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십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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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둥십자당(Pērkonkrusts)은 라트비아에서 활동했던 극우 민족주의 조직으로, 급진 우파 또는 파시즘으로 분류된다. 1932년 구스타브스 첼민슈에 의해 결성되었으며, "라트비아는 라트비아인을 위한 것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라트비아 민족의 정치, 경제적 통제를 주장했다. 반유대주의, 반공주의, 권위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기독교 대신 라트비아 전통 종교 부활을 주장했다. 1934년 쿠데타로 해산되었으나,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과 협력하기도 했으며, 1990년대에 재결성되어 폭탄 테러를 시도하는 등 극단적인 행보를 보였다. 현재는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러시아는 라트비아와의 관계에서 이들의 역사를 '파시스트' 유산의 증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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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십자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뇌십자당 |
![]() | |
색상 코드 | #8b0000 |
약칭 | 해당 없음 |
지도자 | 구스타프스 첼민슈(영문판) |
창립 | 1933년 |
해산 | 1941년 8월 18일 |
신문 | 페르콘크루스트스 |
준군사 조직 | 회색 셔츠대 (GCT) |
당원 | 2,000-5,000명 (1934년) |
![]() | |
국가 | 라트비아 |
이념 및 정치 성향 | |
이념 | 라트비아 국민주의 파시즘 반유대주의 반독일주의 |
정치 성향 | 극우 |
조직 | |
분파 | 국민 연합 |
관련 단체 | 구스타프스 첼민슈 타격대 (회색 셔츠) |
2. 이념 및 원칙
페르콘크루스트(뇌십자당)는 학자들에 의해 급진 우파[10][33] 또는 파시즘[3][4][8][35][36][37] 성향으로 분류되며, 로저 그리핀과 같은 연구가는 이들을 권위주의적이고 기업주의적인 국가를 지향하는 "진정한 파시스트 반대 세력"으로 평가했다.[4][38]
이들의 핵심 이념은 "라트비아는 라트비아인을 위한 것이다! 라트비아인을 위한 일과 빵!"(Latviju latviešiem! Latviešiem darbu un maizi!lv)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이다. 페르콘크루스트는 라트비아 민족의 완전한 국가 통제를 주장하며, 발트 독일인이나 유대인 등 소수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기독교를 외세의 영향으로 거부하고 토착 종교 부활 운동인 디에우투리바를 지지했다.[7][41]
페르콘크루스트의 구체적인 정치 강령과 규약은 당 기관지 ''페르콘크루스트''(1933–1934)와 1933년 팸플릿 ''페르콘크루스트: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Kas ir? Ko grib? Kā darbojas? Pērkonkrustslv)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농촌적 이상을 표방했으나, 실제 지지 기반은 리가를 비롯한 도시 지역, 특히 라트비아 대학교 학생들 사이에 집중되었다.
2. 1. 극단적 민족주의

페르콘크루스트는 학자들에 의해 급진 우파[10][33] 또는 파시즘[3][4][8][35][36][37]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분류된다. 파시즘 연구가인 로저 그리핀은 페르콘크루스트를 "소규모지만 진정한 파시스트 반대 세력"으로 평가하며[4][38], 이들이 "통합주의적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경제 위기에 대한 혁명적 해결책을 추구하고 라트비아를 새로운 권위주의 국가로 만들려 했다고 설명했다.[4][38] 그리핀의 파시즘 정의에 기반하여 페르콘크루스트를 "반독일 민족 사회주의"로 분류하자는 제안도 있다.[5][39]
페르콘크루스트의 정치 강령은 당 기관지 ''페르콘크루스트''(1933–34)와 1933년에 발행된 팸플릿 ''페르콘크루스트: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Kas ir? Ko grib? Kā darbojas? Pērkonkrustslv)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이 팸플릿에는 운동의 정치적 계획과 정당 규약이 포함되어 있었다.
