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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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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탠리 볼드윈은 1867년에 태어나 1947년에 사망한 영국의 정치인으로, 보수당 소속으로 여러 차례 총리직을 역임했다. 그는 부유한 철강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후 가업에 종사하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1922년 재무장관을 거쳐 1923년 총리가 되었으나, 보호 무역 정책을 추진하다가 선거에서 패배하여 물러났다. 1924년 다시 총리가 되어 1926년 총파업에 대처하고, 영국 연방 체제의 원형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1929년 총선에서 패배한 후, 1931년 대공황으로 인한 위기 속에서 램지 맥도널드의 연립 내각에서 추밀원 의장으로 사실상 총리 역할을 수행했다. 1935년 총리가 되었지만,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과 라인란트 진주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 에드워드 8세의 퇴위 문제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1937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뷰들리의 볼드윈 백작으로 상원에 진출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유화 정책에 대한 책임론으로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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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볼드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0년의 볼드윈
존칭 접두사각하
이름스탠리 볼드윈
원어 이름Stanley Baldwin
작위명비우들리의 초대 볼드윈 백작
출생일1867년 8월 3일
출생지잉글랜드 비우들리
사망일1947년 12월 14일
사망지잉글랜드 스토어포트온세번
안장지우스터 대성당
부모앨프리드 볼드윈
루이자 맥도널드
배우자루시 리즈데일 (1892년 9월 12일 결혼, 1945년 6월 17일 사망)
자녀7명 (올리버, 아서 포함)
교육해로 학교
모교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직업기업인
정치인
소속 정당보수당
서명Stanley Baldwin Signature.svg
서명 설명잉크로 된 필기 서명
공직
직위영국 총리
재임 시작1935년 6월 7일
재임 종료1937년 5월 28일
군주조지 5세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이전 총리램지 맥도널드
다음 총리네빌 체임벌린
재임 시작1924년 11월 4일
재임 종료1929년 6월 4일
군주조지 5세
이전 총리램지 맥도널드
다음 총리램지 맥도널드
재임 시작1923년 5월 22일
재임 종료1924년 1월 22일
군주조지 5세
이전 총리보너 로
다음 총리램지 맥도널드
직위추밀원 의장
재임 시작1931년 8월 24일
재임 종료1935년 6월 7일
총리램지 맥도널드
이전 의장파머 남작
다음 의장램지 맥도널드
주요 직위
직위영국 야당 대표
재임 시작1929년 6월 5일
재임 종료1931년 8월 24일
총리램지 맥도널드
이전 대표램지 맥도널드
다음 대표아서 헨더슨
재임 시작1924년 1월 22일
재임 종료1924년 11월 4일
총리램지 맥도널드
이전 대표램지 맥도널드
다음 대표램지 맥도널드
직위보수당 대표
재임 시작1923년 5월 22일
재임 종료1937년 5월 28일
이전 대표보너 로
다음 대표네빌 체임벌린
장관 직위 (1917–1923)
직위재무장관
재임 시작1922년 10월 27일
재임 종료1923년 8월 27일
총리보너 로
본인
이전 장관로버트 혼
다음 장관네빌 체임벌린
직위통상부 장관
재임 시작1921년 4월 1일
재임 종료1922년 10월 19일
총리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이전 장관로버트 혼
다음 장관필립 로이드-그레임
직위재무부 재정 차관
재임 시작1917년 6월 18일
재임 종료1921년 4월 1일
총리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동시 차관하드먼 레버 (1917–1919)
이전 차관하드먼 레버
다음 차관힐튼 영
의회 직위
직위상원 의원
신분세속 귀족
재임 시작1937년 7월 8일
재임 종료1947년 12월 14일
임기 구분세습 귀족
이전 의원작위 창설
다음 의원제2대 비우들리의 볼드윈 백작
의회영국 의회
선거구비우들리
재임 시작1908년 2월 29일
재임 종료1937년 6월 30일
이전 의원앨프리드 볼드윈
다음 의원로저 코넌트

2. 어린 시절

1867년 8월 3일 잉글랜드 우스터셔주 뷰들리의 로어파크 하우스에서 알프레드 볼드윈과 루이사 (맥도널드) 볼드윈 사이에서 태어났다.[141] 아버지는 주철업자였으며, 볼드윈 가족은 후에 리처드 토마스 앤드 볼드윈스의 일부가 된 동명의 철강업체를 소유한 부유한 가문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작가이자 시인인 러디어드 키플링과 사촌 관계였고 평생 친구로 지냈다. 1877년 키플링과 함께 에식스주 로턴에서 보낸 여름은 두 소년의 성장에 중요한 경험이었다.[6] 볼드윈은 훗날 "나는 잉글랜드 시골 한가운데, 우스터셔 중심부에 있는 마지막 남은 철공장에서 자랐다"고 회상하며 전원적인 삶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볼드윈은 당시 슬로 버킹엄셔(현재 버크셔)에 있던 세인트 마이클 스쿨과 해로 스쿨을 다녔다.[7] 그는 나중에 학교생활에 대해 "온갖 왕의 말과 온갖 왕의 사람들이 나를 학교 선생님들과 어울리게 하려고 해도 실패했을 것이며, 나는 한때 수동적 저항자로서 모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술회했다.[8]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진학하여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은 순탄치 않았는데, 해로 스쿨 재학 시절 음란한 글을 썼다는 이유로 자신을 징계했던 헨리 몽타규 버틀러가 트리니티 칼리지 학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트리니티 칼리지 토론 학회인 매그파이 앤드 스텀프에서는 활동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사임 요청을 받기도 했다. 결국 역사 과목에서 3등급을 받고 졸업했으며, 아버지의 준비로 메이슨 칼리지에서 1년간 야금술에 대한 기술 교육을 받았다.[9]

대학 졸업 후 1888년 9월, 21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경영하는 "E.P&W. 보드윈 회사"에 입사하여 가업에 종사했다. 이 회사는 20세기 초까지 150명 정도의 직원을 둔 중소기업이었으나(1914년에 500명으로 증가), 경영진과 노동자 간의 소통을 중시하는 온정주의적 경영 방식을 채택했고, 볼드윈은 모든 노동자의 이름을 기억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철강업에 정통하여 현대적인 산업가로서 평판을 얻었다. 젊은 시절에는 말번의 포병 자원봉사단에서 잠시 소위로 복무했고,[10] 1897년에는 워스터셔 카운티의 JP가 되었다.[11] 190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20만파운드 상당의 재산[15]과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이사직을 물려받았다.

