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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플랜태저넷 클래런스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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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플랜태저넷은 1449년 더블린에서 태어난 클래런스 공작으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에 연루되었다. 형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자 아일랜드 총독이 되었으나, 장인 워릭 백작의 반란에 가담하여 헨리 6세를 복위시키려다 실패했다. 이후 동생 리처드 3세의 도움을 받아 워릭 백작을 제거하고 에드워드 4세와 화해했지만, 왕위 계승 다툼과 반역 혐의로 런던탑에 갇혀 처형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며, 솔즈베리 백작 부인 마거릿과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을 자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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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플랜태저넷 클래런스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조지 플랜태저넷
작위클래런스 공작
가문요크 가문
아버지리처드 플랜태저넷
어머니세실리 네빌
배우자이사벨 네빌 (1469년 결혼, 1476년 사망)
생애
출생일1449년 10월 21일
출생지아일랜드, 더블린 성
사망일1478년 2월 18일
사망 장소런던 탑
매장일1478년 2월 25일
매장지테크스베리 수도원
자녀
자녀마거릿 폴, 에드워드 플랜태저넷
작위
작위클래런스 공작
임명일1461년 6월 28일

2. 생애

요크 공작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의 아들로 태어나 형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하면서 클래런스 공작 작위를 받았다. 초기에는 형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으나, 강력한 귀족이자 '킹메이커'로 불린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손잡고 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다시 복귀하는 등 장미 전쟁 시기 복잡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워릭 백작 사후 그의 영지 상속 문제를 둘러싸고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갈등을 겪었으며, 아내 이사벨 네빌이 1476년 사망한 후 형 에드워드 4세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1478년 반역 혐의로 런던탑에 투옥되어 처형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에서는 그가 말름지 와인 통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조지는 이사벨 네빌과의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성인으로 성장한 것은 마거릿 폴과 에드워드 플랜태저넷 둘뿐이었다. 이들은 튜더 왕가의 정통성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어 결국 헨리 7세헨리 8세 치세에 모두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16][17]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조지는 1449년 10월 21일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그의 아버지인 요크 공작 리처드가 왕위를 놓고 헨리 6세에게 도전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의 대부는 제임스 피츠제럴드, 데스몬드 6대 백작이었다. 그는 리처드와 세실리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중 둘째였다. 그의 아버지는 1460년에 사망했다. 1461년, 그의 형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하자 조지는 클래런스 공작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5]

클래런스 공작과 공작 부인, 카디프 성.


한때 부르고뉴 공작 샤를 용담공의 딸인 메리의 남편감으로 거론되기도 했던 클래런스는 사촌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킹메이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469년 7월, 그는 칼레의 노트르담 교회에서 워릭 백작의 장녀 이사벨 네빌과 결혼했다.[5]

클래런스는 처음에는 형 에드워드 4세의 왕위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그의 장인 워릭 백작이 에드워드 4세를 배신하고 폐위된 헨리 6세의 왕비 앙주 마거릿과 동맹을 맺자, 클래런스 역시 워릭을 따라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렸고, 이로 인해 아일랜드 총독 직에서 해임되었다. 클래런스는 임신 중이던 아내 이사벨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워릭과 합류했다. 이사벨은 1470년 4월 16일, 칼레 앞바다의 배 위에서 첫 아이인 딸을 낳았으나, 아이는 곧 사망했다. 헨리 6세는 클래런스를 자신의 아들 다음 가는 왕위 계승자로 삼아 보상했다. 이는 랭커스터 왕가에 대한 반역죄와 사생아 혐의를 들어 에드워드 4세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시킨 조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클래런스는 장인 워릭에 대한 충성심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달았다. 워릭 백작이 1470년 12월, 자신의 둘째 딸이자 클래런스의 처제인 앤 네빌을 헨리 6세의 아들과 결혼시킨 것이다. 이는 워릭이 클래런스를 왕위에 올리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더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워릭이 에드워드 4세를 클래런스로 대체할 가능성이 낮아 보이자, 클래런스는 비밀리에 형 에드워드 4세와 화해했다.

