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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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복사는 중국 시안에 위치한 사찰로, 684년 무측천에 의해 고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되었다. 당나라 시기에 불경 번역과 화엄종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소안탑이 건립되었다. 이후 북송 시대에 전란으로 파괴되었으나 소안탑은 보존되었고,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중화민국 시기에는 군 창고로 사용되면서 폐사되었으나,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인민해방군의 주둔으로 파괴를 면했다. 현재는 소안탑, 금나라 시대의 종 등 다양한 문화 유적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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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복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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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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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 |
위치 | 중국 섬서성 서안시 비림구 |
상세 정보 | |
창건자 | 고종 |
설립 년도 | 684년 |
재건 년도 | 1692년 |
건축 양식 | 중국 건축 |
2. 역사
천복사는 원래 중종 이현이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저택으로, 684년(문명 원년) 고종이 승하하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측천이 건립한 헌복사(獻福寺)가 그 시작이다. 헌복사는 수나라 양제의 저택이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690년(천수 원년)에 천복사(薦福寺)로 개칭되었다.
천복사는 개화방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고, 소안탑이 있는 안인방에도 걸쳐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200명 가까운 승려가 거주했다고 한다.
이후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를 거치며 중건과 개축을 반복했다. 중화민국 시기에는 군 창고로 사용되면서 폐사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한동안 관리되지 않아 주민들이 유물을 가져가기도 했다. 1966년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접수하여 홍위병에 의한 파괴를 막았다.
2. 1. 당나라 시기
684년(문명 원년) 고종이 승하하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측천이 헌복사(獻福寺)를 건립하였다. 헌복사는 중종 이현이 즉위 전에 살았던 저택이자, 수나라 양제의 저택이 있던 자리였다.[1] 690년(천수 원년)에 천복사(薦福寺)로 개칭되었다.706년(신룡 2년) 번경원(飜經院)이 설치되어 의정 삼장이 불경 번역에 힘썼으며, 모두 20부의 경전을 이곳에서 번역하였다. 경룡 연간에는 소안탑이 건립되었다.
708년(경룡 2년)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던 승가 대사가 중종의 초청으로 천복사에 머물렀다.
712년(선천 원년) 화엄종 제3조 법장이 천복사에서 입적하였다. 천복사는 운화사와 함께 장안 화엄종의 중심지로 여겨졌으며, 소안탑은 화엄탑이라고도 불렸다.
730년(개원 18년)부터 741년(개원 29년)까지 금강지 삼장이 천복사에 머물며 밀교 경전을 번역하고 대만다라관정도량(大曼荼羅灌頂道場)을 건립하였다.
845년(회창 5년) 무종의 회창의 폐불 때 대자은사, 서명사, 대장엄사와 함께 폐사를 면한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2. 2. 당나라 이후
송나라 때 전란으로 파괴된 천복사는 소안탑과 통합되었다.[1] 명나라 때 천복사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1426년, 산시성 시닝위 홍각사 출신의 티베트 승려 샤오시지(Shaosiji)는 명나라 정부로부터 증서를 받아 천복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는 사찰의 낡은 건물들을 보고 재건을 맹세했다. 재건은 1449년에 완료되었고, 샤오시지는 정부에 사찰 이름을 요청했다. 정통제가 직접 쓴 "칙사 천복사"(敕赐荐福寺중국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청나라 때 천복사는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가장 큰 개축은 강희제 강희 연간 31년에 이루어졌다. 청나라 말기에는 장경각과 남산문 등 더 많은 건물이 세워졌다.[1]
중화민국 시기에 천복사는 군 관계 창고로 사용되면서 폐사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관리자가 없어지고, 당내에 남아있던 것은 모두 주민들에게 반출되었다고 한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접수했지만, 이는 홍위병에 의한 건물의 파괴를 막는 결과가 되었다.
3. 문화 유적
천복사는 당나라 때 무측천이 고종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한 헌복사에서 시작되었다. 690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1]
천복사는 개화방의 남쪽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약 200명의 승려가 거주했다고 한다. 730년부터 8년간 금강지 삼장이 천복사에 거주하며 밀교 경전을 번역했다. 845년 회창의 폐불 때에도 폐사를 모면한 몇 안 되는 사찰 중 하나였다.[1]
청나라 때 여러 번 중건되었으며, 강희제 31년에 가장 큰 중건이 이루어졌다. 청나라 말기에는 남산문 등 많은 건축물들이 추가로 세워졌다.[1]
3. 1. 소안탑 (小雁塔)
706년(신용 2년), 천복사에 번경원이 설치되어 소안탑이 건립되었다. 번경원에서는 의정 삼장이 불전의 한역에 힘써, 모두 20부의 경전을 이곳에서 번역하였다.[1]712년(선천 원년)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이 천복사에서 입적하였다. 대천복사는 화엄종과 관계가 깊어, 운화사와 함께 장안에서 화엄 교육과 학문의 성지로 여겨졌으며, 소안탑은 화엄탑이라고도 불렸다.[1]
3. 2. 금나라 시대 종
금나라 (1115–1234) 시대인 1192년에 제작된 무게 8000kg의 종이 종각에 보존되어 있다. 종 표면에는 1,000자 이상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중화민국 시대에 사찰에 주둔하던 군대에 의해 파손되어 "대안탑의 새벽 종소리"라는 풍경이 오랫동안 사라졌다. 1993년 시안의 소안탑 유적 사무소에서 복원 작업을 지시하여 종을 용접했다. 1998년에는 관광객들이 칠 수 있도록 새로운 종을 주조했다.[1]3. 3. 기타 유물
- 석비: 1494년에 만들어진 작은 쇠종이 종각 옆의 철제 비계에 걸려 있다.
- 고대 탑 나무: 사찰 안에는 수령이 천 년이 넘는 탑 나무가 10그루 이상 있다.
4.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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