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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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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8차 십자군은 1270년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이끌었던 군사 원정으로, 튀니스를 목표로 시작되었으나 루이 9세의 사망으로 실패했다. 십자군은 1260년대 맘루크 왕조의 세력 확장과 몽골의 레반트 침입으로 인한 성지 상황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질병으로 사망했고, 십자군은 튀니스 조약을 통해 종결되었다. 이 원정에는 프랑스, 나바라, 아라곤 등 유럽 여러 국가가 참여했으며, 튀니스에서 몽골, 맘루크, 유럽 세력 간의 복잡한 외교 관계가 나타났다. 8차 십자군의 실패는 이후 십자군 계획에 영향을 미쳤고, 성지 회복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결국 아크레 함락으로 성지에서의 기독교 세력은 쇠퇴하게 되었다.

2. 십자군 이전의 성지 상황

제7차 십자군프랑스루이 9세가 맘루크 왕조에 포로로 잡히는 등 실패로 끝났지만, 루이 9세는 십자군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1254년부터 1266년까지 성지로 돌아갈 목표를 가지고 울트레메르(Outremer)의 정착지에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계속 보냈다.

파리스쿠르 전투(1250년)에서 포로로 잡힌 루이 9세

2. 1. 예루살렘 왕국

제7차 십자군은 1254년 4월 24일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성지에서 출발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다. 루이 9세는 제프리 드 세르지네를 자신의 대표로 남겨두었는데, 제프리 드 세르지네는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Seneschal)이라는 공식 직책을 맡았다.[1] 왕국의 집정관(Bailli)은 장 드 이벨랭이었으며, 1254년 그의 사촌 장 드 아르수프가 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장 드 아르수프는 키프로스로 돌아가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두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위그 2세의 섭정인 플레상스 드 안티오크를 조언했다. 1254년 5월 콘라트 2세 (예루살렘)가 사망하면서 예루살렘의 명목상 왕관은 그의 두 살 된 아들 콘라딘에게 돌아갔다.[1]

루이 9세는 떠나기 전 다마스쿠스와 휴전을 맺었는데, 이 휴전은 1256년 10월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에미르인 안나시르 유수프가 몽골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프랑크족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술탄인 아이벡 또한 전쟁을 피하고 싶어했고, 1255년 프랑크족과 10년 휴전을 맺었다. 술탄은 팔레스타인 항구를 확보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파는 휴전에서 명시적으로 제외되었다. 확립된 국경은 거의 안전하지 않았다. 1256년 1월 예루살렘의 마멀루크 총독은 3월 프랑크족 약탈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지만 패배하고 사망했다. 아이벡은 그 후 칼리프 알무스타심이 중재한 새로운 다마스쿠스 조약을 체결했다. 두 무슬림 지도자 모두 프랑크족과의 휴전을 갱신했고, 이번에는 팔레스타인과 자파도 포함되었다.

2. 2. 교황 우르바노 4세

낭트의 로베르 라틴 총대주교는 제7차 십자군 당시 루이 9세와 함께 포로 생활을 하다가 1255년에 사망했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은 새 총대주교로 자크 판탈레옹을 임명했다. 그는 베르됭 주교였으며, 이후 알렉산데르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어 우르바노 4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1249년 크리스트부르크 조약 체결을 도왔던 프로이센 십자군 경험이 있었다. 1255년 12월에 총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아크레에는 1260년 여름에야 도착했다. 이로 인해 왕국은 고위 총대주교의 도움 없이 무슬림과 몽골의 지속적인 위협과 내부 분쟁에 직면해야 했다.[2]

2. 3. 성 사바스 전쟁

십자군 국가들은 성 사바스 전쟁에서 여러 이탈리아 상인들과 싸워야 했다.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피사 공화국의 세 이탈리아 도시들은 모든 십자군 국가 항구에 거점을 두고 지중해 무역을 지배했다. 피사와 제노바 사이의 갈등은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었고, 1250년 베네치아인이 제노바 상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크레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루이 9세가 1254년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1256년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 집단 간의 상업적 경쟁은 아크레에 있는 성 사바스 수도원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폭발했다. 피사 상인들의 지원을 받은 제노바인들은 베네치아인 거주지를 공격하고 배를 불태웠지만, 베네치아인들은 그들을 몰아냈다.[1]

그 후 베네치아인들은 티르에서 몽포르의 필리프에 의해 축출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은 아르수프의 존, 자파의 존, 베이루트의 존 2세, 템플 기사단, 튜턴 기사단, 그리고 피사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요한 기사단은 제노바를 지원했다. 1257년 베네치아인들은 수도원을 정복하고 요새를 파괴했지만, 제노바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제노바인 거주지는 봉쇄되었고, 인근에 있던 요한 기사단의 지원을 받았다. 몽포르의 필리프 또한 티르에서 식량을 보냈다. 1257년 8월, 아르수프의 존은 제노바의 이탈리아 동맹국인 안코나 공화국에 아크레에서의 상업권을 부여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했지만, 몽포르의 필리프와 요한 기사단을 제외한 다른 귀족들은 계속해서 베네치아를 지지했다.[2]

2. 4. 키프로스의 플레상스의 아크레 귀환

1258년 2월, 키프로스의 플레상스는 다섯 살 된 아들 위그 2세와 함께 트리폴리로 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형제인 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를 만났고, 보에몽 6세는 그녀를 아크레로 호위했다.[1] 예루살렘 고등법원이 소집되었고, 보에몽은 오랫동안 왕국에 없는 콘라딘 다음으로 위그 2세의 상속권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위그 2세가 플레상스를 섭정으로 하여 왕권을 인정받는 것이 요청되었다. 보에몽은 여동생의 존재가 내전을 진정시키기를 바랐다.[1] 이벨린 가문, 템플 기사단, 튜턴 기사단은 위그 2세와 플레상스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나 요한 기사단은 콘라딘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여 왕족은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1] 베네치아는 플레상스와 그녀의 아들을 지지했다. 제노바, 요한 기사단, 필리프 드 몽포르는 과거 프리드리히 2세의 격렬한 반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콘라딘을 지지했다. 다수결 투표로 플레상스가 섭정으로 인정되었다.[1] 아르수프의 존은 바이유(bailli)직에서 사임했지만 곧바로 재임명되었다. 플레상스와 보에몽은 키프로스로 돌아가서 바이유에게 반군에 대해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지시했다.[1]

2. 5. 새로운 라틴 총대주교의 도착 이전의 문제

낭트의 로베르(Robert of Nantes) 라틴 총대주교는 제7차 십자군에서 루이 9세와 함께 포로 생활을 하다가 1255년에 사망했다. 알렉산데르 4세(Pope Alexander IV) 교황이 임명한 새로운 총대주교는 우르반 4세(Pope Urban IV) 즉, 당시 베르됭 주교(bishop of Verdun)였고 후에 알렉산데르 4세의 후임으로 선출되어 우르반 4세(Urban IV)라는 이름을 사용한 자크 판탈레옹(James Pantaléon)이었다. 그는 1249년 크리스트부르크 조약(Treaty of Christburg) 체결을 도왔던 프러시아 십자군(Prussian Crusade) 경험이 풍부했다. 그는 1255년 12월에 총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아크레에는 1260년 여름에야 도착했다. 그 결과, 왕국은 고위 총대주교의 도움 없이 무슬림과 몽골의 지속적인 위협과 내부 분쟁에 직면했다.[2]

맘루크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 간의 무슬림 간 전쟁과 몽골의 레반트 침략 외에도, 십자군 국가들은 성 사바스 전쟁에 연루된 여러 이탈리아 상인들과 싸워야 했다.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의 세 이탈리아 도시들은 모든 십자군 국가 항구에 거점을 두고 지중해 무역을 지배했다. 이러한 무역은 무슬림 에미르들에게도 이익이 되었고, 양측은 이익의 원천을 방해할까 두려워하여 조약을 체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피사와 제노바 사이의 갈등은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었고, 1250년 베네치아인이 제노바 상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크레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루이 9세가 1254년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1256년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 집단 간의 상업적 경쟁은 아크레에 있는 성 사바스 수도원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폭발했다. 피사 상인들의 지원을 받은 제노바인들은 베네치아인 거주지를 공격하고 배를 불태웠지만, 베네치아인들은 그들을 몰아냈다.

