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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핼리팩스 백작 에드워드 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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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우드(Edward Wood, 1881–1959)는 제1대 핼리팩스 백작으로, 영국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교육부 장관, 농무부 장관을 거쳐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인도 총독을 역임했다. 인도 총독 재임 기간 중 사이먼 위원회 설치, 어윈 선언, 간디와의 협상 등을 통해 인도의 자치와 독립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에 관여했다. 1938년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어 유화 정책을 추진하며 뮌헨 협정에 참여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는 주미 영국 대사로 활동하며 미국의 참전을 이끌었다. 그는 20세기 영국의 중요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유화 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주미 대사로서의 공로도 인정받고 있다.

2. 초기 생애와 교육

에드워드 우드는 1881년 4월 16일 데번의 파우더햄 성에서 요크셔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찰스 우드, 제2대 핼리팩스 자작이고 어머니는 레이디 아그네스 엘리자베스 코트네이이다.[1] 그의 증조부 찰스 그레이, 제2대 그레이 백작은 1832년 대개혁법을 도입한 총리였다.[1] 1886년에서 1890년 사이에 우드의 세 형이 일찍 사망하여, 그는 아홉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재산과 귀족원 의석의 상속자가 되었다.[2]

그는 종교와 사냥을 즐기는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아버지처럼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1] 왼쪽 팔이 위축되고 왼손이 없는 상태로 태어났지만, 승마, 사냥, 사격을 즐기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1] 그는 스프링으로 작동하는 엄지손가락이 달린 인공 왼손을 가지고 있어, 고삐를 잡거나 문을 열 수 있었다.[3]

우드는 이튼 칼리지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를 졸업했다.[73][74] 옥스퍼드 재학 시절, 그는 학생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타내 현대사에서 1등급 학위를 받았다.[1] 1903년 11월부터 1910년까지 올 소울스 칼리지, 옥스퍼드의 특별 연구원이었다.[1] 올 소울스에서 1년 후, 그는 루도빅 히스코트-아모리와 함께 남아프리카, 인도, 호주, 뉴질랜드를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를 했다.[5] 1905년, 그는 올 소울스에서 2년간의 연구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5]

3. 초기 정치 경력과 군 복무

에드워드 우드는 1910년 1월 영국 총선에서 리폰 선거구의 보수당 후보로 출마하여 1,000표 차이로 승리하여 하원 의원이 되었고, 1910년 12월 영국 총선에서는 표 차이를 줄여 당선을 유지했다.[5] 1925년 귀족으로 승진할 때까지 리폰의 국회의원으로 재직했다.[5] 1911년 의회법에 대한 논쟁에서 딜처(Ditcher)였지만, 1914년 이전에는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1914년 웨일스 교회법에 강력하게 반대했다.[5]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우드는 퀸스 오운 요크셔 드래군스 연대의 대위였다.[5] 그는 징병제를 즉시 도입할 것을 촉구했고, 1916년에 최전선으로 보내졌다.[5] 1917년 1월, 그는 전투 보고서에 언급되었고, 소령으로 진급했다.[5] 1917년 11월부터 1918년 말까지 국가 봉사부에서 노동 공급 부국장을 지냈다.[5] 그는 처음에는 타협 평화 제안에 공감했지만, 결국에는 전면적인 승리와 징벌적 평화를 요구했다.[5]

1918년 영국 총선, 1922년 영국 총선, 1923년 영국 총선, 그리고 1924년 영국 총선에서 무투표로 당선되었다.[5] 그는 1919년 4월 베르사유 조약 협상에서 독일에 대한 더 가혹한 평화 조건을 요구하는 로우더 청원에 서명했다.[5] 1918-1922년 의회에서 우드는 새뮤얼 호어, 필립 로이드-그레임, 그리고 월터 엘리엇과 함께 진보적 개혁을 지지하는 야심찬 젊은 국회의원들이었다.[5]

1918년, 우드와 조지 로이드는 로이드 조지 연립 정부의 종식 이후 부활한 보수당 및 통합당의 의제를 설정하기 위한 팸플릿인 "거대한 기회"를 썼다.[9] 그들은 보수당이 개인의 이익보다는 지역 사회의 복지에 집중할 것을 촉구했다.[9] 당시 진행 중이던 아일랜드 독립 전쟁과 관련하여 우드는 연방 해결책을 촉구했다.[9]

4. 장관 경력 초기

1920년 5월, 우드는 남아프리카 연방 총독 직을 수락했으나, 남아프리카 정부가 각료나 왕족 구성원을 원한다고 발표한 후 철회되었다.[9] 1921년 4월, 그는 윈스턴 처칠 밑에서 식민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9] 1921~1922년 겨울, 우드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를 방문하여 처칠에게 보고서를 작성했다.[9]

1922년 10월 16일, 우드는 로이드 조지 연립 정부에 불안감을 표명한 하위 각료 회의에 참석했다. 1922년 10월 19일, 칼턴 클럽 회의에서 보수당이 다음 선거를 독립적인 세력으로 치르도록 투표했고, 연립 정부는 해체되었다.[9] 보나 로가 순수 보수당 정부를 구성하였고, 우드는 1922년 10월 24일 교육부 장관으로 영국 내각에 입성했다.[9] 그는 긴축 정책으로 인해 건설적인 정책을 펼 여지가 없었고, 이 직무에 특별히 효과적이지는 않았지만 더 큰 목표를 향한 발판으로 여겼다.[9]

