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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더르 간척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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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위더르 간척 사업은 저지대 국가인 네덜란드의 국토를 확장하고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추진된 대규모 토목 공사이다. 19세기 후반 코르넬리스 렐리의 계획을 바탕으로, 자위더르 해를 댐으로 막고 간척지를 조성하여 농지를 확보하고 수자원을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18년 자위더르 간척 사업법이 통과된 후 아플슬라위트데이크 건설을 시작으로 여러 간척지가 조성되었으며, 플레볼란트주가 신설되는 등 네덜란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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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더르 간척 사업
개요
위치네덜란드
목적농지 확보
홍수 방지
담수 확보
상태완료
역사
배경1916년 대홍수 발생
코르넬리스 렐리의 제안
계획 수립1918년 자위더르 해 간척 법안 통과
주요 공사 시작1920년
암스텔디프 제방 건설1924년
시험 간척지 안데이크 건설1927년
위링에르메어 간척지 건설1930년
아프슬레이트데이크 건설 완료1932년
노르도스트폴더 간척지 건설1942년
동 플레볼란트 간척지 건설1957년
크나르데이크 건설1956년
남 플레볼란트 간척지 건설1967년
호우트리프데이크 건설 (마르케르와르트 분리)1975년
주요 시설
아프슬레이트데이크길이: 32km
건설 목적: 아이설호 조성 및 해수 침입 방지
호우트리프데이크길이: 26km
건설 목적: 마르케르호 조성
간척지위링에르메어
노르도스트폴더
동 플레볼란트
남 플레볼란트
마르케르와르트 (일부 미개발)
영향
농지 확장약 1,650 제곱킬로미터
담수 확보아이설호, 마르케르호
홍수 피해 감소해안선 단축으로 인한 방어력 강화
생태계 변화염수호에서 담수호로 변화
기타
관련 인물코르넬리스 렐리
참고델타 계획

2. 역사적 배경

저지대 국가는 국토의 절반이 해수면보다 1m 이하일 정도로 낮고 평평하여, 수 세기 동안 주기적인 해수 침수를 겪었다. 17세기부터 자위더르 해를 통제하려는 초기 제안이 있었으나, 당시 기술로는 실현 불가능했다.[4]

1200년부터 1900년까지 네덜란드는 바다에서 간척을 통해 육지를 얻었지만, 자위더르 해의 침수로 육지를 잃기도 했다. 1667년 헨드릭 스테빈은 자위더르 해를 배수할 것을 제안하는 연구를 발표했다. 19세기 중반 IJ와 하를렘메르 호수가 배수된 후, 반 디겔렌, 클로펜부르크, 파데곤은 자위더르 해도 배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Zuiderzeevereenigingnl''(자위더르 해 협회)의 시험 시추 결과 자위더르 해의 약 4분의 3이 유용한 토지임을 확인했다.[4]

19세기 후반, 코르넬리스 렐리는 열린 바다로부터 지역을 보호하고 새로운 농지를 조성하기 위한 계획을 개발했다. 그는 1886년에 설립된 "자위더르 해 협회"에서 자위더르 해를 폐쇄하고 배수하는 최선의 방법을 조사했고, 1891년에 자신의 계획을 도입했다.[5] 이 계획은 노르트홀란트 북쪽 끝과 프리슬란트 서부 해안을 연결하는 대형 댐을 건설하고, 4개의 간척지를 건설하며, 아이설 호수(아이설 호수)를 조성하는 것을 포함했다. 그러나 어부들과 바덴해 연안 지역 주민들은 수위 상승을 우려하여 반대했고, 재정적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1913년 여왕 빌헬미나의 어전 회의는 자위더르 해 간척 사업을 촉구했고,[5] 렐리가 교통 및 공공 사업부 장관이 되면서 사업은 추진력을 얻었다. 1916년 1월 13일과 14일, 겨울 폭풍으로 제방이 무너져 침수가 발생했고, 이는 사업 실행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중 식량 부족은 사업에 대한 지지를 더욱 강화시켰다. 렐리는 경작지 확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간척을 통해 많은 양의 비옥한 땅을 얻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5]