그 후 베네치아인들은 티르에서 몽포르의 필리프(Philip of Montfort)에 의해 축출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은 아르수프의 존(John of Arsuf), 자파의 존(John of Jaffa), 베이루트의 존 2세(John II of Beirut), 템플 기사단, 튜턴 기사단, 그리고 피사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요한 기사단은 제노바를 지원했다. 1257년 베네치아인들은 수도원을 정복하고 요새를 파괴했지만, 제노바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제노바인 거주지는 봉쇄되었고, 인근에 있던 요한 기사단의 지원을 받았다. 몽포르의 필리프 또한 티르에서 식량을 보냈다. 1257년 8월, 아르수프의 존은 제노바의 이탈리아 동맹국인 안코나 공화국에 아크레에서의 상업권을 부여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했지만, 몽포르의 필리프와 요한 기사단을 제외한 다른 귀족들은 계속해서 베네치아를 지지했다.

2. 6. 제프리 드 사르지네의 통치

루이 9세가 성지를 떠나면서 제프리 드 세르지네는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Seneschal)이라는 직책으로 자신의 대표로 남겨졌다. 왕국의 집정관(Bailli)은 장 드 이벨랭이었으며, 1254년 그의 사촌 장 드 아르수프가 이 직위를 이어받았다.[1] 1259년경, 아르수프의 존이 사망하자 플레상스는 제프리 드 사르지네를 집정관(Bailli)으로 임명했다.[1]

제프리 드 사르지네는 왕국에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권한은 트리폴리 백작령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그의 봉신인 헨리 드 제베일이 보에몽 6세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1]

2. 7.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탈환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니케아 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는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회복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 전투에서 아케이아 공국 공작 빌라르두앵의 윌리엄은 그의 모든 귀족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고, 반도 동부를 지배하는 요새들을 할양해야 했다. 1261년 3월, 미카엘 8세는 제노바와 조약을 맺고 현재와 미래의 그의 영토 전역에서 제노바에게 특혜를 부여했다. 1261년 7월 25일, 제노바의 도움으로 그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제4차 십자군으로 시작된 라틴 제국은 해체되었다.

2. 8. 키프로스와 예루살렘의 섭정

키프로스의 플레상스는 키프로스 여왕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이었다. 1258년 2월, 그녀는 다섯 살 된 아들 위그 2세와 함께 트리폴리로 가서 자신의 형제인 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를 만났고, 보에몽 6세는 그녀를 아크레로 호위했다. 예루살렘 고등법원이 소집되었고, 보에몽은 오랫동안 왕국에 없는 콘라딘 다음으로 위그 2세의 상속권 주장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위그 2세가 플레상스를 섭정으로 하여 왕권을 인정받는 것이 요청되었다.[1] 보에몽은 여동생의 존재가 내전을 진정시키기를 바랐다. 이벨린 가문, 템플 기사단, 튜튼 기사단은 위그 2세와 플레상스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나 요한 기사단은 콘라딘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왕족은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플레상스와 그녀의 아들을 지지했다. 제노바, 요한 기사단, 필리프 드 몽포르는 과거 프리드리히 2세의 격렬한 반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콘라딘을 지지했다. 다수결 투표로 플레상스가 섭정으로 인정되었다. 아르수프의 존은 바이유직에서 사임했지만 곧바로 재임명되었다. 그녀와 보에몽은 키프로스로 돌아가서 바이유에게 반군에 대해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지시했다.

1259년 4월, 교황은 베들레헴의 주교였고 후에 라틴 총대주교가 된 토마스 아그니를 동방으로 파견하여 분쟁을 해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거의 같은 시기에 바이유인 아르수프의 존이 사망했고, 플레상스는 아크레에 와서 제프리 드 세르지네를 바이유로 임명했다. 그는 아그니와 함께 휴전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261년 1월, 고등법원과 이탈리아 대표자들 간의 회의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제노바는 티레에, 베네치아와 피사는 아크레에 본부를 유지했다. 전쟁 중인 귀족들과 군사 수도회들도 화해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은 그 합의를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곧 다시 전쟁을 시작하여 시리아 해안을 따라 모든 상업과 해상 운송에 피해를 입혔고, 1270년까지 해전이 계속되었다.

3. 몽골의 침입

1240년대부터 시작된 몽골의 침입은 성지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특히 몽골의 레반트 침입은 이슬람 왕조들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리고, 아이유브 왕조를 격파하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과 마멀루크, 그리고 서방 기독교 세력은 때로는 동맹을 맺고 때로는 적대적인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이 변화했다.[3]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은 바그다드 공방전에서 압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도시를 약탈했다. 훌라구의 아내 도쿠즈 카툰은 도시의 기독교인들을 보호했다. 이후 훌라구는 레반트 침략을 위해 시리아로 진격했고, 아르메니아의 헤툼 1세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를 포함한 기독교 동맹군과 합류했다. 연합군은 1260년 1월 알레포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후, 3월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키트부카의 지휘 아래 다마스쿠스를 함락시켰다. 이로써 아이유브 왕조는 사실상 붕괴되었다.[3]

보에몽 6세는 안티오키아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 에우티미우스를 임명하는 대가로 라타키아 항구를 얻었다. 이는 몽골이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보에몽 6세는 아크레의 반발을 샀고,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에게 파문당했다가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된 후 파문이 취소되었다.

몽골은 프랑크족과 싸울 의도는 없었지만, 시돈의 줄리안이 몽골 사령관을 살해하면서 시돈이 약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베이루트의 존 2세는 템플 기사단을 이끌고 몽골을 공격했으나, 포로로 잡혀 많은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몽골의 다마스쿠스 함락은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를 자극했다. 훌라구가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사절들은 처형당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침략이 있었지만, 훌라구가 형 몽케의 죽음으로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몽골의 정복은 중단되었다. 1260년 9월, 이집트의 맘루크는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을 격파하고 시리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쿠투즈는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되었는데, 바이바르스는 프랑크족과의 동맹에 훨씬 더 적대적이었다.

1265년 2월, 훌라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바카가 일칸의 자리를 계승했다. 아바카는 골든 호드의 위협과 마멀루크와의 동맹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3. 1. 루이 9세와 몽골

루이 9세몽골 지배자들과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했다. 1248년 제7차 십자군 원정 중, 루이는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에 주둔한 몽골군 사령관 엘지기데이의 사절들로부터 제안을 받았다.[3] 엘지기데이는 루이 왕이 이집트에 상륙하는 동안 자신이 바그다드를 공격하여 이집트와 시리아가 연합하는 것을 막겠다고 제안했다. 루이는 앙드레 드 롱주모를 구유크 칸에게 사절로 보냈으나, 구유크 칸은 사절이 도착하기 전에 사망하여 양측 모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구유크의 왕비이자 섭정인 오굴 카이미시는 외교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루이는 빌헬름 르브룩을 몽골 궁정에 또 다른 사절로 파견하여 몽케를 방문하게 했고, 그는 몽골 궁정에서 수년을 보냈다. 1259년 킵차크 칸국의 지배자 베르케는 루이에게 항복을 요구했다.[4] 반대로, 몽골 황제 몽케와 쿠빌라이 칸의 형제인 일칸 훌라구 칸은 프랑스 왕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프랑스에 도착하지 못했다.[5]

아바카(Abaqa)와 도쿠즈 카툰(Doquz Khatun)


1265년 2월 훌라구가 자연사하자, 그의 미망인 도쿠즈 카툰은 그의 계자이자 당시 투르키스탄 총독이었던 아바카 칸의 계승을 확보했다. 훌라구는 죽기 전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와 협상하여 비잔티움 제국 황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 황제의 서출 딸인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가 1265년에 보내졌으나, 훌라구가 마리아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는 대신 아바카와 결혼했다. 아바카의 일칸(Ilkhan)으로의 이행은 더뎠고, 봄에 그의 영토를 침략한 골든 호드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는데, 이는 마멀루크와의 동맹의 일환이었다. 적대 행위는 1267년 베르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개입을 시도했고, 새로운 칸인 멩구 티무르는 아바카의 영토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멩구 티무르는 바이바르스와의 동맹을 유지했고, 바이바르는 이제 간섭에 대한 두려움 없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그의 원정을 재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3. 2. 페르시아에서의 아사신파 멸망

