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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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근행은 속말말갈 출신으로, 당나라의 무장이다. 그의 아버지 돌지계는 수나라 말기에 당나라에 귀부하여 요서 태수를 지냈다. 이근행은 용모가 웅장하고 무용이 뛰어나 영주 도독까지 올랐으며, 고구려 원정과 나당 전쟁에 참여했다. 고구려의 검모잠의 난을 토벌하고, 토번을 격파하는 등 공을 세워 연국공에 봉해졌다. 674년에는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매소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는 683년에 사망했으며, 유주 도독으로 추증되었다.
이근행은 속말말갈 출신으로, 아버지는 돌지계이다. 용모가 웅장하고 무용이 뛰어났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영주 도독이 되었다. 가동(家童)은 수천 명에 달했고, 재산을 축적하여 중국 동북부의 여러 민족들에게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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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666년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좌감문위장군으로 참여하였고, 670년에는 연산도 총관으로 고구려 검모잠의 난을 토벌했다. 673년 고구려 잔당을 호로하 서쪽에서 격파했다. 674년 우령대장군, 계림도 부총관으로 유인궤를 보좌하여 신라를 공격했고, 안동진무대사로 매소성에 주둔하며 신라 군대와 세 번 싸워 물리쳤다. 676년 청해에서 토번을 격파하여 공적을 인정받아 연국공에 봉해졌다.
683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유주 도독으로 추증되었고, 건릉에 배장되었다.
2. 1. 초기 활동
속말말갈 출신으로 아버지는 돌지계(突地稽)인데, 부(部)의 추장이었다. 수나라 말기, 돌지계는 그에 속한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귀순해왔다. 당나라는 이들을 영주(營州)에 거처하게 하고, 돌지계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요서태수(遼西太守)에 임명하였다.
당 태종 초, 돌지계는 조공을 바쳤고, 당나라는 그의 부를 영주로 삼고 총관의 직을 제수하였다. 유흑달(劉黑闥)이 반란을 일으키자, 돌지계는 직접 정주(定州)에 와서 진왕(秦王)에게 상서하여 부절을 청하였고, 군공으로 기국공(耆國公)에 봉해졌다. 이후 그의 부는 창평(昌平)으로 옮겨 거처하게 되었다.
고개도(高開道)가 돌궐의 병력으로 유주(幽州)를 공격하자, 돌지계가 맞아 싸워 격퇴하였다. 이후 돌지계는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승진하고 이씨 성을 하사받았으나, 얼마 안가 죽었다.
이근행은 용모가 장대하고 용맹이 뛰어났다. 여러 번 승진하여 영주도독(營州都督)이 되었는데, 수천 명의 가동(家童)을 거느리고 재물을 쌓아 웅걸(雄傑)이 되니, 이인(夷人)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적석도(積石道) 경략대사(經略大使)가 되었을 때, 논흠릉(論欽陵, 가르친링)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황중(湟中)을 노략질하였다. 당시 보초병(候邏)이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병사들은 땔감을 구하러 나가 절반 이상이 흩어져 있었다. 이근행은 오랑캐가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치를 세우고 북을 치며 성문을 열어 적을 살펴보게 하였다. 논흠릉은 복병이 있는지 의심하여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2. 2. 고구려 원정과 나당 전쟁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의 요청으로 당나라군이 파견될 때, 이근행은 좌감문위장군으로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에 참여했다. 673년, 고구려 잔당을 호로하 서쪽에서 격파했고(나당 전쟁), 674년에는 우령대장군, 계림도 부총관으로 유인궤를 보좌하여 신라를 공격했다. 안동진무대사로 매소성에 주둔하며 신라 군대와 세 번 싸워 물리쳤다.
674년 청해(青海)에서 토번을 격파하여 공적을 치하받아 연국공에 봉해졌고, 675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 정벌에 나섰으나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급습으로 보급 물자를 빼앗기고 수천 기병이 거의 괴멸하는 피해를 입었다. 676년에는 토번을 청해에서 다시 격파하여 공적을 치하받았다.
2. 3. 토번과의 전투와 죽음
674년 청해에서 토번을 격파하여 공로를 치하받고 연국공에 봉해졌다. 675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 정벌에 나섰으나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급습으로 보급 물자를 빼앗기고 수천 기병이 거의 괴멸하는 피해를 입었다.
적석도경략대사로 전임되어 토번의 논흠릉(가르친링)과 대치했다. 논흠릉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황중(湟中)을 노략질했으나, 나후(候邏, 보초 및 순찰)가 이를 알아채지 못했고 병사들은 땔감을 구하러 반 이상 흩어져 있었다. 이근행은 오랑캐가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치를 꼽고 북을 치며 성문을 열어 살피게 했다. 논흠릉은 복병이 있는지 의심하여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676년, 청해에서 토번을 격파하여 공적을 치하받고 연국공에 봉해졌다.
683년에 사망했으며, 유주 도독으로 추증되었고, 건릉(乾陵)에 배장되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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