헨리 6세를 왕위에 유지하려는 워릭 백작의 노력은 결국 실패했고 워릭은 1471년 4월 바넷 전투에서 사망했다. 재임명된 에드워드 4세는 형인 클래런스를 잉글랜드 대장으로 임명하여 왕실의 호의를 되돌렸다. 그의 장인이 사망했으므로 클래런스는 아내의 권리로 워릭 백작이 되었지만,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1471년에 미망인이 된 앤 네빌과 결혼했기 때문에 워릭 전체 영지를 상속받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개입하여 결국 영지를 형제 사이에 나누었다.[5] 클래런스는 아내의 권리로 1472년 3월 25일에 초대 워릭 백작[6]으로, 새로운 창설로 초대 솔즈베리 백작[5]으로 만들어졌다.

1475년 클래런스의 아내 이사벨은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고, 그는 나중에 워릭 백작이 되었다. 이사벨은 1476년 12월 22일, 짧은 생을 살았던 리처드(1476년 10월 5일 출생 – 1477년 1월 1일 사망)를 낳은 지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조지와 이사벨은 글로스터셔의 테우크스베리 수도원에 함께 묻혔다. 그들의 생존 자녀인 마가렛과 에드워드는 1485년까지 고모 앤 네빌의 보살핌을 받았고, 에드워드는 10살이었다.

2. 2. 워릭 백작과의 동맹과 배신



처음에는 형 에드워드 4세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던 클래런스 공작 조지는 점차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는 강력한 귀족이자 '킹메이커'로 불린 사촌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가까워졌다. 부르고뉴 공작령의 상속녀 부르고뉴의 메리와의 혼담이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대신 1469년 7월 칼레의 노트르담 교회에서 워릭 백작의 장녀 이사벨 네빌과 결혼하며 워릭 백작과의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5] 이는 당시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비밀 결혼 및 외교 정책 등으로 워릭 백작과 갈등을 빚던 에드워드 4세를 견제하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결국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리고, 폐위되었던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6세 및 그의 왕비 앙주 마거릿과 연합했다. 클래런스 공작 역시 장인을 따라 에드워드 4세를 배신하고 이 동맹에 가담했다. 이로 인해 그는 아일랜드 총독 직위를 박탈당했고, 임신한 아내 이사벨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워릭 백작 세력에 합류했다. 1470년 4월, 칼레 앞바다의 배 위에서 첫 딸을 낳았으나 아이는 오래 살지 못했다. 헨리 6세는 클래런스 공작에게 자신의 아들 웨일스 공 에드워드 다음으로 왕위 계승권을 약속하며 그의 합류를 보상했다.

그러나 클래런스 공작은 워릭 백작의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1470년 12월, 워릭 백작이 자신의 둘째 딸 앤 네빌을 헨리 6세의 아들 웨일스 공 에드워드와 결혼시킨 것이다. 이는 워릭 백작이 클래런스 공작을 왕위에 올리는 것보다 자신의 가문 세력 확장에 더 관심이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자신이 왕이 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고 판단한 클래런스 공작은 비밀리에 형 에드워드 4세와 다시 접촉하며 화해를 추진했다.

1471년, 클래런스 공작은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훗날 리처드 3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형제들과 다시 손을 잡았다. 에드워드 4세 측은 1471년 4월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의 군대를 격파했고, 워릭 백작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랭커스터 왕가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헨리 6세와 웨일스 공 에드워드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제거되었다.