1257년, 몽골 군대가 페르시아에 있었고, 훌라구는 암살자(Assassin)로 알려진 니자리 이스마일파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의 지도자 루크누드딘 쿠르샤(Rukn al-Din Khurshah)는 외교적 책략을 통해 재앙을 피하려 했다. 훌라구는 다마반드(Damavand)와 아바스 아바드(Abbas Abad)를 거쳐 암살자들의 계곡으로 신중하게 진군했다. 몽골 군대가 알라무트 성(Alamut Castle)에 접근하자, 루크누드딘은 항복했다.[4] 하지만 성의 총독은 항복 명령을 거부했고, 며칠 만에 함락되었다. 루크누드딘은 몽케(Möngke)를 만나러 카라코룸(Karakorum)으로 보내졌지만, 몽케는 그를 만나기를 거부했다. 아직 정복되지 않은 두 개의 암살자 요새, 게르쿠(Gerdkuh)와 람사르 성(Lambsar Castle)이 남아 있었고, 루크누드딘은 이들의 항복을 조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가는 도중 처형되었고, 훌라구는 이 종파 전체를 몰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257년 말까지 페르시아 산맥에는 암살자들 중 극소수만이 남았다.[4]

훌라구의 알라무트 공성전

3. 3. 시리아에서의 몽골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은 바그다드 공방전에서 압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도시를 약탈했다. 훌라구의 아내 도쿠즈 카툰은 도시의 기독교인들을 구했다.[3] 훌라구는 레반트 침략을 위해 시리아로 진격했고, 아르메니아의 헤툼 1세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를 포함한 기독교 동맹군과 합류했다. 연합군은 1260년 1월 알레포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후, 3월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키트부카의 지휘 아래 다마스쿠스를 함락시켰다. 이로써 아이유브 왕조의 잔존 세력은 효과적으로 붕괴되었다. 기독교인 키트부카, 헤툼, 보에몽이 함락된 무슬림 도시들을 승리 행진한 기록은 의문스럽다.[3]

보에몽은 안티오크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 에우티미우스를 임명하는 대가로 라타키아 항구 도시를 받았다. 몽골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보에몽은 아크레의 적대감을 샀고,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제임스 판탈레옹에게 파문당했다. 보에몽의 사건이 심리될 때, 판탈레옹은 교황 우르바노 4세로 선출되었고, 몽골에 항복한 보에몽의 설명을 받아들여 파문을 취소했다. 에우티미우스는 나중에 납치되어 아르메니아로 끌려갔고, 라틴 총대주교 오피조 피에스키가 그를 대신했다.

몽골은 프랑크족과 전투를 벌일 의도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돈의 줄리안은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습격을 가해 키트부카의 조카인 몽골 사령관을 살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시돈은 약탈당했다. 베이루트의 존 2세는 템플 기사단을 이끌고 몽골을 공격했고, 존과 템플 기사단장 토마스 베라르가 포로가 되어 많은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몽골의 다마스쿠스 함락은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로 하여금 행동을 취하게 만들었다. 훌라구는 사절을 보내 술탄에게 이집트 항복을 요구했다. 사절들의 머리는 즉시 잘려 카이로의 바브 주웨일라 문에 전시되었다. 이어 팔레스타인 침략이 있었고, 훌라구가 그의 형 몽케의 죽음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시리아에 소규모 수비대만 남겨두었기 때문에 몽골의 필연적인 정복은 중단되었다. 이집트의 맘루크들은 프랑크 영토를 통과할 허가를 받아 1260년 9월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을 패퇴시켰다. 키트부카는 살해되었고 시리아 전체는 맘루크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쿠투즈는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장군 바이바르스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바이바르스는 그의 전임자보다 프랑크족과의 동맹에 훨씬 더 비우호적이었다.

훌라구는 1265년 2월 자연사하였고, 이로 인해 몽골의 입지가 약해졌다. 그의 미망인 도쿠즈 카툰은 그의 계자이자 당시 투르키스탄 총독이었던 아바카 칸의 계승을 확보했다. 훌라구는 죽기 전에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와 협상하여 많은 아내들 중 한 명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황족의 딸을 맞이하려 했다. 황제의 서출 딸인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는 1265년에 유티미우스의 호위를 받으며 보내졌다. 훌라구가 마리아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는 대신 아바카와 결혼했다. 아바카의 일칸으로의 이행은 더뎠고, 봄에 그의 영토를 침략한 골든 호드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는데, 이는 맘루크와의 동맹의 일환이었다. 적대 행위는 1267년 베르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개입을 시도했고, 새로운 칸인 멩구테무르는 아바카의 영토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멩구테무르는 바이바르스와의 동맹을 유지했고, 바이바르스는 이제 간섭에 대한 두려움 없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그의 원정을 재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이바르스는 군인 출신으로 권력을 잡았다. 그는 제7차 십자군에서 서방을 패퇴시킨 이집트군 사령관 중 한 명이었으며, 아인잘루트 전투에서도 선봉에 섰다. 이는 몽골군의 첫 번째 실질적인 패배를 의미하며 역사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바이바르스는 예루살렘 왕국의 완전한 멸망을 이슬람 통치자로서의 그의 입지를 확립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는 전임자들의 온건한 정책을 거부하고, 프랑크족의 수많은 동맹 제안을 거절했다.

3. 4. 훌라구의 죽음과 아바카의 부상



1265년 2월, 훌라구는 자연사했다. 이로 인해 몽골의 입지는 약해졌다.[3] 그의 미망인 도쿠즈 카툰은 그의 계자이자 당시 투르키스탄 총독이었던 아바카의 계승을 확보했다. 훌라구는 죽기 전에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와 협상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황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 황제의 서출 딸인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가 1265년에 에우티미우스의 호위를 받으며 보내졌다. 훌라구가 마리아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는 대신 아바카와 결혼했다. 아바카의 일칸으로의 이행은 더뎠고, 봄에 그의 영토를 침략한 골든 호드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는데, 이는 마멀루크와의 동맹의 일환이었다. 적대 행위는 1267년 베르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개입을 시도했고, 새로운 칸인 멩구 티무르는 아바카의 영토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멩구 티무르는 바이바르스와의 동맹을 유지했고, 바이바르스는 이제 간섭에 대한 두려움 없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그의 원정을 재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8]

3. 5. 교황 클레멘스 4세와 그레고리오 10세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의 뒤를 이어 우르반 4세가 선출되었는데, 그는 프러시아 십자군 경험이 있는 자크 판탈레옹이었다. 왕국은 고위 성직자의 도움 없이 이슬람과 몽골의 위협, 내부 분쟁에 직면했다.[2]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제국은 이탈리아 무역으로 번성했고, 베네치아는 제국의 성공에 관심이 있었다. 제노바는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지원했고, 미카엘 8세는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비잔티움 제국 회복의 기반을 마련했다. 1261년, 제노바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라틴 제국은 해체되었다.

1261년 플레상스가 사망하고, 8살의 키프로스의 휴 2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섭정이 필요했다. 브리엔의 휴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키프로스 고등법원은 키프로스의 휴 3세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예루살렘 고등법원은 키프로스의 이자벨을 섭정으로 인정했지만, 충성 맹세는 거부했다.

이자벨은 1264년에 사망했고, 예루살렘 섭정 자리는 다시 공석이 되었다. 키프로스의 휴 3세가 섭정직을 주장했고, 브리엔의 휴가 반대했지만, 울트라마르의 법률가들은 휴 3세를 지지했다. 귀족들과 고위 관리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받아들였고, 충성 맹세를 제공했다. 휴 3세는 위그 드 레벨과 토마 베라르로부터 인정받았다.

바이바르스는 십자군 왕국들에 대한 전쟁을 계속했다. 1263년, 아르수프 함락에서 도시를 점령하고 요새를 파괴했다. 1265년, 하이파와 카이사레아 함락이 일어났다.

바이바르스는 마리의 재난에서 아르메니아 군대를 패배시켰다. 15세기 ''Le Livre des Merveilles''의 삽화.