1892년 9월 12일 에드워드 루커스 리즈데일의 장녀인 루시 리즈데일(루시 볼드윈, 약 1869년-1945년)과 결혼했다.[141] 1894년 사산된 첫 아이 이후, 부부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16]

부인 루시 볼드윈


순서이름생몰년비고
장녀다이애나 루시 볼드윈1895년 4월 8일 – 1982년 5월 21일리처드 먼로와 결혼 후 조지 켐프-웰치와 재혼
차녀레오노라 스탠리 볼드윈1896년 7월 10일 – 1989년 6월 23일아서 하워드와 결혼
삼녀파멜라 마가렛 볼드윈1897년 9월 16일 – 1976년 8월 14일제2대 준남작 허버트 헌팅턴-화이트리와 결혼
장남올리버 리즈데일 볼드윈1899년 3월 1일 – 1958년 8월 10일뷰들리 백작 작위 계승
사녀에스터 루이사 (베티) 볼드윈1902년 3월 16일 – 1981년 6월 22일[12][13]사라 제임스와 결혼. 1941년 런던 대공습 중 카페 드 파리 나이트클럽 폭격으로 중상을 입고 성형외과 의사 아치볼드 맥인도에게 안면 재건 수술을 받음.[14]
차남아서 윈덤 볼드윈1904년 3월 22일 – 1976년 7월 5일뷰들리 백작 작위 계승


3. 정치 생활

부인 루시 여사와 딸 다이애나와 함께


19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뷰들리 선거구에서 보수당 소속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정계 진출). 제1차 세계 대전 중 앤드루 보너 로의 의회 개인 비서를 지냈고, 1917년 로이드 조지 연립 내각에서 재무부 재정 서기(Financial Secretary to the Treasury영어)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영국의 전쟁 부채 상환을 위해 부유층의 기부를 독려했으며, 자신도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부했다. 1921년에는 무역위원회 위원장으로 승진하여 내각에 합류했으나, 이후 로이드 조지 연립 정부 해체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로이드 조지 연립 내각 하).

1922년 앤드루 보너 로가 이끄는 보수당 단독 정부가 출범하자 재무장관에 임명되어 미국과의 제1차 세계 대전 전쟁 배상금 협상을 타결했다 (→보너 로 내각 재무장관). 1923년 5월, 보너 로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첫 번째 총리 임기 동안 제국 특혜 관세 제도(Imperial Preference) 도입을 추진했으나, 보호 무역에 대한 반발로 1923년 12월 총선에서 보수당 의석이 크게 줄어들었고, 결국 1924년 1월 하원에서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사임했다 (→제1차 볼드윈 내각).

이후 램지 맥도널드가 이끄는 영국 최초의 노동당 내각 시기에는 야당 대표로서 활동했다. 그는 소련과의 관계 설정 문제와 캠벨 사건(Campbell Case) 등을 비판하며 노동당 정부를 압박했고, 특히 선거 운동 막바지에 터진 지노비예프 서한 사건을 이용하여 1924년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의 압승을 이끌었다 (→제1차 맥도널드 내각에 대한 야당 시기).

1924년 11월, 두 번째로 총리직에 올랐다. 이 시기 재무장관 윈스턴 처칠의 주도로 영국은 금본위제에 복귀했으나, 이는 석탄 산업 등에 타격을 주어 1926년 총파업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볼드윈 정부는 강경한 태도로 총파업을 진압했다. 외교적으로는 오스틴 체임벌린 외무장관의 주도로 로카르노 조약(1925년)과 켈로그-브리앙 조약(1928년) 체결에 참여했으며, 1926년 제국 회의를 통해 발푸어 선언을 발표하여 대영제국 내 자치령들의 지위를 명확히 했다. 그러나 1929년 5월 총선에서 노동당에 패배하여 다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제2차 볼드윈 내각).

1929년 출범한 제2차 맥도널드 노동당 내각이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실업 수당 문제로 분열하자, 볼드윈은 조지 5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맥도널드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맥도널드 내각에 대한 야당 시기). 1931년 8월 출범한 맥도널드 거국 내각에 추밀원 의장으로 참여했으며, 사실상 내각의 실권을 행사했다. 1931년 10월 총선에서 거국 정부 세력의 압승을 이끌었고, 1932년 대영제국 경제 회의(British Empire Economic Conference)를 통해 제국 특혜 관세 제도를 자치령 국가들에게 관철시켰다 (→맥도널드 거국 내각 추밀원 의장).

1935년 6월, 건강 문제로 사임한 맥도널드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총리직에 올랐다.[140] 이 시기 나치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재군비를 추진했으나, 라인란트 재무장과 스페인 내전 등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는 유화 정책을 고수하며 독일의 행동을 사실상 묵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36년에는 에드워드 8세가 미국인 이혼녀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려 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며 결국 국왕의 퇴위를 이끌어냈다. 1937년 5월, 조지 6세의 대관식 직후 네빌 체임벌린에게 총리직을 넘기고 정계를 은퇴했다 (→제3차 볼드윈 내각).

정계 은퇴 후 1937년 6월 뷰들리 백작(Earl Baldwin of Bewdley) 작위를 받아 상원 의원이 되었으며, 1947년 사망했다 (→말년).

3. 1. 정계 진출

1909년 스탠리 볼드윈


1900년 워스터셔 주 의회 의원이 되었으나, 지방 의원으로서는 평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06년 총선에서 볼드윈은 키더민스터 선거구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당시 자유 무역 문제를 둘러싼 당내 분열과 보수당의 전반적인 참패 속에서 낙선했다. 그러나 1908년 2월, 부친 앨프레드 볼드윈이 사망하자 그의 지역구였던 뷰들리 선거구의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자유당이 후보를 내지 않아 무투표로 당선되어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정계 입문 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6년간 야당 의원으로 활동했지만, 의회 연설은 5번에 그치는 등 눈에 띄지 않는 배후 의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보수당 당수 앤드루 보너 로의 의회 개인 비서(Parliamentary Private Secretary)를 역임했다. 1917년에는 재무부의 재정차관(Financial Secretary to the Treasury)이라는 하급 장관직에 임명되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영국의 전쟁 부채 상환을 돕기 위해 부유층의 자발적인 기부를 장려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FST"라는 필명으로 《타임스》에 여러 차례 기고했으며,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재산 5분의 1에 해당하는 12만파운드 상당의 전쟁 채권(War Loan)을 기부했다.[16] 그는 재무부에서 1916년 임명된 하드먼 레버 경과 함께 일했으나, 1919년 이후에는 볼드윈이 주로 업무를 담당했다.

애슬리 홀 근처 스투어포트온세번, 볼드윈의 1902년부터 1947년까지의 자택


비교적 늦은 나이에 정계에 입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승진은 빠른 편이었다. 1920년 국왕 탄생일 서훈에서 추밀원 고문관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는 내각의 일원인 무역위원회 의장(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으로 승진했다.[17]

1922년 후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자유당과의 연립 정부에 대한 보수당 내 불만이 커져갔다. 볼드윈은 10월에 열린 의원 총회에서 더 이상 연정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로이드 조지를 정치를 파멸로 이끌고 있는 "역동적인 힘"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회의는 당 지도부 대다수의 의사에 반하여 연정 탈퇴를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새로운 보수당 당수가 된 앤드루 보너 로는 내각을 새로 구성해야 했고, 볼드윈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이어진 1922년 11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단독으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며 정권을 잡았다.

