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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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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의황후는 남송 광종의 황후로, 본명은 이봉낭이며 하남 안양 출신이다. 그녀는 광종의 즉위 후 아들 조확을 태자로 세우려 했으나 효종의 반대에 부딪히자 효종과 광종 사이를 이간질하고, 질투심으로 궁녀를 살해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광종이 병에 걸리자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남용했고, 결국 광종이 폐위된 후 수인태상황후로 불렸다. 1200년에 사망하여 임안부의 수길사에 장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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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자의황후 이봉낭
자의황후 이봉낭
이봉낭
별칭자의황후
수인태상황후
생애
출생1144년
출생지안양
사망1200년 7월 16일
사망지임안부 자의전
능묘영숭릉
가족 관계
아버지이도
어머니장씨
배우자광종
자녀조정
영종
제안공주
경력
황태자비 책봉1171년 4월 8일
황후 즉위1189년 2월 18일
황태후 즉위1194년 7월 24일
시호 및 작위
시호자의
추증 작위복충의왕
존호수인태상황후

2. 생애

하남의 안양 사람으로 절도사를 지낸 이도(李道)의 딸이다.[21] 그녀의 아버지는 문밖에 검은 새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고 딸의 이름을 봉낭이라 지었다.[22] 고종의 추천으로 그의 손자인 조돈의 비가 되었는데, 이봉낭은 시조부인 고종과 시부 효종 사이를 이간질하여 두 사람의 노여움을 샀다.[23] 1189년 효종의 양위로 조돈이 즉위하자 이봉낭 또한 황후가 되었는데, 대신 황흡은 효종에게 이씨가 황후로서 예의를 차릴 수 있을지 염려된다고 고하였다.[22]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아들 가왕 조확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였는데 효종은 광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그녀의 청을 거절하였다.[21] 이봉낭은 "첩이 직접 가왕을 낳았는데 왜 안된다는 것입니까?" 하고 고종의 양자였던 효종의 출신에 빗대어 불만을 표하였고 효종은 크게 노하였다.[21] 이후 이봉낭은 끊임없이 광종과 효종 사이를 이간질하였고 광종이 병석에 누운 효종을 문안하러 가려 하자 그를 말리기도 했다.[24] 이봉낭의 방자함에 효종의 황후인 성숙황후 사씨는 이봉낭을 불러 꾸짖었지만 이봉낭은 효종의 계비인 사씨의 말을 무시했다.[25]

이봉낭은 질투가 심한 여인이었는데, 광종이 손을 씻다가 자신의 시중을 드는 궁녀의 손이 아름답다고 여기자 궁녀의 두 손을 잘라 찬합에 넣어 광종에게 보냈으며, 광종이 궁을 비운 사이 그가 총애하던 황귀비 황씨를 때려죽이기도 했다.[21] 이 사실을 알게 된 광종은 큰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누웠고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26] 광종의 병이 심해지자 이봉낭은 그를 대신해 국사를 처리했고, 친정의 일가친척 100여명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27]

상주탕음현 사람이다. 이도와 아내 장씨의 딸이다. 융흥 2년( 1164년) 4월, 공왕 조돈(후의 광종)에게 시집가 영국부인에 봉해졌고, 곧 정국부인으로 진봉되었다[14].건도 4년( 1168년) 10월, 조확(후의 영종)을 낳았다. 건도 7년( 1171년) 3월, 공왕이 황태자에 책립됨에 따라 황태자비가 되었다[16].순희 16년( 1189년), 광종이 즉위하자 황후로 책립되었다.

광종 즉위 후, 봉랑은 조확의 입태자를 원했지만, 태상황효종의 반대에 직면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봉랑은 "확은 장남이고, 본처인 나의 친자입니다[17], 왜 안 됩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리고 태상황이 폐립을 꾀한다고 광종에게 참언했고, 황후의 말에 현혹된 광종은 아버지와 험악한 관계가 되었다. 봉랑은 또한 매우 질투심이 많아 궁녀를 학살하고, 광종의 총애를 받던 황귀비마저 살해했다.

소희 5년( 1194년) 6월, 효종이 붕어하자 국상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이미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던 광종이 상을 주재하는 것을 거부하여 여러 신하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노령의 태황태후 오씨는 조여우·한탁주 등과 협력하여 수렴청정하고, 광종의 폐위를 선포하며 영종을 옹립했다. 경원 2년( 1196년) 10월, 봉랑은 수인태상황후의 호를 받았다[14]

경원 6년 6월 4일 ( 1200년 7월 16일), 자의전에서 56세로 붕어했다. 같은 해 8월, 임안부의 남산에 있는 수길사에 장례를 치렀다[14][18]

2. 1. 초기 생애 및 혼인

자의황후는 안양 출신의 절도사 이도의 딸로 태어났다.[2] "봉낭(鳳娘)"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아버지가 지은 이름이다. 어느 날 도교 사제이자 중매쟁이가 그녀가 백성의 어머니가 될 운명이라고 예언했다.[2] 예언을 한 후, 사제는 황제를 알현하여 황제의 손자인 광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도록 하였다.[3]