1266년, 바이바르스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를 침략하여 마리의 재난에서 승리하고 여러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레오 2세는 킬리키아를 몽골 제국의 속국으로 유지하면서 맘루크에게 조공을 바치는 상황에 놓였다.

4. 바이바르스의 성지 원정

7차 십자군은 프랑스루이 9세가 맘루크 왕조에 포로로 잡히면서 실패로 끝났지만, 루이 9세는 십자군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1254년부터 1266년까지 울트레메르 정착지에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계속했다.

1254년 4월, 루이 9세가 성지를 떠나면서 7차 십자군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제프리 드 세르지네가 루이 9세의 대리인으로 남았고, 장 드 아르수프가 왕국의 집정관(Bailli)을 맡았다. 1254년 5월 콘라트 2세 (예루살렘)가 사망하면서 예루살렘 왕위는 콘라딘에게 돌아갔다.[1] 루이 9세는 다마스쿠스와 휴전을 맺었으나, 안나시르 유수프는 몽골의 위협으로 인해 프랑크족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 이집트 술탄 아이벡도 전쟁을 피하려 1255년 프랑크족과 10년 휴전을 맺었다.

십자군 국가들은 무슬림 간의 전쟁과 몽골의 침략 외에도, 성 사바스 전쟁에 연루된 이탈리아 상인들과도 싸워야 했다. 1250년 아크레에서 베네치아인이 제노바 상인을 살해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1256년 아크레의 성 사바스 수도원 소유권을 둘러싸고 다시 폭발했다. 요한 기사단은 제노바를, 템플 기사단과 튜턴 기사단은 베네치아를 지원했다. 1257년 베네치아인들이 수도원을 점령했지만, 제노바인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1258년, 키프로스의 플레상스와 휴 2세는 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와 함께 아크레로 가 휴 2세의 왕위 계승권을 확인받으려 했다. 이벨린 가문, 템플 기사단, 테우토니 기사단은 인정했지만, 요한 기사단은 콘라딘 없이는 결정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베네치아는 플레상스를, 제노바, 요한 기사단, 필립 드 몽포르는 콘라딘을 지지하여 다수결로 플레상스가 섭정으로 인정되었다.

1258년 6월 24일, 아크레 전투에서 제노바군은 패배하고 티레로 후퇴했다. 1261년, 고등법원과 이탈리아 대표자들 간의 회의에서 제노바는 티레, 베네치아와 피사는 아크레에 본부를 두기로 합의했으나, 곧 다시 전쟁이 시작되어 1270년까지 해전이 계속되었다.

제프리 드 사르지네는 왕국에 질서를 회복하려 했지만, 트리폴리 백작령에는 권위가 미치지 못했다. 1258년, 귀족들이 트리폴리를 포위했고, 보에몽은 베르트랑에게 패배했다. 이후 베르트랑은 살해되어 머리가 보에몽에게 보내졌다.

1258년, 몽골군은 바그다드 공방전에서 압바스 왕조를 패퇴시키고 시리아로 진격,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함락시켰다. 몽골은 프랑크족과 전투를 벌일 의도가 없었지만, 시돈의 줄리안의 습격으로 시돈이 약탈당했다. 몽골의 다마스쿠스 함락은 이집트 술탄 쿠투즈를 자극, 1260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을 패퇴시켰다. 이후 바이바르스가 쿠투즈를 암살하고 술탄이 되었는데, 그는 프랑크족과의 동맹에 훨씬 더 비우호적이었다.

4. 1. 술탄 즉위

바이바르스는 1260년 10월 술탄이 되었고,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신속하게 반대 세력을 진압했다.[8] 1258년 몽골에 의한 바그다드 함락 이후, 압바스 칼리파국은 사실상 막을 내렸고, 이슬람 세계는 칼리프가 없는 상태였다.[8] 카이로를 근거지로 한 새로운 이슬람 지도자의 첫 시도는 알-무스탄시르 2세였으나, 그는 1261년 바그다드 탈환을 시도하다 몽골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알-하킴 1세로 대체되었고, 이 왕조는 1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바이바르스는 이집트 해안 도시들을 요새화하고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와 시칠리아 왕 만프레드와 동맹을 맺어 유럽인들의 의도를 더 잘 파악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는 또한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와 그의 봉신 킬리즈 아르슬란 4세와도 동맹을 맺었다.

4. 2.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원정

사파드 공방전에서 승리한 바이바르스킬리키아 아르메니아를 함락시켜 헤툼 1세의 사위인 보에몽 6세가 다스리는 안티오크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을 고립시켰다. 그 후 몇 년 동안 바이바르스는 남은 십자군 수비대를 계속해서 몰살시켰다.[9]

1268년, 바이바르스는 장 드 이벨랭의 아들인 기 드 이벨랭이 소유한 야파를 포위했다. 야파는 12시간의 전투 끝에 1268년 3월 7일에 함락되었다. 야파 시민 대부분이 살해되었지만, 바이바르스는 수비대는 무사히 돌려보냈다. 그는 거기서 공국 중심지로 진군하여 안티오크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안티오크 기사단과 수비대는 안티오크의 켄스태블인 사이먼 맨셀의 지휘를 받았다. 도시는 1268년 5월 18일에 함락되었다. 바이바르스는 다시 한번 주민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어기고 항복 후 도시를 파괴하고 인구 대부분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안티오크 공국의 멸망이 초래되었다. 안티오크에서 일어난 남녀노소를 불문한 학살은 "전 십자군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학살"이었다.[8] 사제들은 교회 안에서 목이 잘렸고, 여성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1만 7천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했고,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4. 3. 사파드 공방전

템플 기사단이 지키고 있던 사파드는 요르단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여 그 지역의 무슬림 군대 이동을 조기에 경고할 수 있었다. 이 요새는 무슬림 지역 세력들에게 지속적인 골칫거리였고, 1266년 6월 바이바르스는 사파드 공방전을 시작하여 7월에 함락시켰다.[9] 바이바르스는 템플 기사단이 요새를 항복하면 아크레까지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약속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템플 기사단은 항복에 동의했다. 항복하자 바이바르스는 약속을 깨고 템플 기사단 주둔군 전체를 학살했다. 사파드를 점령한 후 바이바르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를 파괴하지 않고 점령하여 요새화했다.[9] 동시에 오도가 십자군 50명 기사로 성지를 방어하다 전사했다. 1266년 10월 초 클레멘스 4세는 새로운 십자군 선포를 명령하면서 사파드 함락을 언급했다. 그는 또한 1267년 3월까지 석궁병 연대를 성지로 파병하도록 조치했다. 템플 기사단의 사파드 방어는 영웅적인 것으로 여겨져 14세기 초 키프로스에서 열린 템플 기사단 재판에서 언급될 정도였다.

4. 4. 안티오크 공방전

1268년 안티오크 포위 공격은 술탄 바이바르스가 야파를 점령한 후, 안티오크 공국의 중심지로 진군하여 시작되었다.[9] 안티오크의 기사단과 수비대는 안티오크의 켄스태블(Constable of Antioch)인 사이먼 맨셀의 지휘를 받았다. 도시는 1268년 5월 18일에 함락되었다.[9]

바이바르스는 주민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약속을 어기고 항복 후 도시를 파괴하고 인구 대부분을 살해하거나 노예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안티오크 공국은 멸망했다.[9] 안티오크에서 일어난 남녀노소를 불문한 학살은 "전 십자군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학살"이었다.[9] 사제들은 교회 안에서 목이 잘렸고, 여성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1만 7천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했고,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갔다.[9]

5. 8차 십자군

8차 십자군을 이끄는 프랑스의 루이 9세


제7차 십자군의 실패와 마믈루크 왕조에 포로로 잡히는 사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루이 9세는 십자군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1254년부터 1266년까지 성지의 정착지에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계속 보냈다.[9]

맘루크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 간의 전쟁, 몽골레반트 침략 외에도, 십자군 국가들은 성 사바스 전쟁에 연루된 이탈리아 상인들과도 싸워야 했다.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는 지중해 무역을 지배했고, 이는 무슬림 에미르들에게도 이익이었다. 1256년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 간의 경쟁은 아크레에 있는 성 사바스 수도원 소유권을 둘러싸고 폭발했다. 피사 상인들의 지원을 받은 제노바인들은 베네치아인 거주지를 공격했지만, 베네치아인들은 그들을 몰아냈다.