3. 2. 로이드 조지 연립 내각 하 (1916년-1922년)



1917년, 당시 보수당 대표였던 앤드루 보너 로의 추천으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연립 내각의 재무담당 정무차관(Financial Secretary to the Treasury)으로 임명되었다.[141] 이는 보너 로와 볼드윈 아버지의 개인적인 친분 덕분이라는 시각도 있다. 재무부에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영국의 전쟁 빚을 갚기 위해 부유층의 자발적인 기부를 독려했으며, 자신도 재산의 5분의 1을 기부했다. 처음에는 하드먼 레버 경과 공동으로 직무를 수행했으나, 1919년 이후에는 주로 혼자서 담당했다. 1920년에는 추밀원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1년 4월, 상무성 회장(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으로 승진하며 내각에 합류했다. 재계 출신인 그는 재계 인사들로부터 마치 동료처럼 여겨지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에 따르면, 볼드윈은 내각 회의에서는 거의 발언하지 않았다고 한다.

1921년경부터 자유당의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연립 내각에 대한 보수당 내의 불만이 커져갔다. 볼드윈 역시 로이드 조지를 "한 정당을 약탈하고 다른 정당을 속이는 사악한 중개자", "자신과 각료 사이에 주인과 하인이라는 봉건적 관계를 설정하는 독재자", "모든 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는 작은 인물" 등으로 비판하며, 연정이 지속될 경우 의회 정치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로이드 조지가 자유당과 보수당 내 연정 지지파를 규합하여 새로운 정당을 창당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1922년 10월 19일, 칼튼 클럽에서 열린 보수당 하원의원 총회에서 볼드윈은 연정 지지 철회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로이드 조지를 "역동적인 힘(dynamic force)"이라고 지칭하며, "역동적인 힘은 두려운 것이며, 여러분을 파괴할지도 모른다. 또한 역동적인 힘은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자유당의 분열이 로이드 조지의 이러한 특성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연정이 계속될 경우 "전통 있는 보수당이 분쇄되고 파괴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연정 탈퇴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 연설은 볼드윈이 미래 보수당의 지도자감임을 인상 깊게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결국 이 회의에서 보수당이 독자적인 노선으로 선거에 임할 것을 결의(찬성 185표, 반대 88표)함에 따라 로이드 조지 내각은 총사퇴했다. 새로운 총리가 된 보너 로는 내각을 구성하면서 볼드윈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1922년 11월 15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은 단독으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며 승리했다.

3. 3. 보너 로 내각 재무장관 (1922년-1923년)

1923년 1월 5일, 볼드윈과 그의 딸


1922년 후반, 보수당 내에서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자유당과의 연립 정부에 대한 불만이 꾸준히 커지고 있었다. 볼드윈은 10월 의회 회의에서 더 이상 연정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로이드 조지를 "정치를 가로질러 파멸을 가져오고 있었던 역동적인 힘"이라고 비판했다. 회의 결과, 보수당은 당 지도부 대다수의 의사에 반하여 연정 탈퇴를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새로운 보수당 당수가 된 앤드루 보너 로는 내각을 새로 구성해야 했고, 볼드윈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1922년 11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단독으로 과반수를 확보하며 집권했다.

재무장관으로서 볼드윈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미국과의 전쟁 채무 협상 타결이었다. 1923년 1월 31일, 그는 협상을 마무리하여 영국이 제1차 세계 대전 중 미국에 진 빚 9.8억파운드을 평균 이자율 3.3%로 62년에 걸쳐 상환하기로 합의했다.

3. 4. 제1차 볼드윈 내각 (1923년-1924년)

1923년 5월 앤드루 보너 로 총리가 후두암 진단을 받고 즉시 사임했다.[18] 당시 보수당의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는 외무장관이었던 커즌 후작과 재무장관이었던 볼드윈이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국왕 조지 5세가 상급 장관들과 공무원들의 조언을 받아 후임자를 선택했지만, 실제로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일부 보수당 정치인들은 커즌이 상원 의원이라는 점, 국내 정치 경험 부족, 귀족적인 배경과 성격 등이 총리직에 부적합하다고 여겼다.[19] 결국 국왕은 볼드윈을 총리로 임명했다. 볼드윈은 처음에 재무장관직을 겸임하며 전 자유당 재무장관이었던 레지널드 매키나를 영입하려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1924년 1월, 총리 볼드윈과 외무장관 제1대 커존 후작


당시 영국은 전간기 내내 10%에 달하는 실업률 문제("감당할 수 없는 100만 명")에 시달리고 있었다. 볼드윈은 실업 문제 해결의 핵심이 영국 산업 보호에 있다고 믿었으며, 1903년 조지프 체임벌린이 주장한 제국 특혜 관세 제도(Imperial Preference영어, 보호 무역적인 관세 개혁론)의 오랜 지지자였다. 그는 1923년 11월 2일 맨체스터의 자유 무역 홀(Free Trade Hall영어)에서 외국 제품에 수입 관세를 부과하고 자치령에 특혜 관세를 부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제국 특혜 관세 제도를 제창했다. 다만, 국민들의 식량 가격 상승 우려를 고려하여 수입 밀과 육류에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보수당은 하원에서 명확한 다수당이었고 다음 총선까지 5년간 집권할 수 있었지만, 볼드윈은 이전 선거에서 보너 로가 관세 도입 없이 집권하겠다고 한 약속에 얽매여 있다고 느꼈다.[18] 또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보호 무역으로 돌아서서 오스틴 체임벌린 등과 함께 '중앙당'을 결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볼드윈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관세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조기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1월 13일 하원 해산을 선언했다.

1923년 12월 총선에서 보호 무역 정책은 주요 쟁점이 되었다. 볼드윈은 식량에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노동당자유당은 보호 무역이 식량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공세를 펼쳤다. 선거 결과, 보수당은 258석을 얻어 이전보다 87석을 잃었고, 노동당은 191석, 자유당은 159석을 확보했다.[21] 보수당은 여전히 하원 제1당이었지만 과반수를 상실했고, 핵심 공약이었던 관세 문제에서는 명확히 패배했다.[21]

볼드윈은 즉각 사임하지 않고 1924년 1월 새 의회가 개원할 때까지 총리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1월 21일, 노동당이 제출한 정부 불신임 결의안이 자유당의 지지를 얻어 가결되자, 볼드윈은 1월 22일 사임했다. 이로써 램지 맥도날드를 총리로 하는 영국 역사상 최초의 노동당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 내각 명단 ===

