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카디건 백작 토머스 브루더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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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머스 브루더넬(1797–1868)은 제7대 카디건 백작으로, 영국의 귀족이자 군인, 정치인이었다. 그는 1818년 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토리당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아버지의 사망으로 백작위를 계승하여 상원 의원이 되었다. 군 복무를 시작하여 1854년 크림 전쟁에 참전,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경 기병대의 돌격을 지휘했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군대 내에서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고, 말년에는 경마, 사냥 등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카디건 백작은 훈장을 받았으나, 그의 사생활 문제로 가터 훈장은 받지 못했다. 그의 행동과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았으며, 대중문화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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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더넬브루스가 - 카디건 백작
카디건 백작은 1661년 토머스 브루데넬 경에게 처음 수여된 잉글랜드 귀족 작위로, 브루데넬 가문의 준남작위와 남작위를 거쳐 시작되었으며, 복잡한 상속 과정을 통해 몬태규 가문과 브루데넬-브루스 가문으로 이어졌고, 특히 7대 카디건 백작 제임스 토마스 브루데넬은 크림 전쟁 당시 경기병 여단의 돌격을 지휘한 인물로서 그가 입었던 니트 조끼에서 유래한 '카디건'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제7대 카디건 백작 토머스 브루더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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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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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짐 더 베어 |
출생일 | 1797년 10월 16일 |
출생지 | 햄블든, 버킹엄셔, 잉글랜드 |
사망일 | 1868년 3월 28일 |
사망지 | 딘 파크, 노샘프턴셔, 잉글랜드 |
묻힌 곳 | 알 수 없음 |
군사 경력 | |
소속 국가 | 영국 |
군 종류 | 영국 육군 |
복무 기간 | 1824년–1866년 |
최종 계급 | 중장 |
소속 부대 | 제8 킹스 로열 아이리시 후사르 제15 킹스 후사르 제11 후사르 |
지휘 | 경 기병 여단 |
주요 전투 | 크림 전쟁 |
참전 전투 | 발라클라바 전투 |
수상 | 바스 훈장 기사단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프랑스) |
가족 관계 | |
관계 | 알 수 없음 |
기타 | |
이후 활동 | 상원 의원 |
2. 생애
제7대 카디건 백작 토머스 브루더넬은 1797년 10월 16일 햄프셔의 햄블던에서 제6대 카디건 백작 로버트 브루더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98][99]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수학했고,[98][99] 1818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토리당 소속으로 활동했다.[98][99][100]
1824년 군에 입대해[99][100] 당시 영국 육군의 사관 임명 매매 제도를 통해 빠르게 진급했으며, 1830년 중령 계급을 얻고 제15 기병 연대의 지휘권을 매입했다.[100] 이후 제11 기병 연대의 지휘관으로 인도에 주둔하기도 했다.[99][98] 1837년 8월 14일 부친의 사망으로 제7대 카디건 백작위를 계승하여 상원 의원이 되었다.[101]
그는 타고난 급한 성격으로 상관 및 동료들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크림 전쟁 중인 1854년 발라클라바 전투에서는 기병 여단 지휘관으로서 유명한 경기병대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영어)을 감행했다. 이 무모한 돌격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으나, 역설적으로 그를 무용의 화신으로 영웅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쟁 후에도 군 복무를 계속하여 186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1868년 3월 28일 노샘프턴셔 코비의 자택 딘 파크에서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99] 두 번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으며, 작위는 사촌인 제2대 에일즈베리 후작 조지 브루더넬=브루스가 계승했다.[100]
오늘날 즐겨 입는 옷인 카디건은 제7대 카디건 백작이 애용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2. 1. 초기 생애