그 후 베네치아인들은 티르에서 몽포르의 필리프에 의해 축출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은 아르수프의 존, 자파의 존, 베이루트의 존 2세, 템플 기사단, 튜턴 기사단, 피사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요한 기사단은 제노바를 지원했다. 1257년 베네치아인들은 수도원을 정복했지만, 제노바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1257년 8월, 아르수프의 존은 안코나 공화국에 아크레에서의 상업권을 부여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했지만, 몽포르의 필리프와 요한 기사단을 제외한 다른 귀족들은 계속해서 베네치아를 지지했다.

1258년 2월, 키프로스의 플레상스와 휴 2세는 트리폴리로 가서 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를 만났고, 그는 그녀를 아크레로 호위했다. 예루살렘 고등법원이 소집되었고, 보에몽은 휴 2세의 상속권 주장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요한 기사단은 콘라딘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다수결 투표로 플레상스가 섭정으로 인정되었다.

1258년 6월 24일, 아크레 전투에서 제노바군은 혼란 속에 티레로 후퇴했다. 결과적으로 제노바는 아크레를 버리고 티레에 본부를 설치했다. 1261년, 제노바는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지원하여 베네치아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266년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가 함락되면서 헤툼의 사위인 보에몽 6세가 지휘하는 안티오크와 트리폴리는 고립되었고, 바이바르스는 그 후 몇 년 동안 남은 십자군 수비대를 계속해서 몰살했다. 1268년 바이바르스는 안티오크 포위 공격을 시작하여 5월 18일에 함락시켰다. 바이바르스는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만들어 안티오크 공국의 멸망을 초래했다. 안티오크에서 일어난 학살은 "전 십자군 시대를 통틀어 가장 큰 학살"이었다.[9]

안티오크에서 승리한 후, 바이바르스는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잠시 멈췄다. 몽골인들은 불안했고 루이 9세가 이끄는 새로운 십자군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키프로스휴 3세는 휴전을 요청했고 바이바르스는 적대 행위 중단을 제안하는 사절단을 아크레로 보냈다. 보에몽 6세는 휴전에 포함되기를 요청했지만, 단순한 백작으로 불린 것에 기분이 상했다. 그럼에도 그는 제안된 것을 받아들였다.

5. 1. 다시 십자가를 든 루이 9세

루이 9세는 1266년 9월, 국제적인 노력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다시 십자군에 참여하여 지휘하기로 결정했다.[10] 그는 항상 십자군 원정을 다시 시작하기를 바랐지만, 프랑스의 필요는 절박했다. 이듬해, 지쳐 병든 루이 9세는 두 번째 십자군 원정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고, 필요한 준비를 시작하여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수태고지 축일과 생트샤펠에 보관된 성물 앞에서, 루이 9세와 프랑스의 대부분의 귀족들은 다시 한번 십자가를 잡았다. 날짜는 1267년 3월 25일이었다.

두 번째 의식은 1267년 6월 5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 특사 앞에서 거행되었다. 십자군에 참여한 루이 9세의 사위 나바라의 테오발트 2세도 참석했다. 이 반응은 1248년 제7차 십자군을 호소했을 때보다 열기가 덜했지만, 그 인기 부족은 개인적으로 이 원정에 반대했던 그의 편년사가인 장 드 주앙빌이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앙빌이 루이 9세의 첫 번째 십자군을 광범위하게 기록한 것과 달리, 그의 두 번째 십자군의 주요 편년사는 생드니프리마였다. 티레의 템플 기사단과 기욤 드 낭지, 매슈 패리스, 파두아의 피덴티우스, 알 마크리지의 저서들도 이 원정의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

생드니의 프리마(Primat of Saint-Denis)가 프랑스 대왕 연대기(Grandes Chroniques de France)에서 로마 데 로아(Roman des rois)를 집필하는 모습,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MS fr. 2813, 265v 쪽 (약 1375년~1380년)

5. 2. 1267년 십자군

1254년 프랑스루이 9세가 성지에서 출발하면서 제7차 십자군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루이 9세는 제프리 드 세르지네를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으로 남겨두었다.[1] 장 드 이벨랭의 뒤를 이어 장 드 아르수프가 왕국의 집정관(Bailli)이 되었다. 장 드 아르수프는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위그 2세의 섭정인 플레상스 드 안티오크를 조언했다. 콘라트 2세 (예루살렘)의 사망으로 예루살렘 왕위는 그의 아들 콘라딘에게 돌아갔다.[1]

맘루크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 간의 전쟁, 몽골레반트 침략 외에도, 십자군 국가들은 성 사바스 전쟁에 연루된 이탈리아 상인들과 싸워야 했다.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는 지중해 무역을 지배했고, 이는 무슬림 에미르들에게도 이익이 되었다. 피사와 제노바 간의 갈등은 1250년 베네치아인이 제노바 상인을 살해하면서 아크레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1256년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 간의 경쟁은 성 사바스 수도원 소유권을 둘러싸고 폭발했다. 피사 상인들의 지원을 받은 제노바인들은 베네치아인 거주지를 공격했지만, 베네치아인들은 그들을 몰아냈다.

그 후 베네치아인들은 티르에서 몽포르의 필리프에 의해 축출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은 아르수프의 존, 자파의 존, 베이루트의 존 2세, 템플 기사단, 튜턴 기사단, 피사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요한 기사단은 제노바를 지원했다. 1257년 베네치아인들은 수도원을 정복하고 요새를 파괴했지만, 제노바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몽포르의 필리프는 티르에서 식량을 보냈다. 1257년 8월, 아르수프의 존은 안코나 공화국에 아크레에서의 상업권을 부여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했지만, 몽포르의 필리프와 요한 기사단을 제외한 다른 귀족들은 계속해서 베네치아를 지지했다.

1258년 2월, 키프로스의 플레상스와 휴 2세는 트리폴리로 가서 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를 만났고, 그는 그녀를 아크레로 호위했다. 예루살렘 고등법원이 소집되었고, 보에몽은 휴 2세의 상속권 주장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벨린 가문, 템플 기사단, 테우토니 기사단은 휴 2세와 플레상스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나 요한 기사단은 콘라딘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베네치아는 플레상스와 그녀의 아들을 지지했다. 제노바, 요한 기사단, 필립 드 몽포르는 콘라딘을 지지했다. 다수결 투표로 플레상스가 섭정으로 인정되었다. 아르수프의 존은 바이유직에서 사임했지만 곧바로 재임명되었다.

새로운 라틴 총대주교 야코부스 판탈레온이 아크레에 도착하기 전에 문제가 극에 달했다. 그는 알렉산데르 4세에게 조치를 취해 줄 것을 호소했다. 교황은 세 공화국의 대표들을 비테르보에 있는 자신의 법정으로 소환하여 즉각적인 휴전을 명령했다. 1258년 6월 24일, 아크레 전투에서 제노바군은 혼란 속에 티레로 후퇴했다. 결과적으로 제노바는 아크레를 버리고 티레에 본부를 설치했다.

1259년 4월, 교황은 토마스 아그니를 동방으로 파견하여 분쟁을 해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거의 같은 시기에 아르수프의 존이 사망했고, 플레상스는 제프리 드 사르지네를 바이유로 임명했다. 1261년 1월, 고등법원과 이탈리아 대표자들 간의 회의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제노바는 티레에, 베네치아와 피사는 아크레에 본부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은 그 합의를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곧 다시 전쟁을 시작하여 1270년까지 해전이 계속되었다.

제프리 드 사르지네는 왕국에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트리폴리 백작령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곳에서 제프리의 봉신인 헨리 드 제베일은 보에몽 6세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1258년, 귀족들은 트리폴리로 행군하여 보에몽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를 포위했다. 보에몽은 베르트랑에게 패하여 부상을 입었고, 템플 기사단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다.

성 사바스 전쟁의 결론이 불확실했던 것은 시리아를 넘어서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제국은 이탈리아 무역의 도움으로 번영했다.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에게 해 제도 모두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제국의 성공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이에 맞서 제노바는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 (니케아 제국 황제)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261년 3월, 미카엘은 제노바와 조약을 맺고 현재와 미래의 그의 영토 전역에서 제노바에게 특혜를 부여했다. 7월 25일, 제노바의 도움으로 그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제4차 십자군에서 시작된 라틴 제국은 해체되었다.

