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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 (18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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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재학은 1856년 대구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하여 대구 지역의 3대 부호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는 명태 장사로 큰돈을 벌어 어염무역에 진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1913년 대구은행을 설립하여 초대 은행장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행위로 비판을 받았으나, 민족 자본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27년간 은행장으로 재임하며 최장수 은행장 기록을 세웠다. 그의 아들과 손자 역시 은행장을 역임하며 3대 은행가 집안을 이루었으며, 사회공헌 활동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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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 (185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 생애

정재학은 1858년 경북 경제권의 중심지인 대구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외가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나, 20세에 이르러 자수성가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다. 금전 대부업자 밑에서 일하며 품삯을 모았고, 1883년 이남숙과 결혼 후에는 명태 장사를 시작하여 큰 돈을 벌었다.[14] 1885년에는 장남 정응원이 태어났다.[14]

낙동강 뱃길을 이용한 어염무역으로 사업을 확장한 정재학은 1886년 콜레라 유행으로 소금값이 폭등하자 이를 기회로 대구 3대 부호로 성장했다.[3] 1892년에는 대구 남일동에 99칸 기와집을 짓기도 했다.[3] 1921년 '대구일반'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100만 원 이상이었고, 현미 8000~3000석 규모의 연 수입을 올렸으며, 하인도 50~60명에 달했다.[16]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정재학은 민족은행 설립을 추진, 1913년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대구은행을 설립하고 은행장에 취임했다.[3] 경상농공은행, 경일은행 등에도 관여했으나, 1927년 대구은행과 경남은행경상합동은행으로 통합되면서 경남은행 출신 인사들의 입지가 좁아졌다.[3] 1939년에는 맏손자 정운용을 이사 겸 부장으로 발탁하여 경영 수업을 받게 했다.[22]

고승제 박사는 정재학이 한일합방 이후 설립된 수많은 민족자본은행 경영자 중에서도 30년 가까이 은행 경영 실권을 장악한 유일한 사례라고 평가하며, 대구은행 자본금을 7년 만에 4배 증액하는 등 경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23][24]

정재학의 가족과 친척 중에는 항일 투사들이 있었다. 손자 정운용의 재혼한 부인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 인물이었고[25][26][27], 김진만의 손자 김일식은 대구 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했다.[30] 정재학과 친척 관계인 정운일도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30]

2. 1. 자수성가

정재학은 1858년 경북 경제권의 중심지인 대구에서 연일(영일) 정씨 정석은과 손남산 사이의 1남 3녀 중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외가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소년 시절에는 잠시 방황을 하기도 했으나 20세에 접어들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번듯한 인생을 일구겠노라 굳게 다짐한다. 그는 금전 대부업자였던 부자 밑에 들어간 뒤 어렵게 번 품삯을 한 푼 두 푼 모아갔다.

1883년 이남숙(1864년생)과 결혼 한 뒤 1885년 장남 정응원이 태어나자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었다.[14] 아내에 대한 애정도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 후 장사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근검절약 해오면서 부인에게 옷 한 벌도 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낡아 찢어진 아내의 속옷을 발견하곤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4]

큰돈을 벌 결심을 한 뒤 명태 장사를 택했다. 옛 주인을 찾아가 1년간 천 냥을 빌려 달라 했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원산으로 달려간 그는 3년 만에 갚을 돈은 물론 장사 밑천도 두둑이 마련해 고향으로 돌아왔다.[3][15]

2. 2. 대구 3대 부호

정재학은 낙동강 뱃길을 이용한 어염무역에 진출했다. 1886년 여름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었는데, 이 괴질에 소금물이 좋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금은 불티나게 팔렸고 값도 폭등했다. 정재학은 이를 바탕으로 대구 3대 부호로 급부상하며 1892년 대구 중심가인 남일동에 99칸 기와집을 세웠다. 1921년 간행된 '대구일반'에는 그의 재산 규모에 대해 "100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미 8000~3000석 규모의 연 수입을 거두고 있다. 하녀와 하인은 각각 30~40명에서 50~60명에 이른다."고 기술하고 있다.[3][16]

2. 3. 은행업 개척

1910년 조국이 일본 치하에 들어가자 정재학은 은행 감사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은행 설립을 결정한다. 일본인들이 규합해 설립한 일본계 은행에 대한 견제에 공감한 경북 지역의 민족 자본가들도 적극 참여했다.

1913년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그해 5월 창립총회에서 은행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대구은행 행장 직을 수행하면서도 지분 참여 등을 통해 경상농공은행, 경일은행 등의 경영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하지만 대구은행 경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지방은행들의 경영 상황이 나빠지면서 총독부는 은행 간 합병으로 체질 개선을 요구했다. 대구은행과 경남은행이 1927년 경상합동은행으로 통합됐다.

