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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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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는 프랑스 혁명기부터 나폴레옹 전쟁, 부르봉 왕정복고 시대를 거치며 활약한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화가를 꿈꿨으나 혁명군에 자원 입대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원수 계급에 올랐다. 특히 방어전에 능했으며, 나폴레옹은 그를 "방어전의 제1인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공화주의적인 신념을 지녔으나, 냉정하고 무표정한 성격으로 인해 "스파르타인" 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군사적 재능뿐만 아니라 예술적 재능도 뛰어나 화가이자 음악가로 활동했다. 그는 왕정복고 시기 전쟁 장관을 역임하며 군 개혁에 기여했으며, 그의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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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의 초상화, 오라스 베르네, 1821년
"오라스 베르네의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 원수 초상화, 1821년"
존칭 접두사원수
이름로랑 구비옹
출생지프랑스 왕국 트와에베셰 툴
출생일1764년 4월 13일
사망지프랑스 왕국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바르 이에르
사망일1830년 3월 17일
존칭 접미사구비옹-생시르 후작
로마자 표기Lo-rang de Gu-bi-ong Saeng-si-reu
별칭방어전의 제일인자 (방어전의 제1인자)
군사 경력
복무 기간1792년–1819년
소속 군대육군
충성프랑스 공화국
프랑스 제국
프랑스 왕국
계급제국 원수
참전 전투프랑스 혁명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마인츠 전투
라슈타트 전투
에틀링겐 전투
네레스하임 전투
엠멘딩겐 전투
비베라흐 전투
슐리엔겐 전투
켈 포위전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노비 전투
제2차 노비 전투
슈토카흐 전투
메스키르히 전투
비베라흐 전투
오렌지 전쟁
나폴레옹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카스텔프랑코 베네토 전투
나폴리 침공
반도 전쟁
로세스 포위전
카르데데우 전투
몰린스 데 레이 전투
발스 전투
제3차 지로나 공방전
러시아 원정
제1차 폴로츠크 전투
제2차 폴로츠크 전투
제6차 대프랑스 동맹
드레스덴 전투
드레스덴 포위전
훈장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
정치 경력
직위육군 장관
임기 시작1815년 7월 7일
임기 종료1815년 9월 26일
이전루이니콜라 다부
다음앙리자크기욤 클라르크
직위해군 및 식민지 장관
임기 시작1817년 9월 12일
임기 종료1819년 11월 19일
이전앙리 자크 기욤 클라르크
다음빅토르 드 페이 드 라 투르-모부르
임기 시작1817년 6월 23일
임기 종료1817년 9월 12일
이전프랑수아 조제프 드 그라테, 비콩트 뒤부샤주
다음루이마티외 몰레

2. 생애

프랑스 혁명 시기에 군에 입대하여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본래 화가를 지망했으나 혁명의 흐름 속에서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빠른 진급을 거듭하여 프랑스 원수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특히 방어전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으며,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에는 전쟁 장관을 역임하며 군제 개혁에 기여했다.

2. 1. 초기 생애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Laurent Gouvion Saint-Cyr)는 1764년 4월 13일, 당시 세 주교구였던 (뫼르트에모젤 현)에서 로랑 구비옹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두질 장인 장바티스트 구비옹이었고, 어머니는 안느 마리 메르시에였다. 그는 부모의 장남이었으나, 3살 때 부모가 이혼하였고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려졌다. 훗날 그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성을 따라 '생시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가업을 잇기를 원치 않았던 구비옹은 집을 나와 학교에서 언어, 수학, 그림, 제도 등을 배웠다. 화가를 꿈꾸며 18세에 회화 공부를 위해 로마로 건너가 2년간 머물렀고, 1784년 파리로 돌아온 후에도 예술 공부를 계속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당시 그는 파리에서 화가로 일하고 있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파리에서 배우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의 열기 속에서 그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공화국군에 자원입대했다. 이때 성에 '생시르(Saint-Cyr)'를 추가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유명했던 같은 성을 가진 사촌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고도 전해진다. 군인으로서의 적성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드물게 높은 교육을 받았던 덕분에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아, 입대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장군으로 진급했다. 이 시기에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 미셸 네, 루이 니콜라 다부 등 훗날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할 인물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으며, 특히 네, 다부와는 이후에도 가깝게 지냈다.

