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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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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유무는 고려 무신 임연의 아들로, 아버지 사후 권력을 승계했으나, 개경 환도를 반대하다가 원종에 의해 처형되었다. 1270년 임연이 사망한 후 권력을 이어받았지만, 몽골의 지원을 받은 원종이 개경 환도를 추진하자 이에 반발했다. 원종은 홍문계와 송송례에게 임유무 제거를 명했고, 삼별초를 동원하여 임유무를 처형했다. 그의 죽음으로 이고, 이의방 이후 약 100년간 이어진 무신정권이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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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무
기본 정보
한글 표기임유무
한자 표기林惟茂
로마자 표기Im Yumu
매큔-라이샤워 표기Im Yumu
예일 표기Im Yumwu

2. 생애

임연의 둘째 아들로 임유간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설에는 임유무가 임연의 장남이며 임유간의 형이라고도 한다.

1270년 음력 2월 아버지 임연이 등창으로 죽자 그 지위를 승계하였다.[1] 집권 당시 임유무는 22세였으며, 사공 이응렬과 추밀원 부사 송군비가 실권을 행사했다. 같은 해 음력 5월, 연경에 입조했다가 귀국길에 오른 원종은 최우 이래의 수도였던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명했다.[1][2] 그러나 임유무는 지방에 관원을 보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왕명에 거스르는 자세를 보였다. 이는 고려몽골 제국에 복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몽골의 지원을 배경으로 한 원종은 환도를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어사중승 홍문계와 직문하성사 송송례에게 임유무를 제거하도록 명했다. 홍문계와 송송례는 정권의 친위대인 삼별초를 끌어들여,[1][2] 그들을 선두에 세워 임유무를 체포한 후, 그를 섬으로 추방하려 했지만, 몽골 사신의 시선을 의식하여 시장 거리에서 참형에 처했다.

임유무가 처형되자 동생인 임유빈 등도 주살되었고, 이응렬과 송군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임연의 아내이자 임유무의 어머니는 보물을 가지고 도망가다 군중에게 붙잡혀, 임유간 등과 함께 몽골로 압송되었다.

임유무의 죽음으로 이고, 이의방 이후 100년간 왕권보다도 큰 권력을 행사하던 무신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러나 임유무를 살해한 삼별초도 나중에는 몽골에 항거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다.[1]

2. 1. 출생과 가계

임유무는 임연(林衍 1215 ~ 1270)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임연은 1215년에 태어나 1270년에 사망하였다. 임유무가 임연의 둘째 아들인지, 장남인지에 대한 이설이 존재한다.

임유무의 형제로는 형 임유간(林惟幹)과 동생 임유인(林惟栶 1252 ~ 1270), 임유거(林惟柜), 임유제(林惟提)가 있었다. 임유인, 임유가, 임유정은 임유무의 형제라는 언급은 있지만,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2. 2. 권력 승계와 개경 환도 반대

1270년 음력 2월 아버지 임연이 등창으로 죽자 그 지위를 승계하였다.[1] 원종 11년(1270년) 임유무는 교정별감이 되어 정권을 담당했으나, 22세의 젊은 나이였기에 사공 이응렬과 추밀원 부사 송군비가 실권을 행사했다.[2] 같은 해 음력 5월, 원나라에서 귀국한 원종은 최우 이후 천도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하였다.[1][2] 그러나 이는 고려몽골 제국에 복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임유무는 지방에 관원을 보내 방어 태세를 갖추며 왕명에 거스르는 자세를 보였다.[2]

2. 3. 최후와 무신정권의 몰락

1270년 음력 2월 아버지 임연이 등창으로 죽자 그 지위를 승계하였다.[1] 같은 해 음력 5월, 원나라에서 귀국한 원종은 최우 이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하였다.[1] 그러나 이는 고려몽골 제국에 복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임유무는 왕명에 거스르는 자세를 보였다.

몽골의 지원을 배경으로 한 원종은 환도를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어사중승 홍문계와 직문하성사 송송례에게 임유무를 제거하도록 명했다. 홍문계와 송송례는 정권의 친위대인 삼별초를 끌어들여, 그들을 선두에 세워 임유무를 체포한 후, 그를 섬으로 추방하려 했지만, 몽골 사신의 시선을 의식하여 시장 거리에서 참형에 처했다.[2]

임유무가 처형되자 동생인 임유빈 등도 주살되었고, 임연의 아내이자 임유무의 어머니는 보물을 가지고 도망가다 군중에게 붙잡혀, 임유간 등과 함께 몽골로 압송되었다.

임유무의 죽음으로 경인년의 난 이후 100년에 걸쳐 이어져 온 고려 무신정권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1][2]

3. 가계

임유무의 아버지는 고려 무신 임연이다.

임유무는 임연의 아들이며, 형제로는 임유간, 임유인, 임유거, 임유제가 있었다. 임유인은 1252년에 태어나 1270년에 사망했다.

3. 1. 아버지

임유무의 아버지는 고려 무신 임연이다.

3. 2. 형제

임유무는 임연(林衍)의 아들이며, 형제로는 임유간, 임유인, 임유거, 임유제가 있었다. 임유인은 1252년에 태어나 1270년에 사망했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4. 3. 중립적 평가

5. 기타

5. 1. 임유무를 다룬 작품

5. 2. 대중문화 속의 임유무

참조

[1] 뉴스 문신정권에 맞서다 호국항쟁의 화신이 되다 http://news.chosun.c[...] 조선닷컴
[2] 뉴스 진도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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