"라트비아는 라트비아인을 위한 것이다! 라트비아인을 위한 일과 빵!" (Latviju latviešiem! Latviešiem darbu un maizi!lv)이라는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페르콘크루스트는 라트비아 민족이 국가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통제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따라, 이들은 소수 민족에게 문화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기존 법률을 거부했다. 페르콘크루스트는 선전 활동을 통해 라트비아 경제를 장악했다고 여겨지는 발트 독일인이나 유대인 등 소수 민족과 부패 혐의를 받는 당시 의회 정치인들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당수 구스타브스 셀민스(Gustavs Celmiņš)는 자신의 저서에서 "라트비아인의 라트비아에서는 소수 민족 문제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라트비아 민족의 번영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다른 모든 제약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라트비아인이 정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라트비아라고 생각한다. 다른 민족들은 그들만의 나라를 가지고 있다"고 덧붙이며, 궁극적으로 "라트비아 라트비아에는 라트비아인만 있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배타성을 드러냈다.[6][40]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를 외세의 영향으로 간주하여 거부하고, 기독교 이전의 전통 라트비아 종교를 부활시키려는 디에우투리바를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7][41]
페르콘크루스트는 농촌적 이상을 내세웠지만, 실제 지지 기반은 리가, 체시스, 발미에라, 옐가바와 같은 도시 지역, 특히 라트비아 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강세를 보였다.
2. 2. 반유대주의
페르콘크루스트는 "라트비아는 라트비아인을 위한 것이다! 라트비아인을 위한 일과 빵!"(Latviju latviešiem! Latviešiem darbu un maizi!|lv)이라는 슬로건 아래, 라트비아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통제권을 라트비아인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내 소수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로 이어져, 이들에게 문화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기존 법률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페르콘크루스트는 선전 활동을 통해 라트비아 경제를 장악했다고 여겨지는 소수 민족, 특히 발트 독일인과 유대인, 그리고 부패 혐의를 받던 당시 의회 정치인들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6]페르콘크루스트의 지도자 구스타브스 셀민스는 이러한 배타적 민족주의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라트비아인의 라트비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6]
라트비아 라트비아에서는 소수 민족 문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은 우리가 민족 문제에 대한 부르주아-자유주의적 편견을 조건 없이 포기하고, 우리의 유일한 진정한 목표, 즉 라트비아 민족의 번영을 추구하는 데 역사적, 인본주의적 또는 기타 제약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신,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삶의 의미, 우리의 목표는 라트비아 민족이다: 그들의 복지에 반대하는 자는 우리의 적이다. ...
우리는 라트비아인이 정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라트비아라고 생각한다. 다른 민족들은 그들만의 나라를 가지고 있다. ...
한마디로, 라트비아 라트비아에는 라트비아인만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라트비아 내 소수 민족, 특히 유대인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과 배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페르콘크루스트의 반유대주의적 성격을 명확히 나타낸다.
2. 3. 반공주의와 권위주의
페르콘크루스트(뇌십자당)는 학자들에 의해 급진 우파[10][33] 또는 파시즘[3][4][8][35][36][37]으로 분류된다. 파시즘 연구가인 로저 그리핀은 페르콘크루스트를 "소규모지만 진정한 파시스트 반대 세력"으로 평가하며, 이들이 "경제 위기에 대한 혁명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고, 라트비아를 새로운 기업주의(corporatism) 경제를 가진 새로운 엘리트를 기반으로 한 권위주의 국가로 만들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리핀은 이들의 정치를 "통합주의적 민족주의"로 정의했다.[4][38] 그리핀의 파시즘 정의에 따라, 페르콘크루스트를 "반(反)독일 민족사회주의"로 분류하자는 제안도 2015년에 있었다.[5][39]
정당의 신문인 ''페르콘크루스트''(1933–1934) 외에도, 이들의 정치 강령은 1933년 발행된 팸플릿 ''페르콘크루스트: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Kas ir? Ko grib? Kā darbojas? Pērkonkrustslv)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이 팸플릿에는 운동의 정치적 목표와 함께 완전한 정당 규약이 포함되어 있었다.
"라트비아는 라트비아인을 위한 것이다! 라트비아인을 위한 일과 빵!" (Latviju latviešiem! Latviešiem darbu un maizi!lv)이라는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페르콘크루스트는 라트비아 민족이 자국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통제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소수 민족에게 문화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기존 법률을 거부했다. 페르콘크루스트는 라트비아 경제를 지배한다고 여겨지는 소수 민족(특히 발트 독일인, 유대인)과 부패했다고 비난받던 당시 의회 정치인들을 주요 선전 대상으로 삼았다.