1918년 6월 14일, 자위더르 간척 사업법이 통과되었다.[6] 이 법은 네덜란드 중부를 북해로부터 보호, 식량 공급 증대, 담수 호수를 통한 물 관리 개선을 목표로 했다. 렐리는 폭풍 시 강을 북해로 우회하면 내륙 홍수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자위더르 해의 어업 보존과 새로운 땅의 접근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1919년 5월, 건설 및 초기 관리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인 ''Dienst der Zuiderzeewerken''(자위더르 해 간척 사업부)가 설립되었다. 사업 초기 단계에서 무거운 점토가 준설되어 댐 건설 예정지에 퇴적되었다. 1914년 당시 주요 댐 건설에는 10년, 4개의 내부 울타리 완성에는 20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5]

사업부는 먼저 주요 댐 건설 대신, 섬 비에링겐을 노르트홀란트 본토에 다시 연결하는 2.5km 길이의 ''암스텔디프데이크''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 제방은 1920년과 1924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간척지 건설은 안디크의 실험 간척지에서 소규모로 테스트되었다.

3. 사업 계획 및 목표

1918년 자위더르 간척 사업법 통과와 함께,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다.


  • 네덜란드 중부를 북해 수위의 영향으로부터 보호
  • 새로운 농지 조성을 통한 식량 증산
  • 내수(內水) 배제 용이성 증대

4. 건설 단계

1920년, 암스텔디프데이크(Amsteldiepdijk) 건설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9] 1927년에는 자위더르해북해와 분리하는 핵심 구조물인 아프슬라위트데이크 건설이 시작되었고, 1932년 완공되면서 자위더르 해는 담수호인 아이설호로 바뀌었다.

아프슬라위트데이크 건설과 병행하여, 첫 번째 간척지인 노르트홀란트주의 비링어메르 간척지는 1929년에 총 길이 18km의 제방이 폐쇄되어 배수를 시작했고, 1930년 8월에 배수를 완료했다.

플레볼란트주플레볼란트 북동 간척지1940년에 총 길이 55km의 제방이 폐쇄되었고, 1942년 9월에 배수를 완료했다.

플레볼란트 간척지는 동 간척지와 남 간척지의 2개 구역으로 나누어 간척되었다. 플레볼란트 동 간척지는 1956년에 총 길이 90km의 제방을 폐쇄했고, 1957년 6월에 배수를 완료했다. 플레볼란트 남 간척지는 1967년에 총 길이 70km의 제방을 폐쇄했고, 1968년에 배수를 완료했다.

다섯 번째 간척지인 마르케르메르 간척지가 계획되었지만, 2000년에 계획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어 1986년에 자위더르해 개발이 완료되었다.

완성된 간척지의 토지 이용 현황은 다음과 같다.

간척지의 토지 이용 현황
간척지명총 면적농업 용지주택 용지미개발토목 기반 용지
비링어메르200km287 %1 %3 %9 %
플레볼란트 북동480km287 %1 %5 %7 %
플레볼란트 동540km275 %8 %11 %6 %
플레볼란트 남430km250 %25 %18 %7 %



간척지의 배수는 조성 시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러 배수 펌프장이 간척지에 건설되었다. 이 펌프장들은 디젤 기관 방식과 전기 방식이 있으며, 한쪽 방식의 에너지 공급 등이 중단될 경우를 대비한 이중화 사상에 따른 것이다.

4. 1. 아프슬라위트데이크 건설

1927년 자위더르해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자위더르해북해로부터 분리하는 총 길이 32km의 아프슬라위트데이크 (대방조제) 건설이 시작되었다. 대방조제는 노르트홀란트주프리슬란트주 양쪽 끝과 중간 지점에 만들어진 두 곳의 인공섬에서 건설이 시작되었다.[9]

네덜란드의 자위더르 간척 사업은 북해의 얕은 만인 위험한 자위더르를 아이설호와 마르커르호의 잔잔한 호수로 나누고 1,650 km2의 토지를 만들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빙퇴석, 모래, 현무암, 식물 섬유 매트 등이 재료로 사용되었다. 독일에서 수입한 석재를 해저에서부터 쌓아 올렸다.[9] 건설은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1932년 5월 28일, "폐쇄 제방 (스롯타 데이크)"이 완성되면서 외해로부터 격리된 자위더르해는 담수화되어 아이설호가 되었다. 이 제방은 높이 7.8미터, 폭 90미터, 길이 약 30킬로미터이다.[9]

이후, 덴 오버와 코르베르데르잔트에 두 곳의 복합 갑문 (갑문과 차단 수문) 및 제방 위의 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1933년 9월에 아프슬라위트데이크에 관한 모든 공사가 완료되었다. 덴 오버에는 스테빈 갑문과 아이설호를 와덴해로 방류하기 위한 수문 3개 세트(5개)가 설치되었고, 코르베르데르잔트에는 헨드릭 로렌츠 갑문과 수문 2개 세트(5개)가 설치되어 총 25개의 방류 수문을 통해 아이설호의 수위를 조절했다.

