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정현조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정인지의 아들이자 세조의 부마이다. 1440년에 태어나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결혼하여 하성위(河城尉)에 봉해졌으며, 이후 하성군, 하성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온양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고,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는 등 세조를 보좌했다. 남이의 옥사에 공헌하여 공신으로 책록되었으나, 만년에 첩을 들이고 불교를 숭상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연산군 때 유배되어 사망했으나, 중종 반정 이후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편정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40년 출생 - 히노 도미코
히노 도미코는 무로마치 시대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정실로, 막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오닌의 난 권력 다툼 개입, 쇼군 후계자 옹립 역할 수행, 막부 좌지우지, 민중 반발 야기 등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며, 후지와라 도미코로 불렸다는 주장도 있고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 1440년 출생 - 카비르
카비르는 15세기경 인도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성자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위선을 비판하며 내면의 성찰을 강조했고, 그의 사상은 카비르 판트 종교 공동체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 조선의 부마 - 윤사로
윤사로는 세조의 계유정난 공신으로 의정부 좌찬성 등 요직을 역임하며 세조 정권에 기여하고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는 등 권력층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조선왕조실록에 영민함과 청렴함이 기록됨과 동시에 재산 축적에 대한 비판도 함께 제시된 조선 전기의 인물이다. - 조선의 부마 - 심종
심종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태조 이성계의 사위가 되어 청원군에 봉해지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회안군 이방간과 내통한 죄로 폐서인되어 사망했다. - 1504년 사망 - 윤필상
윤필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조와 성종 때 활약하며 이시애의 난 평정에 기여하고 좌의정을 거쳐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사림을 숙청하고 갑자사화 때 사사된 후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었다. - 1504년 사망 - 효숙황후
효숙황후는 명나라 영종의 후궁이자 성화제의 생모로, 후궁 시녀 출신으로 빈이 되었고 아들 성화제 즉위 후 황태후, 손자 홍치제 즉위 후 태황태후로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명나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권력 남용 논란 등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정현조 | |
---|---|
기본 정보 | |
![]() | |
본관 | 전주 이(全州 李) |
출생 | 1440년 |
사망 | 1504년 |
부모 | 아버지: 덕종(德宗)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
관직 | |
관직 | 우참찬(右參贊)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남양 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 |
자녀 | 장남: 이계윤(李繼胤) 차남: 이계창(李繼昌) 장녀: 이정환(李貞環)에게 출가 차녀: 박중선(朴仲善)에게 출가 삼녀: 김전(金詮)에게 출가 |
2. 생애
2. 1. 생애 초반
정현조는 1440년(세종 22) 영의정부사 하동부원군 정인지와 경주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 정상조, 정경조, 정숭조는 그의 동생들이다. 아버지 정인지는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세조 반정에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다.[2] 정현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가문의 음덕으로 관직에 올라 돈녕부주부(敦寧府注簿)에 보임되었다.[2]
2. 2. 세조의 부마
1455년(단종 3) 돈녕부주부(敦寧府注簿)가 되고, 그해 7월 장인 세조 즉위 후 부인이 의숙공주로 책봉되면서 7월 21일 그도 하성위(河城尉)에 봉하여졌다. 1456년 다시 하성위에 봉해지고 1457년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다시 하성군(河城君)으로 개봉되었으며 1461년 교서관 제조(校書館提調)에 임명되었다. 그해 도적이 가택에 침입, 도적으로부터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1465년(세조 11) 6월 28일 중앙에서 군역에 쓸 노비를 전라도 광주에서 불러와 백악산(白岳山)에서 훈련을 시켰는데, 이 노비의 옷이 몸을 가리지못할 정도로 걸인이라 세조가 옷과 의복을 하사했다. 의금부에서 그를 파직하자 하여 분노한 세조가 그를 파직시켰다가 그해 7월 4일 복직했다. 1466년 1월 의빈부 의빈(儀賓府儀賓)이 되었다. 그해 잡류장(雜類將)을 거쳐 다시 하성위(河城尉)가 되고, 1467년(세조 13) 10월 하성군(河城君)으로 개봉되었다. 세조는 잠저 시절부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점지해 두다가 1455년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정현조는 이후 연영과(筵英科)에 제3위로 등제하였다.
2. 3. 관료 생활
1468년(세조 13년)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조선에서 부마로서 과거에 응시한 것도 처음이고 과거에 응시했다가 급제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가 문과에 응시하여 초시에 합격한 것이 실록에도 등재되었다. 그는 2등이었지만 특별히 탐화랑(探花郞)의 영예가 수여되었다. 글씨를 잘 썼던 그는 세조가 법령을 정비하여 경국대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1468년(예종 즉위년) 10월 남이의 옥사에 공헌하여 추충보사정난익대공신(推忠保社定難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고 수록대부 의빈부의빈(綏祿大夫 儀賓府儀賓) 하성군에 봉하여졌으며, 1469년 3월 잠시 영의정을 지내기도 했다. 예종의 서거 직후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의 한사람으로 예종의 국장을 주관하였다.
