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대프랑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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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1805년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나폴리, 스웨덴이 프랑스 제1제국에 대항하여 결성한 동맹이다. 1792년부터 이어진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일환으로, 영국은 프랑스의 해상 봉쇄를 강화했고,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을 계획했지만,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하며 좌절되었다. 육상에서는 울름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며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통해 동맹에서 이탈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라인 동맹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는 등 유럽 정세를 재편하며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의 결성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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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대프랑스 동맹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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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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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러시아 역사학: 러시아-오스트리아-프랑스 전쟁 () 프랑스: 1805년 오스트리아 전역 () 또는 1805년 독일 전역 () |
일부 | 나폴레옹 전쟁 및 대프랑스 동맹 |
기간 | 1805년 4월 11일 – 1806년 7월 18일 |
장소 | 중앙유럽, 이탈리아, 대서양 |
결과 | 프랑스-스페인 승리 |
상세 결과 | 프레스부르크 조약 프랑스 제국의 통치 강화 라인 동맹 형성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수개월 후 제4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 |
교전 세력 | |
동맹군 |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나폴리 시칠리아 스웨덴 |
프랑스 연합군 | 프랑스 바타비아 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에트루리아 스페인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
지휘관 및 지도자 | |
동맹군 | 프란츠 1세 카를 대공 카를 마크 폰 라이베리히 윌리엄 피트 윌리엄 그렌빌 호레이쇼 넬슨 커스버트 콜링우드 로버트 칼더 알렉산드르 1세 미하일 쿠투조프 표트르 바그라티온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북스회브덴 페르디난도 4세 구스타브 4세 아돌프 |
프랑스 연합군 | 나폴레옹 1세 피에르 오주로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루이-니콜라 다부 장 란 오귀스트 드 마르몽 앙드레 마세나 에두아르 모르티에 조아킴 뮈라 미셸 네 니콜라-장 드 듀 술트 피에르-샤를 빌뇌브 막시밀리안 1세 카를 필리프 폰 브레데 루트허르 얀 스힘멜페닌크 카렐 헨드릭 베르 휄 외젠 드 보아르네 카를로스 4세 페데리코 그라비나 |
병력 규모 | |
동맹군 | 알 수 없음 |
프랑스 연합군 | 알 수 없음 |
피해 규모 | |
동맹군 | 오스트리아 제국: 사상자 20,000명 포로 70,000명 러시아: 사상자 25,000명 포로 25,000명 나폴리: 사상, 부상 또는 포로 20,000명 총 사상자: 사상, 부상 또는 포로 160,000명 |
프랑스 연합군 | 프랑스: 사망 13,500명 부상 37,000명 포로 5,000명 이탈리아: 사망 350명 부상 1,900명 스페인: 사망 1,200명 부상 1,600명 바이에른: 사망 300명 부상 1,200명 총 사상자: 사상, 부상 또는 포로 62,050명 |
2. 배경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은 프랑스 혁명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1792년 이래 유럽은 프랑스 혁명 전쟁에 휘말렸으며, 1797년 프랑스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격파했다. 1798년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으나 1801년 패배했고, 영국만이 프랑스에 적대적인 국가로 남았다.
2. 1. 프랑스 혁명 전쟁
유럽은 1792년부터 프랑스 혁명 전쟁에 휘말렸다. 5년간의 전쟁 끝에, 1797년 프랑스 공화국은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의 군대를 제압했다.[4] 1798년에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지만, 이 또한 1801년까지 패배하여 영국만이 새로운 프랑스 통령 정부의 유일한 적수로 남게 되었다.[4]2. 2. 아미앵 조약과 그 이후
1802년 3월, 프랑스와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적대 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10년 만에 유럽 전체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양측 간에는 많은 문제들이 남아 조약 이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영국군이 몰타에서 철수하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5] 나폴레옹이 아이티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긴장은 더욱 악화되었다.[6]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지속적인 갈등은 결국 1803년 5월 18일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이끌었다.3. 동맹
1803년 5월,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후 영국은 해상 봉쇄를 통해 프랑스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본토 침공을 계획하고 도버 해협에 위치한 불로뉴에 18만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영국은 1805년 4월 11일 다른 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대항했다. 다만, 프로이센은 중립을 유지했다.