제임스 브루더넬은 1797년 10월 16일 버킹엄셔주 햄블던에서 제6대 카디건 백작 로버트 브루더넬과 그의 아내 페넬로페 앤 쿡(Penelope Anne Cooke)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2][98][99] 당시 햄블던의 저택은 브루더넬 가문의 기준으로는 평범한 수준이었다.[2] 1811년 2월, 아버지가 막대한 영지와 수입이 따르는 카디건 백작위를 상속받으면서, 제임스는 "브루더넬 경"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고, 14세의 나이에 노샘프턴셔주 딘 파크의 웅장한 가문 저택으로 이주했다.[2]
그는 해로우에서 교육받았다. 어린 시절 말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친 후 지능 손상을 우려하는 가족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재능을 보였다.[3][4] 학업 성취도는 좋았으나, 다른 학생과의 주먹 싸움(해로우에서는 용인되었으나, 브루더넬이 런던 외과 의사에게 손 골절 치료를 받는 동안 무단 결석으로 처벌받은 것이 부친인 백작을 화나게 함) 이후 아버지가 그를 학교에서 퇴학시켰다.[5] 이후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7명의 누이들 사이에서 유일한 아들이었던 그는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한 다소 버릇없는 아이로 자랐으며, 이는 훗날 그의 오만함과 완고함의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3]
브루더넬은 뛰어난 기수였고, 워털루 전투에서 기병대의 활약에 영감을 받아 군인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가문의 후계자를 전투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6] 대신 1815년 11월,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입학했다.[6] 귀족 신분으로 별도의 시험 없이 입학이 허가되었다. 그는 3학년까지 다녔으나, 어느 정도 학문적 적성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위를 받지 못하고 중퇴했다.[6]
2. 2. 의회 경력

1818년 2월, 옥스퍼드에서의 마지막 학기 중,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촌인 찰스 에일즈버리 후작이 소유한 말버러의 포켓 보로 하원 의원(MP)으로 선출되었다.[6] 이는 장차 귀족원에서 활동하게 될 브루더넬에게 의회 업무의 기초를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브루더넬은 옥스퍼드를 졸업한 후 바로 의정 활동을 시작하는 대신, 당시 부유한 젊은 귀족들의 관례였던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그의 여정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전통적인 목적지를 넘어 러시아와 스웨덴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방문한 국가들의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기회를 경험할 수 있었다.[6]
영국으로 돌아온 브루더넬은 하원에서 당시 집권당이던 토리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의정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조지 캐닝, 로버트 필, 캐슬레이 자작과 같은 당대의 뛰어난 의원들과 비교할 만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안에서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다. 1829년, 토리당은 제한적인 가톨릭 해방을 허용하는 법안을 발의했는데, 그의 후원자이자 사촌인 에일즈버리 후작은 그에게 이 법안에 반대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브루더넬은 법안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인 웰링턴 공작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세 차례의 결정적인 표결에서 기권했다. 이로 인해 에일즈버리 후작은 그에게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다.[8]
1830년, 브루더넬은 상당한 비용을 치르고 의회에 복귀했다. 이전의 불복종으로 인해 후원자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콘월의 포이 선거구 의석을 직접 구매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최소 5천파운드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된다.[9] 그러나 이 의석은 불과 2년 후, 포켓 보로와 같은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제정된 1832년 개혁법에 의해 폐지되는 선거구 중 하나가 되었다. 대신 그는 가문의 저택인 디인 파크와 가까운 곳에 새로 만들어진 노샘프턴셔 북부 선거구에 출마했다. 많은 유권자들이 가문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운동은 순탄치 않았다. 9월 12일 웰링버러에서 유세 도중 폭행을 당해 "상당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10] 그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유권자들에게 약 2만파운드를 살포했고, 결국 당선되었으나 휘그당 경쟁자에 이어 차점자(junior member)로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11]
