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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빈 (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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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빈은 조군 중구 출신으로, 후조를 건국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학문에 정통하고 장량을 자처하며 유방과 같은 군주를 만나기를 원했다. 영가의 난 이후 석륵을 만나 그의 모사가 되었으며, 석륵의 신임을 얻어 여러 계책을 성공시켰다. 장빈은 후조 건국 과정에서 모략, 관제 정비, 유민 대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헌했으며, 석륵은 그를 존경하여 '우후'라 불렀다. 그는 겸손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부하를 아꼈으며, 322년경 사망했다. 장빈은 뛰어난 지략과 충성심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후세의 소설에서도 그의 활약이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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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빈 (후조)
인물 정보
이름장빈
로마자 표기Jang Bin
한자張賓
생몰년도3세기 ~ 318년
맹손(孟孫)
출생지위군(魏郡) 동무양(東武陽)
국적후조(後趙)
직업군사(軍師), 모사(謀士)
주요 활동갈족(羯族)의 중원(中原) 지배에 기여
섬긴 군주석륵(石勒)

2. 생애

장빈은 조군 중구(趙郡 中丘; 현재의 하북(河北) 지역) 출신으로, 아버지 장요(張瑤)는 진(晋)나라의 중산태수(中山太守)를 지냈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경사(經史)에 정통했던 그는 스스로를 한나라장량에 비유하며 한 고조와 같은 군주를 만나기를 염원했다.

영가의 난 이후, 전조의 유연석륵에게 하북 지방을 경략하게 하고, 기주(冀州)를 병합한 석륵은 인재를 모으기 위해 군자영(君子營)을 설치했다. 장빈은 석륵이 큰일을 할 인물임을 알아보고 직접 찾아가 면담을 요청했고, 군공조(軍功曹)로 발탁되었다. 처음에는 석륵에게 중용되지 않았지만, 여러 계책을 성공시켜 점차 신임을 얻었다. 312년에는 우장사(右長史), 중묵장군(中墨將軍)으로 승진했고, 319년 석륵이 즉위한 후에는 대집법(大執法)을 맡아 복양후(濮陽侯)에 봉해지며 사실상 재상으로서 조정을 총괄했다.

장빈은 왕미가 석륵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간파하고 그를 제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유곤과 왕준 사이의 불화를 이용하여 왕준을 사로잡고 유곤을 패퇴시키는 등 뛰어난 모략으로 후조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겸손하고 신중하며 부하를 아끼는 성품을 지닌 장빈은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예의를 중시했다. 석륵은 그를 존경하여 '우후(右侯)'라고 부르며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말년에 정하의 참언으로 권력에서 밀려났고, 322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륵은 그의 죽음을 "하늘이 나에게 사업을 이루게 할 생각이 없는 것인가! 어찌하여 나에게서 우후(右侯)를 이토록 빨리 빼앗아 갔는가!"라며 크게 슬퍼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조군 중구(趙郡 中丘; 현재의 하북(河北) 지역) 출신이다. 아버지 장요(張瑤)는 진(晋)나라의 중산태수(中山太守)였다. 장빈은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한 고조과 같은 군주를 만나기를 염원했다.

처음에는 진나라 중구왕(中邱王)의 장하도독(帳下都督)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3] 하지만, 바라던 직무가 아니었기에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영가의 난이 발발하자 전조의 유연석륵에게 하북 지방을 경략할 것을 명령하였고, 기주(冀州)를 병합한 석륵이 인재를 구하기 위해 군자영(君子營)을 설치하였다.