2. 2. 혁명 전쟁

1792년 파리 사냥꾼 제1대대 대위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 조르주 루제 작, 1835년


1792년, 로랑 드 구비옹은 자원 대대의 대위로 선발되어 퀴스틴 장군의 참모로 복무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1일, 파리 자원봉사 부대인 공화국 사냥꾼 제1대대에 합류하면서, 그는 다른 인물들과 구별하기 위해 어머니의 성인 '생시르'를 자신의 성에 추가하여 '구비옹 생시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교육 수준 덕분에 소위로 선출되었고, 11월 1일에는 제9 봉기군 대대 대위가 되었다. 이후 라인 방면군(Armée du Rhin)에서 다양한 참모직을 거치며 빠르게 승진하여, 1794년 6월 5일 여단장(프랑스어: général de brigade)으로, 불과 닷새 뒤인 6월 10일에는 파견 대표 니콜라 앙츠에 의해 사단장(프랑스어: général de division)으로 승진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생시르는 피슈그뤼와 클레베르 휘하에서 마인츠 전투(1795년) 당시 프랑스 중앙군을 지휘했다. 1796년 라인 전역에서는 모로 장군 휘하 라인-모젤 군(Armée de Rhin-et-Moselle)의 중앙 사단(이후 좌익)을 지휘하며 바이에른에서 라인강으로의 유명한 퇴각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라슈타트 전투(1796년)와 에틀링겐 전투에 참여했으며, 7월 18일 슈투트가르트를 점령하고 10월 2일 비베라흐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역 막바지에는 케흘 포위 공격(1796-1797) 방어를 맡았으나, 1797년 1월 도시 함락을 막지는 못했다.

사망한 오슈 장군의 뒤를 이어 라인-모젤 군 사령관직을 잠시 대행했으며, 이후 오주로 장군이 공식적으로 지휘권을 인수했다. 그는 1797년 12월 바젤 공국 침공을 이끌고 1798년 1월까지 점령했다. 프뤼티도르 18일 쿠데타(1797년 9월 4일) 이후 프랑스 총재정부에 대한 축하를 거부했던 생시르는 1798년 3월 마세나 장군의 후임으로 이탈리아 방면군 내 로마 주둔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질서와 규율을 회복시켰지만 병사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권력 남용 혐의로 정직되기도 했으나 조사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장 위르뱅 게랭 작, 1801년 초상화


1799년, 생시르는 독일 전선으로 복귀하여 주르당 장군 휘하 도나우 방면군(Armée du Danube)의 좌익을 지휘하며 슈토카흐 전투(3월 25일)에 참전했다. 주르당이 마세나로 교체되자, 생시르는 이탈리아의 모로 군대에 합류했다. 그는 총사령관 주베르 장군이 전사한 노비 전투(8월 15일)에서 우익을 지휘하며 패배 속에서도 군대를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모로 장군은 정의롭고 부패하지 않은 생시르를 "나쁜 잠자리 친구"(mauvais coucheur|모베 쿠쇠르프랑스어, 함께 일하기 어려운 사람을 의미하는 프랑스 속어)라 부르며 싫어했고, 다른 장군들을 잘 돕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는 네 장군이나 다부 장군 등이 전투 후 생시르의 지원에 감사를 표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꺼렸던 생시르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이후 병사들이 새로운 통령정부에 충성 서약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공훈은 인정받아 제1통령 나폴레옹으로부터 보석으로 장식된 사브르를 하사받았다. 1799년 말 다시 모로의 부관으로 라인 방면군에 복귀하여 병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1800년 5월 9일 다시 한 번 비베라흐 전투에서 크레이 장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모로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고, 결국 전역 초기 작전 이후 프랑스로 물러났다.