직책이름
영국 총리
재무장관 (1923년 8월까지)
하원 원내대표
스탠리 볼드윈[135]
대법관케이브 경
추밀원 의장솔즈베리 후작
옥새상서로버트 실 경 (1923년 12월 28일부터 첼우드 자작) [136]
내무장관브리지먼 경
외무장관
상원 원내대표
커즌 후작
식민지 장관데번셔 공작
육군장관더비 백작
인도 장관필 경
공군장관호어 경
스코틀랜드 장관노바 경
제1 해군경레오 에머리
무역위원회 의장필립 로이드-그림 (후에 필립 컨리프-리스터, 제1대 스윈튼 백작)
농업수산식품부 장관로버트 샌더스 경
교육위원회 의장에드워드 프레더릭 린리 우드 (후에 제1대 핼리팩스 백작)
노동장관앤더슨 몬태규-발로
보건장관 (1923년 8월까지)네빌 체임벌린
재무장관 (1923년 8월부터)네빌 체임벌린
보건장관 (1923년 8월부터)윌리엄 조인슨힉스
재무부 재무차관 (내각 외)윌리엄 조인슨힉스 (1923년 8월까지)
우체국 장관래밍 워딩턴-에번스


3. 5. 제1차 맥도널드 내각에 대한 야당 시기 (1924년)

1924년 1월 램지 맥도널드가 이끄는 최초의 노동당 소수 정부가 출범하자, 스탠리 볼드윈은 야당 대표가 되었다. 볼드윈은 노동당의 점진적인 사회 개량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했으며, 노동당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특히 맥도널드 총리의 외교관에 대해서는 자신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아 신뢰했다. 당시 국왕 측근이었던 스탬퍼드햄 남작 아서 비그는 "볼드윈은 맥도널드 총리를 좋아하고 신뢰한다. 그는 총리가 공산주의에 대해 냉정하고 단호하게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특정 사안에서는 노동당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1924년 3월 13일, 노동당 정부는 하원에서 처음으로 패배했으나, 보수당은 같은 날 자유당에 맞서 노동당과 함께 투표하기도 했다.[23] 해군 예산 논의에서는 노동당에 반대했지만, 3월 18일 싱가포르 해군 기지 건설 관련 지출 삭감 투표에서는 노동당을 지지하는 등 사안별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23] 또한 볼드윈은 아일랜드 정책에 관해서는 맥도널드와 협력하여 당파적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막았다.[24][25]

한편, 맥도널드 노동당 정부는 1924년 2월 소련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4월 14일부터 소련과의 일반 조약 및 상업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런던에서 시작했다. 이 협상은 8월 5일까지 영국인 재산 배상 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겪었으나, 노동당 좌파 의원들의 비공식 중재를 통해 8월 8일 타결되었다. 조약은 영국 무역 대표단에게 최혜국 대우 특권과 외교적 지위를 부여하고, 혁명 이전 영국 채권 보유자와 재산 몰수 피해자의 청구를 해결하며, 이후 영국 정부가 소련에 대한 대출을 보증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26]

보수당과 자유당은 이른바 '러시아 조약'에 강하게 반발했다. 노동당 좌파 의원들이 정부에 압력을 가해 무리하게 조약을 체결시켰다는 점과, 영국 금융 시장에서 소련 발행 채권을 정부가 보증하게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볼드윈 역시 노동당 좌파 의원들이 외교 문제에 개입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또한 영국 공산당의 J. R. 캠벨이 『워커스 위클리』에 군인들에게 파업 노동자를 향해 발포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글을 실었다. 법무총장 패트릭 헤이스팅스는 이를 1797년 반란 선동죄 위반으로 보고 캠벨을 기소했으나, 노동당 좌파 의원들의 반발로 기소를 취하하는 이른바 '캠벨 사건'(Campbell Case)이 발생했다. 볼드윈은 이 사건 역시 노동당 좌파가 사법부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결과라고 보며 강하게 비판했다.

10월 2일 뉴캐슬 연설에서 볼드윈은 "노동당은 급진주의자들에게 복종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러시아 조약을 문제 삼았다. 10월 8일 의회에서는 자유당의 애스퀴스가 러시아 조약 반대 및 캠벨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 설치 동의안을 제출했고, 보수당이 이에 찬성하면서 가결되었다.[27] 이에 맥도널드는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단행했다.

총선거 운동 기간 볼드윈은 노동당이 급진주의자들에게 지배되고 있으며 실업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전과 달리 보호 관세 공약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10월 24일에는 지노비예프 서한 사건이 발생했다.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예프가 영국 공산당에 보낸 것으로 알려진 이 서한에는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방해로 조약 비준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노동자들이 비준 투쟁을 벌여 영국의 현 체제를 전복하고 군대를 와해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더 타임스지가 이 서한과 이에 대한 영국 외무성의 항의문을 게재하면서 파문이 커졌다.

이 사건은 노동당이 소련과 연계하여 영국 내 혁명을 기도하는 정당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볼드윈과 보수당은 이를 적극 활용하여 노동당과 소련의 연계를 집중적으로 비판하며, 보수당의 '안정'과 노동당의 '적색' 이미지를 대비시키는 데 힘썼다.

10월 29일 선거 결과, 보수당은 412석을 얻어 압승했으며 노동당은 151석, 자유당은 40석 확보에 그쳤다. 이 결과 볼드윈은 다시 총리직에 오르게 되었다. 선거 후 볼드윈은 "가까운 장래에 자유당은 소멸하고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 시대가 될 것이지만, 노동당에서 공산주의자는 배제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3. 6. 제2차 볼드윈 내각 (1924년-1929년)

1924년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223석이라는 압도적인 다수를 확보하며 승리했다. 이는 상당 부분 당시 인기를 잃어가던 자유당의 의석을 가져온 결과였다. 볼드윈은 선거 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비현실성, 캠벨 사건, 그리고 지노비예프 편지 등을 주요 쟁점으로 활용했다. 특히 지노비예프 편지는 볼드윈이 진본이라 믿었으며, 보수당은 노동당 선거 운동에 타격을 주기 위해 이를 ''데일리 메일''에 유출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 편지는 위조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진다.[28] 볼드윈은 러시아와의 조약[29] 문제도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연설하기도 했다.

> 지노비예프 씨가 오늘 총리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읽으니 피가 끓는다. 한때 "러시아에 손대지 마라"는 외침이 있었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러시아에 "영국에 손대지 마라"라고 말할 때라고 생각한다.[30]

1924년 11월 4일, 볼드윈은 조지 5세 국왕의 부름을 받아 다시 총리직에 올라 제2차 볼드윈 내각을 구성했다. 이 내각에는 로이드 조지의 이전 정치적 동료였던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대표적으로 전 연립 보수당 소속이었던 오스틴 체임벌린(외무장관), 버컨헤드 경(인도 장관), 아서 밸푸어(1925년 이후 추밀원 의장)와 전 자유당 소속이었던 윈스턴 처칠(재무장관) 등이 입각했다.

제2차 볼드윈 내각의 모습, 체임벌린 외무장관, 볼드윈 총리, 처칠 재무장관.


