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라클로나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라클로나스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마르티나의 아들로, 헤라클레이오스 2세로도 불린다. 그는 638년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았고, 641년 부황 사망 후 이복 형 콘스탄티누스 3세와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콘스탄티누스 3세의 사망 후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모친 마르티나와의 공모로 콘스탄티누스 3세를 암살했다는 의혹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 폐위되었고, 코가 잘린 채 로도스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 사건은 황위에서 쫓겨난 황제에게 절단형이 가해진 최초의 사례로, 이후 비잔틴 정치에서 신체 훼손이 권력 상실을 의미하는 징표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클로나스는 추방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626년 출생 - 문무왕
    문무왕은 신라의 제30대 국왕으로 삼국 통일을 완수하고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 신라의 기틀을 다졌으며, 중앙 집권 체제 강화, 불교 장려 등의 정책을 통해 신라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한 군주이다.
  • 626년 출생 - 덴지 천황
    덴지 천황은 7세기 일본 천황으로, 다이카 개신을 주도하고 백제 부흥을 지원했으며, 오미 율령 편찬 등 국가 체제 정비에 힘썼다.
  • 642년 사망 - 교황 요한 4세
    교황 요한 4세는 640년에 즉위하여 642년에 사망한 교황으로, 단의론을 비판하고 슬라브족 선교에 힘썼으며 고향 지역 구호 활동을 펼쳤다.
  • 642년 사망 - 영류왕
    영류왕은 고구려의 27대 왕으로 당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왕이다.
  • 7세기 동로마 황제 - 레온티오스
    레온티오스는 7세기 후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폐위하고 즉위했으나 우마이야 왕조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폐위되어 처형당했다.
  • 7세기 동로마 황제 - 포카스
    포카스는 찬탈을 통해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나, 폭정과 잦은 전쟁으로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 폐위되었지만, 교황의 수위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라클로나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헤라클로나스
로마자 표기Heraclonas
그리스어Ἡράκλειος
현대 그리스어Ηρακλεωνάς
통치
재위 기간641년 2월 – 10월/11월
계승동로마 황제
이전 통치자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누스
다음 통치자콘스탄스 2세
섭정콘스탄티누스 3세 (641년 5월까지)
섭정 (계속)티베리우스 (641년 10월)
인물 정보
본명헤라클리우스
대관식638년 7월 4일
왕조헤라클리우스 왕조
아버지헤라클리우스
어머니마르티나
출생일626년
출생지라지카
사망일642년 (15–16세)
사망지로도스
종교칼케돈 기독교
기타
헤라클리우스와 아들들을 묘사한 금화
헤라클로나스(왼쪽), 헤라클리우스(중앙), 콘스탄티누스 3세(오른쪽)를 묘사한 솔리두스

2. 생애

이라클로나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그의 조카이자 두 번째 부인인 마르티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공식 이름은 헤라클레이오스 2세였지만,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기 때문에 '작은 헤라클레스'라는 뜻의 "헤라클로나스"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1]

아버지 헤라클리우스의 치세 말기인 638년 7월 4일, 어머니 마르티나의 영향력으로 공동 황제(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얻었다. 641년 헤라클리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이복형 콘스탄티누스 3세와 함께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불과 몇 달 만인 641년 5월, 콘스탄티누스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라클로나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 마르티나가 콘스탄티누스 3세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마르티나가 어린 아들을 대신해 실권을 행사하려 하면서 정치적 불안정이 커졌다.[1]

결국, 마르티나와 이라클로나스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군부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권좌에서 축출되었고, 마르티나는 혀가 잘리고 이라클로나스는 코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폐위된 황제가 다시 황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신체를 절단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1] 이후 두 사람은 로도스섬으로 유배되었으며, 이라클로나스는 유배된 해 또는 이듬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1] 황위는 콘스탄티누스 3세의 아들인 콘스탄스 2세가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와 가족

이라클로나스는 626년, 아버지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사산 제국 페르시아를 상대로 동방 원정을 벌이고 있을 때 라지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어머니는 헤라클리우스의 조카이자 황후인 마르티나였다.

공식 이름은 '''헤라클레이오스 2세'''였지만,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기에 성장 후에도 '작은 헤라클레스'라는 뜻의 "헤라클로나스"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불렸다.

헤라클리우스와 마르티나는 숙부와 조카 사이의 근친혼 관계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10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근친혼의 영향으로 추정되는 장애나 허약함을 가진 아이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1] 이라클로나스는 마르티나가 낳은 자녀들 중 신체적 장애가 없는 첫 번째 아들이었다.