1801년, 생시르는 포르투갈 침공(오렌지 전쟁)을 위한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파견되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장교(Grand Officier)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 포르투갈과 평화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뒤를 이어 마드리드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2. 3. 나폴레옹 전쟁

샤를-에메 포레스티에 작


생시르는 실용주의와 영광을 추구하던 시대에 보기 드문 금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프랑스 제1제국 선포를 축하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나폴레옹이 처음 발표한 프랑스 원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독립적인 지휘 경험이 부족했던 장 란느,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장 드 디외 술트 같은 인물들이 명단에 포함된 것과 대조적이었다. 생시르는 평생 동안 나폴레옹이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군대를 맡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1803년, 그는 이탈리아 주둔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804년 7월 6일에는 흉갑기병대 총감(Colonel General프랑스어)이 되었고, 1805년 2월 2일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수훈장(Grand Eagle프랑스어)을 받았다. 1805년 5월, 그는 밀라노에서 열린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왕 대관식에 참석했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에는 마세나 휘하 군대의 좌익을 지휘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1805년 11월 29일 카스텔프랑코 베네토 전투에서 망명 귀족 루이 빅토르 메리아덱 드 로한(Louis Victor Meriadec de Rohan프랑스어)을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12월에는 나폴리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다음 달 마세나에게 자리를 넘겨주었고, 마세나가 도착하기 전에 직책을 떠났다. 나폴리에서의 처우에 항의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을 때, 나폴레옹은 사형을 언도하며 그를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다.

1806년 프랑스의 나폴리 침공에 참전했으며, 2월부터 8월까지 풀리아와 아브루치에 배치된 군단을 지휘했다. 그는 베르티에에게 "나는 이 임무의 모든 불쾌함을 감내했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후 1806년 12월부터 1808년 8월까지 불로뉴 캠프를 지휘했는데, 이는 다른 원수들이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명성을 쌓는 동안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역할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뢰르-에-루아르 주 루브레-생플로랑탱(Rouvray-Saint-Florentin프랑스어)에 있는 레베르소(Reverseaux프랑스어) 영지를 구입했다.

뢰르-에-루아르 주 루브레-생플로랑탱의 레베르소 성


1807년에는 프로이센폴란드 전역에 참가하여 좋은 활약을 보였다. 1808년 5월 제국 백작(Count of the Empire프랑스어) 작위를 받았고, 8월에는 카탈루냐로 파견되어 제7군단(나중의 제5군단)을 지휘했다. 뛰어난 전술가였던 생시르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특히 12월 16일 카르데데우 전투, 12월 20일 몰린스 드 레이 전투, 1809년 2월 25일 발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는 로제스 포위 공격(1808년)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바르셀로나의 봉쇄를 풀었다. 그러나 지로나, 타라고나, 토르토사를 동시에 포위하라는 베르티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오주로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간 그는 1811년 국무원에 복귀할 때까지 불명예 속에 지냈다.

러시아 원정이 시작되자 생시르는 여전히 사단장 계급이었으나 제6군단(VI Corps)의 지휘를 맡았다. 1812년 8월 18일, 제1차 폴로츠크 전투에서 우디노 원수가 부상을 입자 그의 제2군단(II Corps) 지휘권까지 넘겨받아 피터 비트겐슈타인(Пётр Христиа́нович Ви́тгенштейнru) 휘하의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이 공로로 그는 제국 원수(Marshal of the Empire)로 임명되었다. 당시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레이 드 톨리( 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ru ) 휘하의 러시아군은 모스크바로 후퇴하며 초토화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고, 근처의 스몰렌스크를 막 불태운 상태였다.

1812년 10월 18일, 생시르는 제2차 폴로츠크 전투에서 다시 비트겐슈타인과 맞붙었으나, 이틀간의 격전 끝에 퇴각해야 했고 전투 중 발에 심각한 총상을 입었다. 후퇴 과정 중 다른 전투에서도 중상을 입었다.