1265년 에브샴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가 시몽 드 몽포르 6세와 그의 반역적인 귀족들을 패배시키면서 제2차 남작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앙주 백작 샤를 1세가 승리하면서 시칠리아 왕국카페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어, 마침내 프랑스의 전투 병력이 해방되었다. 이는 클레멘스 4세가 1263년 우르바노 4세 시대에 시작된 십자군 원정 계획을 다시 활성화시켜 1266년 1월 새로운 성지 원정을 선포하도록 고무시켰다. '''크로니카 미노르 아우크토레 미노리타 에르포르디엔시'''에 따르면:

> 주후 1266년, 클레멘트 4세 교황은 독일 왕국 전역에 서한을 보내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게 바빌론 술탄이자 이집트 파라오인 자와 해외 사라센인들에 맞서 십자군을 충실하고 긴급하게 설교하여 그곳 기독교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성지를 지원하도록 명령했다.[10]

1266년 9월까지 루이 9세는 다시 십자군에 참여하여 지휘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지쳐 병든 루이 9세는 두 번째 십자군 원정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고, 필요한 준비를 시작하여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수태고지 축일과 생트샤펠에 보관된 성물 앞에서, 루이 9세와 프랑스의 대부분의 귀족들은 다시 한번 십자가를 잡았다. 날짜는 1267년 3월 25일이었다.

두 번째 의식은 1267년 6월 5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 특사 앞에서 거행되었다. 십자군에 참여한 루이 9세의 사위 나바라의 테오발트 2세도 참석했다. 이 반응은 1248년 제7차 십자군을 호소했을 때보다 열기가 덜했다. 주앙빌이 루이 9세의 첫 번째 십자군을 광범위하게 기록한 것과 달리, 그의 두 번째 십자군의 주요 편년사는 생드니의 프리마였다. '''티레의 템플 기사단'''과 기욤 드 낭지, 매슈 패리스, 파두아의 피덴티우스, 알 마크리지의 저서들도 이 원정의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

1267년 십자군은 상라인 지역에서 성지로 향한 군사 원정이었다. 클레멘스 4세가 교황령을 발표한 후, 독일 주교들과 도미니크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십자군 징집을 설교하도록 명령했다. 프랑스와 접경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반응이 저조했다. 그러나 상라인 지방에서는 십자군 징집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1267년 초까지 수백 명의 십자군이 십자가를 받았다. 십자군들은 1267년 사순절에 바젤을 출발하여 바젤 주교의 두 명의 관료 기사의 지휘 아래 아크레로 바다를 통해 이동했다. 십자군 중 일부는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를 방문할 수 있었지만, 성지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대부분은 1270년까지 독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11]

1267년 십자군의 기사

5. 3. 1269년 아라곤 유아들의 십자군

1269년 아라곤의 십자군은 아라곤의 하이메 1세가 주도한 군사 원정이었다. 일칸 아바카는 1267년 초 하이메 1세에게 서신을 보내 맘루크와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고, 하이메 1세는 이에 응하여 십자군을 준비했다.

클레멘트 4세카스티야알폰소 10세는 하이메 1세가 성지로 가는 것을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클레멘트 4세는 1268년 11월에 사망했고, 그레고리우스 10세가 즉위하기까지는 거의 3년이 걸렸으며, 카스티야 왕은 아라곤에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무르시아 정복을 마친 하이메 1세는 십자군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1269년 9월 1일, 그는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바르셀로나에서 동쪽으로 항해했으나, 곧 폭풍우를 만나 왕과 함대 대부분은 귀환했다.

왕의 서자 두 명, 페드로 페르난데스와 페르난 산체스가 이끄는 소규모 함대만이 항해를 계속하여 12월 말 아크레에 도착했다. 당시 바이바르스가 휴전을 깨고 대규모 군대로 아크레에 나타난 직후였기 때문에, 아라곤 군은 즉시 적을 공격하려 했지만, 템플 기사단과 요한 기사단에 의해 제지되었다. 결국 아라곤 군은 아무런 성과 없이 아라곤으로 돌아갔다.

5. 4. 앙주의 샤를 1세

A young man who holds a sword above his head stands by an other young man who is kneeling.
콘라딘의 처형, 1268년.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샤를 1세 군대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드 군대를 격파했고, 만프레드는 전투 중 사망했다.[12] 샤를은 만프레드의 지지자들에게 관대했지만, 그들은 이러한 화해 정책이 지속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클레멘스 4세는 샤를의 통치 방식을 오만하고 완고하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샤를은 피렌체에서 기벨린 세력을 축출하는 데 도움을 요청받았지만, 토스카나에 대한 그의 확장주의는 교황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클레멘스는 샤를에게 3년 이내에 토스카나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도록 강요했다. 샤를은 비잔티움 황제 미카엘 8세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는 데 쿠르트네의 발두인 2세를 돕는 대가로 정복지의 3분의 1을 받겠다고 약속했다.[12]

샤를은 토스카나로 돌아와 포지본시 요새를 포위했지만, 1267년 11월 말까지 함락되지 않았다. 만프레드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바이에른으로 도망쳐 15세의 콘라딘을 설득하여 시칠리아에 대한 그의 세습 권리를 주장하도록 시도했다. 콘라딘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만프레드의 지지자인 카스티야의 프레드리히는 이프리키야(현재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 칼리프 무함마드 1세 알무스탄시르의 허락을 받아 북아프리카에서 시칠리아를 침공했다. 1268년 8월 23일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콘라딘이 승리하는 듯했으나, 결국 그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1268년 10월 29일, 콘라딘과 그의 동맹자인 바덴의 프레드리히는 참수형을 당했다.[13] 카스티야의 프레드리히와 그의 군대는 투옥되는 대신 튀니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1270년 루이 9세의 십자군과 싸우는 데 튀니지인들을 도왔다.

5. 5. 십자군 준비

1266년 9월, 루이 9세는 십자군에 다시 참여하여 지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항상 십자군 원정을 다시 시작하기를 바랐지만, 프랑스의 필요가 더 시급했다. 1267년, 지치고 병든 루이 9세는 두 번째 십자군 원정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고, 필요한 준비를 시작하여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수태고지 축일과 생트샤펠에 보관된 성물 앞에서, 루이 9세와 프랑스 귀족 대부분은 다시 한번 십자가를 졌다. 날짜는 1267년 3월 25일이었다.[10]

두 번째 의식은 1267년 6월 5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 특사 앞에서 거행되었다. 십자군에 참여한 루이 9세의 사위 나바라의 테오발트 2세도 참석했다. 이 반응은 1248년 제7차 십자군을 호소했을 때보다 열기가 덜했지만, 그 인기 부족은 개인적으로 이 원정에 반대했던 그의 편년사가인 장 드 주앙빌이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앙빌이 루이 9세의 첫 번째 십자군을 광범위하게 기록한 것과 달리, 그의 두 번째 십자군의 주요 편년사는 생드니의 프리마였다.[10] '''티레의 템플 기사단'''과 기욤 드 낭지, 매슈 패리스, 파두아의 피덴티우스, 알 마크리지의 저서들도 이 원정의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

몽골 일칸 아바카는 1267년 초 아라곤의 하이메 1세에게 서신을 보내 맘루크와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하이메 1세는 자이메 알라릭 드 페르피냥을 아바카에게 사절로 보냈고, 그는 몽골 사절단을 데리고 돌아왔다. 클레멘트 4세와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는 하이메 1세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 그가 성지로 군사 원정을 떠나는 것을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클레멘트 4세는 1268년 11월에 죽었고, 그레고리우스 10세가 새로운 교황이 되기까지는 거의 3년이 걸렸으며, 카스티야 왕은 아라곤에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무르시아 정복을 마친 하이메 1세는 십자군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1269년 9월 1일, 그는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바르셀로나에서 동쪽으로 항해했다. 하지만 곧 폭풍우를 만났다. 왕과 그의 함대 대부분은 귀환했다. 왕의 서자 두 명, 페드로 페르난데스와 페르난 산체스가 이끄는 소규모 함대만 항해를 계속했다. 그들은 12월 말 아크레에 도착했는데, 바이바르스가 휴전을 깨고 대규모 군대로 아크레에 나타난 직후였다. 아라곤 군은 즉시 적을 공격하려 했지만, 템플 기사단과 요한 기사단에 의해 제지되었다. 기독교 세력은 약해져 있었다. 제프리 드 세르지네는 1269년 4월에 죽었고 로베르 드 크레스크가 그를 대신했다. 올리비에 드 테르므가 지휘하는 그의 프랑스 연대는 몽포르 너머로 급습을 갔다. 아크레 군대는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다. 올리비에 드 테르므는 아크레로 몰래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로베르 드 크레스크는 공격을 주장했다. 그들은 바이바르스가 매복한 곳에 빠져들었고, 소수만이 살아남았다. 아크레 내의 군대는 그들을 구하러 가고 싶어했지만, 아라곤 군이 그들을 막았다. 곧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아라곤으로 돌아갔다.