예종 사후 왕위계승권자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을 때 그는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 혈을 지지하였다. 1471년(성종 2) 3월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77년 부인인 의숙공주가 자녀 없이 일찍 죽자 양반인 충찬위 이징(李徵)의 딸을 재취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의빈은 반가의 여자와의 재혼이 인정되지 않았기에 이씨 부인은 첩으로 여겨졌다. 성종은 정현조를 벌주지 않되 그 자손은 서얼로 논하도록 했다. 중종 대에 와서 이씨가 자식들의 벼슬길을 열어주기를 청했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 4. 생애 후반
1479년 국장도감의 당상으로 국장에 참여하였다.[6] 1502년 부처에게 공양하고 재를 올린다는 이유로 대간과 헌부로부터 여러번 공격을 받았다. 전명(傳命)에 능하여 세조의 《경국대전》 찬정(撰定)에 공헌한 바 있으나, 만년에는 작첩(作妾)과 불교를 너무 숭상한 것 때문에 대간으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6]성종시 참결대책녹훈일등에 책록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8년 갑자)에 안악에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65세의 나이로 죽었다.[6] 1506년 중종 반정으로 중종이 집권하면서 복관 예장했으며, 시호는 편정(褊玎)이다.[6]
처음에 충주의 선영 곁에 예장하였고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려[6] 불천지위가 되었으며, 1542년(중종 37) 10월에 중종의 명으로 경기도 양주군 개좌동(价佐洞) 동남향 언덕에 이장하였다. 뒤에 다시 개장하여 고양 연희면 가좌동 해좌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다시 경기도 의왕시 초평 이교산으로 이장하였다.[6]
계실 정경부인 우계 이씨는 전직(典直) 증이참(贈吏參) 이징의 딸로 의빈은 본래 재혼이 인정되지 않으나 중종의 특명으로 윤허되었으며 이씨 부인의 묘는 광주군 언주면 신원이며 그 후손들은 경기도 의왕시와 김포지방에 세거하고 있다.
2. 5. 사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가좌동 정토(淨土) 해좌의 의숙공주 묘소 아래에 처음 매장했다가 후에 의왕시 초평동 이교산으로 이장하면서 의숙공주와 합장되었다. 의왕 초평동에는 셋째 아들 승장의 손자 계안(繼安)과 계안의 후손들이 묻혀있는 곳이었다. 현재 묘소는 경기도 의왕시 초평동 이교산 64-4 중턱에 있다. 묘비문은 1543년(중종 38) 성균관사성 장옥(張玉)이 찬하고 썼다.그의 동생 정상조의 아들이 정세호로, 정세호의 딸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선조의 생모였다. 중종의 서자 덕흥군과 결혼하여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하성군이 후사없이 사망한 명종의 뒤를 이으면서 부대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임인년 신도비(神道碑)를 수립하고, 사우는 김포 검단면 대곡리에 있었으나 1997년(정축) 의왕 초평동에 재실을 건립하고 1999년(기묘) 이전했다.
3. 가계
정현조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혼인하였으나 소생은 없었고, 이징의 딸 우계 이씨에게서 9남 1녀를 두었다.
- 부인: 의숙공주(1441년 ~ 1477년 음력 12월 3일), 자녀 없음
- 부인: 우계 이씨(? ~ ?년 1월 2일), 이징의 딸
- * 아들 : 정승수(鄭承秀, 부호군), 묘는 광주군 신원
- ** 며느리 : 충주 박씨
손자 : 정언백(鄭彦伯)
- * 아들 : 정승영(鄭承英, 장사랑), 묘는 양주 이답면
- ** 손자 : 정광(鄭廣)
- * 아들 : 정승장(鄭承장, 사헌부감찰, 1494년 ~ 1549년) 묘는 군포 부곡동 탄현 경좌
- ** 며느리 : 전주 이씨, 묘는 공묘하
- ** 며느리 : 고령 신씨, 묘는 쌍분
손자 : 정류(鄭瑠)
- * 딸 : 왕족 종성령 이구(李球)에게 출가
- * 아들 : 정승화(鄭承華)
- ** 손자 : 정충(鄭忠)
- ** 손자 : 정신(鄭臣)
- * 아들 : 정승란(鄭承蘭)
- ** 손자 : 정경(鄭瓊)
- ** 손자 : 정영(鄭暎)
- ** 손자 : 정림(鄭琳)
- * 아들 : 정승무(鄭承武)
- ** 손자 : 정적(鄭籍)
- ** 손자 : 정간(鄭簡)
- ** 손자 : 정전(鄭箋)
- * 아들 : 정승범(鄭承範)
- * 아들 : 정승온(鄭承蘊, 사역원정)
- * 아들 : 정승동(鄭承董, 예빈시첨정)
- ** 손자 : 정요(鄭堯)
- ** 손자 : 정순(鄭舜)
- ** 손자 : 정우(鄭禹)
- ** 손자 : 정직(鄭稷)
- ** 손자 : 정기(鄭夔)
4. 평가와 비판
정현조는 만년에 첩을 들인 것과 불교를 너무 숭상한 것 때문에 대간으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받았다.
5. 기타
참조
[1]
문서
부마의 과거 응시 허용 및 최초 과거 급제 사례
[2]
웹인용
하성부원군
http://www.hdjeong.c[...]
2011-12-19
[3]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성종 13년 5월 2일 2번째 기사
[4]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성종 13년 5월 24일 4번째 기사
[5]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중종 5년 3월 21일 3번째 기사
[6]
웹인용
하성부원군
http://www.hdjeong.c[...]
2011-12-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