1927년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볼드윈


캐나다 총리 W. L. 매켄지 킹(왼쪽)과 1926년 10월 제국 회의에서의 볼드윈


1926년 10월 볼드윈(오른쪽)과 에드워드 왕세자(미래의 에드워드 8세)의 대화


내각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총리 겸 하원 원내대표[137]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
대법관케이브 경(Lord Cave)
추밀원 의장 겸 상원 원내대표커즌 경
옥새상서솔즈베리 경
재무장관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내무장관윌리엄 조인슨-히크스(William Joynson-Hicks)
외무장관 겸 하원 원내대표 부대표오스틴 체임벌린(Austen Chamberlain)
식민장관레오 에머리(Leo Amery)
전쟁장관레이밍 워딩턴-이븐스(Laming Worthington-Evans)
인도장관버컨헤드 경
공군장관새뮤얼 호어
스코틀랜드 장관존 길모어 경
해군성 장관윌리엄 브리지먼 경
랭커스터 공작령 장관첼우드의 세실 경
무역위원회 의장필립 컨리프-리스터(Philip Cunliffe-Lister)
농업수산식품장관E. F. L. 우드
교육위원회 의장유스테이스 퍼시 경(Lord Eustace Percy)
공공사업국 제1위원필 경
노동장관아서 스틸-메이트랜드(Arthur Steel-Maitland)
보건장관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법무장관더글러스 호그 경



내각 구성에는 다음과 같은 변경이 있었다.


  • 1925년 4월: 커즌 경 사망 후, 밸푸어 경이 추밀원 의장직을 승계했다. 솔즈베리 경은 상원 원내대표가 되었으며, 옥새상서직을 계속 겸임했다.
  • 1925년 6월: 독립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 for Dominion Affairs) 직책이 신설되었고, 레오 에머리가 식민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the Colonies)직과 겸임했다.
  • 1925년 11월: 월터 기니스가 E. F. L. 우드의 뒤를 이어 농업부 장관이 되었다.
  • 1926년 7월: 스코틀랜드 장관(Secretary of Scotland) 직책이 스코틀랜드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 for Scotland)으로 격상되었다.
  • 1927년 10월: 쿠션던 경이 첼우드의 세실 경의 뒤를 이어 랭커스터 공작령 장관이 되었다.
  • 1928년 3월: 헤일셤 경(전 더글러스 호그)이 케이브 경의 뒤를 이어 대법관이 되었다. 그의 후임 법무장관은 내각에 포함되지 않았다.
  • 1928년 10월: 필 경이 버켄헤드 경의 뒤를 이어 인도 국무장관이 되었다. 런던데리 경이 필 경의 뒤를 이어 공공사업 제1위원이 되었다.


이 시기 영국은 1926년 총파업이라는 큰 혼란을 겪었으나, 볼드윈 정부는 이를 관리해 나갔다. 볼드윈은 파업에 반대하는 자원봉사 단체인 물자 조달 유지 기구(Organisation for the Maintenance of Supplies)를 설립하여 필수적인 업무가 계속되도록 조치했다.[31]

또한 볼드윈의 요청으로 위어 경(Lord Weir)이 이끄는 위원회는 "전기 에너지의 국내 문제"를 검토했다. 위원회는 1925년 5월 14일 보고서를 제출했고, 정부와 지역 사업체가 절반씩 자금을 지원하는 국가 독점 기업인 중앙전력부(Central Electricity Board) 설립을 권고했다. 볼드윈은 이 권고를 받아들여 1926년 말 관련 법률을 제정했다. 그 결과 1929년까지 전기 생산량은 네 배로 증가했고, 발전 비용은 감소했다. 전기 소비 가구는 1926년 75만 가구에서 1929년 900만 가구로 크게 늘어났다.

1929년 총선에서는 보수당이 노동당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원 의석수에서는 노동당이 제1당이 되어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3. 7. 제2차 맥도널드 내각에 대한 야당 시기 (1929년-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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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8. 맥도널드 거국 내각 추밀원 의장 (1931년-1935년)

1931년 9월 7일자 《타임》지 표지.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램지 맥도널드, 볼드윈


1931년, 영국과 전 세계가 대공황의 위기에 직면하자, 볼드윈과 보수당노동당 총리 램지 맥도널드와 연정을 구성했다.[39] 이 결정으로 맥도널드는 자신의 당에서 제명되었고, 볼드윈은 추밀원 의장(Lord President of the Council)으로서 점차 영향력이 약해지는 맥도널드를 대신하여 사실상 총리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35년에 다시 공식적으로 총리가 되기 전까지 이 역할을 맡았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는 왕실 인장 보관관을 겸임했다.[141]

1931년 8월 24일 맥도널드 거국 내각이 구성되었고, 볼드윈은 추밀원 의장으로 입각하였다. 비록 총리는 아니었지만, 연립 내각의 실질적인 주도권은 보수당이 쥐고 있었다. 연립 내각은 즉시 대규모 긴축 재정과 금 유출을 막기 위한 금본위제 포기 안을 하원에서 통과시켰다.

같은 해 9월 28일 각의에서 보수당 각료들은 관세 개혁을 쟁점으로 한 총선거 실시를 요구했으나, 노동당 및 자유당 출신 각료들은 반대했다. 볼드윈은 각 정당이 쟁점에 대해 자유롭게 입장을 표명할 수 있도록 하는 타협안을 제시했고, 다음 날 각의에서 체임벌린 재무장관이 "관세 개혁은 선거 후 새 내각에서 검토하되, 선거에서는 각 당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구체적인 타협안을 내놓았다. 각 정당 간 협의 끝에 10월 5일, 각 당이 자유롭게 선거 강령을 발표하기로 결정되었다.

거국 내각의 일원으로서 총선거에 임하게 된 볼드윈은, 이전과 같은 노동당 공격보다는 "건전하고, 명확하며, 명예로운 재정", "안전 제일"과 같은 보수당의 안정성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10월 20일 리즈 연설에서는 "결국 기본적인 쟁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주의도 아니고, 개인주의도 아니다. 또 자유무역도 보호무역도 아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곳에 있다. 여러분의 재산, 식량, 고용에 손해를 주지 않고, 국민을 지도하는 여당에서 선택된 정부에, 이 나라의 운명을 여러분이 위임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0월 27일 총선거 결과, 거국 정부 진영은 521석을 얻어 야당(아서 헨더슨이 이끄는 노동당 52석, 새뮤얼이 이끄는 독립 자유당 37석)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32년 7월부터 8월까지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대영제국 경제회의(British Empire Economic Conference, 오타와 회의)에 볼드윈은 영국 정부 대표로 재무장관 체임벌린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1932년 2월 체임벌린 주도로 도입된 제국 특혜 관세 제도를 제국 각 자치령 정부에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제국보다 미국과의 통상 강화를 원했던 캐나다 총리 리처드 베드퍼드 베넷이 가장 강하게 반대했으나, 볼드윈이 캐나다산 계란, 가금류, 버터, 치즈 등 유제품의 영국 수출에 대해 3년간 무관세를 적용하는 양보안을 제시하여 설득에 성공했다. 또한 육류 관세를 둘러싸고 호주 총리 스탠리 브루스와 논쟁이 있었지만, 볼드윈이 제안한 할당제를 브루스가 수용하면서 해결되었다. 8월 20일 오타와 협정이 체결되어 제국 특혜 관세 제도가 실현되었으며, 이는 1846년 자유무역 채택 이후 86년 만의 관세 정책 전환이었다.