루이 9세는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생각을 결코 버리지 않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튀니스에 대한 군사 원정으로 새로운 십자군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고해 신부인 보졸리의 제프리(Geoffrey of Beaulieu)에 따르면, 루이 9세는 무함마드 1세 알무스탄시르가 기독교로 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13세기 역사가 사바 말라스피나(Saba Malaspina)는 샤를이 지배자들이 이전 시칠리아 군주들에게 바치던 공물의 지불을 확보하기 위해 튀니스 공격을 설득했다고 믿었다. 결정의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루이 9세는 1268년 초에 결정을 내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십자군은 1270년 초여름 제노아(19척)와 마르세유(20척) 출신 선박으로 출항할 예정이었다. 루이 9세의 초기 계획은 키프로스를 경유하여 외국 지역(Outremer) 해안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 계획은 1269년에 수립되었는데, 함대는 먼저 튀니스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루이 9세는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이었지만, 이 목표는 루이 9세의 종교적 필요와 샤를의 정치적 목표를 모두 충족시키는 유일한 것이었다. 자금 조달은 평소처럼 어려웠다. 원정에 대한 열의가 부족했기 때문에 루이 9세는 많은 부담을 져야 했다. 클레멘트 4세는 또한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해 나바라의 교회 수입 10분의 1을 나바라의 테오발트 2세(Theobald II of Navarre)에게 양도했다.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의 수도원장과 투델라의 수석 사제는 10분의 1의 징수를 감독할 예정이었다. 나바라에서의 십자군 설교는 주로 팜플로나(Pamplona)의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맡았다.

5. 6. 원정과 루이 9세의 죽음

루이 9세는 1254년 성지에서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제프리 드 세르지네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남겨두었다.[1] 루이 9세는 다마스쿠스와 휴전을 맺었고, 이집트와도 10년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이집트 술탄이 팔레스타인 항구를 원했기 때문에 자파는 휴전에서 제외되었다.[1]

한편, 십자군 국가들은 성 사바스 전쟁에 휘말렸다.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 간의 상업 경쟁이 격화되면서 아크레에 있는 성 사바스 수도원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1] 베네치아는 템플 기사단, 튜턴 기사단 등의 지원을 받았고, 제노바는 요한 기사단의 지원을 받았다.[1] 1257년 베네치아가 수도원을 점령했지만, 제노바를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1]

1258년, 키프로스의 플레상스 드 안티오크와 위그 2세가 예루살렘 왕위 계승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아크레에 왔다.[1] 고등법원은 플레상스를 섭정으로 인정했지만, 요한 기사단은 콘라딘 없이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1]

1258년 6월 24일, 아크레 해전에서 제노바가 베네치아-피사 연합군에 패배하고 아크레에서 쫓겨나 티레에 본부를 설치했다.[1] 1261년, 제노바는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지원하여 베네치아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1]

1270년, 루이 9세는 다시 십자군을 일으켜 튀니스로 향했다.[14] 그는 튀니지의 더위와 질병으로 인해 1270년 8월 25일 사망했다.[14] 그의 마지막 말은 "주여,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Domine in manus tuas animam meam commendavi)"였다.[14] 필리프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14]

5. 7. 튀니스 조약

튀니스 조약은 1270년 11월 1일, 프랑스의 필리프 3세, 앙주의 샤를 1세, 나바라의 테오발도 2세가 라틴 기독교를 대표하여, 그리고 튀니스의 무함마드 1세 알무스탄시르가 튀니스를 대표하여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양측 군대 간의 휴전을 보장했다. 이 협정에서 기독교인들은 튀니스와의 자유 무역을 얻었고, 도시 내 수도사와 사제들의 거주가 보장되었다.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튀니스에서 프랑크족과 싸우기 위해 이집트 군대를 파견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1] 이 조약은 샤를에게 매우 유익했다. 그는 튀니스인들로부터 전쟁 배상금의 3분의 1을 받았고, 술탄령에 있는 호엔슈타우펜 망명자들이 추방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십자군은 그 직후 출발했고, 제8차 십자군은 끝났다.

5. 8. 프랑스의 필리프 3세

프랑스의 필리프 3세는 오를레앙 백작으로서 아버지 루이 9세와 함께 튀니스로 갔다. 루이 9세는 왕국을 마티외 드 ヴァン돔과 클레르몽의 시몽 2세에게 맡기고 왕실 인장도 그들에게 주었다. 루이 9세를 덮친 전염병은 필리프 3세와 그의 가족도 덮쳤다. 그의 동생 장 트리스탕이 8월 3일에 먼저 죽었고, 8월 25일에는 왕이 사망했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유해를 운반하기 용이하도록 육체를 뼈에서 분리하는 ''모스 테우토니쿠스'' 방식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16]

25세의 나이에 병에 걸린 필리프 3세는 튀니스에서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프랑스, 시칠리아, 나바라의 왕들과 튀니스 칼리프 사이의 조약에 참여했다. 이 참사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1270년 12월, 필리프 3세의 처남인 나바라의 테오발도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2월에는 필리프 3세의 왕비인 아라곤의 이사벨라가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4월에는 테오발드의 미망인이자 필리프 3세의 누이인 프랑스의 이사벨라도 사망했다. 필리프 3세는 1271년 5월 21일 파리에 도착하여 사망자들을 추모했다. 다음 날 아버지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새로운 군주는 1271년 8월 15일 랭스에서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6. 여파

루이 9세가 성지에서 출발한 후, 예루살렘 왕국의 명목상 왕위는 콘라딘에게 돌아갔다. 루이 9세는 다마스쿠스와 휴전을 맺었고, 이집트의 술탄 아이벡도 프랑크족과 10년 휴전을 맺었다.[1] 그러나 1256년 예루살렘의 마멜루크 총독이 프랑크족 약탈자들을 처벌하려다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국경은 불안정했다. 아이벡은 알무스타심의 중재로 다마스쿠스와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고, 두 무슬림 지도자는 프랑크족과의 휴전을 갱신했다.[1]

한편, 십자군 국가들은 성 사바스 전쟁에 연루된 이탈리아 상인들과도 싸워야 했다. 제노바, 베네치아, 피사는 십자군 국가 항구에 거점을 두고 지중해 무역을 지배했으며, 이는 무슬림 에미르들에게도 이익이었다.[1] 피사와 제노바 간의 갈등은 1256년 아크레에 있는 성 사바스 수도원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폭발했다. 베네치아인들은 티레에서 축출되었지만, 아르수프의 존, 자파의 존, 베이루트의 존 2세, 템플 기사단, 튜턴 기사단, 피사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요한 기사단은 제노바를 지원했다.[1]

키프로스의 플레상스는 예루살렘의 섭정이었고, 1258년 예루살렘 고등법원에서 휴 2세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았다. 이벨린 가문, 템플 기사단, 테우토니 기사단은 휴 2세와 플레상스를 지지했으나, 요한 기사단은 콘라딘이 없는 상황에서 결정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1] 베네치아는 플레상스와 휴 2세를, 제노바, 요한 기사단, 필립 드 몽포르는 콘라딘을 지지했다. 다수결 투표로 플레상스가 섭정으로 인정되었다.[1]