3. 1.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참가국
1805년 러시아 제국군은 많은 면에서 구체제 군사 조직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연대 이상의 영구적인 편성은 없었고, 고위 장교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외국인 포함)이었으며, 당시 러시아 군인은 규율 주입을 위해 정기적으로 구타와 처벌을 받았다.[15] 많은 하급 장교들은 훈련이 부족했고, 때로는 복잡한 전투 기동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훌륭한 포병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포가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치열하게 싸웠다.[15]
카를 대공은 1801년 오스트리아군을 개혁하기 시작하여 오스트리아 군대의 의사 결정을 담당하는 군사 정치 위원회인 호프크리그스라트로부터 권한을 빼앗았다.[16] 카를은 오스트리아 최고의 야전 사령관이었지만,[17] 황실에서는 인기가 없었고, 그의 조언에 반하여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을 때 많은 영향력을 잃었다. 카를 막은 오스트리아군의 새로운 주요 사령관이 되었고, 전쟁 직전에 보병 개혁을 시행하여 연대는 6개 중대 3개 대대 대신 4개 중대로 구성된 4개 대대로 구성하도록 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는 장교 훈련 없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새로운 부대는 제대로 지휘되지 못했다.[18]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유럽 최고로 여겨졌지만, 많은 기병대가 다양한 보병 부대에 분산 배치되어 프랑스군에 비해 집중적인 공격력을 발휘하지 못했다.[18]
3. 2. 프로이센의 중립
1805년 4월 11일, 영국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과 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15]4. 주요 전역
프랑스군은 불로뉴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내륙 방비가 허술했다. 오스트리아는 이 틈을 노려 카를 마크 폰 레이베리히가 이끄는 7만 명의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바이에른으로, 카를 대공이 이끄는 부대를 이탈리아로 침공시켰다.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도 바이에른으로 침공하여 양군은 협동하여 바이에른군을 격파하고 뮌헨을 함락시켰다.[45]
1805년 8월 29일, 프랑스군 대부대는 불로뉴를 떠나 6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당시 군사 상식을 뛰어넘는 속도로 이동하여 9월 말 라인 방면에 집결했다. 프랑스군의 동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레이베리히는 울름까지 군대를 전진시켰지만, 완전히 기습을 받았다. 9월 25일부터 10월 20일에 걸친 울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전략적으로 포위하는 데 성공했고, 10월 20일 레이베리히는 항복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로 침공하여 11월 14일 빈에 입성했다.[45]
4. 1. 울름 전역 (1805년)
1805년 8월 29일, 프랑스군은 불로뉴를 떠나 당시 군사 상식을 뛰어넘는 600km 남짓의 속도로 이동하여 9월 말 라인 방면에 집결했다. 프랑스군의 동향을 완전히 포착하지 못한 레이베리히는 울름까지 군대를 전진시켰지만 완전히 허를 찔리게 되었다. 9월 25일부터 10월 20일에 이르는 《울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전략적 포위에 성공, 10월 20일 레이베리히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후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로 침공하여 11월 14일 빈에 입성했다.[45]
4. 1. 1. 오스트리아군의 계획과 준비
막 장군은 오스트리아의 안보가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 동안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독일 남부의 산악 지대인 검은 숲 지역의 틈새를 봉쇄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막은 중앙 독일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막은 울름 시를 그의 방어 전략의 핵심으로 삼기로 결정했는데, 이 전략은 미하일 쿠투조프 휘하의 러시아군이 도착하여 나폴레옹에 불리한 전황을 바꿀 때까지 프랑스군을 억류하는 것이었다. 울름은 강력하게 요새화된 미헬스베르크 고지에 의해 보호받았고, 막은 그 도시가 외부 공격으로부터 사실상 난공불락이라는 인상을 받았다.[22]치명적으로, 궁정 군사 회의는 오스트리아군의 주요 작전 무대를 북부 이탈리아로 결정했다. 카를 대공에게는 95,000명의 병력이 배정되었고, 초기 목표로 만토바, 페스키에라, 밀라노를 확보하며 아디제 강을 건너도록 지시받았다.[23] 요한 대공에게는 23,000명의 병력이 주어졌고, 그의 형인 카를과 그의 사촌인 페르디난트 사이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면서 티롤 백국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자의 병력은 72,000명으로, 바이에른을 침공하여 울름에서 방어선을 유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마크가 실질적으로 통제했다.[23] 오스트리아군은 또한 포메라니아에서 스웨덴군과, 나폴리에서 영국군과 함께 활동하도록 개별 군단을 파견했지만, 이는 프랑스군을 혼란시키고 그들의 자원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4. 1. 2. 프랑스군의 계획과 준비

1805년 8월,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대의 시선을 영국 해협에서 라인강으로 돌렸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은 울름 작전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는 막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 군대를 포위하기 위해 프랑스와 바이에른 군대가 벌인 일련의 군사 기동과 전투였다.

