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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근 (18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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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성근은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인물이다. 황해도 관찰부 순검으로 시작하여 경찰, 관료,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탄압에 가담했다. 1935년에는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되었고, 1941년에는 매일신보 사장을 역임하며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풀려났고,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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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근 (1887년)
기본 정보
이름이성근
한글 표기이성근
한자 표기李聖根
출생
생년1887년
사망미상
경력
대한제국 관료대한제국 관료
일제강점기 관료일제강점기 관료
기타 정보
참고이성근 (1938년)
大韓帝国の官僚
정보 출처
제국비밀탐정사帝国秘密探偵社, 1942, 朝鮮29頁
帝国秘密探偵社, 1942, 朝鮮29頁
帝国秘密探偵社, 1942, 朝鮮29頁

2. 생애

이성근은 황해도에서 관찰부 순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경찰, 관료,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친일 행위를 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황해도에서 순검으로 근무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찰로서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이후 전라남도 산업과장, 함경북도 산업부장과 참여관, 충청남도 도지사등 고위 관료와 매일신보 사장을 역임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등 여러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일제의 침략 전쟁을 옹호하고 지원했다.

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났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2. 1. 일제강점기 이전

1887년 황해도 금천군 현내면에서 태어났다. 1905년 금천군 군립 육영학교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12월에 퇴학하고, 1906년 순검교습과를 졸업했다.[1] 해주 경무서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1908년부터 황해도 경찰부 근무를 겸임했으며, 1909년 경부로 승진했다.[1] 1910년 한문 사숙인 중봉사숙에 입학했지만, 1905년에 사숙이 폐지되었다.[1]

2. 2. 일제강점기 경찰 활동

이성근은 황해도 관찰부 순검으로 이력을 시작하여 1910년 통감부 소속 충청북도 경부, 조선총독부 경찰국 등지에서 근무하면서 의병 활동을 탄압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1920년 경시로 승진했다.[1]

평안북도 경찰고등과장을 지내면서 국경 지대에서 활발했던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직책을 맡았다. 친일 경찰 김덕기의 상관이었고, 오동진 등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4] 이들은 독립 운동을 하다가 붙잡힌 사람들을 협박하거나 회유하여 밀고자로 활용했다. 1922년에는 보안과장, 관동청 경시를 겸임하며, 조선 독립운동가 박치기 등을 체포했다.[2]

2. 3. 일제강점기 관료 및 언론 활동

1910년 통감부 소속 충청북도 경부, 조선총독부 경찰국 등지에서 근무하면서 의병 활동을 탄압했고, 1920년 경시로 승진했다.[1]

국경 지대에서 활발했던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평안북도 경찰고등과장을 지냈다. 친일 경찰 김덕기의 상관이었고, 오동진 등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찰에서의 공로로 전라남도 산업과장, 함경북도 산업부장과 참여관, 충청남도 도지사를 역임했다. 1935년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3][4]

1941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하여 광복 시점까지 4년 2개월간 재직했다. 매일신보는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표적인 친일 매체이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전쟁 지원 연설회와 좌담회에 참석하여 친일 연설을 했다.[5] 도쿄에서 유학생들에게 학병 참전을 권유하는 연설을 했으며,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준비위원, 1945년 2월 대화동맹 이사, 1945년 7월 대일본흥아회 조선지부 고문을 맡았다.

2. 4. 일제강점기 친일 단체 활동

이성근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하는 전쟁 지원 연설회와 좌담회에 참석하여 성전 승리를 위해 한반도가 병참 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일 연설을 했다.[5] 또한, 유학생들에게 학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기 위해 도쿄로 건너가기도 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준비위원, 1945년 2월 대화동맹 이사, 광복 직전인 1945년 7월 대일본흥아회 조선지부 고문을 맡았다.

2. 5. 광복 이후

1945년 광복 후 10월에 매일신보 사장을 퇴임하고[2],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1948년 1월 18일에 체포되었다. '거물급 친일파'로서 박흥식, 이종형, 최린, 이승우, 이풍한에 이어 검거[6]된 이성근은 반민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체되는 과정에서 풀려났다. 1949년에 반민족행위 특별조사 위원회 특별검사부에 기소되었지만, 병을 이유로 보석되었다[2]。한국 전쟁 중 서울에서 납북되어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2004년대한민국에서 성립된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2]

3. 사후 평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이성근의 이름은 두 명단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나타나, 그의 다양한 친일 경력이 드러났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참조

[1] 문서 이성근 ( 李聖根 )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2] 백과사전 이성근(李聖根) http://encykorea.aks[...]
[3]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s://web.archive.[...] 일요시사 2008-03-06
[4]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s://web.archive.[...] 일요시사 2008-03-06
[5] 서적 해방전후사의 인식 (1) 한길사 2004-05-20
[6] 서적 해방전후사의 인식 (1) 한길사 200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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