당수 구스타브스 셀민스(Gustavs Celmiņš)는 그의 저서 "라트비아인의 라트비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라트비아인의 라트비아에서는 소수 민족 문제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은 우리가 민족 문제에 대한 부르주아-자유주의적 편견을 조건 없이 포기하고, 우리의 유일한 진정한 목표, 즉 라트비아 민족의 번영을 추구하는 데 역사적, 인본주의적 또는 기타 제약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신,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삶의 의미, 우리의 목표는 라트비아 민족이다: 그들의 복지에 반대하는 자는 우리의 적이다. ...
우리는 라트비아인이 정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라트비아라고 생각한다. 다른 민족들은 그들만의 나라를 가지고 있다. ...
한마디로, 라트비아인의 라트비아에는 라트비아인만 있을 것이다.[6][40]
페르콘크루스트는 기독교를 외세의 영향으로 보고 거부했으며, 대신 기독교 이전의 라트비아 토착 종교 부활 운동인 디에우투리바(Dievturība)를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7][41]
이들의 이념은 농촌적 이상을 담고 있었지만, 실제 지지 기반은 리가, 체시스, 발미에라, 옐가바와 같은 도시 지역, 특히 라트비아 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강세를 보였다.
2. 4. 종교관
페르콘크루스트는 기독교를 외세의 영향으로 간주하여 거부하고, 대신 기독교 이전 라트비아의 전통 종교를 부활시키려는 시도인 디에우투리바를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7][41]3. 상징
천둥십자당은 여러 상징을 사용했다. 조직의 이름이기도 한 "천둥십자"는 라트비아어로 만자를 의미하며, 이들의 핵심 상징이었다. 또한 로마식 경례 또는 히틀러식 경례의 변형된 형태를 사용했으며, Cīņai sveikslav라는 구호와 함께 회색 셔츠와 검은색 베레모로 구성된 정복을 착용했다.[8][42]
라트비아 역사가 울디스 크레슬린슈에 따르면, 천둥십자당이 만자와 로마식 경례를 사용했지만, 이는 독일 나치즘을 모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9][43]
3. 1. 천둥십자 (만자)
"천둥십자"는 라트비아어로 만자를 이르는 말 중 하나이며, 이 조직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로마식 경례 또는 히틀러식 경례의 변형된 형태를 사용했으며, 라트비아어 구호 "''Cīņai sveiks''" ("전투에 대비"[8] 또는 "투쟁 만세"[42])로 인사했다. 당의 제복은 회색 셔츠와 검은색 베레모였다.라트비아 역사가 Uldis Krēsliņš|울디스 크레슬린슈lav에 따르면, 천둥십자당은 만자와 로마식 경례를 모두 사용했지만, 이는 독일 나치즘과는 관련이 없으며, Jānis Štelmachers|야니스 슈텔마체스lav가 이끈 Apvienotā Latvijas nacionālsociālistiskā partija|라트비아 국가 사회주의 연합lav과 같은 모방 단체도 아니었다고 한다.[9][43]
3. 2. 경례
천둥십자당은 로마식 경례 또는 나치식 경례의 변형된 형태를 경례 방식으로 사용했다. 경례 시에는 Cīņai sveiks|치냐이 스베익스lv라는 구호를 외쳤는데, 이는 "전투에 대비"[8], "투쟁에 경례"[8], "전쟁에 대비하라"[42] 또는 "투쟁 만세"[42] 등으로 번역된다.라트비아의 역사가 울디스 크레슬린슈(Uldis Krēsliņš)는 천둥십자당이 이러한 경례 방식을 사용했지만, 이것이 독일 나치즘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나 모방은 아니라고 주장했다.[9][43]
3. 3. 복장
천둥십자당의 정복은 회색 셔츠와 검은색 베레모였다.4. 역사
천둥십자당(페르콘크루스트)은 1932년 구스타브스 체르민슈가 라트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창설한 파시즘 조직 '불 십자당'에서 비롯되었다.[44] 1934년 카를리스 울마니스의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나, 이후 망명 활동과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 및 나치 독일 점령 하에서의 복잡한 활동을 거쳤으며, 전후에도 유사한 이념을 가진 극우 단체들이 그 이름을 이어받아 활동했다.