1837년, 그는 자신의 연대와 함께 인도에서 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1837년 영국 총선에 재출마하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 지 며칠 후, 그는 아버지로부터 백작위와 디인 파크를 포함한 막대한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았고, 이에 따라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12][13]
2. 3. 군 경력

브루더넬은 영국 육군에서 경력을 쌓기로 했다.[22] 22세에는 노샘프턴셔 예오머리 기병대의 대위로서[13] 지역 개혁주의 시위에 대비하여 사비로 기병대를 무장시키기도 했다. 1824년 5월 6일, 27세의 나이에 8대 킹스 로열 아일랜드 후사르에 소위(Cornet)로 정식 입대했다.[12][99][100] 당시 사관 임명 매매 제도를 적극 활용하여 1825년 1월 중위(Lieutenant),[98] 1826년 6월 대위(Captain),[98] 1830년 8월 소령(Major)으로[98] 빠르게 진급했으며, 같은 해 12월 3일에는 중령(Lieutenant-Colonel) 계급을 얻었다.[12][100]
1832년 3월 16일에는 약 35,000파운드를 지불하고 15대 킹스 후사르의 지휘권을 얻었다.[12][100] 그러나 워털루 전투 참전 용사 등 경험 많은 장교들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사소한 부분까지 엄격하게 통제하려 하여 갈등을 빚었다.[12][23][24] 결국 1833년 부하 장교에 대한 군사 재판 과정에서 "비난받을 만한 행동"으로 공개적인 비판을 받았고,[25][26] 1834년 초 윌리엄 4세 국왕의 직접 명령으로 해임되었다.[25][26]
브루더넬은 여동생 해리엇 등 궁정 내 인맥을 통해 복귀를 추진했고,[27] 육군 총사령관 힐 경이 여전히 그의 지휘 능력에 회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27] 1836년 3월 제11 경룡 기병대(11th Light Dragoons) 지휘권을 얻었다.[99] 그는 다음 해 10월 인도에서 부대에 합류했으며,[12] 인도에 머무는 동안인 1837년 8월 14일 부친의 사망으로 제7대 카디건 백작위를 계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29][101] 카디건 백작은 자신의 사비를 들여 부대의 군복을 화려하게 바꾸는 등 부대의 명성을 높이는 데 힘썼다.[12][30] 그 결과 1839년 10월,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 영국에 온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을 호위하는 부대로 선정되었고, 부대는 '제11 (앨버트 공 친위) 후사르' (11th (Prince Albert's Own) Hussars)로 명칭이 바뀌었다. 하지만 연간 약 10,000파운드를 지출하며 도입한 값비싼 새 군복(장교 재킷 가격 40파운드)[31] 비용을 장교들에게 부담시켜 불만을 사기도 했다.[31] 특히 인도에서 오랫동안 복무해 온 장교들("인도 장교")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식당에서 포터 맥주 제공을 금지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손님이 모젤 와인을 "검은 병"에 담아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여 와인을 주문한 존 윌리엄스 레이놀즈 대위를 체포하는 "검은 병 사건" (Black Bottle affair)을 일으켰다.[32] 이 사건은 언론에 대서특필되어 조롱거리가 되었으며,[34] 이후 또 다른 장교인 리처드 레이놀즈 대위는 카디건에게 불복종 편지를 보냈다는 이유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면직되기도 했다.[35]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병에 걸린 젠킨스 소령을 간호하고 그의 사후 가족을 지원(아들 장학금으로 400파운드를 지불)하는 등 부하들에게 관대함을 베풀기도 했다.[36]
1847년 준장으로 진급했고, 1854년 6월 20일 소장으로 진급했다.[99][100]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제3대 루칸 백작조지 빙엄 소장의 사단 산하 경기병 여단장으로 참전했다.[98] 그의 군 경력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1854년 10월 25일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있었던 경 기병 여단의 돌격이다. 그는 상관인 루칸 경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러시아군 포병 진지를 향해 돌격을 이끌었다.[45] 이 돌격으로 여단 소속 674명 중 약 107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44] 카디건 자신은 포병 진지를 통과한 후 거의 피해 없이 돌아왔는데, 돌격 과정과 이후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명령 전달 과정의 혼선(명령을 전달한 루이스 놀란 대위는 돌격 중 전사), 직속 상관 루칸 경과의 불화 등이 원인으로 지적된다.[45][46] 참모 장교였던 서머셋 칼소프 대령은 카디건이 적진에 도달하기 전에 후퇴했다고 주장했고,[47] 이는 1863년 카디건이 제기한 명예 훼손 소송으로 이어졌으나 패소했다. 다만 법원은 그의 용기가 아닌 지휘 능력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라고 판결했다.[52] 역사학자 알렉산더 킹레이크 역시 카디건이 용감하게 돌격했지만, 이후 부하들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지휘관으로서 무능함을 보였다고 평가했다.[53] 카디건은 돌격 후 자신의 임무는 끝났다고 판단하고 후퇴했다고 주장했으나,[55] 다른 장교들은 그가 너무 빨리 후퇴하여 후속 부대에 대한 지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55][58][59][60]