스탠리 볼드윈이 관세를 채택하여 보수당이 1923년 영국 총선에서 과반수를 잃고 제1 맥도널드 내각의 소수 노동당 정부에 자리를 내준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9] 보수당이 1924년 영국 총선에서 권력을 되찾았을 때, 우드는 1924년 11월 6일 농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9] 그는 농업 및 십일조 법안을 하원을 통과시켰다.[9]

5. 인도 총독 (1926년 ~ 1931년)

델리 대관식 공원에 있는 어윈 경의 동상


1925년 10월, 인도 국무장관 비컨헤드 백작 F. E. 스미스 경은 국왕 조지 5세의 제안에 따라 우드에게 인도 부왕 직을 제안했다. 1925년 12월, 요크, 커비 언더데일의 '''어윈 남작'''으로 봉해졌다.[10] 1926년 3월 17일 인도로 출발하여,[9] 1926년 4월 1일 봄베이에 도착했다.[11]

어윈은 부왕직의 위엄을 즐겼다. 인도인들에게 더 동정적이었지만, 정당하다고 생각되면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인도인들이 더 단결하고 영국에 우호적이기를 바랐다. 부왕으로 처음 한 주요 연설과 임기 동안 여러 차례 연설을 통해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종교 분쟁을 종식할 것을 촉구했다.[9]

농림수산 대신 재직 중인 1926년 4월에 국왕 조지 5세의 발탁으로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75] 어윈 경은 인도의 반영 운동에 대해 탄압과 유화를 교묘하게 병행하는 통치를 목표로 했다.[76]

1927년에는 1919년 인도 통치법 시행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는 를 설치했지만, 동 위원회에는 인도인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아 인도 각 파가 분개했다.[77] 인도 국민 회의는 사이먼 위원회 방문 장소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이를 단속하는 관헌과의 다툼이 각지에서 폭동으로 발전했다.[77]

어윈 경은 이러한 저항 운동에 대한 유화 정책으로 1929년 10월 31일에 인도를 대영 제국 자치령(도미니언)으로 하는 것이 최종 목표임을 선언했으며, 또한 사이먼 위원회 보고서 발표 후 영국 당국과 인도 각 파 대표에 의한 원탁 회의를 열 것을 약속했다.[78][79] 그러나 사이먼 위원회 보고서는 인도 민족주의를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자치는 주 레벨에 머무르며 인도 각 파를 더욱 분개하게 했다.[80]

그 때문에 인도 국민 회의는 인도의 완전 독립을 목표로 원탁 회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81] 간디도 1930년 3월부터 인도 빈민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는 소금세에 대한 저항 운동인 「소금 행진」을 시작하여 소금세 위반을 시작했다.[82] 이러한 상황을 위험시한 어윈 경은 5월에 간디를 비롯한 6만 명 이상의 정치범을 대량 투옥하고, 탄압 법규를 잇따라 제정했다.[83]

1931년 1월에 간디를 석방하고, 이듬해 2월부터 4주에 걸쳐 8번이나 그를 면담했다. 이 회담에서 어윈 경은 간디로부터 양보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여, 불복종 운동과 보이콧 운동의 중단, 또한 「대영 제국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이라는 의제는 다루지 않도록 했다. 그 대신 어윈 경은 정치범을 석방하는 것, 또한 원탁 회의에 인도 국민 회의 측 대표도 참석시키는 것을 약속했다. 간디가 요구한 「경찰의 과도한 단속의 공적 조사」에 대해서는 거절했고, 최종적으로 간디도 이를 수용하여 단념했다.[84]

보수당 당수 스탠리 볼드윈도 어윈 경의 인도 통치를 높이 평가했다.[85] 하지만 인도의 철저한 강압 지배를 희망하는 제국주의자 윈스턴 처칠은 간디에게 양보하는 것에 반대한다며 비판했다.[86]

1931년 4월에 임기를 마치고 총독직을 퇴임했다. 어윈 경 이후의 인도 총독은 탄압 일변도의 총독이 이어지기 때문에 어윈 경은 「마지막 광채를 발한 총독」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87]

5. 1. 사이먼 위원회

1919년 인도 통치법은 몬테구-체름스포드 개혁(영국과 인도인의 지방 수준에서의 공유 통치인 "이원 통치")을 포함했으며, 10년 후에 새로운 헌법을 조사하고 추가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조언할 위원회가 구성될 것이라고 약속했다.[9] 어윈은 1919년 이후 인도 민족주의적 열망이 커짐에 따라 더 큰 자치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였다.[9] 존 사이먼 경에게 위원회를 맡겼다. 어윈은 인도 측이 서로 합의하지 못하고 조사 결과 뒤에 줄을 설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든 위원들을 영국인으로 구성할 것을 권고했다.[9] 데이비드 더튼은 이를 "그의 부왕 재임 기간 중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으며, 그는 이를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11]