1813년 독일 전역에서는 2월에 베를린에서 제11군단(XI Corps)을 지휘했으나, 티푸스에 걸려 프랑스로 돌아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회복 후 제14군단(XIV Corps) 사령관으로서 드레스덴 전투 (1813년 8월 26일~27일)와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제6차 대프랑스 동맹군에 맞선 드레스덴 방어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나폴레옹은 그를 공세에 투입한 것을 실수라고 인정하면서도, 방어전에서의 능력은 자신과 동등하다고 높이 평가하며 관계가 개선되었다. 그러나 탄약과 식량이 고갈되자 11월 11일, 나폴레옹이 라인강으로 후퇴한 후에 결국 항복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이는 나폴레옹 전쟁 중 포로가 된 유일한 프랑스 원수였다. 당시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병력 손실보다 생시르를 포로로 잡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며, "그는 방어전에서 우리 모두 중 첫 번째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원수 지위를 받던 날 아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지만, 그의 성격대로 승진에 대해서는 단 한 줄만 언급했다.

2. 4. 부르봉 왕정복고와 이후

1814년 6월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뒤, 구비옹 생시르는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으나, 같은 해 6월 4일 루이 18세에 의해 프랑스 귀족(Peer of France)으로 임명되었다. 1815년 백일천하 동안에는 나폴레옹에게도, 망명 중이던 겐트의 루이 18세 정부에도 가담하지 않으며 중립을 지켰다.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구비옹 생시르는 탈레랑 내각에서 1815년 7월 8일부터 9월 25일까지 전쟁 장관을 역임했다. 이 시기 그는 오랜 친구이자 동료 원수인 미셸 네의 재판에서 그를 돕기 위해 다른 나폴레옹 시대 원수 4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을 제공하려 했으나, 몽세 원수가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것조차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구비옹 생시르는 귀족원 재판에서 네의 추방에 찬성표를 던졌다.

1817년 6월 해군 및 식민지 장관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 12일부터 1819년 11월 18일까지 다시 전쟁 장관직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군대를 왕조적 세력이 아닌 국가적 세력(국군)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를 포함하여 많은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 참전용사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으며, 총참모부를 조직하고, 군법연금 규정을 개정했다. 특히 1818년 3월 10일에는 징병제와 관련된 구비옹-생시르 법(Gouvion-Saint-Cyr Law)을 통과시켜 프랑스 혁명 시기의 징병 정책을 재확립했다. 1817년에는 후작 작위를 받았다.

1819년 전쟁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구비옹 생시르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남은 생애를 농업과 회고록 집필에 바쳤다. 그는 1830년 3월 17일 프랑스 남동부의 도시인 이에르에서 사망했으며, 파리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GOUVION ST CYR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3. 군사적 업적과 평가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는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의 유능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전술가였으며, 특히 방어전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나폴레옹으로부터 "방어전의 제1인자"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빠른 승진을 거듭하여 라인 전선,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등 다양한 전역에서 활약하며 군사적 능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평생 공화주의 신념을 지키고 타협하지 않는 냉정한 성격 탓에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원수 임명이 늦어지는 등 경력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3. 1. 주요 전투 및 전역



1792년 자원 대대의 대위로 군 경력을 시작한 생시르는 퀴스틴 장군의 참모를 거쳐 빠르게 승진하여 2년 만에 사단장이 되었다.

초기 경력에서 그는 주로 라인강 전선에서 활약했다. 1795년 마인츠 전투에서는 피슈그루와 클레베르 휘하에서 프랑스 중앙군을 지휘했다. 1796년 라인 전역에서는 모로 장군 휘하 라인-모젤 군의 좌익 및 중앙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전역에서 그는 라스타트 전투와 에틀링겐 전투에 참여했으며, 슈투트가르트를 점령(7월 18일)하고 10월 2일 비베라흐 전투에서 승리했다. 또한 모로 군대가 바이에른에서 라인강으로 유명한 퇴각을 감행할 때 이를 효과적으로 지원하고 조직했다. 전역 막바지에는 케흘 포위전의 방어를 맡았으나, 1797년 1월 도시의 항복을 막지는 못했다.