1796년과 1800년의 두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다뉴브 전역을 프랑스군의 주요 목표로 삼았지만, 두 경우 모두 이탈리아 전역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궁정 회의는 나폴레옹이 다시 이탈리아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폴레옹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21만 명의 프랑스군이 불로뉴 진영에서 동쪽으로 진격하여, 만약 슈바르츠발트 방향으로 계속 진격한다면 노출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할 것이었다.[24]
한편, 요아킴 뮈라 원수는 프랑스군이 서-동 축으로 직접 진격하는 것처럼 오스트리아군을 속이기 위해 슈바르츠발트를 가로질러 기병 부대를 운용할 것이었다. 독일에서의 주 공격은 다른 전역에서의 프랑스군 공격으로 지원될 것이었다. 앙드레 마세나 원수는 5만 명의 병력으로 이탈리아에서 카를 대공과 대치할 것이고, 로랑 구비옹 생 시르 원수는 2만 명의 병력으로 나폴리로 진격할 것이며, 기욤 마리 안 브룬 원수는 영국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3만 명의 병력으로 불로뉴를 순찰할 것이었다.[25]
요아킴 뮈라 원수와 앙리 그라티앵 베르트랑 장군은 티롤과 마인강 경계 지역 사이에서 정찰을 수행했고, 계획 참모장인 안 쟝 마리 르네 사바리 장군은 라인강과 다뉴브강 사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도로 조사를 작성했다.[25] 그랑 다르메프랑스어의 좌익은 하노버와 위트레흐트에서 뷔르템베르크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할 것이고, 우익과 중앙은 해협 연안에서 온 병력으로, 만하임과 스트라스부르와 같은 도시 주변의 미텔라인을 따라 집결할 것이었다.[25] 뮈라가 슈바르츠발트를 가로질러 시위를 벌이는 동안, 다른 프랑스군은 독일의 중심부를 침공하여 아우크스부르크를 점령함으로써 남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이었고, 이는 막을 고립시키고 오스트리아의 통신선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25]
4. 1. 3. 프랑스군의 침공

1805년 8월,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대의 시선을 영국 해협에서 라인강으로 돌렸다. 마크는 9월 22일 일러 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울름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9월 마지막 3일 동안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으로 진입하기 위한 맹렬한 행군을 시작했다. 마크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 영토를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이 프로이센 안스바흐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후퇴하여 군대 대부분을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고 울름을 방어하기로 결정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26]
10월 5일, 나폴레옹은 미셸 네 원수에게 장 란 원수, 니콜라 장 드 디외 술트 원수, 뮈라와 합류하여 도나우뵈르트에서 다뉴브 강을 건너도록 명령했다.[28]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이 울름에 집결해 있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고, 프랑스군 상당 부분을 도나우뵈르트 주변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10월 6일, 3개의 프랑스 보병 및 기병 군단이 마크의 탈출로를 봉쇄하기 위해 도나우뵈르트로 향했다.[29]
프랑스군은 불로뉴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내륙 방비가 허술했다. 오스트리아는 이 틈을 노려 카를 마크 폰 레이베리히가 이끄는 7만 명의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바이에른으로 침공시켰다. 8월 29일, 프랑스군 대부대는 불로뉴를 떠나 6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당시 군사 상식을 뛰어넘는 속도로 이동하여 9월 말 라인 방면에 집결했다. 프랑스군의 동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레이베리히는 울름까지 군대를 전진시켰지만, 완전히 기습당했다. 9월 25일부터 10월 20일에 걸친 울름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전략적으로 포위하는 데 성공했고, 10월 20일 레이베리히는 항복했다.
