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물산공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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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물산공진회는 1915년 일제가 한일 병합 5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의 산업 발전과 통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경복궁에서 개최한 박람회이다. 1913년부터 준비하여 경복궁 내 전각을 철거하고 전시장을 건설했으며, 다이쇼 천황의 대리, 조선총독 등 주요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개막했다. 조선 각지에서 출품된 다양한 산업 제품과 부대 행사, 대규모 조명 시설 등으로 많은 관람객을 모았으며, 일본 본토에서 온 방문객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박람회는 조선총독부의 통치 성과를 선전하고, 일본의 기술과 문명을 알리는 데 기여했으나, 경복궁 훼손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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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공진회 | |
---|---|
조선물산공진회 | |
전시회 정보 | |
종류 | 박람회 |
범주 | 10 |
![]() | |
개최 연도 | 1915년 |
명칭 | 조선물산공진회 (Chōsen Industrial Exhibition) |
건물 | 일호관 및 경복궁 |
방문객 수 | 100만 명 |
개최 국가 | 대한제국 (일본 제국) |
개최 도시 | 경성부 (서울) |
개최 장소 | 경복궁 |
개장일 | 1915년 9월 11일 |
폐장일 | 1915년 10월 31일 |
2. 배경과 준비
1910년 일본 제국의 한일병합 이후 5년을 맞이한 조선총독부는 그간의 통치 성과를 과시하고, 조선의 산업 발전을 도모하며, 일본 본토의 관람객에게 그 실상을 알리겠다는 취지 아래 박람회 개최 계획에 나섰다. 일제의 통치로 "개선 진보" (改善進歩)한 조선의 산업, 교육, 위생, 토목, 교통, 경제 등에 관한 시설과 통계, 조선에서 생산된 제품, 그밖에 조선과 관련된 일본과 각국의 생산품 전시를 기획하였다.[4]
1915년 9월 11일, 다이쇼 천황의 명을 받은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고노 히로나카 농상무장관,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이 열렸다.
1913년부터 개최 계획이 수립되었고, 1914년 8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사무총장으로 하는 공진회 평의회가 발족하며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박람회 장소는 경복궁 내 약 72,000평 부지와 인천부 수족관으로 결정되었다.[9][4]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내 전각 대부분을 철거하고 박람회 전시장 6동을 가설하였으며, 일부 전각은 수리하여 박람회장으로 활용하였다.
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조선 각지에 37개소의 협찬회와 관람 장려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지방 거주자의 단체 관람 주선 외에도 금강산에서 강원도 협찬회가 일본인 관광객을 위해 일식 숙박 시설을 준비하거나, 인천 수족관 개관 등 일본인 관광객 유치 활동을 펼쳤다.
3. 개최
51일 동안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의 총 관람객은 1,164,383명이었으며, 이 중 일본에서 온 관람객은 299,541명이었다.[14][15][6]
박람회장 내부는 6,205개의 전등으로 대규모 조명 장식을 설치하여, 신문에서는 "불야성" (不夜城)이라고 표현했다.[12] 장내 시설 중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전통 공연, 영화 상영이 이루어진 연예관 (演芸館)이 인기를 끌었다.
조선 각지의 37곳에는 협찬회 또는 관람 장려회가 조직되었다. 금강산에서는 강원도 협찬회가 일본인 관광객을 위해 일본 음식을 제공하는 숙박 시설을 마련하고, 인천에서는 수족관을 개장하는 등, 공진회를 계기로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인에 대한 관광 알선도 이루어졌다.
3. 1. 전시 내용
조선물산공진회에는 조선 각지에서 출품한 각종 생산품이 전시되었다. 출품 품목 중 관공서 출품 및 조선 이외 지역 출품을 제외한 모든 품목에 대해 심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에 따라 포상이 이루어졌다. 심사 대상은 총 25,096건이었으며, 이 중 6,965건이 포상 대상이 되었다.[4]
전시는 제1호관, 제2호관, 심세관 (審勢館), 미술관 (美術館), 기계관 (機械館), 참고관 (参考館), 농업분관 (農業分館), 수산분관 (水産分館)으로 구성되었다. 전시장 내부에는 미니어처 철도를 설치한 철도국 특설관 (鉄道局特設館)이 인기를 끌었다.[10] 철도국 특설관의 첨탑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도 알려졌다.[11]
전시된 물품은 4만 점이 넘었으며, 주로 일본과 한국의 물품이었고, 일부 대만 물품도 있었다. 1호관에는 농업 관련 물품이 전시되었으며, 기계관과 참고관에도 다양한 물품이 전시되었다.[3]
조선물산공진회에서는 일본 통치에 의해 개선, 진보한 조선의 산업, 교육, 위생, 토목, 교통, 경제 등에 관한 시설과 통계, 조선 물산, 그리고 조선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일본 및 여러 외국 물산의 전시가 이루어졌다.[4]
3. 2. 부대 행사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에 맞춰 가정박람회[13], 조선철도 1천리 기념축하식, 일본 적십자사 및 애국부인회 조선지부총회[6] 등 각종 행사가 조선호텔, 경성호텔 등 경성 각지에서 개최되었다.[6] 이러한 행사들에 맞춰 많은 관계자가 경성에 모이면서 공진회도 함께 둘러보았다.