1797년 말에는 바젤 공국 침공을 이끌어 1798년 1월까지 점령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1798년 3월부터 7월까지 마세나의 뒤를 이어 로마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을 잠시 맡았다. 1799년에는 다시 독일 전선으로 돌아와 주르당 휘하 도나우 군의 좌익을 지휘하며 3월 25일 스톡하흐 전투에 참전했다. 주르당이 마세나로 교체되자, 생시르는 이탈리아의 모로 군대에 합류하여 노비 전투 (8월 15일)에서 우익을 지휘했다. 이 전투에서 총사령관 주베르가 전사하는 등 프랑스군이 패배했지만, 생시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799년 말, 그는 다시 라인 군으로 복귀하여 모로의 부관이 되었다. 1800년 5월 9일, 비베라흐 전투에서 크레이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모로와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았고, 결국 전역 초기 작전 이후 지휘관과의 불화로 프랑스로 은퇴했다.

1801년, 생시르는 오렌지 전쟁에서 포르투갈 침공을 위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지휘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파견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잠시 마드리드 주재 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803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육군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805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에는 마세나 휘하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11월 29일 카스텔프랑코 베네토 전투에서는 망명 귀족 군대를 이끌던 루이 빅토르 메리아덱 드 로한 공작을 격파하고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1806년에는 나폴리 침공에 참전하여 풀리아와 아브루치 지역의 군단을 지휘했다.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생시르는 나폴레옹의 제정 선포를 지지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1804년 첫 프랑스 원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한동안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렀으나, 1807년 프로이센폴란드 전역에 참가하며 다시 기용되기 시작했다. 1808년에는 카탈루냐에서 제7군단(나중의 제5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전술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여 12월 16일 카르데데우 전투, 12월 20일 몰린스 데 레이 전투, 그리고 1809년 2월 25일 발스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로제스 포위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바르셀로나의 봉쇄를 푸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내려온 특정 명령 수행을 거부하면서 베르티에와의 갈등으로 사임했고, 오제로에게 지휘권을 넘겨준 뒤 1811년까지 다시 은둔 생활을 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이 시작되자 생시르는 제6군단(VI Corps)의 지휘를 맡았다. 8월 18일, 제1차 폴로츠크 전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이끄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마침내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다. 이 전투 직전 우디노 원수가 부상을 입으면서 생시르는 제2군단(II Corps)의 지휘권까지 인수했다. 그러나 10월 18일, 제2차 폴로츠크 전투에서 다시 비트겐슈타인과 격돌했으나 이틀간의 격전 끝에 퇴각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생시르 자신도 발에 심각한 총상을 입었다.

