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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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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제는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으로, 손휴 시대에 둔기교위로 시작하여 육개가 추천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촉한 멸망을 예측했으며, 279년 승상에 임명되었다. 서진의 침공 당시 왕혼 군대와 싸우다 장교를 항복시키는 등 선전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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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 (동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장제
원어 이름張悌
거선 (巨先)
출생지양양, 후베이성
사망일280년
사망지허현 또는 당투현, 안후이성
직업관료
작위산도후 (山都侯)
경력
소속 국가
섬긴 군주손휴손호
주요 직위승상
군사둔기교위 (屯騎校尉)
군사 (軍師)
임관 정보
둔기교위 임관 시기알 수 없음
군사 임관 시기270년대 경
승상 임관 시기279년 9월 또는 10월
승상 재임 기간
시작279년 9월 또는 10월
종료280년
이전 승상
이전 승상육개 및 만욱

2. 생애

장제는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이었다.[4][7] 젊어서 도리에 맞는 인물로 알려져 손휴(258-264년) 시대에 둔기교위가 되었다.[2] 어린 시절 제갈량의 일족에게 발탁되었다고 전해지며,[2] 대관에 임명되자 황제의 측근들에게 아첨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2]

위의 사마소촉한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자 장제는 반드시 사마씨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오나라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결국 촉은 위에게 항복했다.(촉한의 멸망)[3]

269년, 육개는 죽기 직전 국가를 지탱할 인물 중 한 명으로 장제의 이름을 꼽았다.[4] 276년, 손호가 봉선을 행했을 때의 비문(봉선국산비)에 "둔기교위 제"라는 글자가 보인다.[5]

279년 8월, 장제는 승상으로 승진했다.[5][7] 280년 진의 오 정벌 때 진나라 군사가 여러 갈래로 쳐들어오자, 심영, 손진, 제갈정(諸葛靚)과 함께 왕혼의 군사를 맞아 싸웠다.

오군이 우저(牛渚)에 이르렀을 때, 심영은 진군을 기다렸다가 싸울 것을 제안했으나, 장제는 왕준의 함대가 이르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장강을 건너 왕혼의 부장 장교(張喬)와 싸워 궁지로 몰아넣었다. 장교가 항복하려 하자 제갈정은 반대했지만, 장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준(周浚)의 군사와 싸울 때 장교가 부하들과 함께 오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오군은 혼란에 빠져 무너졌다.

전세가 기울자 제갈정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후퇴하면서 장제를 불렀으나, 장제는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 죽으려 했다. 제갈정이 직접 찾아가 후퇴를 권했으나, 장제는 "몸으로 국가에 순국할 수 있다면 어찌 피하겠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하였다.[6] 결국 장제는 왕혼 휘하의 유표에게 사로잡히거나[6], 난전 중에 전사하여 장제, 손진, 심형 등의 수급은 낙양으로 보내졌다.[7]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장제는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이었다.[4][7] 젊어서 도리에 맞는 인물로 알려져 손휴(258-264년) 시대에 둔기교위가 되었다.[2] 어린 시절 제갈량의 일족에게 발탁되었다고 전해지며,[2] 대관에 임명되자 황제의 측근들에게 아첨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2]

위의 사마소촉한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자 장제는 반드시 사마씨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오나라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결국 촉은 위에게 항복했다.(촉한의 멸망)[3]

269년, 육개는 죽기 직전 국가를 지탱할 인물 중 한 명으로 장제의 이름을 꼽았다.[4] 276년, 손호가 봉선을 행했을 때의 비문(봉선국산비)에 "둔기교위 제"라는 글자가 보인다.[5]

279년 8월, 장제는 승상으로 승진했다.[5]