4. 1. 4. 베르팅겐 전투
1805년 10월 8일, 베르팅겐 전투는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벌어진 첫 번째 주요 전투였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마크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기 위한 울름 작전의 일환이었다.마크는 자신의 위치가 위험함을 인지하고 공세로 전환하여 귄츠부르크 주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나폴레옹의 보급선을 공격하려 했다. 그는 키엔마이어에게 나폴레옹을 뮌헨과 아우크스부르크 방향으로 더 동쪽으로 유인하라고 지시했다. 나폴레옹은 마크가 도나우강을 건너 자신의 중앙 기지에서 멀어질 가능성은 낮게 보았지만, 귄츠부르크의 다리를 점령하면 큰 전략적 이점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30]
이 목표를 위해 나폴레옹은 네 원군을 귄츠부르크로 보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주력 부대 역시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10월 7일, 마크는 아우펜부르크에게 5,000명의 보병과 4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귄츠부르크에서 베르팅겐으로 이동하여 울름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주공세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31]
뮈라의 기병 사단(낭수티의 흉갑기병 포함)이 먼저 도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고, 곧 우디노의 근위 보병이 합류하여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했다. 아우펜부르크는 남서쪽으로 후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오스트리아군은 1,000명에서 2,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32] 이 전투는 프랑스의 손쉬운 승리로 끝났다.
4. 1. 5. 하슬라흐-융겐 전투와 엘칭겐 전투
1805년 10월 11일, 네 원수는 울름에 대한 공세를 재개했다. 네의 제2사단과 제3사단은 도나우강 우안을 따라 도시로 진격하고, 뒤퐁의 사단은 기병 사단의 지원을 받아 울름으로 직접 진격하여 도시 전체를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네는 오스트리아군 전체가 울름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35]뒤퐁 사단의 제32 보병 연대는 하슬라흐에서 울름으로 진격하다가 볼핑겐을 점령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연대 4개와 맞닥뜨렸다. 제32 연대는 격렬한 공격을 여러 차례 감행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굳건히 방어하며 모든 공격을 격퇴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융겐으로 더 많은 기병대와 보병 연대를 투입하여 뒤퐁 부대를 포위하려 했다. 뒤퐁은 이를 감지하고 융겐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최소 1,000명의 포로를 잡았다.[37] 오스트리아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뒤퐁의 부대는 하슬라흐로 후퇴했고, 프랑스군은 하슬라흐를 사수했다. 결국 뒤퐁은 다이에르의 병력이 있는 알베크로 후퇴했다. 하슬라흐-융겐 전투가 나폴레옹의 계획에 미친 영향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황제는 마침내 오스트리아군 대부분이 울름에 집결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38]
이 시점에서 오스트리아 지휘부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페르디난트는 마크의 지휘 스타일과 결정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마크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앞뒤가 맞지 않는 명령을 내려 오가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40] 10월 13일, 마크는 북쪽으로 돌파하기 위해 울름에서 두 개의 대열을 내보냈다. 하나는 요한 지기스문트 리에슈 장군 휘하로 엘칭겐으로 향하여 그곳의 다리를 확보하고, 다른 하나는 프란츠 폰 베르네크 휘하로 대부분의 중포와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41] 네는 뒤퐁과 다시 연락을 취하기 위해 군단을 서둘러 전진시켰다. 네는 도나우강 우안의 엘칭겐 남쪽으로 병력을 이끌고 공격을 시작했다. 측면의 들판은 부분적으로 숲이 우거진 범람원이었고,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언덕 마을인 엘칭겐으로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42]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 전초 부대를 몰아냈고, 한 연대는 대담하게 공격하여 언덕 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을 총검으로 점령했다. 오스트리아 기병대 또한 격파되었고, 리에슈의 보병은 도주했다. 네는 그의 인상적인 승리에 대한 공로로 "엘칭겐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43]
4. 1. 6. 울름 전투
1805년 8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군대의 시선을 영국 해협에서 라인강으로 돌렸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은 울름 작전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막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 군대를 포위하기 위한 프랑스와 바이에른 군대의 일련의 군사 기동과 전투였다.