308년 1월, 한의 보한장군 석륵이 여러 장수를 이끌고 청주로 진출했을 때, 장빈은 석륵을 보고 "나는 지금까지 많은 장수를 관찰해 왔지만, 호 장군(석륵)만이 함께 큰일을 도모할 만한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칼을 들고 군문에 나가 석륵에게 면회를 청했다. 석륵은 장빈을 만났지만 처음에는 평범한 인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장빈이 여러 계책을 제시하고 그 계책이 성공하자, 비범한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309년, 석륵이 거록·상산을 공략하고 기주의 군현에서 100개가 넘는 보루를 함락시켜 10만 명 이상의 병사를 귀순시키자, 현인을 모아 '군자영'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장빈은 이 조직의 모주를 맡게 되었고, 군공조에 임명되었다.

2. 2. 석륵과의 만남과 초기 활약

장빈은 석륵이 큰일을 할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아보고, 스스로 석륵의 진영에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여 그의 부하가 되었다.[1] 처음에는 석륵에게 중용되지 못했으나, 여러 차례 모략을 성공시켜 서서히 신임을 얻었다.[1]

311년, 석륵이 장강과 한수 사이 지역 점령을 고려할 때, 장빈은 석륵 군대가 평원에서 기동하는 데 적합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 이 지역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반대했다.[2]

312년, 석륵 군대가 식량 부족과 나라 군대의 공격 위협에 직면했을 때, 장빈은 석륵에게 후퇴를 조언했다.[2] 장빈은 사마월 장례 행렬과 낙양 점령에 석륵이 참여했기 때문에 진나라 군대가 석륵에게 큰 적개심을 가지고 있어, 후퇴 시 진나라 군대가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2] 그의 조언대로 석륵은 안전하게 후퇴했고, 장빈은 우장사, 중묵장군으로 승진했다.[1][2] 석륵은 장빈을 '우후(右侯)'라고 부르며 존경했다.[1][2]

2. 3. 후조 건국의 핵심 모사

312년, 장빈은 석륵에게 황하와 양쯔강 사이의 지역 대신 평원에서 기동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조언하며, 상국(현재 싱타이, 허베이)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석륵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상국을 점령하고 영구적인 본거지로 삼았다.[1]

왕미가 석륵을 살해하고 청주에서 독립하려는 음모를 꾸몄을 때, 장빈은 이를 간파하고 석륵에게 왕미를 연회에 초대하여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 석륵은 장빈의 계책에 따라 왕미를 제거하고 그의 세력을 흡수했다.[2]

유곤과의 관계에서, 장빈은 유곤과 왕준 사이의 불화를 이용하여 왕준을 사로잡고 유곤을 패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빈은 "왕준과 유곤은 실제로 원수 사이로 도와주려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진언하며, 유곤에게 귀순 사절을 보내는 동시에 유주를 급습하여 왕준을 사로잡도록 했다. 이후 유곤은 석륵을 공격하려다 패하고 선비족에게 도망쳤으나, 결국 죽임을 당했다.[3]

319년, 석륵이 후조를 건국한 후, 장빈은 사실상의 재상으로서 조정을 총괄하며 복양후에 봉해졌다. 그는 모략, 관제 정비, 유민 대책 등 후조 정권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2. 4. 후조 건국 이후의 역할

장빈은 겸손하고 신중하며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았으며, 조정에서는 규칙을 준수하고 밖에서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석륵은 장빈을 존경하여 조정에서 만날 때마다 용모를 단정히 했으며, '우후(右侯)'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319년 석륵이 후조를 건국한 후, 장빈은 대집법(大執法)을 맡아 복양후(濮陽侯)에 봉해졌고, 사실상 재상으로서 조정을 총괄했다. 321년, 석륵은 오품관제를 정비하고 장빈에게 관료 선출을 위임했다.

그러나 장빈은 말년에 정하의 참언으로 인해 권력에서 밀려났다. 정하는 장빈의 권세를 시기하여 석륵의 총애를 받는 여동생 정씨를 통해 장빈과 그의 측근 장피를 모함했다. 결국 장피는 살해되었고, 장빈은 정하의 음모를 알면서도 반론하지 못했다.