왕위를 되찾은 에드워드 4세는 동생 클래런스 공작의 배신을 용서하고 그를 다시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으며, 잉글랜드 대장으로 임명하는 등 예우를 갖췄다.[5] 장인 워릭 백작이 사망함에 따라 클래런스 공작은 아내 이사벨의 권리(jure uxoris)로 막대한 워릭 백작령을 상속받을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워릭 백작의 둘째 딸이자 웨일스 공 에드워드의 미망인이었던 앤 네빌이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1471년에 결혼하면서 상속 문제가 복잡해졌다. 결국 에드워드 4세의 중재 하에 워릭 백작령은 클래런스 공작과 글로스터 공작 형제에게 분할 상속되었다.[5] 클래런스 공작은 1472년 3월 25일, 공식적으로 초대 워릭 백작[6] 및 초대 솔즈베리 백작[5]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워릭 백작령 상속 문제는 형제간 갈등의 씨앗으로 남았다. 특히 아내 이사벨이 1476년에 사망하면서 상속 다툼에서 클래런스 공작의 입지는 더욱 불리해졌다. 계속되는 야심과 불만으로 인해 그는 다시 형 에드워드 4세에 대한 반역을 꾀한다는 의심을 받았고, 결국 런던탑에 투옥되어 처형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에서는 그가 말름지 와인(Malmsey wine) 통에 빠져 익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2. 3. 에드워드 4세 복위와 워릭 백작령 상속 분쟁

클래런스는 장인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킹메이커")이 에드워드 4세를 버리고 폐위된 헨리 6세의 왕비 앙주 마거릿과 동맹을 맺자, 장인을 따라 에드워드 4세에게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해 그는 아일랜드 총독 직위를 박탈당했다. 임신한 아내 이사벨 네빌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워릭 백작과 합류했으나, 이사벨은 1470년 4월 칼레 앞바다의 배 위에서 첫 아이를 사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헨리 6세는 클래런스를 자신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다음의 왕위 계승자로 삼으며 보상했다. 이는 랭커스터 왕가에 대한 반역죄와 사생아 혐의를 들어 에드워드 4세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한 조치였다.

그러나 1470년 12월, 워릭 백작이 자신의 둘째 딸이자 클래런스의 처제인 앤 네빌을 헨리 6세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결혼시키자, 클래런스는 장인이 자신을 왕위에 올리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워릭 백작이 에드워드 4세 대신 클래런스를 왕으로 만들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클래런스는 비밀리에 형 에드워드 4세와 화해했다.

헨리 6세를 복위시키려던 워릭 백작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워릭 백작은 1471년 4월 바넷 전투에서 전사했다. 왕위를 되찾은 에드워드 4세는 동생 클래런스를 잉글랜드 대장으로 임명하며 왕실의 호의를 베풀었다. 장인 워릭 백작이 사망하면서 클래런스는 아내 이사벨의 권리로 워릭 백작 작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워릭 백작의 막대한 영지 전체를 상속받지는 못했는데, 이는 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1471년 워릭 백작의 미망인이 된 작은딸 앤 네빌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4세가 개입하여 결국 워릭 백작령은 두 형제에게 분할되었다.[5] 클래런스는 1472년 3월 25일, 아내의 권리로 초대 워릭 백작[6] 및 초대 솔즈베리 백작[5]으로 새로이 책봉되었다.

1476년 아내 이사벨이 사망하면서 워릭 백작령 상속 다툼에서 클래런스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결국 그는 상속 분쟁에서 패배했으며, 이후 에드워드 4세에 대한 반역을 의심받아 런던탑에 투옥되고 처형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2. 4. 몰락과 처형

아내 이사벨 네빌이 1476년 12월 22일 사망하면서 조지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이사벨은 아들 리처드를 낳은 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사인을 결핵이나 산욕열로 추정한다.[5] 하지만 조지는 이사벨이 시녀 중 한 명인 앙카레트 트위니호에게 독살당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1477년 4월, 앙카레트를 즉결 체포하고 워릭에서 배심원단을 협박하여 유죄 판결을 받아내 처형시키는 방식으로 사실상 재판을 조작하여 처형했다. 앙카레트는 1478년 에드워드 4세 국왕에 의해 사후 사면되었다. 이 사건 이후 조지의 정신 상태는 더욱 불안정해졌고, 결국 형 에드워드 4세를 상대로 또 다른 반란 음모에 연루되었다.