경상합동은행에서도 정재학의 경영권 장악력이 다시금 발휘되면서 경남은행 출신 인사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졌다. 1939년 그는 맏손자 정운용을 이사 겸 부장으로 발탁하여 경영 수업을 받게 했다.[22][3]

국내 경제학계의 원로로 꼽히는 고승제 박사는 "한일합방 이후 수많은 민족자본은행이 설립됐지만 정재학처럼 30년 가까이 시종 은행경영의 실권을 장악한 사례는 찾아볼 수가 없다"며 "그는 대구은행의 자본금을 7년 만에 4배나 증액하는 등 경영자로서의 총력을 다 바쳤다"고 밝혔다. 아울러 "다른 부호들이 한 우물을 파지 않고 다방면으로 사업을 넓혀가는 데 비해 정재학은 오로지 대구은행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강조했다.[23][24][3]

2. 4. 항일투사와의 관계

정재학의 손자이자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2대 조흥은행장에 오른 정운용은 1931년 대구 남산동에 거주하던 김분조와 재혼했다.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1915년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25][26][27]

김진만은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 중 대구 지역 부호였던 장인 서우순의 집을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물러나던 중 반항하는 하인 우도길에게 총상을 입혔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13년간 옥고를 치렀다.[28][29] 김진만의 손자 김일식 역시 1920~1930년대 대구 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김진만과 함께 서우순 자택에 침입했던 광복단원들 가운데 정재학과 친척관계인 정운일도 있었다. 정운일 역시 검거돼 10년형을 선고받고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복 후 미군정 경상북도 상임고문과 반민특위 경북 도위원장을 역임했고 건국포장과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30]

정인택 역시 항일학생운동에 가담, 경찰에 잡혀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66년 경향신문이 제정한 제1회 '국민의 주는 희망의 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31][32] 정인택은 경향신문에 연재한 당선소감에 자신이 정재학의 증손자라고 적고 있다.[33]

그러나 정재학이 1858년 출생인 점에 비춰볼 때 1911년생인 정인택이 증손자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정재학의 맏손자인 정운용 1대 조흥은행장이 태어난 해가 1904년이기 때문이다. 다만 항렬 등에 비춰볼 때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먼 친척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인택의 부친인 독립투사 정운일(1884~1956)은 정재학 대구은행장(1856~1940)의 손자인 정운용 제2대 조흥은행장 (1904~ 1963 )과 같은 항렬이다. 정재학 행장은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던 먼 친척의 아들을 위해 기꺼이 진학추천서를 써줬다.

3. 조선총독부와의 갈등과 협력

정재학은 조선총독부와 타협하기도 했지만, 부당한 요구에는 끝까지 맞섰다. 조선총독부조선은행경남은행과의 통합을 강요했을 때 그는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34]

일본인들의 경영권 찬탈 시도가 이어지자, 경찰 출신 일본인 지배인을 선임하는 등 경영권 방어 전략으로 맞섰다. 또한 총독부와 조선은행이 그를 행장 자리에서 몰아내려 했지만, 주주총회에서 한국인 주주들이 정재학 행장에게 표를 몰아주면서 번번이 실패했다.[35][36] 31년간 민간은행장 자리를 유지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이다.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많은 민족계은행이 일제의 강제합병 과정에서 사라져갔지만, 정재학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저항했다.[37]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은행 정책은 시기별로 큰 변화를 보였다. 1910년대에는 일반은행 신설을 장려했으나, 1922년 이후 신설을 불허하고 합병 정책으로 민족자본은행을 일본인 소유 은행으로 전환시켜갔다. 1910년대 수도권 및 지방에 잇따라 신설된 민족자본은행들은 총독부의 관리를 받는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의 주도로 일본인 은행에 흡수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흡수 과정의 첫 단추는 1928년 3월에 단행된 한성은행에 대한 정리 작업이었다. 총독부는 한성은행에 조선은행 출신 일본인 임원을 진입시켜 경영권을 장악했다. 이는 일반은행이 경영난으로 중앙은행 격인 조선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리기 위해 핵심 임원 자리를 일본인에게 내줘야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본인 임원의 침투 전략이 반복되면서 한국인 은행은 일본인 은행으로 바뀌어 갔다. 정태헌 고려대 교수는 "어미새(국가)가 둥지를 틀고 품어줘야 새끼(자본주의)가 알을 깨고 나와 먹을 공급(은행)받아 성장할 수 있지만, 남의 둥지를 독점한 뻐꾸기(총독부 산하 특수은행과 일본인은행)는 둥지의 원주인(조선인은행)을 하나하나 떨어뜨려 죽인다. 식민지 자본주의 조선인은행의 모습이었다."고 강조했다.[38]