발라클라바 전투 이후, 카디건은 크림 전쟁 기간 대부분을 발라클라바 항구에 정박한 자신의 호화 요트 《드리아드》 (Dryad)에서 보냈다.[63] 이로 인해 여단 지휘에 어려움이 있었고, 잉커만 전투 (1854년 11월 4-5일)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64] 또한 크림 반도의 혹독한 겨울 동안 식량, 사료, 피복 등 보급품 부족 문제가 심각했지만, 카디건은 적의 기습을 우려하고 상부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보급품 수송에 병력과 말을 투입하는 것을 거부하여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65][66][67] 결국 1854년 12월 8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의무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영국으로 돌아갔다.[70][71]
영국 귀국 후에도 군 복무를 계속하여 186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100]
계급 | 임관일 | 소속 부대 |
---|---|---|
소위 (Cornet) | 1824년 5월 6일 | 제8 왕립 아일랜드 경기병 연대[99][100] |
중위 (Lieutenant) | 1825년 1월 | [98] |
대위 (Captain) | 1826년 6월 | [98] |
소령 (Major) | 1830년 8월 | [98] |
중령 (Lieutenant-Colonel) | 1830년 12월 3일 | 제15 왕립 기병 연대 (1832년 지휘권 인수 ~ 1834년 해임)[100] |
중령 (Lieutenant-Colonel) | 1836년 3월 | 제11 경룡 기병대 (이후 제11 후사르)[100] |
대령 (Colonel) | 1846년 | [99][100] |
준장 (Brigadier General) | 1847년 | |
소장 (Major-General) | 1854년 6월 20일 | [99][100] |
중장 (Lieutenant-General) | 1861년 | [100] |
2. 4. 결혼
1820년대 초, 브루더넬은 존 톨마슈 해군 제독의 딸이자 크리스찬 존스턴 중령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톨레마체 존스턴 부인(1797년 12월 8일 ~ 1858년 7월 15일)을 만났다. 존스턴 중령은 브루더넬의 오랜 친구였으나, 브루더넬은 결혼 직후부터 친구의 아내에게 구애한 것으로 알려졌다.[14] 1824년 3월, 브루더넬은 엘리자베스의 사촌 길버트 존 히스코트에게 결투를 신청했는데, 이는 히스코트가 브루더넬의 여동생 엠마와의 약혼을 파기했기 때문이며 외도와는 관련이 없었다. 결투에서 양측 모두 다치지는 않았다.[15][13][16] 존스턴 중령은 1824년 6월 이혼 소송을 시작하여 1826년 초에 마무리 지었다. 그는 브루더넬로부터 1000GBP의 손해 배상을 받았다.[17]브루더넬은 1826년 6월 19일 엘리자베스 제인 헨리에타 할리데이와 결혼했다.[12][18][99] 그러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자녀 없이 1837년부터 별거했으며[12][18] 결국 1846년에 이혼했다.[99]
첫 번째 아내가 병으로 죽어가던 중, 브루더넬은 아델라인 드 호세이와 불륜 관계를 맺어 더욱 악명을 얻었다.[19] 첫 아내가 1858년 7월 15일에 사망한 후,[14] 그는 1858년 9월 20일 하원 의원 스펜서 호지 드 호지의 딸인 아델라인 루이자 마리아 드 호지와 재혼했다.[19][99] 두 사람 사이에는 27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고 이번에도 자녀는 없었지만,[20][99] 카디건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고 전해진다.[20] 아델라인은 사교계에서 배제되었지만 시골 생활에 적응했으며, 카디건은 그녀와 함께 편안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많은 돈을 썼다.[20] 아델라인은 카디건의 주요 정부였던 마리아, 에일즈버리 후작 부인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남편의 다른 불륜 관계들도 용인했다고 한다.[21]
2. 5. 말년

1866년 군에서 은퇴한 후, 그는 노샘프턴셔 코비의 자택인 딘 파크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경마, 사냥, 사격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또한 로열 요트 스쿼드론의 회원이자 로열 서던 요트 클럽의 코모도어이기도 했다.
은퇴 후에도 그의 귀족원 활동은 계속되었다. 때때로 런던으로 가서 군사 문제에 대해 연설했으며, 자신의 군 경력에 대한 추가적인 공식 인정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1866년에는 토머스 칼라일과 함께 자메이카 총독 에드워드 존 에어를 지지하는 시위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에어 총독은 전 해 10월에 발생한 모란트 만 반란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진압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1867년에는 제2차 1867년 개혁법안에 찬성하는 발언을 하여 일부를 놀라게 했는데, 그는 개혁의 흐름을 막으려는 시도는 지났으며 투표권 확장이 "모든 사회 계층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자신의 입장 변화를 설명했다. 1868년에는 워털루 전투에서 효과를 보인 폭발성 포탄을 발명한 고 헨리 슈래프넬 장군에 대한 추가적인 인정을 요구하는 청원을 의회에 제출했다.