그에 대한 몰수 법안에 따르면, 조지는 많은 하인들에게 자신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을 상속에서 배제하려 하며 마법을 사용해 백성을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왕국 곳곳에 보내 반란을 선동했다.[8] 또한 자신의 진짜 아들 대신 "이상한 아이"를 내세우고, 진짜 아들은 아일랜드나 플랑드르로 보내 에드워드 4세에 대항하는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조지는 헨리 6세가 서명한, 자신이 왕위 계승자임을 명시하는 문서를 비밀리에 보관하기도 했다.[8]

1477년, 조지는 남편 샤를 용담공 사후 다시 미혼이 된 메리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이 결혼을 반대했고, 이에 조지는 궁정을 떠났다.[5]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의 측근 중 한 명인 옥스퍼드 천문학자 존 스테이시가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그는 고문 끝에 왕의 죽음을 "상상하고 구상"했으며, 이를 위해 흑마술을 사용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토마스 버뎃과 스테이시가 속한 대학(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칼리지)의 채플린 토마스 블레이크도 연루시켰다. 세 사람은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타이번에서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블레이크는 노리치 주교 제임스 골드웰의 탄원으로 사형 직전 구제되었으나, 스테이시와 버뎃은 처형되었다.

이는 조지에게 명백한 경고였지만, 그는 이를 무시했다. 오히려 존 고다드라는 인물을 의회로 보내 스테이시와 버뎃이 죽기 전 무죄를 선언했다고 주장하게 했다. 고다드는 과거 랭커스터파로서 헨리 6세의 왕위 주장을 지지했던 인물이었기에 이는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분노한 에드워드 4세는 조지를 윈저로 소환하여 심하게 꾸짖고 반역죄로 고발한 뒤 즉시 체포하여 감금하도록 명령했다.

조지는 런던 탑에 투옥되었고, 형 에드워드 4세를 상대로 한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는 조지 본인이 출석하지 않았으며, 에드워드 4세가 직접 동생을 기소했다. 에드워드 4세는 의회에 조지에 대한 몰수 법안 통과를 요구하며, 그가 충성과 사랑을 빚진 형제에게 "부자연스럽고 혐오스러운 반역"을 저질렀다고 선언했다. 유죄 판결과 함께 재산 몰수가 결정된 후, 조지는 1478년 2월 18일 런던 탑(전통적으로 보이어 타워)에서 "비밀리에 처형"되었다.[5] 처형 직후 그가 말바시아 와인 통에 빠져 익사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5]

에드워드 4세가 동생을 처형한 이유 중 하나로 조지가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9] 배스 앤드 웰스 주교 로버트 스틸링턴으로부터 에드워드 4세의 이전 약혼 사실을 조지가 알게 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0][11]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에서는 조지가 자신의 처형 방법으로 말름지(Malmsey) 와인 통에 빠져 죽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켈트족의 전설에 기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셰익스피어 희곡에서의 묘사

클래런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두 편, ''헨리 6세 3부''와 ''리처드 3세''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셰익스피어는 클래런스를 의지박약하고 변덕스러운 인물로 묘사한다.

''헨리 6세 3부''에서 클래런스는 형 에드워드 4세가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가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에 반감을 느껴 처음에는 에드워드를 배신하고 워릭 백작에게로 넘어간다. 그는 워릭 백작과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만, 이후 형제들을 다시 만나자 그들의 설득에 쉽게 넘어가 요크파로 복귀한다. 극 중 여러 대사를 통해 그가 술을 즐기는 모습이 언급되기도 한다.

