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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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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화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물로,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 건물은 원래 배밭이었던 지역에 세워졌으며, 조선 시대에는 신광한의 옛 집터로 사용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이승만이 거주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대통령 퇴임 후에도 머물렀다. 현재는 '대한민국건국대통령우남 이승만박사기념관'으로 활용되며, 본채와 조각당, 정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또한 이화장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이화장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소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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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2018년 이화장 전경
명칭이화장
한자 표기梨花莊
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장길 32 (이화동)
면적6571m²
상세 정보
지정 유형대한민국의 사적
지정 번호497
지정일2009년 4월 28일
소유자이인수
면적4,799.1m²
구 기념물 지정 번호6
구 기념물 지정일1982년 12월 28일
구 기념물 해제일2009년 4월 28일
관련 정보
관련 인물신광한

2. 역사적 배경

이화장이 위치한 이화동 일대는 원래 배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불렸다. 이 정자는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다.

이곳은 중종 때 문신(文臣)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신대(申臺)'라고도 불렸다. 근처에는 효종의 잠저(潛邸)인 용흥궁(龍興宮)과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는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자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큰 글자가 4·19 혁명 이전까지 남아 있었다.

2. 1. 조선시대

이화동 일대는 원래 배밭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일제 때 없어졌다.

이곳은 일찍이 중종 때의 문신(文臣)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는데, 거기에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근에는 효종의 잠저(潛邸)인 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또 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 제택조(第宅調)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駱山) 아래에 용흥궁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데, 석양루가 있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 궁중 장례식에 쓰일 관을 제작하던 관아 )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장생전은 이승만이 이곳에서 조각(組閣)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이화장 정문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4·19 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2. 2. 해방 이후 ~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5년 한반도가 해방되자 망명지인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기거할 집이 없어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실업가 권영일 등을 비롯한 30여 명의 도움으로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돈암장에서 이곳 이화장으로 옮겨 1947년 11월부터 기거하였다.[1] 그는 이곳에 살면서 정부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48년 7월 경무대로 이사하였다.[1]

2. 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5년 한반도가 해방되자 망명지인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기거할 집이 없어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당시의 실업가 권영일 등을 비롯한 30여 명의 도움으로 돈암장에서 이곳 이화장으로 옮겨 1947년 11월부터 기거하였다. 그는 이곳에 살면서 정부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이어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48년 7월 경무대로 이사하였다.[5]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끔 이곳에 들러 정원과 뒷산을 산책하기도 하였다. 1960년 4월 27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이곳 이화장으로 이사했고, 같은 해 5월 29일에 하와이로 휴가를 떠났으나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서거하자 7월 23일에 이화장에 안치되었다가 7월 27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5]

이승만의 영부인 프란체스카1945년 8ㆍ15광복과 함께 한국에 왔고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의 대통령이 되자 퍼스트 레이디로서 6ㆍ254ㆍ19 등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체험했다.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의 돌아오지 못하는 하와이 휴가에 동행하여 1965년 이승만이 사망할 때까지 병상을 지켰고, 1970년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내다 1992년 사망했다. 1946년 장개석 총통이 한국을 방문할 때 가져온 냉장고는 무려 35년간 사용했으며, 1958년에 최초로 생산된 국산 모직으로 만든 옷을 34년 동안이나 입었다. 이화장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도 연료 절약을 위해 겨울철이면 본채 대신 경비실에서 추운 겨울을 지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5]

1948년, 5·10 선거 직후 이승만 박사가 부인 프란체스카와 이화장의 정원에서 미국 잡지 《라이프》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화장

3. 주요 시설

이화장에는 본채, 조각당, 생활관 등의 주요 시설이 있다.

