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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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명사는 수나라 양소의 저택 부지에 당 고종과 측천무후가 병약한 황태자 이홍의 쾌유를 빌며 천축의 기원정사를 본떠 656년에 창건한 절이다. 의정, 현장, 원측 등 고승들이 머물며 불경을 번역하고 저술 활동을 하였으며, 일본의 다이안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 무종의 회창폐불로 폐사되었다가 당 선종 대중 원년에 복수사로 부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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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사 | |
---|---|
지도 | |
사찰 정보 | |
위치 | 중국 시안 시 |
종파 | 불교 |
창건 시기 | 당나라 고종 용삭 연간 (661년 ~ 663년) |
소멸 시기 | 당나라 말기 |
주지 | 시밍 법사 (西明法师, Xīmíng Fǎshī) |
건축 및 유물 | |
주요 건축물 | 불전 |
역사 | |
창건 배경 | 고종이 돌아가신 어머니 문덕황후를 기리기 위해 창건 |
번성 시기 | 개원 연간 |
주요 활동 | 역경 사업 중심지 |
주요 인물 | |
관련 인물 | 현장 의정 금강지 (金剛智, Jīngāngzhì, Vajrabodhi) 불공금강 (不空金剛, Bùkōng Jīngāng, Amoghavajra) 혜과 |
기타 | |
참고 문헌 | 마리오 포체스키 (Mario Poceski), "Ordinary mind as the way: the Hongzhou school and the growth of Chan Buddhism",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60쪽, ISBN 978-0-19-531996-5 팡리톈 (Fang Litian), "The Buddhist temple hall", Chinese Buddhism and Traditional Culture, Routledge, New York, 2018-11-21, 128–146쪽, DOI: 10.4324/9781315720487-6, ISBN 978-1-315-72048-7, S2CID 199195602 |
2. 역사
수나라 상서령 양소의 저택이 있던 곳에 당나라 때 서명사가 세워졌다. 양소의 아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여 집터가 몰수된 후 사찰로 바뀌었다. 승려 도선이 지은 『서명사록』이나 『서명사도찬』 등에 관련 기록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당 고종 현경 원년(656년) 8월 19일, 고종과 측천무후는 병약한 황태자 이홍의 쾌유를 빌며 천축의 기원정사를 본떠 서명사를 창건하였다.[1]
무주 구시 원년(700년) 이후 의정도 이 절에 와서 불경을 번역하였다. 현장삼장과 그의 범어 경전 번역을 도운 신라 승려 원측도 서명사에 머물렀으며, 불교 역사가 도선이 이 절의 상좌로 있었다. 도선의 저술 『속고승전』, 『대당내전록』, 그의 제자 도세의 『법원주림』 등이 이곳에서 편찬되었다.[1]
당나라 중기에는 혜림의 『일체경음의』, 원조의 『정원신정석교목록』이 서명사에서 저술되었다. 일본 승려 구카이도 서명사를 방문했으며, 《원형석서》, 《부상략기》 등의 문헌에는 나라의 다이안지가 서명사를 본떠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1]
당 무종의 회창폐불로 서명사는 폐사되었으나, 당 선종 대중 원년(847년)에 부흥되어 복수사로 이름이 바뀌었다.[1]
2. 1. 창건과 번성
수나라 상서령 양소의 저택이 있던 곳에 서명사가 세워졌다. 양소의 아들 양현감이 수나라를 전복시키려다 실패하고 그 집터는 관에 몰수되었는데, 그곳에 절이 지어지게 된 것은 승려 도선이 지은 『서명사록』(西明寺錄)이나 『서명사도찬』(西明寺圖讚) 등에 기록되었다고 전하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사찰의 창건은 당 고종 현경 원년(656년) 8월 19일의 일로, 고종과 측천무후가 병약한 황태자 이홍의 쾌유를 빌며 천축의 기원정사를 본떠 지었다고 한다.[1]
무주 구시 원년(700년) 이후 의정도 이 절에 와서 불경을 번역하였다.[1] 천축에서 범어 불경을 가져온 현장삼장과, 그와 함께 범어 경전을 번역한 신라의 승려 원측도 서명사에 있었다.[1] 불교 역사가로 이름 높았던 도선이 이 절의 상좌였다.[1] 그의 저술인 『속고승전』, 『대당내전록』, 그의 제자 도세가 지은 『법원주림』 등이 이곳 서명사에서 편찬되었다.[1]
당나라 중기에는 혜림의 『일체경음의』나 원조의 『정원신정석교목록』이 이 절에서 저술되었다.[1] 일본 승려 구카이도 서명사에 온 적이 있으며,[1] 《원형석서》나 《부상략기》 등의 문헌에는 나라의 다이안지가 이곳 서명사를 모델로 지어졌다고 적고 있다.[1]