1927년에는 1919년 인도 통치법 시행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는 를 설치했지만, 동 위원회에는 인도인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아 인도 각 파가 분개했다.[77] 인도 국민 회의는 사이먼 위원회 방문 장소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이를 단속하는 관헌과의 다툼이 각지에서 폭동으로 발전했다.[77] 1927년 11월, 사이먼 위원회의 구성이 발표되었다. 인도 국민 회의를 포함한 모든 주요 인도 정당들이 이를 보이콧했다.[11] 어윈은 비켄헤드에게 사이먼이 온건한 인도 여론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시켰다. 사이먼은 1928년 2월 3일 봄베이에 도착했다. 그는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어윈은 새로운 제스처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11] 사이먼의 도착에 대한 인도 측의 반응으로는 전(全) 정당 회의가 있었으며, 이 회의의 위원회는 인도의 자치령 지위를 옹호하는 네루 보고서를 발표했다 (1928년 5월). 그러나 1928년 11월 라라 라지파트 라이의 죽음과 1928년 12월 바가트 싱의 보복 공격을 포함한 폭력 사태도 발생했다. 다른 반응으로는 전인도 무슬림 연맹 지도자 무하마드 알리 진나의 진나의 14개 조항 (1929년 3월) 등이 있었다.

5. 2. 어윈 선언

1929년 6월 영국에서 램지 맥도널드가 이끄는 새로운 노동당 정부가 출범하면서, 어윈은 인도에 자치령 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을 모색했다.[12] 1929년 10월, 어윈 선언을 통해 영국은 인도에 궁극적으로 자치령 지위를 부여할 것을 약속했다.[11] 이는 1917년 몬태규 선언에서 암시된 내용이었지만, 10년 동안 명확히 언급되지 않았던 정책이었다.[11]

이 선언은 보수당 우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리딩 경은 이를 비난했다.[11] 사이먼 위원회의 사이먼 경도 불쾌감을 드러냈는데, 그는 이 선언이 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훼손하고, 자치령 지위가 인도 지도자들에게 최소한의 요구 사항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11]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윈은 1929년 12월 인도 지도자들과 뉴델리 회의를 열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11] 결국 간디는 완전한 독립을 위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시작했고, 어윈은 간디를 포함한 모든 의회 지도자들을 투옥했다.[11]

1926년 4월 인도 총독 취임 당시 미국의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어윈 경.


1927년, 어윈은 1919년 인도 통치법 시행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는 를 설치했지만, 인도인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아 인도 각 파가 분개했다.[77] 어윈 경은 이러한 저항에 대한 유화 정책으로 1929년 10월 31일에 인도를 대영 제국 자치령(도미니언)으로 하는 것이 최종 목표임을 선언했다.[78][79]

5. 3. 간디와의 협상 및 간디-어윈 협약

1927년 인도 통치법 시행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는 Simon Commission영어가 설치되었지만, 인도인이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아 인도 각 파가 분개했다.[77] 인도 국민 회의는 사이먼 위원회 방문 장소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고, 각지에서 폭동으로 번졌다.[77] 어윈 경은 1929년 10월 31일 인도를 대영 제국 자치령(도미니언)으로 하는 것이 최종 목표임을 선언하고, 사이먼 위원회 보고서 발표 후 영국 당국과 인도 각 파 대표에 의한 원탁 회의를 열 것을 약속했다.[78][79] 그러나 사이먼 위원회 보고서는 인도 민족주의를 실망시키는 것이었고, 중앙 정부의 책임 내각제 수립은 번왕국이 연방에 참여할 때까지 연기되었다.[80]

런던에서 열린 제1차 원탁 회의, 1930년 11월 12일


인도 국민 회의는 인도의 완전 독립을 목표로 원탁 회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81] 간디는 1930년 3월부터 소금 행진을 시작하여 소금세 위반을 시작했다.[82] 어윈 경은 1930년 5월 간디를 비롯한 6만 명 이상의 정치범을 투옥하고 탄압 법규를 제정했다.[83] 1930년 11월, 조지 5세 국왕은 런던에서 제1차 원탁 회의를 열었으나, 간디가 투옥되어 의회 대표는 참여하지 않았다.[11]

어윈 경은 1931년 1월 간디를 석방하고 면담을 추진, 1931년 1월 간디가 석방되었고 어윈의 초청으로 두 사람은 8차례의 회동을 가졌다.[11] 2주간의 논의 끝에 1931년 3월 5일 간디-어윈 협약이 체결되었고, 시민 불복종 운동과 영국 상품 보이콧이 중단되었다.[11]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의회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중단한다.
  • 의회는 원탁 회의에 참여한다.
  • 정부는 의회를 억압하기 위해 발령한 모든 법령을 철회한다.
  • 정부는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범죄와 관련된 모든 기소를 철회한다.
  • 정부는 시민 불복종 운동에서 활동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모든 사람을 석방한다.


간디는 의회의 유일한 대표로 제2차 원탁 회의에 참석하기로 합의했다. 1931년 3월 20일, 어윈은 간디의 정직함, 성실함, 애국심에 경의를 표했다. 1931년 3월 23일, 인도 혁명가 바가트 싱, 시바람 라지구루, 수크데브 타파르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어윈은 1931년 4월 임기를 마치고 인도 총독직에서 퇴임했다.