1813년 독일 원정에서는 초기에 제11군단(XI Corps)을 지휘했으나 티푸스에 걸려 잠시 전선을 떠났다. 회복 후 제14군단(XIV Corps) 사령관으로 복귀하여 드레스덴 전투 (8월 26-27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 주력군이 패배한 뒤에도 드레스덴에 고립되어 도시 방어전을 훌륭하게 지휘했으나, 결국 탄약과 식량이 소진되어 11월 11일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로써 그는 나폴레옹 전쟁 중 포로가 된 유일한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방어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생시르는 방어전에서 우리 모두 중 첫 번째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3. 2. 군사적 특징과 평가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는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유능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나, 다부마세나와 같은 다른 원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평생 공화주의 신념을 지켰고 이로 인해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아 경력에 영향을 받았다.
방어전의 달인생시르의 가장 두드러진 군사적 능력은 방어전 지휘였다. 나폴레옹은 생시르를 "방어전에 관해서는 제1인자"라고 평가했으며, 심지어 "수비에서는 나폴레옹 자신과 동등하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러한 능력은 특히 드레스덴 방어전(1813년)에서 잘 나타났다.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연합군에 포위된 드레스덴에서 그는 탄약과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약 3개월간 도시를 방어하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비록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지만, 그의 뛰어난 방어 능력은 적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폴레옹은 생시르가 포로가 된 것에 대해 연합군이 "인간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비판하며 그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전략 및 전술 능력생시르는 방어전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전략 및 전술적 식견도 뛰어났다. 그는 복잡한 전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능력이 있었다. 스탕달은 그를 "사건을 연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군 지휘관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라인 전역에서 모로 군대의 퇴각을 성공적으로 엄호했으며, 비베라흐 전투(1800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스페인카탈루냐 전역(1808-1809년)에서는 제7군단을 이끌고 카르데데우 전투, 몰린스 드 레이 전투, 발스 전투 등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뛰어난 전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러시아 원정 중에는 제1차 폴로츠크 전투(1812년)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여 원수로 승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휘 스타일과 평가개인적으로 생시르는 냉정하고 침착하며 감정에 잘 휘둘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는 청렴결백했지만, 무표정하고 과묵하며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아 주변 사람들, 특히 상관들과 자주 충돌했다. 이 때문에 "스파르타인", "얼음 인간", "올빼미"와 같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러한 성격은 모로와 같은 지휘관과의 불화를 야기하기도 했으며, 나폴레옹 역시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능력과 청렴함은 부하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았다. 1813년 독일 전역에서 그가 다시 지휘를 맡게 되었을 때 병사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의 엄격함 속에서도 공정함과 능력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종합적으로 생시르는 다부마세나에 버금가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화주의적 신념과 타협하지 않는 성격, 그리고 나폴레옹과의 복잡한 관계로 인해 그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나폴레옹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때로는 그를 한직에 두거나 중요한 작전에서 제외시킨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화가이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전투 후 수도원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거나, 명령 없이 자리를 이탈하여 집으로 돌아갔다는 등의 기행에 가까운 일화도 남아 있다.

4. 성격 및 유산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공화주의적 신념을 지키려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나폴레옹의 독재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에는 전쟁 장관으로서 군대를 왕가가 아닌 국가에 봉사하는 조직으로 만들고자 군제 개혁을 추진했으며, 특히 1818년에 통과된 '구비옹 생시르 법'은 근대적인 징병 시스템의 기초를 마련하는 중요한 업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의 개혁 노력은 보수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4. 1. 성격 및 개인적 특징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려졌으며, 나중에 어머니의 이름인 '생시르'를 자신의 성에 추가했다. 이는 당시 유명했던 같은 성의 사촌과 구별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는 가업인 무두질을 잇기를 꺼려 집을 나와 학교에서 언어, 수학, 그림, 제도 등을 배웠다.

18세에는 화가를 꿈꾸며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 2년을 보냈고, 1784년 파리로 돌아온 후에도 미술 공부를 계속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파리에서 화가로 일하고 있었으나, 화가라는 직업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기록에 따르면 파리에서 배우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4. 2. 유산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에 의해 프랑스 귀족이 된 구비옹 생시르는 1815년 7월 탈레랑 내각에서 전쟁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구비옹 생시르는 오랜 동료였던 미셸 네 원수의 재판에서 다른 나폴레옹 시대 원수들로 배심원단을 구성하려 했으나, 몽세 원수가 참여를 거부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그는 귀족원 재판에서 네의 추방에 찬성표를 던졌다.

1817년 6월 해군 및 식민지 장관을 거쳐 같은 해 9월 다시 전쟁 장관에 임명되어 1819년 11월까지 재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군제 개혁에 착수하여 많은 중요한 변화를 이끌었다. 특히 군대를 왕가에 충성하는 군대가 아닌 국가에 봉사하는 군대로 만들고자 노력했으며,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했던 베테랑 군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총참모부를 조직했다. 또한 군법과 연금 규정을 개정하여 군의 체계를 정비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1818년 3월 10일에 통과된 '구비옹 생시르 법'이다. 이 법은 프랑스 혁명기의 징병제 정책을 재확립하여 근대적인 군 병력 충원 시스템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 세력의 반발로 인해 그의 군 개혁은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817년에는 후작 작위를 받았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Père Lachaise Cemetery)에 있는 구비옹 생시르의 묘


정계 은퇴 후 그는 시골로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며 회고록과 군사 관련 저술 집필에 몰두했다. 그의 저술은 당시의 군사 전략과 전술,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주요 저술로는 다음이 있다.