4. 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932년, 구스타브스 첼민슈는 라트비아 민족 상징 중 하나인 불 십자[44]를 사용하여 파시즘 단체 '우군스크루스츠'(Ugunskrustslav, 불십자당)를 창설했다. 그러나 이 조직은 곧 라트비아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이후 '페르콘크루스트'(Pērkonkrustslav, 천둥십자당)라는 이름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934년까지 천둥십자당의 당원 수는 5,000명에서 6,000명 사이로 추산되었으나, 당 자체는 더 많은 당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당시 라트비아 총리이자 보수 민족주의 성향의 라트비아 농민 연합 지도자였던 카를리스 울마니스는 1933년 10월 헌법 개정을 제안했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우익보다 좌익을 더 겨냥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같은 해 11월, 7명의 라트비아 공산당 의원이 체포되었지만 천둥십자당 관계자들은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우익 세력의 확장 등으로 정치적 불안이 커지자, 울마니스는 1934년 5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로 라트비아 공산당과 천둥십자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활동이 금지되었고, 의회인 세이마도 해산되었다. 쿠데타 이후 천둥십자당 지도자 첼민슈는 체포되어 3년간 투옥되었고, 이후 라트비아에서 추방되었다.
비록 천둥십자당은 1934년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지만, 많은 전직 지도자들과 당원들은 이후에도 어느 정도 결속력을 유지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30년대 후반, 첼민슈는 핀란드 헬싱키에 천둥십자당의 '해외 연락 사무소'를 설립했다. 망명 생활 중에도 그는 유럽의 다른 파시스트 단체 지도자들과 교류했는데, 특히 루마니아 철위대의 코르넬리우 코드레아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10][45]
4. 2. 제2차 세계 대전 중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직후, 라트비아는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소련 정권은 카를리스 울마니스 정권 하에서 투옥되었던 공산주의자들을 석방했지만, 페르콘크루스트(천둥십자당) 정치범들은 석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1940년부터 1941년 사이 더 많은 페르콘크루스트 회원들이 소련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11][46]
1941년 6월 말 나치 독일이 라트비아를 침공하자, 1940년 소련 점령 이후 독일로 이주했던 구스타우스 첼민슈(Gustavs Celmiņš)는 독일 국방군의 존더퓌러(Sonderführer) 신분으로 라트비아로 돌아왔다.[12][47]
같은 해 7월 초, 페르콘크루스트는 일시적으로 다시 공개 활동을 허가받았다. 독일 당국은 아라이스 특공대(Arajs Kommando)에 자원할 전직 페르콘크루스트 회원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루디테 비크스네(Rudīte Vīksne)의 연구에 따르면, 라트비아 홀로코스트에서 역할을 한 페르콘크루스트 회원은 극소수였으며, 그들의 활동은 주로 선전에 집중되었다.[13][48]
라트비아 홀로코스트 초기 단계에서, 역사학자 발디스 루만스(Valdis Lumans)가 페르콘크루스트 회원으로 묘사한 마르틴스 바굴란스(Mārtiņš Vagulāns)는 옐가바(Jelgava) 마을에서 지퍼하이츠딘스트(SD) 소속의 살인 부대를 이끌었다.[12][49] 하지만 역사학자 안드리브스 에제르갈리스(Andrievs Ezergailis)는 바굴란스가 실제로는 페르콘크루스트 회원이 아니었으며, 페르콘크루스트와 나치 사이에는 "의심의 벽"이 존재했다고 반박했다.[14][50] 에제르갈리스는 또한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페르콘크루스트 회원은 10명이 넘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은 나치 언론에 반유대주의 선전물을 제공하는 역할을 더 많이 수행했다"고 주장했다.[14][51]
독일 당국은 1941년 8월 페르콘크루스트를 영구적으로 금지했다. 일부 전직 회원들은 독일과 협력했지만, 다른 이들은 반독일 정서를 유지하며 독일 점령에 반대하는 지하 단체에 가담했다.[12][52]