6. 1931년 ~ 1935년 영국 정치

1931년 5월 3일 어윈은 영국으로 돌아와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11] 같은 해, 새로운 국민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직을 거절했다.[11] 1932년 6월, 도널드 맥린 경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두 번째로 교육부 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했다.[11]

1933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다.[13] 193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할리팩스 자작 작위를 상속받았다.[13] 그는 새뮤얼 호어 제1대 템플우드 자작이 1935년 인도 정부법 초안을 작성하는 것을 도왔다.[13] 1935년 6월, 스탠리 볼드윈은 세 번째로 총리가 되었고, 핼리팩스는 육군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3] 1935년 11월, 총선 이후, 핼리팩스는 추밀원 부총리이자 상원 원내대표가 되었다.[13]

7. 외교 정책 (1935년 ~ 1940년)



이 무렵, 핼리팩스는 외교 문제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13] 1935년 12월 18일 아침, 내각은 호어-라발 협약에 대한 대중의 거센 항의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그날 오후 상원에서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었던 핼리팩스는 정부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외무 장관 사무엘 호어가 사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J. H. 토마스, 윌리엄 옴스비-고어와 월터 엘리엇도 그의 사임을 지지하게 되었다. 앤서니 이든은 호어의 후임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4] 이듬해 핼리팩스는 협약의 조항이 "국제 연맹의 5인 위원회에서 제시한 조항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후자는 존경받는 출신이었고, 파리 조항은 19세기 외교의 무대 뒤 합의와 너무 비슷했다"고 말했다.[15]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사실상 핼리팩스는 이든의 외무 차관이었다. 핼리팩스는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의 서명자 중 한 명이었다.[16] 일반적으로 그들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3]

핼리팩스와 이든은 외교 정책의 방향에 대해 동의했고(영국 전역의 지배적인 여론과 일치), 나치 독일의 "뒷마당"인 라인란트 재무장에 반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험난한 상황 이후 독일이 정상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환영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1936년, 네빌 체임벌린은 핼리팩스가 항상 공직에서 물러나고 싶어한다고 기록했다.[17] 1937년 5월, 네빌 체임벌린이 볼드윈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자, 핼리팩스는 추밀원 의장이 되었고, 동시에 상원 원내대표로 남았다.[13] 체임벌린은 자신의 배경이 준비되지 않은 외교 정책에 점점 더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이든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37년 11월, 핼리팩스는 반 공식적인 자격으로 독일을 방문하여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 이 방문은 헤르만 괴링이 개인 자격으로 미들턴 사냥단의 단장인 핼리팩스를 베를린에서 열리는 사냥 전시회에 참석하고 포메라니아에서 괴링과 함께 여우 사냥을 하도록 초대한 후에 이루어졌다. 핼리팩스는 나중에 방문의 상황에 대해 처음에는 열의가 없었다고 말했지만,[13] 이든이 그에게 초대를 수락하도록 강요했고, 핼리팩스의 독일 방문은 체임벌린이 외무부를 우회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독일에서 괴링은 핼리팩스에게 독일 사냥 구호인 '할랄리!'에서 따온 "할라팍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와 길고 긴장된 회담이 있었는데, 그는 처음에 그를 하인으로 착각하고 외투를 건네려 했다.[18] 이 토론에서 핼리팩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유럽 질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든의 우려를 무시하고, 그는 원칙적으로 오스트리아 연방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과 폴란드 제2공화국의 일부에 대한 히틀러의 구상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변화의 평화로운 과정만이 수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13] 핼리팩스는 당시 일반적으로 영국 정부를 대변하고 독일 정부와의 대화를 재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여겨졌다.[19]

1938년의 핼리팩스와 윈스턴 처칠. 핼리팩스의 검은 장갑 아래 가려진 인공 왼쪽 손에 주목하십시오.


단치히 자유시의 카를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국제 연맹 위원과 히틀러의 대화에 대해 볼드윈에게 보낸 편지에서 핼리팩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는 강력한 힘이지만, 저는 그것이 부자연스럽거나 부도덕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저는 이들이 공산주의 등을 진정으로 혐오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느꼈을 것입니다!"[20]

1937년 12월, 핼리팩스는 내각에 "우리는 독일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든과 체임벌린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여전히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및 일본 제국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13] 1938년 2월까지 핼리팩스는 체임벌린에게 내각의 긴장을 경고했고, 체임벌린과 이든 사이의 합의를 중재하려 했다. 이든은 베니토 무솔리니를 신뢰할 수 없는 갱스터로 여기고 선의의 제스처 없이 그에게 더 많은 양보를 하려는 체임벌린의 뜻에 항의하며 2월 20일 외무 장관에서 사임했다. 핼리팩스는 중요한 직책이 귀족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노동당과 다른 곳에서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1938년 2월 21일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3] 핼리팩스는 외무 장관 임명을 수락하기 전에 "나는 한 평생 동안 충분한 비난을 받았다"(즉, 인도 총독으로서)고 말했다.[21] 체임벌린은 흥분하기 쉬운 이든보다 그를 선호했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 외무 장관에게 하나님께 감사한다."[13]

핼리팩스 경의 초상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이 임박하자 체임벌린 수상은 이탈리아에 접근하여 독일을 견제하려 했지만, 외무부 장관 앤서니 이든은 스페인 내전에서 이탈리아가 영국과의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탈리아군이 스페인에서 철수할 때까지 이탈리아와 이해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이탈리아 접근에 반대했다. 결국 이든은 1938년 2월 사임하게 되었고, 그 후임 외무부 장관에는 이탈리아 접근 정책에 찬성하는 핼리팩스 경이 취임하게 되었다[91]