조각당은 이화장 본채에서 조금 떨어진 동남쪽 언덕, 막돌 화강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있는 건물이다. 역 'ㄱ'자형 평면을 한 아주 작은 건물로, 약간 북쪽으로 튼 서향(을좌신향)이다. 회첨골을 이룬 곳에 1칸 반 온돌방이 있고, 남쪽에는 장마루를 깐 작은 대청 한 칸이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 서쪽으로 부엌 한 칸이 딸려 있다. 굴뚝은 온돌방 동쪽 밖에 தனியாக 있으며, 온돌방 앞에는 작은 쪽마루가 있다. 기단 없이 네모 화강석 초석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납도리,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승만내각을 조직하던 당시에 쓰던 돗자리와 나무의자가 아직도 남아있고, 대청마루 처마 아래에는 '조각당' 현판이 걸려 있다. 본채와 조각당 주변에는 지형을 따라 가꾼 정원과 산책로가 있다.[1]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는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196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으나 4·19 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1]

3. 1. 본채와 생활관

한양 도성의 좌청룡인 낙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본채는 192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채는 서향(卯坐酉向)이며,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그 오른쪽에 응접실(접견실)과 서재가, 대청마루 왼쪽에 침실과 부엌이 있다. 본채는 별다른 특징은 없으나 이승만 대통령 내외의 검소한 생활을 느낄 수 있는 건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통 한옥이 시대상을 수용하며 변모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벌대 장대석 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7칸, 측면 6칸, 굴도리,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1988년 '대한민국건국대통령우남 이승만박사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역사자료 및 평소에 사용한 기구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1] 본채 서쪽 언덕 아래에는 생활관이 있다.

3. 2. 조각당

이화장 본채에서 조금 떨어진 동남쪽 언덕, 막돌 화강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조각당이 있다. 조각당은 역 'ㄱ'자형 평면을 한 아주 작은 건물인데, 약간 북쪽으로 튼 서향(을좌신향)이다. 회첨골을 이룬 곳에 1칸 반 온돌방이 있고, 남쪽에는 장마루를 깐 작은 대청 한 칸이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 서쪽으로 부엌 한 칸이 딸려 있다. 굴뚝은 온돌방 동쪽 밖에 தனியாக 있으며, 온돌방 앞에는 작은 쪽마루가 있다. 기단 없이 네모 화강석 초석 위에 사각기둥을 세운 납도리,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승만내각을 조직하던 당시에 쓰던 돗자리와 나무의자가 아직도 남아있고, 대청마루 처마 아래에는 '조각당' 현판이 걸려 있다. 본채와 조각당 주변에는 지형을 따라 가꾼 정원과 산책로가 있다.[1]

3. 3. 기타 시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는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196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으나 4·19 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1]

4. 프란체스카 여사와 이화장



이승만의 영부인 프란체스카1945년 8ㆍ15광복과 함께 한국에 왔고,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의 대통령이 되자 퍼스트 레이디로서 6ㆍ25와 4ㆍ19 등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체험했다. 1965년 이승만이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그의 병상을 지켰고, 1970년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내다 1992년 사망했다.[5]

프란체스카 여사는 1946년 장개석 총통이 한국을 방문할 때 가져온 냉장고를 35년간 사용했으며, 1958년에 최초로 생산된 국산 모직으로 만든 옷을 34년 동안이나 입을 정도로 검소했다. 이화장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도 연료 절약을 위해 겨울철이면 본채 대신 경비실에서 추운 겨울을 지냈다고 한다.[5]

참조

[1] 웹사이트 서울 이화장(서울 梨花莊) https://encykorea.ak[...] 2024-01-01
[2] 웹사이트 사적 서울 이화장 (서울 梨花莊)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https://www.heritage[...] 2024-01-01
[3] 간행물 서울특별시고시 제2009-178호 http://event.seoul.g[...] 서울특별시장 2009-05-07
[4] 간행물 이화장 사적 지정 및 지형도면 http://gwanbo.mois.g[...] 문화재청장 2009-04-28
[5] 서적 이야기로 읽는 대한민국 경제사 미래의창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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