2. 2. 공동 황제 즉위

이라클로나스(공식 이름은 '''헤라클레이오스 2세'''였으나, 어린 황제였기에 흔히 "헤라클로나스", 즉 '작은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는 아버지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황후 마르티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부황이 사산 제국 페르시아와 전쟁 중일 때 라지카에서 태어났으며, 헤라클리우스와 마르티나 사이의 자녀 중 신체 장애가 없는 첫째 아들이었다. 헤라클리우스와 마르티나는 숙부와 조카 사이의 근친혼 관계였기에 교회법상 논란이 있었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10명의 자녀 중 상당수가 장애를 가졌거나 허약했다고 전해진다. 이라클로나스는 632년 1월 1일 아버지 헤라클리우스 황제에 의해 카이사르la로 임명되었다. 이후 638년 7월 4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다프네 궁전 내 성 스테판 예배당에서 남동생 다비드와 함께 공동 황제인 아우구스투스la로 격상되었으며, 다비드는 카이사르la가 되었다. 당시 의식에 대한 기록은 ''De Ceremoniis''에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라클로나스의 머리에서 카이사르la의 상징인 ''카멜라우키온''을 벗기고 제국 황제의 관을 씌웠으며, 벗겨낸 ''카멜라우키온''은 다비드의 머리에 씌워졌다고 한다.

641년 2월 11일,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부종으로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제국은 이복형인 콘스탄티누스 3세와 이라클로나스가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641년 5월 말에 공식적으로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3세는 28세였던 반면, 이라클로나스는 15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력은 콘스탄티누스 3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 공동 통치 체제는 시작부터 불안 요소를 안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라클로나스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어머니 마르티나와 아버지 헤라클리우스의 근친 결혼은 불법으로 간주되었고, 이 때문에 이라클로나스를 사생아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3세의 10살 된 아들 콘스탄스 2세가 공동 황제로 함께 즉위하지 못한 점도 반발을 샀다. 이는 아버지가 사망할 경우 장남이 황위를 잇는 장자 상속의 전통을 깬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콘스탄스 2세가 아예 상속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콘스탄티누스 3세는 즉위 직후 재정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재무 장관 필라그리우스로부터 아버지 헤라클리우스가 황후 마르티나를 위해 비밀 자금을 마련해 두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피루스가 이를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3세는 이 자금을 몰수하여 봄철 군대 급여와 즉위 기념 하사금 지급에 사용했는데, 그 총액은 201만 6천 솔리두스에 달했다. 또한 그는 아랍의 침공에 맞서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발렌티누스를 동부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알렉산드리아의 키루스를 다시 이집트 총독으로 보내 알렉산드리아 방어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빌론 요새가 아랍군에게 함락되어 알렉산드리아 포위가 가능해졌고, 비잔티움 군대는 아랍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다.

한편, 헤라클리우스의 유언에는 마르티나가 '어머니이자 황후'로서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섭정 역할을 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으나, 원로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티나는 어린 아들 이라클로나스를 내세워 권력을 행사하려 했고, 콘스탄티누스 3세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며 정치적 갈등을 유발했다. 이로 인해 궁정 내에는 두 황제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콘스탄티누스 3세의 파벌이 우세했지만, 제국의 경제난과 이집트 상실이라는 악재가 겹치면서 그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641년 5월 25일, 콘스탄티누스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결핵이었지만, 콘스탄티누스 3세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마르티나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로써 이라클로나스는 어머니 마르티나의 섭정 아래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2. 3. 몰락과 유배

헤라클로나스의 솔리두스 금화


콘스탄티누스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헤라클로나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으나, 실권은 어머니 마르티나가 장악하고 있었다. 마르티나는 단성론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와 재정 문제에 대한 소문,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루스를 통해 이집트를 아랍에 항복시킨 결정 등으로 인해 원로원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 그리고 군대의 지지까지 잃게 되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3세의 죽음에 마르티나와 헤라클로나스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퍼지면서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군 사령관 발렌티누스는 마르티나에게 반기를 들었다. 641년 8월, 발렌티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칼케돈으로 진격하여, 콘스탄티누스 3세의 아들인 콘스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킬 것을 요구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에서도 군중들이 봉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피루스의 퇴위와 콘스탄스 2세의 즉위를 외쳤다.

궁지에 몰린 마르티나는 군대에 추가 증여금을 약속하고 발렌티누스에게 엑스큐비토르 백작 칭호를 제안하는 등 회유책을 시도했다. 9월 말 또는 10월에는 결국 콘스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으나, 동시에 자신의 아들이자 헤라클로나스의 동생인 다비드에게도 제위를 부여하며 권력 유지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발렌티누스는 10월 또는 11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헤라클로나스와 마르티나를 폐위시키고 콘스탄스 2세를 단독 황제로 옹립했다. 642년 1월, 마르티나는 혀가 잘리고 헤라클로나스는 코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폐위된 황제가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신체를 절단한 최초의 사례로 여겨진다[1]。 고대 로마 시대부터 황제의 조건으로 '오체 만족'이 암묵적으로 요구되었기에, 이러한 형벌은 황위 복귀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의미를 가졌다.

이후 헤라클로나스와 마르티나는 로도스섬으로 유배되었으며, 헤라클로나스는 유배된 해인 642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이나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