1938년 5월의 주데텐 문제에서, 독일 정부가 무력에 호소하지 않도록 위협 외교를 펼치는 동시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독일 정부에 양보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체임벌린도 핼리팩스 경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 "현재 형태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자국만으로는 방어할 수 없고, 개선될 전망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독일 측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과 화해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92]。또한 주데텐 병합 비판의 근거로 사용된 민족 자결론에 대해 핼리팩스 경은 전 인도 총독으로서의 입장에서 "민족 자결의 제단에 더 이상 향료(선례)를 늘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93]。결국, 같은 해 9월에 영국 수상 체임벌린, 프랑스 외무 장관 에두아르 달라디에, 이탈리아 수상 베니토 무솔리니 등이 방독하여 뮌헨 회담이 열렸고, 그 결과 주데텐란트는 독일에게 할양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핼리팩스 경은 뮌헨 협정을 "재앙 속에서 가장 가벼운 것"으로 평가했다[94]

하지만 1939년 3월에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감행하자 유화 정책은 실패였다는 여론이 강해졌고, 핼리팩스 경도 보수당의 분열을 경계하여, 3월 30일의 각의에서 "독일의 침공에 대한 영국의 태도를 명확히 해야, 수상이 보수당 내나 하원에서 반란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체임벌린 수상에게 조언했다. 체임벌린도 "만약 폴란드의 독립을 위협하는 행동이 발생하여, 따라서 폴란드 정부가 저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경우, 영불 양국은 전력을 다해 폴란드 정부를 지원할 것이다"라고 성명했다[95]。같은 해 4월의 이탈리아군의 알바니아 침공에 즈음하여 체임벌린은 이탈리아와의 연계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했지만, 핼리팩스 경은 영국, 프랑스, 그리스, 터키의 4개국 간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이 쥐고 있는 지중해의 패권을 이탈리아에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체임벌린도 그러한 주장의 압력에 굴복하여 4월에 폴란드와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고, 그리스와 루마니아에도 같은 보장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96]

1939년 6월부터 8월에 걸쳐 소비에트 연방과의 교섭에도 임했지만, 소련 외무 인민 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영불 소 연합의 조건으로, 발트 3국에서 살고 있는 독일인의 "내부로부터의 침략"을 소련군이 공격하는 것에 대해 영불이 무조건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요컨대 소련이 발트 3국에 선제 침략하는 것을 인정하라는 요구와 같았고, 체임벌린도 핼리팩스 경도 난색을 표했다. 또한 소련 국방 인민 위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도 "영불 양국은, 붉은 군 육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작전하는 허가를 폴란드 정부로부터 받아야 한다. 즉 붉은 군 육군이 빌뉴스 회랑(Wilnopl, Vilniuslt)을 통과하여, 리투아니아도 넘어 동프로이센 국경까지, 나아가서는 갈리치아까지 넘는 것을 허가해야 한다"고 거대한 군사권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폴란드 정부로부터 그러한 허가를 얻을 수 없었고, 영불과 소련의 교섭은 난항에 빠졌다. 소련은 영불과의 교섭을 중단하고, 교섭 상대를 독일에 전환하여, 8월에는 동유럽 제국의 독소 분할 지배를 약속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97]

1939년 9월 1일에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이 있었고, 9월 2일의 각의에서 핼리팩스 경을 비롯한 각료들은 영국의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체임벌린 수상에게 압박했다. 최종적으로 체임벌린은 독일에 최후 통첩을 보내는 것을 결정했고, 핼리팩스 경은 프랑스 외무 장관 와 연락을 취한 후, 주독 영국 대사를 통해 독일에 최후 통첩을 발했다. 그 기한이 끝난 9월 3일 오전 11시에 영국은 독일과 교전 상태에 돌입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98]

체임벌린은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싫어했고, 경제 압력을 주안점으로 하여 조기 강화에 돌입할 것을 생각했지만, 1940년 5월에 노르웨이 전에서의 패퇴로 그는 사임을 면치 못했다. 후임으로는 해군 장관 처칠이나 외무 장관 핼리팩스 경이 고려되었지만, 체임벌린은 유화 정책을 공유하는 핼리팩스 경을 후임의 수상으로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핼리팩스 경 자신이 "귀족원 의원인 자신은 하원을 통제할 수 없고, 정권 운영은 어렵다"고 사퇴했기 때문에, 철저 항전파인 윈스턴 처칠이 수상이 되었다[99]

핼리팩스 경은 처칠 내각에도 외무부 장관으로 유임되었지만, 처칠의 방침에는 찬동하지 않았고, 1940년 12월을 기해 외무 장관을 사임했다[100]

7. 1. 유화 정책과 뮌헨 협정

핼리팩스는 외무 장관으로서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추진했다.[13][14][15][16][17] 1937년 11월, 독일을 방문하여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18] 이 회담에서 핼리팩스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일부에 대한 히틀러의 구상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지만, 평화로운 변화만이 수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13][19][20]

1938년 3월,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핼리팩스는 영국 재무장에 더 열성적으로 임했다.[23] 1938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당시, 핼리팩스는 처음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의 주데텐 독일인 지위와 관련된 요구에 양보하도록 설득하려 했다.[23]

아돌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중인 1938년 9월 15일 베르크호프 계단에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을 맞이한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오른쪽에 서 있다.