5. 간척지 조성

아플슬라위트데이크 완공 이후, 아이설호 내에는 여러 개의 간척지(폴더)가 조성되었다. 바다를 막은 후, 아이설호의 일부를 막고 물을 퍼내는 방식으로 간척지가 만들어졌다.

1929년에는 첫 번째 폴더인 비링어르메르가 둑으로 막혔고, 1930년에 완전히 배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노르도스트폴더가 1942년이 되어서야 완전히 배수되었는데, 이 지역은 네덜란드 지하 레지스탕스가 은신처로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전쟁 후에는 거의 1000km2에 달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인 플레볼란트의 배수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는 현재 레리스타트와 알메러가 위치해 있으며, 특히 알메러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부분적으로 암스테르담과의 근접성 때문). 또 다른 대규모 폴더는 원래 마르케르메르에 계획되었으나, 2000년대 초반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계획이 폐기되었다. 1986년에는 노르도스트폴더와 플레볼란트에서 새로운 주, 플레볼란트주가 만들어졌고, 이로써 자위더르 간척 사업이 완료되었다.

이 새로운 땅은 레메르, 볼렌호베, 블록자일과 같은 도시들의 정체성 변화를 가져왔다. 이 도시들은 바다로 직접 접근할 수 없게 되었고, 쿠인레는 완전히 갇히게 되었다. 우르크와 쇼클란트, 비링언과 같은 이전의 섬들은 본토와 연결되었다.

간척지의 배수는 조성 시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러 배수 펌프장이 간척지에 건설되었다. 이 펌프장들은 디젤 기관 방식과 전기 방식이 있으며, 방식을 다르게 한 것은 한쪽 방식의 에너지 공급 등이 중단될 경우를 대비한 이중화 사상에 따른 것이다.

완성된 간척지의 토지 이용 현황은 다음과 같다.

간척지의 토지 이용 현황
간척지명총 면적농업 용지주택 용지미개발토목 기반 용지
비링어르메르200km287 %1 %3 %9 %
노르도스트폴더480km287 %1 %5 %7 %
동플레볼란트540km275 %8 %11 %6 %
남플레볼란트430km250 %25 %18 %7 %


5. 1. 비링어메르(Wieringermeer) 간척지

1927년에 시작된 비링어르메르(Wieringermeer) 간척지 조성 사업은 자위더르 간척 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5개의 간척지 중 첫 번째이자 가장 작은 200km2 규모였다.[9] 이 간척지는 비링언 남쪽의 수역에 건설되었으며, 아플슬라위트데이크 완공 전에 간척된 유일한 폴더이다.

비링어르메르를 둘러싼 제방 건설은 아플슬라위트데이크 완공 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자위더르 간척 사업의 조류의 영향으로 인해 이후의 폴더보다 더 높게 건설되었다. 18km 제방 건설은 비링언의 덴 오버에서 새로운 건설 섬인 오데 제우까지 시작되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1929년 7월에 자위더르 간척 사업으로부터 차단되었다.

미래의 폴더에서 모든 물을 배수하기 위해 두 개의 펌프장이 건설되었다. 덴 오버 근처에는 디젤 엔진 동력의 ''레만스'' 펌프장이, 메뎀블리크 근처에는 전기로 구동되는 ''렐리'' 펌프장이 건설되었다. 두 펌프장은 서로 다른 동력 시스템을 사용하여 한 펌프장의 전원이 끊기더라도 다른 펌프장이 폴더를 계속 건조시킬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펌핑 메커니즘은 아르키메데스 나사의 변형을 기반으로 했으며, A. 볼드윈 우드가 설계했다. 1930년 2월에 완공된 펌프장은 6개월 동안 지속적인 펌핑 후에 폴더를 배수하는 데 성공했다. 1930년 8월, 비링어메르는 완전 배수되었다.[9]

배수 후, 토양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수도 관로 네트워크로 추가 배수가 이루어졌다. 작은 도랑이 더 큰 수로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물을 주요 배수관으로 운반하여 펌프장으로 보냈다. 탈수로 인해 이전 해저가 어떤 곳에서는 1m 이상 가라앉았다. 땅이 안정된 후에는 더 작은 도랑이 폴더의 정상적인 배수에 사용될 지하 배수관으로 대체되었다.