3. 9. 제3차 볼드윈 내각 (1935년-1937년)

1935년 6월 7일, 건강이 악화된 램지 맥도널드가 사임하자 스탠리 볼드윈이 그 뒤를 이어 국민 연합 내각의 총리가 되었다. 맥도널드는 내각에 남아 추밀원 의장직을 맡았다.[57] 볼드윈은 국민 연합 내각을 유지했는데, 이는 초당파 정부라는 명분을 통해 자유당 내 반대 세력을 견제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1935년 총선'''

볼드윈의 세 번째 임기 시작 직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발발했다. 볼드윈은 이탈리아의 침략에 대응하고 국제 연맹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영국의 군사력 강화, 즉 재군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재군비 추진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기 위해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10월에는 선거 강령 기초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1월 14일에 1935년 영국 총선을 실시하기로 했다.

네빌 체임벌린노동당에 맞서 재군비를 총선의 주요 쟁점으로 삼을 것을 볼드윈에게 조언했다. 그는 총선 후에 재군비 계획을 발표하면 정부가 국민을 속였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58] 그러나 볼드윈은 선거 운동에서 재군비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국제 연맹을 지지하고 영국의 방위력을 현대화하며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대규모 군비 확장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59] 실제 선거의 주요 쟁점은 주택 문제, 실업, 그리고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특정 지역들에 대한 대책이었다.[59] 볼드윈은 "집단 안보"를 위한 군비 강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며 국제 평화를 위한 연맹의 틀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야당인 노동당은 정부의 군비 확장 계획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진입하는 이탈리아 육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이탈리아는 단기간에 에티오피아 전역을 점령했다.


선거 결과, 국가정부 연립은 이전 선거보다 92석을 잃었지만 429석(보수당 387석)으로 여전히 과반수를 차지했다. 노동당은 154석을 얻어 의석수를 크게 늘리며 제1야당으로서의 입지를 회복했다. 자유당은 21석에 그쳤다. 보수당이 다수당 지위를 유지함에 따라 볼드윈 정권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재군비 논란'''

볼드윈의 아들 A. 윈덤 볼드윈은 아버지가 1934년 초부터 재군비를 계획했지만, 당시 영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평화주의 정서(1934-35년의 평화 투표에서 드러난) 때문에 이를 비밀리에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60] 그는 1935년 총선 승리가 재군비를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다고 보았다.

실제로 내각은 1934년 7월, 영국 왕립 공군(RAF)을 5년 안에 40개 비행대대만큼 증강하는 계획을 승인했다.[61] 그러나 같은 해 11월, 루프트바페가 1년 안에 RAF와 동등한 규모가 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내각은 공군 재군비 기간을 2년으로 단축하기로 결정했다.[62] 윈스턴 처칠나치 독일의 재군비 속도를 경고하며 영국 공군 예산 증액을 강력히 요구했다.[65] 볼드윈은 처음에는 독일 공군력이 영국 공군의 50% 미만이라고 반박하며[66] 영국 공군이 독일 공군보다 우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1935년 5월에는 독일 공군력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증강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67] 그는 하원에서 "미래에 대한 저의 추정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저는 완전히 틀렸습니다."라고 시인하며[68] 공군력 증강 계획을 대폭 수정했다.[62]

1936년에는 영국 해군 확장과 영국 육군의 재장비(병력 증강은 제외), 그리고 유사시 군수품 생산을 위한 민간 운영 공장인 "그림자 공장" 설립이 승인되었다.[69]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군비 속도는 독일의 위협에 비해 여전히 느리다는 비판이 계속되었다. 1936년 11월, 처칠은 하원에서 정부의 재군비 지연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결정하지 않고, 결의하기 위해서는 우유부단하고... 전능하기 위해서는 무력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볼드윈은 1933-34년의 강한 평화주의 여론 속에서는 재군비를 공개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웠으며, 1935년 총선 승리를 통해 비로소 재군비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얻었다고 해명했다.[70] 그러나 이 발언은 선거 승리를 위해 국가 안보 문제를 뒤로 미뤘다는 비판을 자초했다.[71]

볼드윈은 처칠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가 전시 총리가 되어야 하지만 평시 내각에 참여시키는 것은 국론 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72][73] 한편, 노동당은 재군비 프로그램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74][52][76][77]

'''대외 정책: 유화 정책'''

나치 독일의 등장 이후, 볼드윈 정부는 기본적으로 유화 정책을 추구했다. 이는 나치의 반공주의적 성향을 이용하여 독일을 소련 공산주의 확산의 방파제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볼드윈은 1936년 보수당 의원 모임에서 히틀러가 동쪽으로 진출하여 볼셰비키와 싸우기를 바란다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1936년 3월,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라인란트를 재무장했을 때, 프랑스는 군사적 대응을 포함한 강경책을 영국에 제안했다. 그러나 볼드윈은 "영국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며 사실상 독일의 행동을 묵인했다. 이는 히틀러의 영토 확장 야욕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1936년 7월 발발한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도 볼드윈 정부는 엄격한 불개입 정책을 고수했다.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에게 "프랑스나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소련 편에 서서 참전하게 하려는 음모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며, 내전이 유럽 전체의 전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개입 정책은 결과적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지 않고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 반란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에드워드 8세 퇴위 위기'''

스탠리 볼드윈 총리


1936년 유고슬라비아에서 휴가를 보내는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프슨


1936년 1월, 조지 5세가 서거하고 그의 장남인 에드워드 8세가 즉위했다. 새 국왕은 친독 성향을 보였으며 국정, 특히 외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하여 볼드윈 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라인란트 재무장 당시 국왕이 독일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정적인 위기는 국왕이 미국인 이혼녀 월리스 심프슨과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불거졌다. 볼드윈을 비롯한 정부와 보수당 지도부는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고 외국인인 심프슨 부인이 영국의 왕비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심프슨 부인이 주영 독일 대사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가깝게 지낸다는 점[78], 그리고 당시 영국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와 영국 국교회의 교리 등이 반대의 주요 원인이었다.[79] 볼드윈은 국왕에게 결혼을 단념하거나 왕위를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국왕은 심프슨 부인을 정식 왕비가 아닌 콘월 공작 부인과 같은 낮은 지위로 결혼하게 해달라는 귀천상혼 방안을 제시했지만, 볼드윈은 내각과 영연방 자치령 정부들의 반대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윈스턴 처칠 등 일부 정치인들이 국왕을 지지하며 '국왕파'를 형성하려 했으나, 의회 다수와 노동당, 자유당, 그리고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주요 자치령 정부들은 볼드윈 정부의 입장을 지지했다.[84][86][90]