  • Journal des opérations de l'armée de Catalogne en 1808 et 1809|카탈루냐 군대의 1808년과 1809년 작전 일지fra (1821)
  • Mémoires sur les campagnes des armées du Rhin et de Rhin-et-Moselle de 1794 à 1797|1794년부터 1797년까지 라인 군대와 라인-모젤 군대의 전역에 관한 회고록fra (1829)
  • Mémoires pour servir à l'histoire militaire sous le Directoire, le Consulat et l'Empire|디렉토리, 집정, 제국 시대 군사사에 기여할 회고록fra (1831)


구비옹 생시르는 1830년 3월 17일 프랑스 남동부의 이에르에서 사망했으며,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이름은 파리 개선문 동쪽 기둥에 GOUVION ST CYR 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5. 비판과 논란

로랑 드 구비옹 생시르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과 정치적 신념으로 인해 여러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그는 장 빅토르 마리 모로를 비롯한 여러 상관들과 불화를 겪었으며, 이는 그의 군 경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열렬한 공화주의자로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며 프랑스 원수 임명이 늦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에는 전쟁 장관으로서 군 개혁을 시도했지만, 미셸 네 원수의 재판에 관여하는 등 정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비판과 논란은 그의 군사적 업적과 더불어 생시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5. 1. 상관과의 불화



구비옹 생시르는 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인해 여러 상관들과 불화를 겪었으며, 이는 그의 군 경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장 빅토르 마리 모로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1799년 이탈리아에서 모로의 군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노비 전투 패배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모로는 그의 정의롭고 부패하지 않은 면모 때문에 오히려 생시르를 싫어했다. 심지어 생시르가 “나쁜 침대 친구”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모로는 또한 생시르가 동료 장군들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지만, 이는 네 장군다부 장군이 전투 후 그의 지원에 감사를 표했던 사실과는 대조된다. 1800년 모로가 라인군 사령관이 되었을 때 생시르는 그의 중위로 임명되어 비베라흐에서 크레이 장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으나, 지휘관과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아 첫 작전 종료 후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다.

나폴레옹과의 관계에서도 그의 독립적인 성향이 드러났다. 제1프랑스 제국 선포를 축하하는 선언문에 서명을 거부하여, 독립적인 지휘 경험이 부족했던 장 란,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장드디외 술트 등과 달리 나폴레옹의 첫 프랑스 원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1805년 말 나폴리 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한 달 만에 앙드레 마세나로 교체되자, 마세나가 도착하기도 전에 직위를 떠나 파리로 돌아가 항의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사형을 언급하며 그를 다시 자리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스페인에서의 복무 중에도 불화는 계속되었다. 카탈루냐 군 사령관 시절, 그는 베르티에 원수로부터 지로나, 타라고나, 토르토사를 동시에 포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오주로로 교체되었고, 생시르는 후임자가 도착하기 전에 또다시 직책을 떠났다. 결국 체포되어 자신의 영지로 보내졌으며, 1811년 국무원에 복귀할 때까지 은둔해야 했다.