3. 1. 민족자본 수호

정재학은 항일투쟁 경력의 임호연 대기자가 '대구지역 일제 대항 세력 중심'으로 인정한 민족자본의 수호자였다. 정재학의 대구은행은 일제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경일은행은 일제에 순응하는 경영 방식을 택했다.[39]

임호연 대기자는 정재학에 대해 "거리의 일개 건달에서 수만금의 재산가가 되고 군수라는 관직에 오르기도 했고 풍운아인데 대구은행 설립을 통해 일제의 대항 세력이 되어 지체를 높인 특이한 존재"라고 평가했다. 또한 "정재학이 설립했던 대구은행은 일제에 대한 커다란 저항세력으로 한국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길러주는데 큰 몫을 했다"고 강조했다.[42]

대구은행의 출범은 일본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에 의해 1912년 설립된 대구 최초의 민간은행인 선남은행에 대한 대구 지역 내 한국인 재계의 경계심을 보여준다. 대구은행의 설립계획서 제출 시기가 1912년 9월 5일로 선남은행 설립일자인 1912년 9월 1일에 비해 4일 뒤였다는 점은 대구 경북 지역 민족자본가들의 위기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44]

대구은행은 민족계은행답게 대출 가운데 한국인 비중은 77%, 일본인 비중은 23%였다. 1인당 대출액은 일본인에 비해 적었지만 가능한 동포들에게 더 대출 혜택을 주기로 한 정재학의 경영 방침이 있었다.[45]

대구은행의 민족자본 수호 의지는 해방 직후 조흥은행의 자본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1948년 미군정이 우리 정부에게 넘겨준 주요 은행 주식 분포를 보면 조흥은행의 경우 한국인 지분 비율이 54%에 달했다.[46] 조흥은행이 민족자본의 적통을 이어받았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47]

조흥은행은 1943년 10월 1일 최초의 민족은행인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이 합병하여 출범했다. 한성은행 계열 5개 은행(한성은행, 해동은행, 구포은행, 주일은행, 대구은행)과 동일은행 계열 4개 은행(한일은행, 호서은행, 동래은행, 호남은행)은 조흥은행으로 최종 통합되었다.[49] 정재학 가문은 경상합동은행 주식 가운데 1만여 주를 보유한 최대 주주였다.[51]

3. 2. 황실 외척과의 대결

1930년대 말 경상합동은행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정재학 가문은 민영휘 가문과 대립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경영권을 차지하려 할 때, 민영휘 가문이 정재학 가문을 돕기로 했으나 갑자기 오구라에게 지분을 넘겨 정재학 가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55]

최대 주주 자리를 잃은 정재학은 1940년 4월 2일 82세로 세상을 떠났다.[56] 그러나 정재학의 손자 정운용은 1940년 4월 27일 이사회에서 대표이사 겸 행장에 선임되었다. 1941년 경상합동은행이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된 후, 정운용은 한성은행 상무이사로 발탁되어 해방 후 한국인 최초의 은행장이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반면 민씨 가문은 1957년 조선맥주 경영 정상화를 위해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매각하면서 주요 주주 자리에서 물러났다.[58][59][60] 1995년 조흥은행은 은행장 순서를 조정하여 1897년 한성은행장 김종한을 1대 조흥은행장으로 결정했다. 이로써 민영휘 가문은 주요 주주였음에도 조흥은행장을 배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정재학의 3남 정종원은 제5대 조흥은행장, 손자 정운용은 제2대 조흥은행장을 역임했다.[61]

4. 최장수 은행장

정재학은 1913년 55세에 대구은행 행장에 취임하여 1940년 타계할 때까지 총 27년간 은행장 자리를 지켰다. 1930년까지 15년간 대구은행장을 역임한 뒤, 1930년부터 1940년까지는 경상합동은행 최고경영자 자리를 유지하였다.

국내 언론계에서는 해방 이후 역사에만 주목하여 현재 최장수 은행장을 하영구 씨티은행장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금융사학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민족자본은행 은행장까지 포함시킬 경우 순서가 달라진다. 신한은행으로 합병된 조흥은행은 1997년 발행된 '조흥은행 100년사'에서 일제강점기 민족자본은행의 계보를 상세하게 다루었다. 신세계, 두산, LG 등도 일제강점기 활동을 포함하여 100년 역사를 내세우고 있다.