"내가 물러서겠다"는 월리스 부인의 발언을 전하는 신문. 그러나 국왕은 그 다음 날 퇴위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지, 12월 8일자)


결국 에드워드 8세는 1936년 12월 10일 퇴위를 선택했고, 볼드윈은 하원에서 국왕의 결정을 발표하며 위기를 마무리 지었다. 볼드윈은 이 연설에서 국왕의 개인적인 의지보다 공적인 의무가 우선함을 강조하며 퇴위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95] 볼드윈은 이 위기를 정치적 문제에서 헌법적 원칙의 문제로 전환시켜 해결함으로써 군주제의 안정을 지키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6][84][98]

'''정계 은퇴'''

에드워드 8세의 퇴위와 조지 6세의 즉위라는 큰 사건을 마무리 지은 후, 볼드윈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날 준비를 했다. 조지 6세의 대관식이 끝난 직후인 1937년 5월 28일, 볼드윈은 총리직과 보수당 당수직에서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그는 마지막 각료회의에서 오랫동안 맡아왔던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의 후임으로는 네빌 체임벌린이 총리 및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내각 구성 (1935년 6월 ~ 1937년 5월)'''

직책이름임기 시작임기 종료
총리 겸 하원 원내대표스탠리 볼드윈1935년 6월1937년 5월 [138]
대법관더글러스 호그1935년 6월1937년 5월
추밀원 의장램지 맥도널드1935년 6월1937년 5월
옥새상서 겸 상원 원내대표런던데리 경1935년 6월1935년 11월
옥새상서 겸 상원 원내대표핼리팩스 경1935년 11월1937년 5월
재무장관네빌 체임벌린1935년 6월1937년 5월
내무장관 겸 하원 부대표존 사이먼 경1935년 6월1937년 5월
외무장관새뮤얼 호어 경1935년 6월1935년 12월
외무장관앤서니 이든1935년 12월1937년 5월
식민장관맬컴 맥도널드1935년 6월1935년 11월
식민장관J. H. 토머스1935년 11월1936년 5월
식민장관윌리엄 오름즈비-고어1936년 5월1937년 5월
자치령 장관J. H. 토머스1935년 6월1935년 11월
자치령 장관맬컴 맥도널드1935년 11월1937년 5월
육군장관핼리팩스 경1935년 6월1935년 11월
육군장관더프 쿠퍼1935년 11월1937년 5월
인도장관젯랜드 경1935년 6월1937년 5월
공군장관스윈턴 경1935년 6월1937년 5월
스코틀랜드 장관고드프리 콜린스1935년 6월1936년 10월
스코틀랜드 장관월터 엘리엇1936년 10월1937년 5월
해군성 제1차관볼턴 아이레스-몬셀1935년 6월1936년 6월
해군성 제1차관새뮤얼 호어 경1936년 6월1937년 5월
통상위원회 위원장월터 런시먼1935년 6월1937년 5월
농무장관월터 엘리엇1935년 6월1936년 10월
농무장관윌리엄 모리슨1936년 10월1937년 5월
교육위원회 위원장올리버 스탠리1935년 6월1937년 5월
노동장관어니스트 브라운1935년 6월1937년 5월
보건장관킹즐리 우드1935년 6월1937년 5월
공공사업 제1차관윌리엄 오름즈비-고어1935년 6월1936년 5월
공공사업 제1차관스탠호프 경1936년 5월1937년 5월
무임소 장관 (국제연맹 담당)앤서니 이든1935년 6월1935년 12월
무임소 장관 (정부 정책 담당)유스테이스 퍼시 경1935년 6월1936년 3월
국방조정장관토머스 인스킵1936년 3월1937년 5월
교통부 장관레슬리 호어벨리샤1936년 10월1937년 5월


4. 말년 (1937년-1947년)

우스터 대성당에 있는 볼드윈 부부의 묘


조지 6세의 대관식 이후, 볼드윈은 1937년 5월 27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총리로서 그의 마지막 조치 중에는 국회의원 연봉 인상과 야당 당수에 대한 봉급 지급 결정이 있었다.[99] 퇴임 다음 날인 5월 28일에는 가터 기사단 기사(KG)로 임명되었고,[100] 6월 8일에는 '''뷰들리 백작'''(Earl Baldwin of Bewdley) 및 코브데일 자작(Viscount Corvedale) 작위를 받아 영국 상원 의원이 되었다.[16][101][139]

퇴임 후 볼드윈의 삶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러나 그가 총리 시절 추진했던 유화 정책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그의 정치적 명성에 큰 오점으로 남았다. 특히 네빌 체임벌린 사후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으며, 전쟁 중에는 전쟁 물자 생산을 위해 자신의 시골 저택 철문을 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언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전쟁 기간 동안 윈스턴 처칠 총리는 아일랜드의 중립 유지 문제와 관련하여 단 한 차례 볼드윈에게 자문을 구하는 데 그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938년 12월, 볼드윈은 BBC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탈출한 유대인과 다른 난민들을 돕기 위한 기금 모금을 호소하는 등 인도주의적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102] 이로 인해 나치 독일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103] '난민을 위한 볼드윈 경 기금'은 50만파운드 이상을 모금하여 킨더트랜스포트와 같은 구호 활동을 지원했다.[104] 1940년 7월에는 덩케르크 철수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앙과 국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아 할리팩스 경에게 편지를 보냈다.[112]

1945년 6월, 부인 루시가 세상을 떠났다.[141] 볼드윈 자신도 말년에는 관절염을 앓아 지팡이에 의지해야 했다. 그의 마지막 공식 석상 참석은 1947년 10월 런던에서 열린 조지 5세 동상 제막식이었다. 당시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았던 그는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군중에게 "내게 야유하는 건가?"라고 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22]

1930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직을 맡아왔던 볼드윈은 1947년 12월 14일, 우스터셔주 스투어포트온세번 근처 애슬리 홀 자택에서 80세를 일기로 수면 중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우스터 대성당에 아내와 함께 안치되었다.[16] 백작 작위는 장남 올리버가 계승했다.[141]

5. 유산

볼드윈은 본질적으로 일국보수주의 성향의 보수당 정치인이었다.[16] 1937년 퇴임 당시에는 많은 칭찬을 받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네빌 체임벌린, 맥도날드와 더불어 볼드윈은 1939년 전쟁 직전 영국의 군사적 준비 부족 상태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그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당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서 평화주의적 유화 정책이 지배적인 정치적 견해였으며, 국민적 합의 없이는 공격적인 재무장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볼드윈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가 나치 독일의 독재자에게 영국이 공격당해도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주었다고 확신했다. 정치적 경쟁자들에게 관대했던 처칠조차 볼드윈에게는 예외였다. 1947년 볼드윈의 80세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거절하며 "나는 스탠리 볼드윈에게 악의를 품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살지 않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처칠은 또한 "역사상 가장 불필요한 전쟁"으로 이어진 정책에 대해 체임벌린보다 볼드윈이 후대에 더 큰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처칠은 자신의 "제2차 세계 대전사" 제1권 (''폭풍의 전조'')에서 볼드윈이 "국가보다 당을 우선시했다고 인정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볼드윈이 더 공격적인 재무장 정책을 추진했다면 1935년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그러나 처칠은 볼드윈이 실제로는 1933년 풀럼 보궐선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1935년 선거 이후 "우리는 국가로부터 아무도 12개월 전에는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을 일(상당한 재무장 프로그램)을 하는 권한을 얻었습니다"라고 한 볼드윈의 실제 발언은 생략했다.[126] 볼드윈의 사망 당시 추도 연설에서 처칠은 "그는 내가 공직 생활에서 만난 가장 무서운 정치인이었다"고 말하며 양날의 검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127]