1258년 6월 24일, 아크레 전투에서 제노바군은 베네치아군에게 패배하고 티레로 후퇴했다. 제노바는 아크레를 버리고 티레에 본부를 설치했다.[1] 1261년, 제노바는 티레에, 베네치아피사는 아크레에 본부를 유지하기로 합의했지만, 이탈리아인들은 곧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1]

제프리 드 세르지네는 왕국에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했지만, 트리폴리 백작령에는 그의 권위가 미치지 못했다. 헨리 드 제베일은 보에몽 6세와 전쟁을 벌였고, 베르트랑 엠브리아코는 보에몽을 공격했다.[1] 베르트랑은 살해되었고, 그의 머리는 보에몽에게 보내졌다. 안티오크와 엠브리아코 가문 사이에 혈투가 벌어졌다.[1]

성 사바스 전쟁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는 제국의 성공에 관심이 있었고, 제노바는 미카엘 8세를 지원했다. 1261년, 미카엘 8세는 제노바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제4차 십자군으로 시작된 라틴 제국을 해체했다.[1]

에드워드 왕의 십자군은 성지로 향한 마지막 대규모 십자군이었다.[17] 그레고리오 10세는 십자군 지원을 호소했고, 리옹 제2차 공의회는 성지 회복 계획을 승인했다.[18] 아바카는 몽골 사절단을 파견했고, 그레고리오는 몽골과 함께 새로운 십자군을 시작할 것을 선포했지만, 1276년 교황의 죽음으로 계획은 무산되었다.[20]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1291년 아크레 공성전 이후 성지 상실을 감독했다.[22]

7. 참여자

제8차 십자군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했다.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인물설명
제프리 드 세르지네루이 9세가 성지를 떠나면서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Seneschal)으로 임명
장 드 이벨랭예루살렘 왕국의 집정관(Bailli), 1254년 사촌 장 드 아르수프에게 자리를 물려줌
장 드 아르수프장 드 이벨랭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국의 집정관, 플레상스 드 안티오크의 조언자 역할
플레상스 드 안티오크키프로스와 예루살렘 두 왕국의 섭정, 위그 2세의 섭정
콘라트 2세 (예루살렘)1254년 사망, 그의 죽음으로 예루살렘 왕위는 아들 콘라딘에게 넘어감[1]
안나시르 유수프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에미르, 몽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프랑크족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음
아이벡이집트의 술탄, 프랑크족과 10년 휴전
알무스타심칼리프, 아이벡과 다마스쿠스 간의 조약 중재
몽포르의 필리프(Philip of Montfort)티르의 영주, 성 사바스 전쟁에서 제노바 지원
아르수프의 존(John of Arsuf)성 사바스 전쟁에서 베네치아 지원
자파의 존(John of Jaffa)성 사바스 전쟁에서 베네치아 지원
베이루트의 존 2세(John II of Beirut)성 사바스 전쟁에서 베네치아 지원
위그 2세키프로스 왕, 예루살렘 왕위 계승권 주장
보에몽 6세안티오크 공작, 플레상스 드 안티오크의 형제
야고부스 판탈레온(James Pantaleon)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도록 요청받음
로렌초 티에폴로(Lorenzo Tiepolo)베네치아와 피사 연합 함대 지휘, 1258년 아크레 해전에서 패배, 이후 베네치아의 도제
토마스 아그니(Thomas Agni)교황의 명령으로 분쟁 해결, 베들레헴의 주교, 훗날 라틴 총대주교
헨리 드 제베일(Henry of Jebail)제프리 드 세르지네의 봉신, 보에몽 6세와 전쟁
베르트랑 엠브리아코(Bertrand Embriaco)헨리 드 제베일의 사촌, 보에몽 6세를 공격했다가 살해당함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니케아 제국의 황제,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라틴 제국 멸망
빌라르두앵의 윌리엄아카이아 공국의 공작,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미카엘 8세에게 패배하여 포로



이 외에도 제8차 십자군 기독교인 및 제8차 십자군 무슬림 범주 목록에서 더 많은 참여자들을 확인할 수 있다.

8. 문학적 반응

베르트랑 달라마농은 샤를 당주의 외교관이었으며, 리코 봉노와 함께 교황이 이탈리아 전쟁에 해외 원정에 사용되어야 할 돈을 사용하는 정책을 비판했다. 제8차 십자군의 실패는 이전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트루바두르들의 오크어 문학, 즉 오크어 시에 대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루이 9세의 죽음은 그들의 창작 활동을 자극했는데, 알비 십자군 동안 트루바두르들이 프랑스 왕실에 보였던 적대감을 고려하면 주목할 만하다. 루이 9세의 죽음을 애도하는 세 곡의 플랑(planh)이 작곡되었다.

기욤 도트폴은 루이를 위해 Fortz tristors es e salvaj'a retrairepro을 작곡했다. 라이몽 고셀 드 베제르는 1268년 십자군 준비를 기념하여 ''Qui vol aver complida amistansa''를 작곡했지만, 1270년에는 프랑스 국왕을 기념하여 Ab grans trebalhs et ab grans marrimenspro을 작곡해야 했다. 오스토르크 드 세그레는 루이를 애도하지만 하나님이나 사탄 중 누군가가 기독교인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말하는, 보다 일반적인 십자군 노래인 ''No sai quim so, tan sui desconoissens''을 작곡했다. 그는 또한 루이가 튀니스를 공격하고 성지를 공격하지 않도록 설득했고 루이의 죽음 후 즉시 무슬림들과 평화협상을 맺었기 때문에, 이교도들의 우두머리(caps e guitz)라고 부르는 루이의 형제 샤를를 공격했다.

십자군 이후, 노령의 트루바두르 페르 카르데날은 Totz lo mons es vestitiz et abrazatzpro (대략: 온 세상이 포위당하고 둘러싸여 있다 [거짓으로])라는 노래를 지어 루이의 상속자인 필리프 3세에게 에드워드 1세를 돕기 위해 성지로 가도록 격려했다.

튀니스 침공이라는 루이의 새로운 계획에 대한 풍자적인 구절이 튀니스에서 작곡되었다. "오 루이여, 튀니스는 이집트의 자매이다! 그러므로 너의 시련을 기대하라! 이븐 록만의 집 대신 네 무덤을 여기서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시 소비는 여기서 뭉키르와 나키르로 대체될 것이다."[23]

참조

[1] 서적 Conradi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Pope Urban IV Robert Appleton Company
[3] 논문 The Crisis in the Holy Land in 1260 https://www.jstor.or[...] Oxford University Press
[4] 논문 The Mongols in the West https://www.jstor.or[...] Harrassowitz Verlag
[5] 논문 The Letters of Eljigidei, Hulegu and Abaqa: Mongol overtures or Christian Ventriloquism? https://brill.com/vi[...] Brill
[6] 서적 Clement IV Cambridge University Press
[7] 서적 Gregory X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논문 Some Observations on the ’Abbāsid Caliphate of Cairo https://www.jstor.or[...]
[9] 논문 Enshrined Fortification: A Trialogue on the Rise and Fall of Safed https://journals.sag[...]
[10] 논문 _In subsidium_: The Declining Contribution of Germany and Eastern Europe to the Crusades to the Holy Land, 1221–1291 https://www.academia[...]
[11] 논문 Ein oberrheinischer Palästina-Kreuzzug 1267 https://www.e-period[...]
[12] 논문 Charles of Anjou Reassessed https://www.scienced[...]
[13] 서적 Pope Clement IV Robert Appleton Company
[14] 웹사이트 Florent de Varennes http://www.netmarine[...]
[15] 논문 The English Baronage and the Crusade of 1270 https://academic.oup[...]
[16] 서적 Philip III, King of Fr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7] 웹사이트 Lord Edward's crusade (act. 1270–1274) https://www.oxforddn[...]
[18] 서적 Pope Gregory X Robert Appleton Company
[19] 서적 Second Council of Lyons (1274) New York
[20] 웹사이트 Second Council of Lyons 1274 https://www.papalenc[...]
[21] 논문 The Crusade against Aragon https://www.jstor.or[...]
[22] 서적 Philip IV, King of Fr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3] 문서 Verses by a contemporary Tunesian named Ahmad Ismail Alzayat (Al-Maqrizi, p. 462/vol.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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