수문 인프라가 갖춰진 후, 처녀지는 경작을 위해 개발되었다. 가장 먼저 정착한 식물은 갈대였는데, 폴더가 배수되는 동안 비행기로 진흙 평지에 공중에서 파종되었다. 갈대는 물을 증발시키고 토양에 공기를 불어넣어 구조를 굳히고 원치 않는 잡초의 출현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 인프라가 구축된 후, 갈대를 태우고 유채로 대체하여 봄에 갓 태어난 폴더를 노란 꽃의 바다로 만들었다. 이후 호밀, 밀, 보리, 귀리 등 다양한 곡물을 심었다. 도로 및 주택과 같은 다른 인프라도 건설되었다.

비링어르메르 및 이후 폴더는 약 50 에이커의 구획으로 나뉘었다. 가장 좋은 땅은 채소를 위해, 다음으로 좋은 땅은 곡물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가장 나쁜 땅은 숲을 조성했다. 각 구획 앞에는 포장된 도로가 있고 뒤에는 운송로와 수로가 있어 육상 및 수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폴더 중앙의 테르프는 제방이 무너질 경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북해의 가장 높은 홍수 수위보다 높게 건설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1945년 퇴각하는 독일군은 비링어르메르의 침수를 명령했지만, 이후 다시 배수되었고 피해가 복구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즈음인 1945년 4월 17일, 독일(Germany)군은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폭발물로 비에린게르메르 제방을 파괴하여 간척지를 침수시켰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높은 수위와 그 이후의 폭풍으로 지난 10년간 건설된 대부분의 기반 시설과 모든 작물이 파괴되었다. 재건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1945년 말까지 간척지는 다시 배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방 손상으로 인한 비에린게르메르 홍수


비링어르메르는 새로운 토지를 주로 농업용 토지로 사용하겠다는 원래의 구상에 가장 가깝게 조성되었으며, 강한 농촌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간척지에는 슬로트도르프(1931), 미덴메르(1933), 비에린게르베르프(1936), 크라일레로르트(1957)의 4개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간척지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대표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했고, 1941년 7월 1일 비에린게르메르(Wieringermeer) 자치구가 설립되었다.

현재 비링어르메르의 토지 이용 현황은 다음과 같다.

비링어르메르의 토지 이용 현황
총 면적농업 용지주택 용지미개발토목 기반 용지
200km287 %1 %3 %9 %


5. 2. 노르도스트폴더(Noordoostpolder) 간척지

1936년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총 길이 55km에 달하는 두 개의 제방이 아이설호에서 위르크 섬까지 뻗어 나갔다. 하나는 프리슬란트레머에서, 다른 하나는 오버레이설의 폴렌호베에서 시작되었다. 이 제방들과 펌프장 건설은 1940년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중단되었다. 1940년 12월에 제방이 폐쇄되었고, 1941년 초에 펌프장이 가동되어 배수가 시작되었다. 1942년 9월에 노르도스트폴더는 충분히 배수된 것으로 간주되어, 480km2 면적의 새로운 토지에 대한 개발이 시작되었다.[9]

노르도스트폴더 위성 사진


이전의 경험, 잔잔해진 아이설호의 물, 그리고 기계화 덕분에 건설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때로는 자위더르 간척 사업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기계들이 사용되었다. 토지 사용은 비링어메르와 유사하게 농업에 중점을 두었으며, 비옥하지 않은 지역은 산림지로 조성되었다. 개발 과정 동안 토지는 국유였으며, 완료 후에는 사유지로 분배되었다. 간척지에 있던 초기 개척자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고, 이후 네덜란드 전역의 농부들이 선정 과정을 거쳐 토지를 받았다. 1953년 북해 홍수 이후, 정부는 피해를 입은 젤란트 농부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간척지에는 빙하 퇴적토 언덕인 위르크와 19세기에 버려진 늪지대 스호클란트가 포함되었다. 어업 공동체였던 위르크는 건설 섬이자 개발 기지 역할을 했다. 1939년 10월 3일 레머에서 뻗어 나가는 제방이 폐쇄되면서 위르크는 섬이 아니게 되었고, 스호클란트는 주변 물이 배수되면서 섬의 지위를 잃었다. 두 섬은 새로운 토지에서 두드러지며, 특히 위르크 공동체는 "본토"와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했다. 쿠인레 마을은 개방 수역에서 단절되어 사업과 지위를 잃었다.