4. 결과와 평가
조선물산공진회는 51일 동안 총 1,164,383명의 관람객이 방문했으며, 이 중 299,541명은 일본 본토에서 온 관람객이었다.[14][15][6] 1915년 10월 31일 폐막 전까지 100만 명 이상이 방문했다.[1]
일본은 조선물산공진회를 통해 조선 통치의 성과를 과시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조선인의 대부분은 일본의 선진 기술과 문명에 동경을 품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4] 1907년의 두 번의 박람회와 1915년의 공진회의 성공으로 일본에 의한 조선 통치는 정착기에 들어갔다고 평가받는다.[4]
4. 1. 경복궁 훼손 논란
1913년부터 총독부는 박람회 부지 확보를 목적으로 근정전, 경회루 등 일부만을 남기고 경복궁 내 전각 4,000여 칸을 헐었다.[16][17] 확보한 부지 위에는 전시장으로 쓰일 석조건물과 가건물 18동, 그리고 프랑스식 정원을 조성하였다.[17] 광화문은 박람회 출입문으로 사용되었으며, 문 앞에는 일장기와 국화 문양으로 꾸며진 가설 장식문이 덧붙여졌다.[17]박람회가 끝난 뒤 미술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이름만 바뀌고 전시 내용은 거의 유지한 채 운영되었다.[17]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식민주의 역사학 구축과 선전에 기여하는 전시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18]
흥례문 권역에는 조선총독부 청사 건설이 계획되었으며, 1926년에 완공되었다.[6] 이 건물은 8·15 광복 후 중앙청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의사당, 정부청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으로 철거되었다. 흥례문은 2001년에 복원되었다.
박람회는 경복궁 부지에서 열렸으며,[3] 기존 건물과 새로 건설된 건물 모두에서 진행되었다.[3] 배치는 역사적인 한국 건축과 현대 일본 건축을 대조하도록 설계되었으며, 방문객들은 기존의 광화문을 통과하여 근정전 정전 앞에 있던 새로운 일호관(第一號館)으로 들어갔다.[3]
이태문은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개조함으로써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민족(국민) 의식까지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라고 말하고 있다.[4]
5. 참고문헌
- 박미정, 「식민지 조선의 박람회 사업과 경성의 공간 형성」, 《입명관언어문화연구》 21-4호, 2010년, 157쪽.
- 이태문,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의 구성과 내용」, 《경응의숙대학일길기요 언어・문화・커뮤니케이션》 (30), 25-61, 2003.
- 이상해, 《궁궐ㆍ유교건축》, 서울: 솔 출판사, 2004.
참조
[1]
서적
Chora 7: Intervals in the Philosophy of Architecture
https://books.google[...]
McGill-Queen's Press - MQUP
2016-02-01
[2]
논문
Inventing the identity of modern Korean architecture, 1904-1929
McGill University, Montreal, Canada
2014-11-01
[3]
서적
Aesthetic Constructions of Korean Nationalism: Spectacle, Politics and History
2011-01-01
[4]
논문
1915年朝鮮物産共進会の構成と内容
慶應義塾大学日吉紀要 言語・文化・コミュニケーション (30)
2003-01-01
[5]
논문
植民地朝鮮の博覧会事業と京城の空間形成
立命館言語文化研究21-4号
2010-01-01
[6]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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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01
[15]
뉴스
[신인섭 칼럼] 한국 최초의 컬러 포스터
https://www.madtimes[...]
매드타임스
2022-05-25
[16]
문서
이상해
[17]
뉴스
[단독] 세종 거닐던 경복궁 터…일제가 깔아뭉갠 흔적 드러났다
https://www.hani.co.[...]
한겨레
2021-07-13
[18]
웹사이트
https://www.yna.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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