장빈은 322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륵은 장빈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늘이 나에게 사업을 이루게 할 생각이 없는 것인가! 어찌하여 나에게서 우후(右侯)를 이토록 빨리 빼앗아 갔는가!"라고 탄식했다. 사후 장빈은 경후(景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3. 업적 및 평가

장빈은 후조 건국과 하북 평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그의 지략과 판단력은 석륵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단순한 모사를 넘어, 행정, 인사,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영가의 난 발발 후, 전조의 유연이 석륵에게 하북 지방 경략을 명령했을 때, 석륵은 인재를 구하기 위해 군자영(君子營)을 설치했다. 장빈은 석륵이 큰일을 할 수 있는 자임을 알고 스스로 석륵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군공조(軍功曹)에 발탁되었다. 처음에는 석륵이 장빈을 중시하지 않았지만, 장빈의 모략이 매번 성공하여 점차 중용되어 석륵의 모사가 되었다. 312년 우장사(右長史), 중묵장군(中墨將軍)로 승진했고, 319년 석륵 즉위 후 대집법(大執法)을 맡아 복양후(濮陽侯)에 봉해졌다. 장빈은 사실상 재상으로서 조정을 총괄했다.

장빈의 모략은 왕미가 석륵을 살해하고 청주에서 독립을 기도했을 때 빛을 발했다. 석륵은 장빈의 진언에 따라 왕미를 연회에 꾀어내어 살해하고 그 무리를 병합했다. 진양(晋陽)에 근거한 병주(幷州)의 실력자 유곤의 회유를 거절하고, 왕준은 선비족 단씨에게 의존했으나, 석륵이 단씨를 사로잡은 뒤 잘 보살펴 단씨로부터 호의를 받고 있었다. 장빈은 "왕준과 유곤은 실제로 원수사이로 도와주려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진언했고, 유곤에게 귀순의 사자를 보내면서 유주를 급습해 왕준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유곤 또한 단씨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처럼 장빈은 모략, 관제 정비, 유민 대책 등 후조 정권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하북 평정에 매진했다. 석륵이 전조를 제압하고 북부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것은 장빈의 공이 컸다.

장빈은 겸허하고 신중했으며, 부하를 아끼고 사랑했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고, 조정에서는 규칙을 준수했으며, 바깥에서도 예의를 잊지 않았다. 석륵은 장빈을 존경하여 조정에서 만날 때는 용모를 단정히 했고, 그를 우후(右侯)라 부르며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석륵은 "내가 항상 중대한 일에 임하여, 생각을 거듭하여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후(장빈)는 이미 결심을 내리고 있다"고 칭찬했다.

장빈은 323년 초에 사망했는데, 석륵은 "하늘이 내가 큰 일을 이루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인가? 왜 우후가 나에게서 빼앗겼는가?"라며 크게 슬퍼했다.

3. 1. 후세의 평가 및 각색

장빈은 뛰어난 지략과 충성심으로 후세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명나라 시대 소설에서는 장비의 손자로 설정되어, 제갈량의 병법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삼국지연의의 속편인 "속 삼국지" (삼국지후전)에서는 진(晋)나라에 반기를 든 무장들을 모두 나라 무장의 후손으로 묘사하는데, 장빈 또한 장비의 손자 (장포의 아들)로 설정되어 등장한다. 작중에서 장빈은 촉나라 강유로부터 제갈량의 병법을 전수받아 "그대의 재능은 나보다 열 배나 낫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촉나라 멸망 후에는 량주 장액군에 은거하여 조의(조상의 자손으로 설정), 진원달 등과 교류했고, 유연의 친구인 진원달의 추천으로 유연에게 등용되었다고 묘사된다.

참조

[1] 서적 Book of Jin Dynasty: 二十四史 晋书 https://books.google[...] DeepLogic
[2] 문서 乾隆14年(1749年)に編まれた『南和県志』によれば、任県白仏村(現在の河北省邢台市南和県河郭郷張相村)の人ともいう。
[3] 문서 『晋書』には中丘王と記載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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