노르도스트폴더의 중심부, 세 개의 주요 배수 운하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에멜로르트(1943년)가 있다. 간척지의 유일한 주요 마을로 계획된 에멜로르트는 지역 정부 및 서비스 센터 역할을 한다. 에멜로르트 주변에는 자전거로 이동 가능한 거리에 10개의 작은 마을이 농업 공동체로 구상되었다. 엔스, 마르크네세, 크라겐부르크(1949년), 루텔헤스트(1950년), 반트(1951년), 크레일, 루텐(1953년), 에스펠, 톨레베이크, 나겔레(1956년) 순으로 건설되었다.

에멜로르트에서 세 개의 운하가 세 개의 펌프장으로 물을 운반한다. 레머 근처의 ''부마'', 폴렌호베의 ''스메엔허'', 위르크의 ''비세링''이다. 처음 두 곳은 전기로 작동하고, 마지막 펌프장은 디젤 동력을 사용한다.

5. 3. 플레볼란트(Flevoland) 간척지

플레볼란트 간척지는 동부 플레볼란트와 남부 플레볼란트로 나뉘어 건설되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진행된 이 사업으로 아이설호의 일부가 육지로 바뀌었다. 두 간척지는 "크나르다이크(Knardijk)"라는 둑으로 분리되어 한쪽이 침수되더라도 다른 쪽은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플레볼란트 간척지에는 렐리스타트알메러와 같은 새로운 도시들이 건설되었는데, 특히 알메러는 암스테르담 인근의 인구 과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획된 도시이다.

5. 3. 1. 동부 플레볼란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노르도스트폴더(Noordoostpolder) 작업과 함께 비에링어메르포르더(Wieringermeerpolder) 복구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후 동부 플레볼란트(Oostelijk Flevoland) 간척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면적이 540 km2로 새로운 간척지 중 가장 컸다. 1950년, 아이설호(IJsselmeer) 중앙에 여러 건설 섬에서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중 가장 큰 곳은 렐리스타트-하번(Lelystad-Haven)으로 둑 건설자들의 첫 공동체가 있던 곳이었다.

노르도스트폴더에서의 경험을 통해, 높은 곳에 위치한 옛 본토에서 낮은 새로운 땅으로 지하수가 흘러 옛 땅에 침강과 탈수를 유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수리지질학을 이용하여 새로운 간척지를 본토와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주변 호수의 띠가 두 지역 사이에 남겨져 간척지를 둘러싸는 데 90km 길이의 더 긴 둑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초 하나의 남동부 간척지로 계획되었으나, 공동 수문 인프라를 갖춘 두 개의 분리된 간척지를 건설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중앙에 "크나르다이크(Knardijk)"라는 둑으로 나누어 한쪽이 침수될 경우 다른 쪽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둑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주요 배수 운하는 홍수 발생 시 로 막을 수 있었다. 동부 간척지가 먼저 건설될 예정이었으며, 1951년에 주변 둑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둑 공사는 1953년 북해 홍수가 네덜란드 남서부를 강타할 때까지 진행되었다. 작업자와 기계는 수리 작업을 위해 그곳으로 이동했다 (이 추가 작업은 델타 계획의 일부였다).

동부 플레볼란트 공사는 1954년에 재개되었고, 1956년 9월 13일에 둑이 완공되었다. 펌프장은 같은 날 간척지 배수를 시작하여 1957년 6월에 작업을 완료했다.[9] 세 개의 펌프장이 건설되었다. 렐리스타트-하번에 있는 "보르트만(Wortman)" (디젤 동력), 하르더베이크 근처의 "로빙크(Lovink)" 및 케텔메르(Ketelmeer) 옆 북부 둑을 따라 있는 "콜린(Colijn)" (전기 동력)이었다. 이 세 곳 모두 미래 남부 간척지를 염두에 두고 여유 용량으로 건설되었다.