10월 14일, 뮈라의 부대는 알베크에서 뒤퐁과 합류하여 베르네크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했다. 뮈라와 뒤퐁은 함께 북쪽으로 헤이덴하임 방향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14일 밤, 두 개의 프랑스 군단이 울름 외곽 미셸스베르크의 오스트리아군 야영지 근처에 주둔했다.[44] 마크는 북쪽 강둑을 따라 탈출할 희망이 없었고, 마르몽과 황실 근위대는 남쪽 울름 외곽에, 술트는 멤밍겐에서 남쪽의 티롤로 탈출하는 오스트리아군을 막고 있었다.[44] 페르디난트는 마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울름에서 6,000명의 기병을 철수시켰다.[45] 뮈라는 베르네크를 추격하여 10월 19일 트로히텔핑겐에서 8,000명의 병사와 함께 항복시켰고, 500대의 차량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야전 공원 전체를 점령한 다음 노이슈타트로 진격하여 12,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을 포획했다.[45]
10월 15일, 네의 부대는 미셸스베르크 야영지를 공격했고, 16일에는 프랑스군이 울름을 포격했다. 오스트리아군의 사기는 최저점에 달했고 마크는 구원 희망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0월 17일, 세귀르는 마크와 협약을 체결하여 오스트리아군은 10월 25일에 항복하기로 합의했다.[45] 그러나 마크는 헤이덴하임과 네레샤임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10월 20일 항복했다. 오스트리아 주둔군 10,000명이 탈출했지만, 대다수는 21일에 항복했다.[45]
4. 2. 트라팔가 해전 (1805년)

프랑스가 영국 본토에 침공하기 위해서는 도버 해협의 제해권을 획득해야만 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협력하여 많은 군선과 수송선을 건조하였다. 또한 영국 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영국령 서인도 제도 공격을 계획하고, 빌뇌브가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서인도 제도에 대한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빌뇌브 함대는 본국으로 귀환하는 중 콜더가 이끄는 영국 함대와 교전하여, 7월 22일 피니스테레 곶 해전에서 패배하고, 카디스 항구로 후퇴했다.[69]
8월, 내륙 전투를 위해 나폴레옹은 불로뉴의 병력을 라인강 방면으로 이동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영국 침공 작전을 포기한 것이다. 10월 19일 프랑스 함대가 나폴리로 향해 출항하자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이를 포착하고 10월 21일,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이 해전으로 영국은 넬슨 제독을 잃었지만, 프랑스의 해군력은 크게 감소하게 되고, 나폴레옹은 제해권 탈취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영국 침공 작전을 완전히 중단했다.
4. 3.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805년 12월 2일, 모라바 아우스터리츠 교외 프라체 고지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격돌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우세한 적을 상대로 훗날 예술이라고 칭송받는 지휘를 펼쳤다. 아군의 약점을 일부러 드러내어 적의 중앙부에 틈을 만들고, 집중 공격으로 돌파하여 완승을 거두었다.[49]
이 전투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 3명의 황제가 한 전장에 모였기 때문에 "삼제회전"이라고도 불린다.[49] 12월 4일,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을 접견하고 휴전 협정에 합의했다.