''리처드 3세''는 동생 글로스터 공작(훗날 리처드 3세)이 클래런스를 반역죄로 모함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글로스터는 교묘하게 예언을 이용하여 에드워드 4세가 클래런스를 의심하게 만든다. 첫 장면에서 클래런스는 체포되어 런던 탑으로 이송된다. 글로스터는 클래런스의 처형을 서두르는 한편, 에드워드 4세가 마음을 바꿔 내린 사면 명령을 중간에서 가로챈다. 1막 4장에서 클래런스는 자신이 꾼 끔찍한 악몽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글로스터에 의해 바다에 빠져 익사하고 지옥에서 워릭 백작과 에드워드 왕자(헨리 6세의 아들)의 유령에게 위증죄로 고발당하는 내용이다. 결국 그는 글로스터가 보낸 자객들에게 공격받아, 설득력 있게 목숨을 구걸하지만 칼에 찔린 뒤 말름지 와인 통에 던져져 익사한다. 클래런스의 죽음은 에드워드 4세에게 큰 충격과 치명적인 후회를 안겨준다. 클래런스는 이 극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이며, 그의 유령은 나중에 보스워스 전투 전날 밤 리처드 3세와 헨리 튜더(미래의 헨리 7세) 앞에 나타나 리처드를 저주하고 헨리를 격려한다.

4. 후계

조지 플랜태저넷은 부인 이사벨 네빌과의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 중 솔즈베리 백작 부인 마거릿과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 두 사람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들은 서자 계열이었던 보퍼트 가문의 헨리 튜더와, 리처드 3세에 의해 결혼이 무효로 선언되었던 에드워드 4세엘리자베스 우드빌 사이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결합으로 세워진 튜더 왕가의 정통성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여겨졌다. 결국 마거릿과 에드워드는 튜더 왕조 시대에 런던 탑에서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마거릿의 아들인 레지널드 폴은 한때 헨리 8세의 장녀 메리 튜더의 유력한 남편 후보로 거론되며 왕과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의 신임을 얻었다.[16] 그러나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추진할 당시, 폴은 신학적 신념에 따라 아라곤의 캐서린을 지지하면서 왕의 노여움을 사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17] 1536년 추기경으로 서임된 그는 헨리 8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메리 1세가 왕위에 오른 1553년이 되어서야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레지널드 폴은 영국 역사상 마지막 로마 가톨릭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5. 자녀

1469년 7월 11일, 당시 잉글랜드 왕국이 통치하던 칼레의 노트르담 교회에서 이사벨 네빌과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5]


  • 앤 오브 클래런스 (1470년 4월 16일 ~ 1470년 4월 17일경): 칼레 앞바다의 배 위에서 태어났으나, 사산되었거나 태어난 직후 사망하여 칼레에 매장되었다.[6][12]
  • 마거릿 폴 (1473년 8월 14일 ~ 1541년 5월 28일): 솔즈베리 백작 부인. 리처드 폴 경과 결혼하였으며, 헨리 8세 치세에 처형되었다.
  • 에드워드 플랜태저넷 (1475년 2월 25일 ~ 1499년 11월 28일): 워릭 백작. 런던 탑 탈출 시도 혐의로 헨리 7세 치세에 처형되었다.
  • 리처드 오브 클래런스 (1476년 10월 5일[6] 또는 6일 ~ 1477년 1월 1일): 글로스터셔의 테우크스베리 수도원에서 태어나 워릭 성에서 사망하였고, 워릭 성 근처의 워릭 교회에 매장되었다.


이사벨 네빌은 막내 리처드를 낳은 지 두 달 만인 1476년 12월 22일에 사망했다. 살아남은 자녀 마거릿과 에드워드는 1485년까지 고모 앤 네빌의 보살핌을 받았다.

성인으로 성장한 마거릿과 에드워드는 튜더 왕가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져, 각각 헨리 8세헨리 7세에 의해 런던 탑에서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

참조

[1] 논문 The King's Hat: Two Anecdotes about Louis XI and Edward IV's Embassy to France in 1477-1478 2021
[2] 서적 The Family of Richard III https://books.google[...] Amberley Publishing Limited 2015-03-15
[3] 웹사이트 Marks of Cadency in the British Royal Family http://www.heraldica[...] 2012-07-09
[4] 서적 The Royal Heraldry of England Heraldry Today, Slough, Buckinghamshire: Hollen Street Press
[5] 간행물 Clarence, Dukes of
[6] 논문 George, duke of Clarence https://doi.org/10.1[...] 200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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