5. 2. 나폴레옹과의 관계



생시르는 실용주의적이고 금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열렬한 공화주의자였기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는 복잡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나폴레옹의 군사적 능력은 인정했지만, 그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군 경력, 특히 승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생시르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이후 병사들이 새로운 프랑스 영사정부에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군사적 공훈을 인정받아 제1영사 나폴레옹으로부터 보석으로 장식된 사브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제1제국 선포 당시, 축하 선언문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1804년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임명한 프랑스 원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명단에는 장 란,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장 드 디외 술트와 같이 독립적인 지휘 경험이 부족했던 인물들도 포함되었기에, 생시르는 평생 나폴레옹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원수직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폴레옹 역시 공화주의 성향의 생시르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생시르는 여러 전역에서 유능함을 입증했지만, 나폴레옹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1803년 이탈리아 주둔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805년에는 앙드레 마세나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1806년 나폴리 침공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나폴리에서의 처우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을 때, 나폴레옹은 사형까지 언급하며 그를 위협하고 즉시 직위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1808년 반도 전쟁카탈루냐 군단을 지휘하며 카르데데우 전투, 몰린스 데 레이 전투 등에서 승리하는 등 뛰어난 전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였지만, 파리로부터 받은 특정 명령을 따르지 않고 사임하여 1811년까지 불명예스러운 상태에 놓였다. 이 시기 그는 제국 백작 작위를 받기는 했으나, 여전히 사단장 계급에 머물러 있었다.

생시르가 마침내 원수로 임명된 것은 1812년 러시아 원정 때였다. 제6군단을 지휘하던 그는 폴로츠크 전투에서 니콜라 우디노 원수가 부상당하자 제2군단의 지휘까지 맡아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 공로로 1812년 8월 18일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다. 오랫동안 미뤄졌던 승진이었지만, 생시르는 성격대로 원수 임명 소식을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단 한 줄만 언급했을 뿐이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생시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1813년 독일 해방 전쟁 중 드레스덴 전투 이후 도시 방어를 맡은 생시르는 뛰어난 수비 능력을 보여주었다. 비록 탄약과 식량이 떨어져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지만(이는 나폴레옹 휘하 원수 중 유일한 사례였다), 나폴레옹은 "생시르는 방어전에서 우리 모두 중 첫 번째이며, 나와 동등하다"라고 극찬하며 그의 가치를 인정했다. 또한 연합군이 생시르를 포로로 잡기 위해 규칙을 어겼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드레스덴 전투 자체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이 생시르를 공세에 기용한 것이 자신의 실수였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황제와 생시르의 관계는 이전보다 온화해진 것으로 보인다.

5. 3. 정치적 입장

1814년 6월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뒤, 구비옹 생시르는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으며, 같은 해 6월 4일 루이 18세에 의해 프랑스 귀족으로 임명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로 시작된 백일천하 동안에는 나폴레옹에게도, 망명 중이던 겐트의 루이 18세 정부에게도 가담하지 않으며 중립을 지켰다.

워털루 전투 이후 그는 잠정 정부에 참여하여 공화정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국왕이 귀국하자, 구비옹 생시르는 탈레랑 내각에서 1815년 7월 8일부터 9월 25일까지 전쟁 장관을 맡았다. 이 시기 그는 오랜 친구이자 동료 원수인 미셸 네의 재판에서 그를 돕기 위해 다른 나폴레옹 시대 원수 4명으로 배심원단을 구성하려 했지만, 몽세 원수가 참여를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그는 귀족원 재판에서 네의 추방에 찬성표를 던졌다.

1817년 6월, 구비옹 생시르는 해군 및 식민지 장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곧이어 같은 해 9월 12일부터 1819년 11월 18일까지 전쟁 장관직을 다시 맡기 위한 구실이었고, 그는 이 기간 동안 전쟁 장관직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군대를 왕조의 사적인 군대가 아닌 국가의 군대로 만들려는 목표 아래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제국 시절 참전용사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노력했으며, 총참모부를 조직하고 군법과 연금 규정을 개정했다. 특히 1818년 3월 10일에는 프랑스 혁명 시기의 징병 정책을 부활시키는 구비옹-생시르 법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 세력의 반발에 부딪혀 1819년 11월 전쟁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821년까지 모든 공직을 사임했다.

1817년 프랑스 왕국 후작 작위를 받았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업에 힘쓰고 회고록과 전쟁사 연구 및 집필에 몰두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1830년 3월 17일 프랑스 남동부 도시 이에르에서 사망했으며, 파리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GOUVION ST CYR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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