1868년 3월 28일, 카디건 백작은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전날 낙마 사고로 인한 부상이었다. 그는 평소 "어떤 친구도 타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위험한 말에서 떨어졌는데, 이는 뇌졸중 발작 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세인트 피터 교회, 딘의 가족 예배당에 특별히 마련된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의 작위는 사촌인 조지 브루덴넬-브루스, 제2대 에일즈버리 후작에게 상속되었다.[100] 1915년 그의 미망인이 사망한 후, 딘 파크는 조지 윌리엄의 남동생인 어니스트 브루덴넬-브루스, 제3대 에일즈버리 후작의 후손들에게 넘어갔다.
3. 유산
크림 전쟁 중 발라클라바 전투(1854년 10월 25일)에서 경 기병 여단의 돌격을 지휘한 사건은 카디건 백작에게 씻을 수 없는 논란을 남겼다. 이 무모한 돌격으로 인해 그의 지휘 아래 있던 674명의 병사 중 약 107명이 목숨을 잃었다.[44] 돌격 명령 자체는 직속 상관인 루칸 경에게서 받은 것이었고, 명령을 전달한 루이스 놀란 대위의 실수 가능성도 제기되었기에[45] 카디건 백작 개인의 책임 범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돌격 이후 그의 행동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돌격에서 돌아온 카디건 백작은 전사한 놀란 대위의 규율 위반을 보고하는 것을 우선시했으며,[46] 일부 참관인들은 그가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후퇴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레글런 경의 참모였던 서머셋 존 고프 칼소프 대령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카디건 백작이 돌격 중 대열을 이탈해 후퇴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47] 카디건 백작은 이 주장에 대해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재판부는 그의 용기는 인정하면서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 부족을 지적했다.[52] 역사학자 알렉산더 킹레이크 역시 카디건 백작이 용감하게 선두에서 돌격했지만, 그 결과 부하들과의 소통이 끊어져 지휘 공백을 초래하는 "무능함"을 보였다고 평가했다.[53] 카디건 백작 스스로는 적 포대를 통과한 후 "사병들 틈에서 적과 싸우는 것"을 경멸하여 후퇴했다고 밝혔으나,[55] 그의 성급한 후퇴는 리프란디 러시아 장군을 포함한 여러 목격자들에게 포착되었고,[57][56][59] 후방에 남겨진 부하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55][58][60]
또한 카디건 백작은 잉커만 전투에는 아예 불참했으며,[64] 크림 반도의 혹독한 겨울 동안 병사들이 겪는 보급품 부족 문제 해결에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적의 기습을 우려하고 "명령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안에 도착한 보급품을 수송하기 위한 병력 투입을 거부했다.[65][66] 이러한 무책임한 태도는 훗날 알렉산더 톨로흐(Alexander Tulloch) 대령의 조사에서도 지적되었다.[67][69]
1854년 12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영국으로 돌아온 카디건 백작은[70] 뜻밖에도 영국에서는 전쟁 영웅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72] 빅토리아 여왕을 접견하고[73] 여러 연회와 연설에서 자신의 무용담을 과장되게 이야기하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74][72] 그는 이 공로로 바스 훈장 기사 사령관(KCB)을 포함한 여러 훈장을 수여받았다.[75][76]
그러나 그의 영웅담은 오래가지 못했다. 크림 전쟁에서 돌아온 동료 장교들의 증언과 조지 라이언과 같은 초기 옹호자들의 입장 변화,[81] 그리고 칼소프 대령의 책 출판과 툴로크 대령의 공식 조사 결과가 알려지면서 그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이 점차 드러났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디건 백작은 특유의 오만함으로 비판을 무시하며 기병대 감찰관 등의 직책을 유지했다.[12][83]
한편, 카디건 백작의 명성은 뜻밖의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상인들은 그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그가 전쟁터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니트 조끼를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이 옷은 그의 이름을 따 '카디건'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패션 아이템이 되었다.[72]
카디건 백작은 이후에도 군에서 중장까지 진급하고 연대장직을 맡는 등[85] 군 경력을 이어갔으나, 크림 전쟁에서의 논란적인 행적과 귀족적인 오만함으로 인해 군사 역사에서 여전히 논쟁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4. 평가
제7대 카디건 백작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9판(1889년)은 발라클라바 전투에서의 그의 행동에 대해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일부 비평가들은 훌륭한 용기와 의문 없는 명령 복종만을, 다른 이들은 무모하고 정당화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생명의 낭비만을 보았다"고 언급했다. 반면, 제11판(1910-11)에서는 "카디건과 그의 부하들은 가장 혹독한 비평가들로부터 훌륭한 용기와 의문 없는 명령 복종을 인정받았다"고 달리 기술했다.