4. 3. 1. 전장
전장의 북쪽 부분은 해발 약 213.36m의 산톤 언덕과 해발 약 259.08m의 주란 언덕이 지배했는데, 두 언덕 모두 서-동 축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올무츠-브르노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두 언덕의 서쪽에는 벨로비츠 마을이 있었고, 그 사이의 보세니츠 개울은 남쪽으로 흘러 골드바흐 개울과 합류했는데, 후자는 코벨니츠, 소콜니츠, 텔니츠 마을을 따라 흘렀다.[50] 이 지역 전체의 중심은 높이가 약 약 10.67m에서 약 12.19m인 완만한 경사의 프라첸 고지였다. 한 보좌관은 황제가 그의 원수들에게 반복해서 "여러분, 이 땅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여기는 격전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50]4. 3. 2. 연합군의 계획과 배치
1805년 12월 1일, 연합군 회의에서 전투 계획이 논의되었다. 대부분의 연합군 전략가들은 적과 접촉하여 빈으로 이어지는 남쪽 측면을 확보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그의 측근들은 전투를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더 신중한 입장이었고,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도 이에 동조했다.[51] 그러나 러시아 귀족과 오스트리아 사령관들의 압박이 거세어, 연합군은 오스트리아 참모총장 프란츠 폰 바이로터의 계획을 채택했다.[51]이 계획은 연합군이 약하다고 판단한 프랑스군 우익에 대한 주공세와 프랑스군 좌익에 대한 양동 공격을 요구했다. 연합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할 4개 부대로 배치했다. 러시아 제국 근위대는 예비대로 유지되었고, 표트르 바그라티온 휘하의 러시아군은 연합군 우익을 방어했다.
4. 3. 3. 프랑스군의 계획과 배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연합군에게 프랑스군이 약하며 평화를 원한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다.[52] 실제로는 연합군이 공격하기를 바라며, 우익을 약화시키는 작전을 펼쳤다.[53] 11월 28일, 나폴레옹은 원수들과 만나 전투에 대한 우려를 들었지만, 계획을 강행했다.[54]
나폴레옹의 계획은 연합군이 우익을 공격하게 유도하여 중앙을 약화시키고, 술트의 제4군단 16,000명으로 중앙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약화된 우익을 지원하기 위해 제3군단의 다부 원수에게 비엔나에서 급행군하여 르그랑 장군의 부대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다부의 병사들은 48시간 안에 110km를 행군해야 했다. 제국 근위대와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은 예비대로, 란의 제5군단은 북쪽 지역을 방어했다.
4. 3. 4. 전투의 전개
전투는 오전 8시경, 연합군 제1열이 텔니츠 마을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연합군은 프랑스군을 마을에서 몰아내고 골드바흐 강 건너편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다부 원수 군단의 선봉대가 도착하여 연합군을 텔니츠에서 몰아냈지만, 곧 후사르 기병의 공격을 받아 후퇴했다.[55]연합군은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했지만, 배치와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 프랑스군에게 막혔다. 연합군 좌익의 리히텐슈타인 휘하 기병 부대는 원래 우익에 배치되어야 했지만, 이동 과정에서 프랑스군 우익으로 진격하던 제2 보병 열과 충돌하여 속도가 늦춰졌다.[54]
한편, 제2열의 선두 부대는 소콜니츠 마을을 공격했다. 초기 공격은 실패했지만, 랑제롱 장군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은 마을에서 쫓겨났다. 거의 같은 시점에 제3열은 소콜니츠 성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반격하여 마을을 탈환했지만, 다시 쫓겨났다. 이 지역의 충돌은 프리앙 사단이 마을을 다시 탈환하면서 잠시 멈추었다. 소콜니츠는 전장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었으며, 하루 동안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56]

오전 8시 45분경, 나폴레옹은 적군 중앙의 약점을 확인하고 술트에게 프라첸 고원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물었다. 술트는 "20분도 채 안 걸립니다, 폐하."라고 답했다. 약 15분 후, 나폴레옹은 공격 명령을 내리며 "한 방의 강타로 전쟁은 끝난다."[57]라고 덧붙였다.