첼민슈는 대규모 라트비아 군대 편성을 희망하며 독일과의 표면적인 협력을 계속했다. 1942년 2월부터 그는 라트비아 남성들을 라트비아 보조 경찰대대(Latviešu brīvprātīgo organizācijas komiteja), 독일어로는 ''Schutzmannschaften'' 또는 ''Schuma''로 알려진 부대에 징집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는 '라트비아 자원봉사자 조직 위원회'를 이끌었다.[15][16][53][54] 이 대대들은 최전선 전투 임무 외에도, 라트비아와 벨라루스에서 농촌 지역 유대인 및 기타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소위 대(對)파르티잔 작전에 동원되었다.[17][55]
한편, 점령된 라트비아의 SD 기구 내에서 활동하던 일부 페르콘크루스트 회원들은 첼민슈에게 비밀 정보를 제공했으며, 이 정보 중 일부는 첼민슈가 발행하던 지하 반독일 간행물 ''브리바 라트비아''(Brīvā Latvija)에 실렸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결국 첼민슈와 그의 동료들은 독일 당국에 체포되었고, 첼민슈는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18]
4. 3. 전후 라트비아
1990년대에 페르콘크루스트의 이름을 내건 급진 민족주의 단체가 등장했다. 이들은 당시 라트비아 정부를 전복하고 "라트비아인을 위한 라트비아"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19] 1995년, 과거 "리바의 수호자"(Līva Varti) 소속이었던 발디스 라웁스(Valdis Raups), 아이바르스 빅스닌슈(Aivars Vīksniņš), 빌리스 리닌슈(Vilis Liniņš, 당시 68세)가 무술가 유리스 레치스(Juris Rečs)와 함께 페르콘크루스트를 재건했다.[20] "리바의 수호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아이자르기(Aizsargi)의 후계 조직을 자처하던 단체에서 야니스 리바(Jānis Rība)의 주도로 분리된 조직이었다.[20] 조직원들은 암호를 부여받고 충성 서약을 했으며, 고위 간부들은 신병을 모집하고 훈련할 때 가면을 착용하기도 했다.[20] 이 조직은 군국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스스로를 "라트비아 전투 부대"(Latviešu cīnītāju vienība)로 칭하며 "성스러운 해방 투쟁"을 벌인다고 주장했다.[20]
이들의 이념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했으며, 반유대주의, 반공주의, 반자유주의 성향을 뚜렷이 드러냈다. 또한 자유 시장 경제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20] 페르콘크루스트는 "라트비아어를 사용하는 코스모폴리탄 잡종이 아닌 라트비아인이 조국의 주인이 되는", "라트비아 민족의 인종적 순수성"이 보장되는 라트비아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특히 "유대인 신공산주의자"와 그 동조 세력을 "라트비아 민족의 제1의 적"으로 규정하고 적대시했다.[20]
재건된 페르콘크루스트 조직원들은 리가에 있는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로부터 소비에트 라트비아와 리가를 해방한 기념비에 세 차례 폭탄 테러를 시도하는 등 과격한 활동을 벌였다. 1997년 6월 5일 밤에는 폭탄 설치 과정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조직원 발디스 라웁스와 아이바르스 빅스닌슈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1] 이후 폭탄 테러 혐의로 기소된 다른 조직원 9명은 1년 6개월의 보호관찰부터 3년의 징역형까지 다양한 형을 선고받았다. 2000년에는 페르콘크루스트의 주요 지도부가 대부분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22][23] 이 단체는 2006년경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거나 금지된 것으로 보인다.[24]
이후 과거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이고르 시시킨스(Igors Šiškins)가 페르콘크루스트의 활동 재개를 시도했다. 그는 라트비아 군단병 추모의 날[25]이나 소비에트 승전 기념일(5월 9일)과 같은 날 리가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 참여하며 페르콘크루스트를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시시킨스는 2007년 5월 9일, 공공장소에서 사용이 금지된 상징물을 착용한 혐의로 체포되었다.[26] 그는 2009년 5월 9일에도 같은 혐의로 다시 구금되었다.[27][28] 한편 2006년에는 페르콘크루스트와 동일한 상징을 사용하며 라트비아 전통 종교 운동인 디에브투리바(Dievturība)를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구스타브스 첼미니슈 센터'(Gustava Celmiņa centrs, GCC)라는 단체가 등록되었다. 시시킨스 역시 이 단체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나, GCC는 2014년 리가 지방 법원의 결정으로 해산되었다.[29][30]