세실 우드햄-스미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계급 시스템을 광범위하게 비판하는 저서 《이성의 결여 (The Reason Why)》(1953)에서 백작을 당시 영국 사회의 폐단을 비추는 프리즘으로 사용했지만, 돌격 자체에서 카디건은 흔들리지 않는 용기와 규율로 행동했다고 인정했다. 도널드 토머스의 1974년 전기 《카디건: 발라클라바의 영웅》은 보다 동정적인 묘사를 제공했다. 반면 소 데이비드의 1997년 평가는 《살인 백작 (The Homicidal Earl)》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매우 비판적이다. 테리 브라이튼의 2005년 저서 《지옥의 기수: 경기병대의 돌격에 대한 진실 (Hell Riders: The Truth about 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은 카디건을 여단 지휘관으로서 다소 비판적으로 평가하지만, 돌격 자체에 대해서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카디건의 가장 논란이 많은 행동은 크림 전쟁 중 발라클라바 전투(1854년 10월 25일)에서 경 기병 여단의 돌격을 이끌었을 때 발생했다. 이 돌격으로 그의 지휘 아래 있던 674명의 병사 중 약 107명이 목숨을 잃었다.[44] 카디건 본인은 러시아 포병 진지에 도달한 후 무사히 돌아왔다. 그가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그는 직속 상관인 루칸 경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공격했으며,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루칸 경과 카디건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는 루칸 경이 카디건의 여동생과 결혼했지만 카디건이 보기에 그녀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5] 명령을 전달한 루이스 놀란 대위는 돌격 중 사망했으며, 루칸과 카디건 모두 그가 명령을 잘못 전달했다고 비난했다. 돌격에서 돌아온 카디건은 가장 먼저 놀란 대위(그가 죽은 줄 몰랐음)가 공격 시작 시 자신보다 앞서 말을 몰며 무질서하게 행동했다고 보고했다.[46]
레글런 경의 참모 장교였던 서머셋 존 고프 칼소프 대령은 자신의 저서에서 카디건이 돌격대가 적과 교전하기 전에 전장을 이탈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47] 카디건은 1863년 칼소프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재판부는 그의 용기가 아니라 능력이 문제시되었다고 명확히 했다. 재판부는 그가 "뚜렷하게 드러난 용기"로 부하들을 이끌고 적 포병 진지까지 갔지만, 그 이후 "장군으로서 그의 행동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판결했다.[52] 역사학자 알렉산더 킹레이크 역시 카디건이 돌격 이후 "무능함"을 보였지만, 이는 그가 너무 앞서 용감하게 질주한 탓에 부하들과의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53]
카디건이 적 포대를 통과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포대 너머에서 전쟁 전 알고 지내던 러시아 장교 Leon Hieronim Radziwiłł|레온 히에로님 라지비우pl에게 목격되기도 했다.[54] 카디건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사병들 틈에서 적과 싸우는 것"을 경멸하며[55] 부대로 돌아섰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걸어서 돌아갔다고 말했다.[55] 그러나 루칸 경은 카디건이 말을 타고 급히 돌아오다가 자신이 감시당하는 것을 깨닫고 속도를 늦춰 걸어갔다고 증언했다.[56] 러시아 사령관 리프란디 장군 역시 공격 후 말을 타고 도망치는 영국 장교를 목격했다고 보고했다.[57] 카디건이 후퇴하는 동안에도 여단의 2, 3열 병사들은 여전히 돌격을 계속하고 있었다.[55][58] 제4 척탄병 연대의 조지 파제트 경은 카디건이 제때 교전 중지 명령을 내렸다면 불필요한 백병전과 손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칸의 참모 윌리엄 포렛 경은 카디건이 후방으로 "미친 사람처럼"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59] 파제트 대령은 돌아오는 길에 "침착한" 카디건을 만나 해명을 요구했으나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 못했고,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60][61][62]