애슬리 홀 근처의 스탠리 볼드윈 기념비


볼드윈에 대한 비판은 전쟁 발발 전후로 거세졌다. 피터 하워드는 1939년 9월 3일 ''선데이 익스프레스'' 기고에서 볼드윈이 재무장을 하지 않고 1935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가가 직면한 위험을 속였다고 비난했다.[123] 1940년 5월 프랑스 전투 당시 로이드 조지는 처칠과 아이언사이드 장군과의 대화에서 볼드윈을 비난하며 "그는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다.[124] 1940년 7월에는 베스트셀러인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이 출판되어 볼드윈의 재무장 실패를 비난했고, 1941년에는 해밀턴 파이프와 A. L. 로우스 등이 같은 혐의로 그를 비판했다. 특히 로우스는 볼드윈이 국민들을 허황된 안전감에 빠뜨렸고 "국민을 속이는 기술"의 전문가라고 혹평했다.

그가 권력을 잡았던 메뚜기떼처럼 황폐했던 세월의 결과로 그의 조국이 겪고 있는 시련을 생각할 때, 이 사람은 고요한 밤의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할까요?[125]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볼드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48년 레지널드 바셋은 처칠이 제기한 "국가보다 당을 우선시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볼드윈이 언급한 것은 재무장 문제로 총선에서 패배할 위험이 있던 1933년과 1934년의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128] 1952년 G. M. 영은 볼드윈의 공식 전기를 통해 그가 국가를 통합하고 노동당의 정책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영 역시 재무장 지연과 당 우선주의 비판은 수용하며 1935년에 은퇴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전기는 처칠과 비버브룩의 항의로 일부 내용이 수정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129] D. C. 소머빌은 1953년 영의 전기에 반박하며 볼드윈을 옹호하려 했지만, 1955년 C. L. 모왓은 두 전기 모두 볼드윈의 명성을 회복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30] 볼드윈의 아들 A. W. 밸드윈도 1956년 아버지를 옹호하는 전기를 출판했으나, 비판의 초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131]

1960년대 이후 정부 기록이 공개되면서 보다 균형 잡힌 평가가 등장했다. 1967년 랩 버틀러는 ''더 스펙테이터'' 기고에서 볼드윈의 온건한 정책이 사회적 분열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옹호했다. 1969년에는 키스 미들마스와 존 바네스가 볼드윈을 옹호하는 방대한 분량의 전기를 출판했다.

1998년 역사가 앤드류 소프는 전쟁과 평화 문제를 제외하면 볼드윈에 대한 평판이 엇갈린다고 지적했다. 그는 볼드윈이 사회적 빈곤에 공감했지만 실제 입법에는 소극적이었고, 경제 시스템 개입을 체계적으로 회피했으며, 때로는 불성실함을 포함한 무자비한 스타일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의 고문들이 2선급 인물들이었으며, 볼드윈 자신이 신경증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으로 1936년 신경 쇠약으로 3개월간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반면, 소프는 볼드윈이 연정의 훌륭한 조정자였으며 동료들의 소규모 개혁을 막지 않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26년 총파업 처리에는 "단호하고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보였지만, 이후 제정된 엄격한 노동쟁의법은 지나치게 우파적이라 여겨 싫어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1936년 에드워드 8세 퇴위 위기를 능숙하게 처리하여 영광 속에 퇴임할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소프는 볼드윈이 추진력 부족, 비관주의, 외교 문제 소홀 등의 단점이 있었지만, 자본주의와 의회 제도 유지, 사회주의에 맞서 보수당을 강화한다는 주요 목표는 달성했다고 결론지었다.[132]

1999년 필립 윌리엄슨은 볼드윈의 신념을 설명하고 그의 정책을 옹호하는 수필 모음집을 출판했다. 그는 당시 평화주의적 유화 정책이 대세였기 때문에 볼드윈이 국민적 합의 없이 재무장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볼드윈이 "1930년대 중반 재무장에 대한 도덕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것이 "뮌헨 이후의 국민적 저항 정신"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133] 윌리엄슨은 볼드윈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이 주로 당파적 정치, 처칠에 대한 과도한 칭송, 선택적 회상, 그리고 1940년 영국의 위기에 대한 희생양 찾기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며, 1960년대 이후 정치적 거리두기와 정부 기록 공개로 더 균형 잡힌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았다.[134]

2004년 스튜어트 볼은 볼드윈에 대한 평가가 "추는 거의 완전히 긍정적인 견해로 기울었다"고 보고했다. 그는 "밸드윈은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고, 어쩌면 그 상황에서 가능한 만큼 많은 일을 했다고 여겨지지만, 그것은 침략자를 단념시키거나 그들의 패배를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볼드윈이 현대 시대의 온건하고 포용적인 보수주의자, 즉 '일국가 전통'의 일부로 재발견되고 있음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평가했다.[16]

피터 클락은 볼드윈의 기조를 노동당에 분명히 반대하면서도 계급 투쟁과 같은 강경한 수사를 피하고 온건한 합의를 추구하는 신보수주의로 규정했다. 그는 볼드윈이 세부 정책 결정보다는 대중적 이미지 관리에 능했으며, 국내 정책에서는 처칠네빌 체임벌린에게 크게 의존했다고 지적했다. 역사가 시먼은 볼드윈이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안정적인 지방 중산층 출신으로서, 당시 새로운 매스미디어인 신문과 라디오를 능숙하게 활용하여 일반 대중에게 안정감을 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고 분석했다. 케네스 베이커는 볼드윈의 본질적인 강점이 회유, 양보, 합의 도출 능력에 있었으며, 특히 평시의 분쟁 해결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고 평가했다.[144]

볼드윈의 사촌인 시인이자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


개인적으로 볼드윈은 온화한 성격으로 사람에게 명령하는 것을 어려워했으며, 동료 각료들의 음모나 질투에도 비교적 관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밭일과 원예를 좋아하고 자연 속 산책을 즐기는 등 소박한 면모를 지녔다. 또한 문학적 재능도 있어, 그의 사촌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러디어드 키플링은 "스탠리(볼드윈)는 일족 중에서 진정한 문인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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