간척지 설계의 새로운 요소는 모든 간척지, 어쩌면 잠재적인 새로운 주의 수도 역할을 할 더 큰 도시를 건설하려는 의도였다. 이 도시는 간척지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며, 자위더르 간척 사업의 설계와 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렐리스타트 (1966)로 개발되었다. 다른 더 전통적인 정착지들은 이미 그 당시에 개발되어 있었다. 드론텐, 지역 주요 도시는 1962년에 설립되었고, 1963년에는 두 개의 작은 위성 마을인 스위프터반트(Swifterbant)와 비딩후이젠(Biddinghuizen)이 설립되었다. 이 마지막 세 마을은 1972년 1월 1일에 새로운 드론텐 자치구에 통합되었다. 렐리스타트는 1980년 1월 1일에 별도의 자치구로 조직될 만큼 충분히 컸다.

처음에는 농업이 간척지의 주요 목적이었지만, 전후 시대의 요구 사항으로 인해 새로운 간척지의 설계 목표가 바뀌었다. 변화하는 농업 요구 사항과 증가하는 자동차 이동성은 많은 농업 마을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고, 마을 수는 결국 두 개로 줄었다. 라르센(Larsen) 마을 공사가 막 시작되려 할 때 취소되었다. 농지는 증가하지 않았다. 렐리스타트(최소 10만 명의 주민을 수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도시) 건설의 결과로 감소했다. 2005년에는 7만 명의 주민이 있었다. 또한, 다음 간척지에서 계속될 추세로, 숲과 자연 보호 구역으로 개발하기 위해 더 많은 지역이 지정되었다.

자위더르 간척 사업 (남부 및 동부 플레볼란트)

5. 3. 2. 남부 플레볼란트

남플레볼란트(Zuidelijk Flevoland)는 자위더르 간척 사업의 네 번째 간척지로, 더 큰 동플레볼란트 옆에 건설되었다. 북동쪽 제방인 크나르데이크(Knardijk)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70km 길이의 제방만 건설하면 되었다. 1959년 초에 시작하여 1967년 10월에 완공되었다.[9]

두 플레볼란트의 수문학적 통합으로 인해 디젤 동력의 '데 블록 판 쿠펠러(De Blocq van Kuffeler)'라는 펌프장 하나만 건설하면 되었다. 간척지가 완성되면 이전 세 곳에 합류하여 두 간척지의 수위를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이 새로운 'gemaal'이 먼저 430km2의 간척지에서 물을 모두 빼내야 했으며, 1968년 5월에 작업을 완료했다.[9]

암스테르담을 포함한 네덜란드의 인구 밀집 지역에 남쪽 간척지가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계획자들은 주택 부족과 과밀화를 완화하기 위해 알메러라는 대규모 신도시를 포함하는 설계를 고안했다. 알메러는 처음에 세 개의 주요 정착지로 나뉘었다.

  • 알메러하번 (1976): 고이메르 (주변 호수 중 하나)를 따라 위치.
  • 알메러스타트 ('알메러 시티') (1980): 가장 큰 규모.
  • 알메러부이텐 (1984): 렐리스타트 방향 북동쪽에 위치.


렐리스타트와 알메러 사이의 지역은 중공업 지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오래된 토지에 충분한 공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간척지의 일부는 그대로 두었다. 몇 년 만에 얕은 웅덩이, 작은 섬, 늪으로 이루어진 이 풍경은 많은 물새들이 찾는 인기 있는 장소가 되었고, 국가적 중요성을 지닌 자연 보호 구역으로 변모했다. 비록 우연히 발생했지만, ''오스트바르데르플라센''은 1970년대에 이 간척지 구역의 최종 목적지가 되었다.

간척지의 중심부는 거의 전적으로 농업 지역이라는 점에서 전쟁 전 간척지와 가장 유사하다. 반면에 남동부 지역은 광대한 숲이 지배적이다. 또한 간척지의 유일한 다른 정착지인 제볼데 (1984)가 있으며, 이곳은 다시 지역 중심 역할을 하는 더 전통적인 도시이다. 제볼데는 1984년 1월 1일에 알메러와 동시에 자치 단체가 되었으며, 제볼데의 경우 도시가 성장하기 전까지 주변 토지에 있는 농장만 관할해야 했으므로, 도시 자체가 건설되기 전에 자치 단체가 존재했다.