짙은 안개는 생틸레르 사단의 진격을 가리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아우스터리츠의 태양'이 안개를 찢어버리고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56] 프라첸 고원 꼭대기에 있던 러시아 군인과 지휘관들은 많은 프랑스군이 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58] 연합군 지휘관들은 제4열의 일부 부대를 투입했지만, 한 시간 이상 지속된 전투로 인해 이 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경험이 부족한 오스트리아군도 전투에 참여했지만, 프랑스군에게 밀려 언덕 아래로 물러났다. 그러나 생틸레르의 부대는 다시 공격하여 연합군을 프라첸 고원에서 몰아냈다. 북쪽에서는 방담 장군의 사단이 스타레 비노흐라디 지역을 공격하여 여러 연합군 대대를 격파했다.[59]
전투는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기울었지만, 여전히 많은 전투가 남아 있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을 방담의 좌익을 지원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의 지휘 본부를 주란 언덕에서 프라첸 고원의 성 안토니 예배당으로 옮겼다. 연합군은 러시아 제국 근위대를 투입하여 반격을 가했고, 프랑스 군기 하나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중기병 근위 기병대에게 전진을 명령했다. 양측 모두 대규모 기병대를 투입하여 전투가 이어졌다. 러시아군은 수적 우위를 점했지만, 에를론의 사단, 베르나도트 제1군단의 제2사단이 배치되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근위대의 기병 포병대 또한 러시아 기병대와 소총병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러시아군은 무너졌고, 프랑스 기병대의 추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60]
모라바의 아우스터리츠 교외의 프라첸 고원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격돌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우세한 적을 상대로 뛰어난 지휘를 펼쳤다. 아군의 약점을 일부러 공격하게 하여 적의 중앙부에 틈을 만들고, 집중 공격을 가하여 돌파, 완승했다.
이 전투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가 참전하여 "삼제 회전"이라고도 불린다.
4. 4. 이탈리아 전역
마세나 휘하의 프랑스군 '이탈리아 군'(Armée d'italie)은 카를 대공 휘하의 오스트리아군 '이탈리아 군'(Armee von Italien)과 이탈리아에서 전투를 벌였다. 프랑스군은 베로나에서 아디제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고, 칼디에로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64] 베네치아는 생시르 휘하의 프랑스군과 이탈리아군에 의해 봉쇄되었다.[64]
4,400명 규모의 합스부르크 군대는 카스텔프랑코 베네토 전투에서 장 레니에와 생시르에게 격파되어 포로로 잡혔다. 생시르의 프랑스군은 나폴리 왕국 국경에서 앵글로-러시아 군대의 감시를 받으며 기동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러시아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했고, 영국군은 시칠리아로 후퇴했다. 프랑스군은 나폴리 군으로 재편성되어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명목상 지휘를 받게 되었고, 실질적인 지휘는 앙드레 마세나가 맡았다.
1806년 2월, 마세나는 나폴리 왕국을 침공했고, 부르봉 왕가의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4세는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나폴리는 곧 프랑스군에 함락되었고, 가에타와 칼라브리아 두 곳에서만 저항이 이어졌다.
장 레이니에는 칼라브리아를 침공했지만, 소수의 칼라브리아인만이 저항했고, 왕립 나폴리군은 캄포 테네세 전투에서 패배했다. 조제프는 나폴리의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다. 프랑스군은 가에타 요새를 포위했고, 7월 18일에 함락시켜 침공을 마무리했다.[65]
칼라브리아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프랑스군에 대한 보급 지원을 거부했고, 3월 말에 반란이 일어났다. 존 스튜어트 경 휘하의 영국 원정군이 메이다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프랑스 포병이 가에타 성벽을 포격하여 함락시키면서 마세나의 제1군단이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영국군은 시칠리아로 후퇴했다. 칼라브리아 반란은 1807년까지 진압되지 않았으며, 프랑스는 잔혹한 게릴라전을 경험했다. 이는 반도 전쟁 동안 스페인에서 직면하게 될 문제의 전조였다.[66]
5. 전후 처리
트라팔가 해전으로 프랑스군의 영국 본토 위협은 줄었지만, 대륙에서의 패권은 여전했다. 1805년 12월 26일,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와 강화하며 동맹에서 이탈했다.
1806년, 나폴레옹은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고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나폴리 왕에 즉위시켜, 나폴리 왕국도 동맹에서 이탈했다. 사실상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친프랑스적인 라인 동맹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했다. 프랑스의 패권은 중부 독일까지 미쳤으나, 이는 중립국 프로이센 왕국의 경계심을 자극해 제4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으로 이어졌다.