러시아 외무부는 라트비아와의 외교 관계에서 페르콘크루스트와 같은 극우 운동의 존재를 근거로 라트비아 내에 파시즘 잔재가 남아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31] 2016년에는 블로거 야니스 폴리스(Jānis Polis)가 과거 GCC 웹사이트의 소유주가 허위 정보를 유포하는 웹사이트 운영에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29]
5. 현대 라트비아와의 관계
1990년대에 페르콘크루스트의 이름을 사용하는 급진적인 단체가 등장했다. 이들은 당시 라트비아 정부를 전복하고 "라트비아인을 위한 라트비아"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9] 1995년, 과거 "리바의 수호자"(Līva Varti)라는 단체 소속이었던 발디스 라웁스, 아이바르스 빅스닌슈, 그리고 당시 68세였던 빌리스 리닌슈는 무술가 유리스 레치스와 함께 페르콘크루스트를 재결성했다.[20] "리바의 수호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아이자르기(Aizsargi) 조직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며 야니스 리바가 이끌던 단체에서 갈라져 나온 그룹이었다.[20] 재결성된 페르콘크루스트의 멤버들은 암호를 부여받고 충성 서약을 했으며, 고위 간부들은 신병을 모집하고 훈련할 때 가면을 썼다.[20] 이 조직은 군국주의적 성향이 뚜렷했으며, 스스로를 "라트비아 투쟁 부대"로 칭하며 "성스러운 해방 투쟁"을 추구했다.[20]
이 단체의 이념은 민족 및 인종 기반의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반공주의, 반자유주의를 핵심으로 했고, 자유 시장 경제에도 반대했다.[20] 페르콘크루스트는 "라트비아어를 사용하는 코스모폴리탄 잡종이 아닌, 라트비아인이 조국의 주인이 되는" 라트비아, 그리고 "라트비아 국민의 인종적 순수성"을 목표로 내세웠다. 또한 "유대인 신공산주의자... 반(反)라트비아인과 그 동맹... 라트비아 국민의 제1 적"에 맞서 싸운다고 주장했다.[20]
재결성된 페르콘크루스트 멤버들은 세 차례에 걸쳐 리가에 있는 독일 파시스트 침략자로부터 소비에트 라트비아와 리가를 해방한 기념비에 폭탄 테러를 시도했다. 1997년 6월 5일 밤에 발생한 가장 심각한 시도에서는 멤버 발디스 라웁스와 아이바르스 빅스닌슈가 폭발로 사망했다.[21]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른 9명의 멤버가 기소되었고, 1년 6개월의 보호 관찰부터 3년의 징역형까지 다양한 형을 선고받았다. 2000년에는 당시 페르콘크루스트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22][23] 이 단체는 2006년경 활동이 중단되거나 금지된 것으로 보인다.[24]
이후 조직의 전 지도자 중 한 명인 이고르 시시킨스(Igors Šiškins)는 페르콘크루스트를 다시 활성화하려 시도했다. 그는 라트비아 군단병 추모의 날[25]과 소비에트 승전 기념일 (5월 9일)에 리가에서 열리는 여러 행사에서 페르콘크루스트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시시킨스는 2007년 5월 9일, 공공장소에서 금지된 상징물을 사용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26] 2009년 5월 9일에도 같은 혐의로 구금되었다.[27][28] 2006년에는 페르콘크루스트와 동일한 상징을 사용하고 디에브투리바(Dievturība) 신앙을 홍보한다고 주장하는 '구스타브스 첼미니슈 센터'(Gustava Celmiņa centrs, GCC)라는 유사 조직이 등록되었다. 시시킨스는 이 단체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GCC는 2014년 리가 지방 법원에 의해 해산되었다.[29][30]
한편, 러시아 외무부는 라트비아와의 관계에서 페르콘크루스트 운동의 역사를 거론하며 현대 라트비아가 "파시스트" 유산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31]
2016년에는 블로거 야니스 폴리스가 과거 GCC 웹사이트의 소유주가 허위 뉴스 웹사이트 운영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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