시무
1. 개요
시무는 진나라에 대한 반란 당시 장군으로 활동하며 한나라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한신 휘하에서 제나라를 공격했고, 고제 6년에 극포후에 봉해졌다. 이후 흉노에 항복한 한왕 신을 토벌했으며, 여태후 사후에는 문제 옹립에 참여하여 대장군으로 활약했다. 문제 치세에 남월과 고조선 정벌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제북왕 유흥거의 반란을 진압했다. 문제 사후 봉국이 제해졌으나, 선제 때 증손에 의해 가문이 다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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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시무 (柴武) |
|---|---|
| 자 | 자양(子陽) |
| 작위 | 극후(棘侯) |
| 시호 | 무후(武侯) |
| 출생 | 미상 |
|---|---|
| 사망 | 기원전 196년 |
| 시대 | 전한 |
|---|---|
| 주요 활동 | 진희 반란 평정 |
| 아버지 | 시역(柴역) |
|---|---|
| 아들 | 시기(柴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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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63년 사망 -
주통 (전한)
주통(전한)은 전한 고조를 섬겨 집모와 중위를 지냈으며, 여나라 승상에 임명되고 중읍후에 봉해졌고, 문제 후원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정이라 하였다. -
기원전 163년 사망 -
효혜황후 (전한)
효혜황후 장씨는 전한 혜제의 황후로, 여태후의 외손녀이자 혜제의 조카딸로서 정치적 이유로 어린 나이에 황후가 되었으나 자녀를 얻지 못하고, 여태후 사후 폐위되어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
전한의 귀족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
전한의 귀족 -
소하
소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군수 보급, 내정 담당, 한신 천거, 승상으로서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2. 일대기
기원전 205년, 한나라에 합류한 시무는 한신의 제나라 공격에 참여하여 역하에 주둔한 제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해하 전투에서는 주발과 함께 고제의 후방을 지켰다. 이 공로로 기원전 201년 극포후(棘蒲侯)에 봉해졌다.
기원전 196년, 흉노로 도망쳤던 한왕 신이 쳐들어오자, 시무는 한왕 신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전투 끝에 죽였다.
기원전 180년, 여태후 사후 문제를 옹립하는 데 대장군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제에게 남월과 고조선 정벌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했다.
기원전 177년, 제북왕 유흥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10만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제압했다.
기원전 174년, 아들 시기(柴奇)가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기원전 163년 사망 후 봉국이 폐지되었다가, 기원전 61년 증손 가(嘉)가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
2.1. 초기 생애와 거병
시무는 진나라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설(薛)에서 병졸 2,500명을 거느리고 거병했다. 동아를 구원하고, 이후 패상에 이르러 고조 2년(기원전 205년)에 한나라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한신의 제나라 공격에서 역하(力下)에 주둔한 제나라 군대를 쳐 흩어버려 공적을 세웠다. 해하 전투에서는 주발과 함께 고제의 후방에 있었다.
2.2. 한나라 건국 공신
시무는 2500명을 거느리고 설(薛)에서 거병해 진나라와 맞서 싸웠고, 한왕 2년(기원전 205년)에 한나라에 들어갔다. 한신의 제나라 공격에서 역하에 주둔한 제나라 군대를 쳐 흩어버렸다. 해하 전투에서는 주발과 함께 고제의 후방에 있었다. 이 공적으로 고제 6년(기원전 201년)에 극포후(棘蒲侯)에 봉해졌다.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이전에 흉노에 항복해 한나라를 계속 괴롭혀 온 한왕 신이 참합(參合)으로 쳐들어오자 맞서 싸우러 나가 한왕 신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그러나 한왕 신이 받아들이지 않자, 싸워 참합을 도륙하고 한왕 신을 참수했다.
2.3. 한왕 신 토벌
기원전 196년(고제 11년), 흉노에 항복해 한나라를 계속 괴롭혀 온 한왕 신이 참합(參合)으로 쳐들어오자 시무는 맞서 싸우러 나가 한왕 신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시무는 한왕 신에게 "폐하는 관대하시어, 제후가 반란이나 도망을 한다 해도 돌아오면 지위를 돌려주고 주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왕도 아는 바일 것입니다. 지금 왕은 져서 흉노로 도망갔지만, 큰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니, 급히 한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한왕 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시무와 교전했고, 시무는 참합을 도륙하고 한왕 신을 참수했다.
2.4. 여태후 사후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한 후, 주발, 유장, 진평 등이 여씨 세력을 제거하고 유항을 새 황제로 추대했다. 이때 시무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대장군으로서 문제를 맞이했다. 문제 초기, 시무는 남월과 고조선을 공격할 것을 건의했으나, 문제는 큰 군사 행동을 원치 않아 이를 거부했다.
2.6. 제북왕 유흥거의 반란 진압
기원전 177년(문제 전3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문제는 시무를 대장군으로 삼아 유흥거를 토벌하게 했다. 시무는 네 장군과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진압에 나섰고, 유흥거는 전투에 패해 사로잡혀 자결했다.
2.7. 말년과 죽음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한 후, 주발, 유장, 진평 등이 여씨 세력을 제거하고 유항을 새 황제로 추대했을 때, 시무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대장군으로서 문제를 맞이했다. 문제 초기, 시무는 남월과 고조선을 공격할 것을 건의했으나, 문제는 큰 군사 행동을 원치 않아 이를 거부했다.
기원전 177년(문제 전3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문제는 시무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네 장군과 10만 군사를 이끌고 진압하게 했다. 유흥거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로잡힌 후 자결했다.
기원전 174년(문제 전6년), 시무의 아들 태자 시기(柴奇)가 회남여왕 유장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시무는 다른 후사를 얻지 못한 채 기원전 163년(문제 후원년)에 사망했다. 시호는 강(剛)이었으며, 봉국은 폐지되었다. 이후 선제 시기인 원강 4년(기원전 61년), 시무의 증손 가(嘉)가 조서를 받아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