1938년 9월 25일, 핼리팩스는 히틀러가 고데스베르크 각서에서 제시한 과도한 요구에 대해 내각에서 반대했다.[24] 1938년 9월, 뮌헨 협정이 체결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할양되었다. 핼리팩스는 이 협정을 "재앙 속에서 가장 가벼운 것"으로 평가했다.[94]

7. 2. 유화 정책 포기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1939년 3월,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면서, 영국 내 여론은 유화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섰다.[23] 핼리팩스는 독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보다 강경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23]

1939년 1월 로마 오페라에서 네빌 체임벌린, 베니토 무솔리니, 핼리팩스, 치아노 백작


1939년 3월 31일, 핼리팩스는 독일에 대한 경고로 폴란드에 대한 영국의 보증을 발표했다.[26] 이는 "더 이상 뮌헨 협정은 없을 것"임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26] 그러나 1939년 4월 초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정보에 대해서는, 핼리팩스는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27]

핼리팩스는 소련과의 동맹을 추진했으나, 1939년 8월 소련과 독일 간의 협정이 체결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23] 핼리팩스는 히틀러가 소련과의 협정을 통해 영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 한다고 오판했다.[34]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98] 핼리팩스는 독일군이 폴란드 영토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어떠한 협상도 거부했다.[23] 1939년 9월 3일,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23][98]

전쟁 발발 후, 핼리팩스는 소련이 추축국에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23] 1939년 11월, 핼리팩스는 히틀러가 권력을 유지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며, 가짜 전쟁 기간 동안 타협적인 평화 제안에 반대했다.[37][38]

7. 3. 1940년 5월 전시 내각 위기

1940년 5월 8일, 체임벌린 정부는 노르웨이 전역의 실패로 불신임 투표에서 81표 차이로 간신히 살아남았다.[39] 그러나, 이는 하원의 강한 비판과 국가적 단결 요구에 직면한 결정적인 위기였다.[40] 체임벌린은 노동당 및 자유당과의 연립 정부 구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5월 9일, 체임벌린은 핼리팩스, 처칠과 회동하여 후임 총리 문제를 논의했다. 처칠은 핼리팩스가 총리직을 맡도록 권유했으나, 핼리팩스는 자신보다 처칠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고사했다.[41] 핼리팩스는 처칠이 국방을 운영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명목상의 총리가 될 것을 우려했다.[46]

5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과 함께, 노동당은 체임벌린을 대신하여 다른 인물이 이끄는 연립 정부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44] 체임벌린은 사임하고, 조지 6세에게 처칠을 총리로 추천했다. 핼리팩스는 보수당, 왕, 노동당의 지지를 받았으나, 총리직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처칠의 리더십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믿었다.[47]

처칠은 핼리팩스, 체임벌린 등을 포함한 전시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핼리팩스는 독일과의 평화 협상을 주장하며 처칠과 대립했다.[38] 핼리팩스는 이탈리아를 중재자로 하여 히틀러와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을 물리칠 가능성이 없다고 믿었다.[38]

5월 25일부터 28일까지, 처칠과 핼리팩스는 전시 내각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경쟁했고, 핼리팩스는 사임 직전까지 갔다.[38] 처칠은 외부 내각 회의를 소집하여 영국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싸워야 한다고 설득하며 핼리팩스를 제압했다.[48] 결국, 처칠은 전시 내각에 협상된 평화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핼리팩스는 패배했다.

8. 주미 영국 대사 (1941년 ~ 1946년)

1940년 12월, 주미 영국 대사였던 필립 커, 로디언 후작 11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윈스턴 처칠핼리팩스에게 이 직책을 맡으라고 지시했다.[38] 처칠의 비서인 조크 콜빌은 처칠이 핼리팩스를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50] 1941년 1월, 핼리팩스는 미국으로 출항했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가 도착했을 때 직접 그를 환영했다.[38]

핼리팩스와 소련 대사 막심 리트비노프가 1942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가든 파티에서


핼리팩스는 미국에서 처음에는 홍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워싱턴 정치를 "무질서한 토끼 사냥의 날"에 비유하기도 했다.[38] 그러나 그의 사촌 앵거스 맥도넬의 도움으로 곧 효과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다.[38] 그는 루스벨트, 해리 홉킨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38] 전국을 순회하며 많은 미국인들을 만났다.[38] 특히 진주만 공격 이후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38]

가운데에 있는 핼리팩스 경(앉아 있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뒤) 태평양 전쟁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핼리팩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미 간 연락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합동 참모 본부 사무국을 통해 군사 문제에 관여했다.[38] 1944년 5월, 핼리팩스는 핼리팩스 백작으로 서임되었다.[38] 그는 국제 연합과 소련에 관한 수많은 국제 회의에 참여했다.[38] 1945년 7월부터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 하에서도 핼리팩스는 1946년 5월까지 주미 대사직을 유지했다.[17]

1946년 2월, 그는 처칠의 미주리 풀턴 연설, 즉 "철의 장막" 연설에 참석했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17] 그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46년 7월에 최종 마무리된 영미 차관 협상을 돕기도 했다.[17] 대사 임기 마지막 해에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으로의 전환과 함께, 원자 폭탄 건설 이후 핵 협력 중단 등 긴장된 순간도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파트너십은 매우 성공적이었다.[17]