이씨는 광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고, 1170년 남편이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황태자비가 되었다.[4] 이 황태자비는 지배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으로 묘사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후궁들에 대해 고종 황제와 시아버지인 효종 황제에게 불만을 제기했는데, 효종은 그녀에게 불쾌감을 느껴 더 순종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요청했다.[4] 그러나 이씨는 복종을 거부했다.[5]

2. 2. 황후 시절

하남 안양 출신으로 절도사 이도(李道)의 딸이다.[21] 아버지 이도는 문밖에 검은 새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고 딸의 이름을 봉낭이라 지었다.[22] 1189년 효종의 양위로 남편 조돈이 즉위하자 황후로 책봉되었다.[22] 황흡은 효종에게 이씨가 황후로서 예의를 차릴 수 있을지 염려된다고 고하였다.[22]

이봉낭은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아들 가왕 조확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효종은 광종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며 거절하였다.[21] 이봉낭은 "첩이 직접 가왕을 낳았는데 왜 안된다는 것입니까?" 하고 고종의 양자였던 효종의 출신을 빗대어 불만을 표하였고, 효종은 크게 노하였다.[21] 이봉낭은 끊임없이 광종과 효종 사이를 이간질하였고, 광종이 병석에 누운 효종을 문안하러 가는 것을 막기도 했다.[24] 이봉낭의 방자함에 효종의 황후인 성숙황후 사씨는 이봉낭을 불러 꾸짖었지만, 이봉낭은 효종의 계비인 사씨의 말을 무시했다.[25]

이봉낭은 질투가 심한 여인이었다. 광종이 손을 씻다가 시중을 드는 궁녀의 손이 아름답다고 하자 궁녀의 두 손을 잘라 찬합에 넣어 광종에게 보냈다.[21] 또한 광종이 궁을 비운 사이 총애하던 황귀비 황씨를 때려죽였다.[21] 이 사실을 알게 된 광종은 큰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누웠고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26] "검은 봉황"이라고 불릴 정도로 흉폭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봉랑 황후는 잔혹하고 꾀가 많으며, 남편을 통해 정치를 좌우하여 중국 역사에 악명을 떨쳤고, 남편은 아내에게 휘둘리는 "애처가 약골"로 알려지게 되었다.[6]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이 황후가 ''사실상'' 송 제국을 통치했다.[7] 1191년, 이 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던 황 귀인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이로 인해 황제는 심하게 반응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고, 황후는 혼자서 국사를 처리하게 되었다.[8] 광종의 병이 심해지자 이봉낭은 그를 대신해 국사를 처리했고, 친정의 일가친척 100여명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27]

이 황후는 황제와 그의 부친을 격리하려 했고, 종종 황제가 부친을 만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9] 한번은 황제의 병상에서 시아버지인 효종이 황후에게 국왕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10] 남편이 회복되자, 황후는 이 위협에 대해 말했고, 그의 부친이 남긴 약에 독이 들었을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11] 이는 1194년 광종이 자신의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로 꼽히며, 이 때문에 이봉랑 황후가 비난을 받았고, 오태후가 광종에게 강제로 퇴위하도록 했다.[12]

2. 3. 말년

1194년, 효종이 죽은 후 광종이 퇴위하고 영종이 즉위하면서 자의황후는 수인태상황후(壽仁太上皇后)로 불렸다.[14] 1197년, 효종의 황후인 무태후 사씨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 마지막 스캔들을 일으켰다.[13] 1200년 7월 16일(음력 6월 4일) 자의전(慈懿殿)에서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4][18] 같은 해 8월, 임안부의 남산에 있는 수길사에 장례를 치렀다.[14][18]

3. 가계

아버지 이도(李道)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일부 기록에는 장씨(張氏)로 기록되어 있다. 남편은 광종이다. 조확 (영종)을 낳았다.

4. 평가

5. 기타

자의황후는 "검은 봉황"이라고 불릴 정도로 흉폭한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광종이 시녀의 아름다운 손을 칭찬하자, 이봉낭은 그 손을 잘라 쟁반에 담아 광종에게 바쳤다. 황귀비를 살해했을 때는 광종이 관원들과 함께 태묘에 임어하여 제사를 지내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알렸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광종은 제사를 중단했고, 이봉낭은 광종에게 직접 경위를 이야기했다고 한다.

참조

[1]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2]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3]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4]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5]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6]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7]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8]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9]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10]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11]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12]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13]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14] 간행물 『宋会要輯稿』巻12 后妃一 光宗李皇后の項より。
[15] 간행물 『宋史』巻37, 寧宗紀一 慶元六年六月戊子条による。
[16] 간행물 『宋史』巻243, 后妃伝下 慈懿李皇后伝より。
[17] 문서 孝宗は[[高宗 (宋)|高宗]]の養子、孝宗の后の[[成粛皇后|太上皇后謝氏]]は側室上がりの継妻、また光宗は孝宗の三男であった。
[18] 간행물 『宋史』巻37, 寧宗紀一 慶元六年八月癸卯条による。
[19] 간행물 《[[송사]]》(宋史) 권243 〈열전〉(列傳) 제2 후비(后妃) 하 - 자의이황후(慈懿李皇后)
[20] 간행물 《[[송사]]》(宋史) 권37 〈본기〉(本紀) 제37 영종(寧宗) 1 - 경원(慶元) 6년 6월 무자(戊子) 기사
[21] 서적 중국사 열전 후비 달과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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