또한 카디건은 크림 전쟁 기간 동안 많은 밤을 발라클라바 항구에 정박한 자신의 호화 요트 《드리아드》에서 보냈으며,[63] 이로 인해 여단 지휘에 어려움을 겪었다.[64] 그는 잉커만 전투(1854년 11월 4-5일)에 사실상 불참했다.[64] 크림의 겨울이 닥쳤을 때 식량, 사료, 의류 등 보급품이 부족했지만, 카디건은 보급품을 운반하기 위해 병력과 말을 투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는 적의 기습을 우려하고 "명령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65][66] 이로 인해 많은 말이 죽었다.[67] 알렉산더 톨로흐(Alexander Tulloch) 대령은 조사 위원회에서 카디건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말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보급품 수송에 투입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67][68][69] 카디건은 1854년 12월 8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영국으로 돌아갔다.[70] 캐라도크 포함으로 스쿠타리로 이송되어 군 병원을 방문한 후, 그는 1854년 12월 26일 P&O 증기선 리폰을 타고 마르세유로 출발하여 파리를 경유하여 불로뉴로 기차를 탔다.[71]
5. 대중문화
조지 맥도널드 프레이저의 소설 시리즈 ''플래시맨 연대기''에는 카디건 백작이 여러 차례 악역으로 등장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플래시맨이 속한 제11 후사르 연대를 지휘하며, 플래시맨이 상인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를 인도로 전출시킨다. 이후 ''플래시맨 앳 더 차지''에서는 플래시맨의 아내 엘스페스를 유혹하려 하며, 플래시맨은 마지못해 카디건과 함께 경기병여단의 돌격에 참여하게 된다. ''플래시맨 인 더 그레이트 게임''에서는 기자들로부터 자신의 명성을 지켜달라고 플래시맨에게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모욕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플래시맨 앤 더 엔젤 오브 더 로드''에서는 플래시맨이 카디건과 패니 파제트의 관계를 목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1968년에 개봉한 영화 ''머나먼 전쟁''(''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은 우드햄 스미스의 연구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발라클라바 전투를 영국군의 시각에서 다룬다. 이 영화에서 카디건 백작(배우 트레버 하워드 분)은 군의 무능함을 상징하는 주요 적대자로 그려진다.[97] 그는 가혹한 훈련가이자 호색한이며 무능한 군인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검은 술병" 사건을 다루지만, 루이스 놀란을 카디건의 적으로 잘못 설정하고 루칸 경과의 경쟁 관계를 부각한다. 또한 카디건이 패니 더벌리와 불륜 관계를 맺는다는 허구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유비소프트가 2015년에 출시한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에서도 카디건 백작은 적으로 등장한다. 1868년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이 게임에서 카디건은 템플 기사단의 일원으로, 영국 총리 벤자민 디즈레일리를 암살하여 부정 선거 방지법 통과를 막으려 한다. 그는 게임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제이콥 프라이에 의해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암살당한다.
6. 작위 및 훈장
1837년 8월 14일 아버지 로버트 브루더넬이 사망함에 따라 다음의 작위를 승계했다.[99]
- '''제7대 카디건 백작'''
- :(1661년 4월 20일의 칙허장에 따른 잉글랜드 귀족 작위)
- '''레스터셔주 스탠턴 위빌의 제7대 브루더넬 남작'''
- :(1627/8년 2월 26일의 칙허장에 따른 잉글랜드 귀족 작위)
- '''(딘의) 제7대 준남작'''
- :(1611년 6월 29일의 칙허장에 따른 잉글랜드 준남작위)
'''훈장'''
7. 군 계급
wikitext
시기 | 계급 | 소속 부대 / 직책 | 비고 |
---|---|---|---|
1824년 5월 | 소위 | 제8 경 기병 연대 | [99][100] |
1825년 1월 | 중위 | - | [98] |
1826년 6월 | 대위 | - | [98] |
1830년 8월 | 소령 | - | [98] |
1830년 12월 ~ 1834년 | 중령 | 제15 경 기병 연대 | [100] |
1836년 ~ 1854년 | 중령 | 제11 경기병 연대 | [100] |
1846년 | 대령 | - | [99][100] |
1847년 | 준장 | - | |
1854년 | 소장 | - | [99][100] |
1859년 ~ 1860년 | 대령 (명예 연대장) | 제5 용기병 연대 | [100] |
1860년 ~ 1868년 | 대령 (명예 연대장) | 제11 경기병 연대 | |
1861년 | 중장 | - | [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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