9. 은퇴 이후

영국으로 돌아온 핼리팩스는 보수당 전선에 재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17] 1947년부터 1952년까지 BBC 자문 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73] 같은 해 셰필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73] 1957년부터 성 미카엘 및 성 조지 훈작의 그랜드 마스터였다.[17]

1956년 11월, 수에즈 위기에 대해 비판하는 연설을 상원에서 했다.[17] 1957년, 자서전 "충만한 날들"을 출간했다.[51]

1959년 12월 23일, 가로비에 있는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7][102]

10. 유산 및 평가

핼리팩스는 20세기 영국의 중요한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서, 격동의 시기에 영국을 이끌었다.[60] 인도 총독 재임 기간 동안의 유화 정책과, 특히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 추진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60]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주미 대사로서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내고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60]

해럴드 베그비는 핼리팩스를 "현재 정치에 몸담고 있는 가장 훌륭한 종류의 영국인"으로 묘사하며, 그의 "삶과 가르침은 매우 고상한 도덕적 원칙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지만, 잘못을 저지르고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고 평가했다.[56] 해럴드 맥밀런은 핼리팩스의 "상냥하고 기독교적인 성품"을 언급했고,[57] 랩 버틀러는 그를 "세상사에 초연한 성자와 교활한 정치가의 중간인 이 기묘하고 인상적인 인물"이라고 칭했다.[58]

1968년, 핼리팩스의 외무 장관 재임 기간 공식 기록이 공개되면서, 보수주의 역사가 모리스 카울링은 핼리팩스가 히틀러에 대한 저항을 강화한 입장, 특히 1939년 봄 폴란드 보장은 전략적 고려보다는 영국 국내 여론 변화에 앞서나가야 할 필요성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59] 데이비드 더튼은 핼리팩스가 체임벌린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협상을 통해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지나치게 확신했다고 평가한다. 더튼은 핼리팩스의 외무 장관 재임 기간이 "그의 경력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역사적 명성은 결국 이 기간에 달려 있다"고 지적하며, 그가 유화 정책을 포기하거나 수정하는 데 공을 세울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60] 또한 1940년 5월 수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은 "그의 긴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였으며, 주미 대사로서 "초기 해석이 ... 암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보다 더 심각했던"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60]

요크 대학교의 핼리팩스 칼리지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61] 델리에 있는 여자 대학인 레이디 어윈 칼리지는 1931년 그의 부인 도로시의 후원하에 설립되었다.[61]

11. 가족

제1대 핼리팩스 백작 에드워드 우드는 1909년 9월 21일, 전 뉴질랜드 총독인 윌리엄 온슬로우, 제4대 온슬로우 백작의 딸인 레이디 도로시 에블린 오거스타 온슬로우(1885–1976)와 결혼했다.[5] 이들 부부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64][73] 장녀 앤 도로시 우드는 찰스 던콤, 제3대 피버스햄 백작과 결혼했다.[64] 장남 찰스 잉그램 코트니 우드, 제2대 핼리팩스 백작 (1912년 10월 3일 – 1980년 3월 19일)은 보수당 정치인이었다. 차남 프란시스 휴 피터 코트니 우드 소령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열 장갑 군단에서 복무하다 전사했다.[65][66] 삼남 리처드 프레데릭 우드, 홀더니스 남작 (1920년 10월 5일 – 2002년 8월 11일)은 1950년부터 하원의원을 역임했다.[17]

12. 대중문화

리처드 애튼버러의 흥행작 간디에서 존 길구드가 핼리팩스를 연기했으며, 인도의 부왕으로서의 그의 시간과 인도의 독립과 관련하여 간디와의 협상에서의 역할을 묘사했다.[67] 핼리팩스는 또한 2017년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스티븐 딜레인이 반대자로서 연기했다.[68]