5. 1. 프레스부르크 조약 (1805년)
트라팔가 해전 결과 프랑스군에 의한 영국 본토 위협은 줄었지만, 대륙에서 패권을 뒤집지는 못했다. 1805년 12월 26일,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와 강화하고 동맹에서 이탈했다.1806년 나폴레옹은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고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나폴리 왕에 즉위시켰다. 이로써 나폴리 왕국도 동맹에서 이탈했고, 사실상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했다. 나폴레옹은 친프랑스 라인 동맹을 결성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했다. 프랑스 패권은 중부 독일에까지 미쳤고, 이런 적극적인 방법은 중립을 지켜왔던 프로이센 왕국의 경계심을 부추겨, 제4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을 자극했다.
5. 2. 라인 동맹 결성 (1806년)
1806년 나폴레옹은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고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나폴리 왕에 즉위시켰다. 이에 따라 나폴리 왕국도 동맹에서 탈락했으며, 사실상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했다. 또한 나폴레옹은 친프랑스적인 라인 동맹을 결성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켰다. 프랑스의 패권은 중부 독일에까지 미치게 되었지만, 이러한 강압적인 방식은 지금까지 중립을 지켜왔던 프로이센 왕국의 경계심을 부추겨,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의 결성을 자극하게 되었다.5. 3. 프로이센의 참전과 제4차 대프랑스 동맹
1806년 나폴레옹은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고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나폴리 왕에 즉위시켰다. 이에 따라 나폴리 왕국도 동맹에서 탈락했으며, 사실상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다. 또한 나폴레옹은 친프랑스 라인 동맹을 결성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켰다. 프랑스의 패권은 중부 독일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이런 적극적인 방법은 지금까지 중립을 지켜왔던 프로이센 왕국의 경계심을 부추겨,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의 결성을 자극하게 되었다.6. 결과 및 영향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그 이전의 작전들은 유럽 정치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프랑스는 3개월 만에 빈을 점령하고, 두 개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을 굴복시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주요 유럽 수도가 적군에 의해 점령된 적이 없었던 18세기의 경직된 권력 구조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유럽 대륙에서 거의 10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위한 무대를 마련했지만, 그보다 더 즉각적인 영향 중 하나는 1806년 프로이센의 참전을 부추긴 것이었다.[1]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12월 4일에 휴전 협정을 체결했고, 22일 후에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물러났다. 오스트리아는 캄포 포르미오 조약(1797년)과 뤼네빌 조약(1801년)에 의해 프랑스가 점령한 영토를 인정하고, 나폴레옹의 독일 동맹국인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선제후국, 바덴 선제후국에 영토를 할양하며, 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베네토는 또한 이탈리아 왕국에 넘겨졌다. 오스트리아에게는 가혹한 종말이었지만, 분명 재앙적인 평화는 아니었다. 러시아군은 자국 영토로 철수할 수 있었고, 프랑스는 남부 독일 지역에 주둔했다.[1]
1806년 7월,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된 독일의 위성국들의 연합인 라인 동맹을 창설했으며, 이들은 프랑스의 "보호자"인 나폴레옹의 지휘 아래 63,000명의 군대를 소집할 것을 약속했다. 라인 동맹에 가입된 국가들은 곧 해체된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해야 했다.[67] 프로이센은 이러한 움직임과 다른 움직임들이 중앙 유럽의 주요 세력으로서의 자국 지위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겼고, 1806년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영국군과 시칠리아군이 부르봉 왕 페르디난도를 시칠리아에서 경계하고 나폴레옹의 나폴리 왕이 본토를 통제하면서 1815년까지 정치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 1808년, 조아생 뮈라가 스페인 왕이 된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뒤를 이어 나폴리 왕이 되었다. 뮈라는 메시나 해협을 건너려는 여러 시도를 했지만, 한때 시칠리아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실패로 끝났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인명 피해는 다음과 같다.
국가 | 사망 | 부상 | 포로 |
---|---|---|---|
프랑스 | 12,000명 | 22,200명 | 5,000명 |
오스트리아 | 20,000명 | 해당없음 | 70,000명 |
러시아 | 25,000명 | 해당없음 | 25,000명 |
나폴리 | (22,000명 전멸, 2,000명 시칠리아로 대피) | ||
스페인 | 1,200명 | 1,600명 | 해당없음 |
바이에른 | 300명 | 1,200명 | 해당없음 |
이탈리아 왕국 | 350명 | 1,900명 | 해당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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