5. 3대 연속 은행장 배출

일제강점기 정재학 행장의 27년 은행경영 노하우는 해방 후 아들과 손자에게 이어졌다. 일제가 강요한 민족자본은행 간 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계은행 자본의 총집결지였던 조흥은행에서 정재학 행장의 아들과 손자가 행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6] 그의 3남 정종원 (5대 행장)과 장손 정운용(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 2대)이 그들이다.[63][64][65] 정재학 행장이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투입한 민족자본은 정씨 가문 지분으로 상속되면서 조흥은행 지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6]

부친, 아들, 손자 3대에 걸쳐 은행장을 배출한 사례는 한국 근대 금융사에서 유일하다.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근대적 은행업은 구한말인 1897년부터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에도 은행업은 유지되었고, 비록 일제 금융당국에 의해 통폐합되어 조흥은행으로 통합되었지만, 민족자본은행들의 한국인 지분은 조흥은행 지분구성에서 절반을 웃돌았다. 해방 이후 조흥은행을 제외한 주요 시중은행들은 대부분 일본인 자본이 절대 우위였으며, 이 지분들은 미군정청에 귀속된 뒤 이승만 정권 당시 재계에 불하됐다. 조흥은행 100년사에 따르면 조흥은행만이 당시 시중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인 지분이 50% 이상이었다. 해방 직후 조흥은행의 총 주식수는 18만 5000주였으며, 이 가운데 경상합동은행은 4만 5000주, 한성은행(경상합동은행 합병 전 기준)은 6만 주, 동일은행은 8만 주 등으로 구성됐다. 해방 이후 민족자본은행의 대표격으로 부상한 조흥은행의 지분 가운데 정재학 가문이 설립한 경상합동은행의 지분율은 24%에 달했다.

6. 사회공헌

정재학은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이었다. 1922년 경북 고아구제회를 설립, 운영자금을 부담했다. 고아 수가 260명으로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정재학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거액의 재산보다 '어머니 없는 손자'들을 가진 것이 기쁘지 짝이 없는 일"이라고 주변에 널리 알렸다. 그러면서 고아들 전원에게 자신의 정(鄭)씨 성을 붙여줬다.[67]

7. 친일 논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도 조선총독부 소속 개령군수로 계속 그 자리를 지켰으며, 1911년 도지사 자문 직책인 경북 도참사를 지냈다. 1910년 한일 병합 직후 은사금 1000JPY을 하사받고 정8위에 서위되어 일제로부터 공을 인정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독립 요구는 불온사상이며 만세시위는 폭도들의 소요 사태라는 일제의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폭동 진압을 목적으로 한 대구자제단을 창립하는 데 참여했다. 박중양이 단장을 맡은 이 단체는 민간의 수상한 활동을 정탐하여 경찰에 알리는 역할을 맡았고, 정재학은 발기인 및 평의원으로 참가하였으며 개인 재산으로 경비도 지원했다.

정재학은 이 같은 공을 인정받아 그해 일종의 민심 유화책으로 신설된 대구부 부협의회원에 임명되었고, 1921년에는 산업 분야에 대한 자문을 목적으로 설립된 총독부 산업조사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었다. 1924년에는 정7위에 서위되고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2002년2008년 각각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8. 주요 경력

연도경력
1897년탁지부 참서관
1895년경상북도 순흥군
1908년경상북도 개령군
1911년경북도지사 자문역 경북도참사, 경상농공은행 감사역
1912년선남은행 취체역(이사)
1913년대구은행 초대 두취(은행장) 취임
1915년조선식산은행 상담역
1924년중추원 참의
1928년경상합동은행 두취 취임 및 대표취체역 역임


9. 일제강점기 민족은행

행명존속기간비고
대구은행1913~1928
구포은행1912~19151915년 경남은행으로 행명 변경
한성은행1887~1943
주일은행1918
해동은행1920~1938
한일은행1906~1931
호서은행1913~1931
동래은행1918~1933
호남은행1920~1942


참조

[1] 서적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2] 뉴스 재계산맥 대구은행 1~19편 매일경제 1982-12-08
[3] 서적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4] 서적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0
[5] 뉴스 일제하 금융인 경향신문 1981-06-15
[6] 서적 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7] 서적 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8] 서적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0
[9] 뉴스 경향신문 1998-04-10
[10] 뉴스 조흥은 '최초 은행 1호 상장사' 숱한 기록 http://economy.hanko[...] 서울경제 2006-03-01
[11] 뉴스 상장사 12개로 증권시장 첫발 한겨레 1992-02-28
[12] 웹인용 인명사전 고승제(高承濟) https://web.archive.[...] 2018-11-01
[13] 서적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14] 뉴스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10 매일경제 1982-12-08
[15] 뉴스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11 매일경제 1982-12-09
[16] 서적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17] 뉴스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2 매일경제 1982-12-10
[18] 뉴스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4 매일경제 1982-12-14
[19] 뉴스 동아일보 1995-11-09
[20] 뉴스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4 매일경제 1982-12-14
[21] 서적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22] 서적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23] 서적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24] 서적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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