13. 작위 및 칭호

제1대 핼리팩스 백작 에드워드 우드의 문장

  • 1881년 4월 16일 – 1885년 8월 8일: 에드워드 프레데릭 린들리 우드
  • 1885년 8월 8일 – 1910년 2월 10일: 명예로운 에드워드 프레데릭 린들리 우드
  • 1910년 2월 10일 – 1922년 10월 25일: 명예로운 에드워드 프레데릭 린들리 우드, 국회의원
  • 1922년 10월 25일 – 1925년 12월 22일: 의원 에드워드 프레데릭 린들리 우드, 각하[62]
  • 1925년 12월 22일 – 1926년 4월 3일: 의원, 어윈 남작[10]
  • 1926년 4월 3일 – 1931년 4월 18일: 각하 어윈 남작, 의원, 인도 부왕 및 총독[63]
  • 1931년 4월 18일 – 1934년 1월 19일: 의원 어윈 남작
  • 1934년 1월 19일 – 1940년 12월: 의원 핼리팩스 자작
  • 1940년 12월 – 1944년: 각하 핼리팩스 자작, 의원, 미국 주재 영국 대사
  • 1944년–1946년: 각하 핼리팩스 백작, 의원, 미국 주재 영국 대사
  • 1946년–1959년: 의원 핼리팩스 백작
  • 1925년 12월 22일, 초대 어윈 남작(연합 왕국 귀족 작위)
  • 1934년 1월 9일, 제3대 핼리팩스 자작(1866년 창설 연합 왕국 귀족 작위)
  • 1934년 1월 9일, 제5대 우드 준남작(1784년 창설 그레이트브리튼 준남작위)[73]
  • 1944년 7월 11일, 초대 핼리팩스 백작(연합 왕국 귀족 작위)[73]
  • 국방 의용군 훈장
  • 1926년, 인도 제국 훈장 나이트 그랜드 커맨더(GCIE)
  • 1926년, 인도의 별 훈장 나이트 그랜드 커맨더(GCSI)
  • 1931년, 가터 훈장 기사단(KG)
  • 1937년, 성 미카엘 · 성 조지 훈장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GCMG)
  • 1946년, 메리트 훈장(OM)[73]
  • 1923년, 법학 박사 학위(LLD)(리즈 대학교 명예 학위)
  • 1931년, 법학 박사 학위(LLD)(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 학위)
  • 1931년, 법학 박사 학위(LLD)(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명예 학위)
  • 1931년, 법학 박사 학위(LLD)(셰필드 대학교 명예 학위)
  • 1931년, 법학 박사 학위(LLD)(옥스퍼드 대학교 명예 학위)
  • 1932년, 법학 박사 학위(LLD)(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명예 학위)
  • 1934년, 법학 박사 학위(LLD)(더블린 대학교 명예 학위)
  • 1934년, 법학 박사 학위(LLD)(런던 대학교 명예 학위)
  • 1934년, 법학 박사 학위(LLD)(리버풀 대학교 명예 학위)
  • 법학 박사 학위(LLD)(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 학위)
  • 법학 박사 학위(LLD)(미국 하버드 대학교 명예 학위)
  • 법학 박사 학위(LLD)(미국 예일 대학교 명예 학위)
  • 1922년, 추밀 고문관 (PC)

참조

[1] 서적 Matthew 2004, p. 81.
[2] 서적 Roberts 1991, p. 10.
[3] 서적 Roberts 1991, p. 9.
[4] 웹사이트 Breaking the Bullingdon Club Omertà: Secret Lives of the Men Who Run Britain https://www.thedaily[...] 2020-07-07
[5] 서적 Matthew 2004, p. 82.
[6] 서적 Roberts 1991, p. 11.
[7] 서적 Matthew 2004, p. 82.
[8] 서적 Roberts 1991, pp. 11–12.
[9] 서적 Matthew 2004, p. 83.
[10] 간행물 London Gazette 1925-12-25
[11] 서적 Matthew 2004, p. 84.
[12] 서적 Halifax: The Life of Lord Halifax Houghton Mifflin
[13] 서적 Matthew 2004, p. 85.
[14] 서적 Roberts 1991, pp. 78–79.
[15] 서적 A Life of Neville Chamberlain Macmillan
[16] 웹사이트 Historic Anglo-Egyptian treaty signed in London – archive, 1936 https://www.theguard[...] 2021-08-27
[17] 서적 Matthew 2004, p. 88.
[18] 서적 Fulness of Days Collins
[19] 논문 Lord Halifax's Visit To Germany: November 1937.
[20] 서적 The Holy Fox. The Life of Lord Halifax Phoenix
[21] 서적 Jago 2015, p. 85.
[22] 웹사이트 Britain to increase spending on arms http://century.guard[...] 1935-03-04
[23] 서적 Matthew 2004, p. 86.
[24] 서적 Jago 2015, p. 106.
[25] 서적 The Holy Fox: The Life of Lord Halifax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24-04-01
[26] 간행물 No more Munichs! What the media won't tell https://go.gale.com/[...] 1988-04-01
[27] 서적 The Defence of the Realm: The Authorized History of MI5 Allen Lane
[28] 서적 Lloyd George: Twelve Essays Hamish Hamilton 1971
[29] 서적 1939: The Making of the Second World War Andre Deutsch 1973
[30] 서적 Maxim Litvinov: A Biography Woodland Publications
[31] 서적 FRUS, Volume I, General https://history.stat[...]
[32] 서적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FRUS)
[33] 서적 Maxim Litvinov Princeton University Press
[34] 서적 Records of the Cabinet Office, CAB 27/625
[35] 서적 Erinnerungen List
[36] 서적 Hitler's First Foreign Minister: Constantin Freiherr Von Neurath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9
[37] 문서 Howard 1987, p. 96
[38] 문서 Matthew 2004, p. 87
[39] 웹사이트 Conduct of the War https://api.parliame[...] 1940-05-08
[40] 문서 Jenkins 2002, p. 582
[41] 문서 Roberts 1991, pp. 275–277
[42] 문서 Jenkins 2002, p. 583
[43] 문서 On the 9 May meeting, see Taylor Downing, "Cometh the finest hour." History Today 60.5 (2010): 25ff.
[44] 문서 Jenkins 2002, p. 586
[45] 문서 Roberts 1991, p. 279
[46] 문서 Roberts 1991, p. 277
[47] 서적 Churchill Clarendon Press
[48] 웹사이트 Churchill decides to fight on https://www.bbc.co.u[...] BBC 2013-01-01
[49] 문서 Halifax, p. 215
[50] 문서 Colville, Fringes of Power, p. 321
[51] 서적 The Order of Merit: one hundred years of matchless honour I. B. Tauris
[52] 문서 Roberts 1991, p. 14; the book says "there" which presumably means at Temple Newsam rather than the [[Leeds City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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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서적 世界伝記大事典 世界編7巻(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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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서적 世界伝記大事典 世界編7巻(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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