5. 4. 마르케르와르트(Markerwaard) 간척지 (미완성)

1941년에 제방의 첫 번째 구간 공사를 시작하기로 결정했지만, 독일 점령군은 그해 공사를 중단했다.[7] 이 제방은 마르켄에서 시작되었는데, 북쪽으로 약 2km 뻗어 오늘날 갑작스럽게 끝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7년 10월 17일, 노르트홀란트 본토까지 3.5km 길이의 제방이 건설되었다.

1981년에 구상된 마커르와르드


1963년부터 1975년까지 렐리스타트와 엔크호이젠 사이에 28km 길이의 제방(''하우트립다이크'' 또는 '''마커르와르다이크''')을 건설하여 아이설호를 둘로 나누었다.

마커르와르드 건설 여부에 대한 논쟁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새로운 농경지에 대한 필요성이 대부분 사라졌고, 주택을 위한 추가 공간이 불필요했다. 많은 사람들은 마르케르메르가 가진 기존의 생태적 및 레크리에이션적 가치가 마커르와르드가 제공할 수 있는 잠재적 가치와 동등하거나 더 우수하다고 여겼다. 간척지의 비용 효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원래의 전후 설계는 410km2의 간척지를 요구했지만, 나중에 여러 가지 제안이 제시되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내각은 마커르와르드를 진행할 의향이 있었지만, 1986년 9월에 이 프로젝트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2012년에는 마르케르메르 북부에 자연 보호 구역을 조성하기 위해 설계된 일련의 섬인 마커르 와덴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등장했다.[7] 마커르와르드와는 달리, 영구적인 인간 거주는 계획되지 않았지만, 관광객과 조류 관찰자가 접근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건설 과정은 2016년 4월에 시작되었으며, 첫 번째 새로운 섬은 2016년 9월 24일에 개장했다.[8]

6. 플레볼란트주 신설

1986년 1월 1일, 노르도스트폴더, 동부 플레볼란트, 남부 플레볼란트를 통합하여 네덜란드의 12번째 주인 플레볼란트주가 출범했다.[9] 이전까지 노르도스트폴더와 위르크는 오버레이설주에, 드론턴은 헬데를란트주에 속해 있었다. 1984년 남부 플레볼란트에 새로운 지방 자치 단체가 설립되면서 주 승격 문제가 다시 주목받았다.

마르케르와르트 간척 사업이 무산되고 6개의 지방 자치 단체만으로는 주를 이루기에 인구가 부족하다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간척지 지방 자치 단체들의 만장일치로 플레볼란트주가 신설되었다. 2004년 기준 인구는 356,400명으로 네덜란드에서 인구가 가장 적었으나, 젤란트주(378,300명)보다는 인구 밀도가 높았다. 2015년에는 플레볼란트주의 인구가 젤란트주를 넘어섰고, 1제곱킬로미터당 280명의 인구 밀도를 보였다.[9]

참조

[1] 서적 Breaking New Ground: Dutch Dredging Pioneers https://books.google[...] Balans 2018
[2] 서적 Verdiept Verleden: Een eeuw koninklijke Boskalis Westminster en de Nederlandse Baggerindustrie Boom
[3] 웹사이트 Seven Wonders of the Modern World http://www.ce.memphi[...]
[4] 간행물 The Home-Made Land https://archive.org/[...] 1961-10
[5] 문서 Zuider Zee https://archive.org/[...]
[6] 웹사이트 TZuiderzeewet http://www.nieuwland[...] 2009-01-17
[7] 간행물 Intentieverklaring Marker Wadden, Rijkswaterstaat https://zoek.officie[...] Dutch government bulletin 2013-04
[8] 웹사이트 Een nieuw stukje Nederland: De Marker Wadden zijn open https://nos.nl/artik[...] 2016-09-24
[9] 서적 'オランダを知るための60章' 明石書店 2007
[10] 뉴스 물막이 완료 10년…새만금 개발 게걸음 http://hani.co.kr/ar[...] 2016-04-21
[11] 뉴스 새만금 방조제 도로 높이기 '위험천만' http://nocutnews.co.[...] 200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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