2. 2. 승상 임명과 서진의 침공

269년 오나라의 좌승상 육개(陸凱)는 죽음을 앞두고 손호(孫皓)에게 상소를 올려 유능한 인재들을 추천했는데, 장제도 그 중 하나였다.[4] 그러나 손호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육개가 죽은 후 일가친척들을 귀양 보냈다. 젊어서 도리에 맞는 인물로 알려져 손휴(258-264년) 시대에 둔기교위가 되었다. 어린 시절 제갈량의 일족으로, 후에 승상이 되는 인물 (제갈각인가)에게 발탁되었다고 한다[2]。 대관에 임명되자 시류에 영합하여 황제의 측근들에게 아첨했기 때문에 논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위의 사마소촉한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자 장제는 반드시 사마씨가 승리할 것이라고 모두에게 말했다. 오나라 사람들은 장제의 말을 비웃었지만, 과연 촉은 위에게 항복했다[3](촉한의 멸망). 천새 원년(276년), 손호가 봉선을 행했을 때의 비문(봉선국산비)에 "둔기교위 제"라는 글자가 보인다. 또한 손호 시대에는 군사가 되어 천기 3년(279년)에는 승상으로 승진했다.[5]

279년 8월, 장제는 승상이 되었고,[5] 280년 진의 오 정벌 때 진나라에서 군사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쳐들어 왔다. 손호는 그 소식을 듣고 유각에게 우저를 지키게 하고 장제에게 희장에서 공성차를 만들게 했다[5]。 장제는 심영(沈瑩), 손진(孫震), 제갈정(諸葛靚)과 함께 왕혼(王渾)의 군사를 맞아 싸우게 했다. 오군이 우저(牛渚)에 이르자 심영은 진군을 기다렸다가 싸울 것을 청했으나 장제는 왕준(王濬)의 함대가 이르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3월에 장강을 건너 왕혼의 부장인 장교(張喬)와 싸워 궁지로 몰았다. 장교가 부하들과 함께 항복하려 하자 제갈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준(周浚)의 군사와 싸울 때 장교가 부하들과 함께 오군의 후방을 공격하자 모두 혼란에 빠져 급격히 무너졌다.[6] 전세가 기울자 제갈정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달아나면서 사람을 보내 장제를 합류시키려 했다. 장제가 거부하자 자신이 직접 찾아가 거듭 후퇴를 권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고 싸우다 죽으려 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후퇴하던 제갈정이 100여 보를 가다가 뒤돌아보니, 그때 장제는 이미 전사해 있었다고 한다.[7]

2. 3. 장강 전투와 최후

279년 8월, 장제는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이 되었다.[2] 280년 진의 오 정벌 때 진나라 군사가 여러 갈래로 쳐들어오자, 심영, 손진, 제갈정(諸葛靚)과 함께 왕혼의 군사를 맞아 싸웠다.[2]

오군이 우저(牛渚)에 이르렀을 때, 심영은 진군을 기다렸다가 싸울 것을 제안했으나, 장제는 왕준의 함대가 이르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장강을 건너 왕혼의 부장 장교(張喬)와 싸워 궁지로 몰아넣었다. 장교가 항복하려 하자 제갈정은 반대했지만, 장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준(周浚)의 군사와 싸울 때 장교가 부하들과 함께 오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오군은 혼란에 빠져 무너졌다.

전세가 기울자 제갈정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후퇴하면서 장제를 불렀으나, 장제는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 죽으려 했다. 제갈정이 직접 찾아가 후퇴를 권했으나, 장제는 "몸으로 국가에 순국할 수 있다면 어찌 피하겠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하였다.[6] 결국 장제는 왕혼 휘하의 유표에게 사로잡히거나[6], 난전 중에 전사하여 장제, 손진, 심형 등의 수급은 낙양으로 보내졌다.[7]

3. 일화

수신기에 따르면, 장제 군의 유영은 행군 중에 병사했다가 이틀 후에 갑자기 살아났다.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유영은 "하늘에 올라 북두문에 다가가니 장군사(張軍師)가 밧줄에 묶여 있었다. 무심코 큰 소리로 외치자, 왠지 문에서 쫓겨나 버렸다"라고 했다. 장제의 죽음도 우연히 그날이었다고 한다.

4. 평가

참조

[1] 서적 Book of Jin
[2] 서적 襄陽記
[3] 서적 襄陽記
[4] 문서 姚信・楼玄・賀邵・張悌・郭逴・薛瑩・滕脩・陸喜・陸抗
[5] 서적 三十國春秋
[6] 서적 晋書
[7] 서적 晋書
[8] 서적 진고
[9] 서적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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