당 무종이 일으킨 회창폐불로 서명사도 폐찰되었지만[1] 당 선종 대중 원년(847년)에 부흥되어 이후 복수사로 이름이 바뀌었다.[1]
2. 2. 폐사와 부흥
수나라 상서령(尙書令) 양소(楊素)의 저택이 있던 곳에 세워진 서명사는, 양소의 아들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여 집터가 몰수된 후 사찰로 바뀌었다. 승려 도선(道宣)이 지은 『서명사록』(西明寺錄)이나 『서명사도찬』(西明寺圖讚) 등에 관련 기록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고종 현경(顯慶) 원년(656년) 8월 19일, 고종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병약한 황태자 이홍의 쾌유를 빌며 천축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본떠 서명사를 창건하였다.[1]
무주 구시(久視) 원년(700년) 이후 의정(義淨)도 이 절에서 불경을 번역하였다. 현장삼장과 그의 범어 경전 번역을 도운 신라 승려 원측도 서명사에 머물렀으며, 불교 역사가 도선이 이 절의 상좌로 있었다.[1] 도선의 저술 『속고승전(續高僧傳)』,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그의 제자 도세(道世)의 『법원주림(法苑珠林)』 등이 이곳에서 편찬되었다.[1]
당나라 중기에는 혜림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원조의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이 서명사에서 저술되었다. 일본 승려 구카이(空海)도 서명사를 방문했으며, 《원형석서》(元亨釋書), 《부상략기》(扶桑略記) 등의 문헌에는 나라의 다이안지(大安寺)가 서명사를 본떠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종의 회창폐불로 서명사는 폐사되었으나, 선종 대중(大中) 원년(847년)에 부흥되어 복수사(福壽寺)로 이름이 바뀌었다.[1]
3. 위치
당대 서명사의 위치는 장안성 연강방(延康坊) 남서쪽 모퉁이에 해당한다. 연강방 북서쪽으로는 서쪽으로부터 이어진 실크로드의 동방 기착지로써 장안에서도 가장 번영을 누렸던 곳인 서시가 있었고, 궁성(宮城)과도 가까웠다. 수대에 양소가 서명사 부지에 저택을 지었던 것을 시작으로 당대의 명화가 염립본이나 문인 장적(766년-830년) 등이 이곳 연강방 가까운 곳에 저택을 짓기도 했다.[1] 보력 3년(827년) 이후로는 당 왕조 종실 제왕들의 왕부(王府)가 세워졌다.[1]
기원정사를 모델로 지은, 대전(大殿)만 열 곳이 넘으며 양(梁)의 소태사나 북위(北魏)의 영녕사도 능가하는 규모였다고 하는 전에 없던 장대한 규모를 지녔던 서명사의 면모는 사찰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었다.[1] 서명사의 위치는 장안성 내 우가에 속하는 연강방(제3가 제7방)의 남서쪽에 해당한다.[1] 연강방은 북서쪽에 장안성에서 가장 번성했던 서시가 있었고, 궁궐과도 가까웠으며, 수나라 시대에는 양소(?~606년), 당나라 시대에는 염립본(?~673년)과 장적(766년~830년) 등의 저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방으로 여겨진다.[1]
4. 건축
당대 서명사의 위치는 장안성 연강방(延康坊) 남서쪽 모퉁이에 해당한다. 연강방 북서쪽으로는 서쪽으로부터 이어진 실크로드의 동방 기착지로써 장안에서도 가장 번영을 누렸던 곳인 서시(西市)가 있었고, 궁성(宮城)과도 가까웠다. 수대에 양소가 서명사 부지에 저택을 지었던 것을 시작으로 당대의 명화가 염립본이나 문인 장적(張籍|장적중국어, 766년-830년) 등이 이곳 연강방 가까운 곳에 저택을 짓기도 했다. 보력 3년(827년) 이후로는 당 왕조 종실 제왕들의 왕부(王府)가 세워졌다.
기원정사를 모델로 지었으며, 대전(大殿)만 열 곳이 넘고 양(梁)의 소태사나 북위(北魏)의 영녕사도 능가하는 규모였다고 하는, 전에 없던 장대한 규모를 지녔던 서명사의 면모는 사찰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5. 의의 및 영향
서명사는 인도의 기원정사를 본떠 건립되었으나, 일본 다이안지는 서명사를 모델로 지었다는 설이 『부상략기』, 『겐코샤쿠쇼』 등의 문헌에 예로부터 기록되어 있다.
5. 1. 신라와의 관계
무주 구시(久視) 원년(700년) 이후 의정(義淨)도 이 절에 와서 불경을 번역하였다. 천축에서 범어 불경을 가져온 현장삼장(玄奘三蔵)과, 그와 함께 범어 경전을 번역한 신라의 승려 원측(圓測)도 서명사에 주석한 적이 있으며, 불교 역사가로 이름 높았던 도선(道宣)이 이 절의 상좌(上座)로 있었다고도 한다.[1] 도선(道宣)의 저술인 『속고승전』(續高僧傳)이나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그의 제자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 등이 이곳 서명사에서 편찬되었다.[1]5. 2. 일본 다이안지와의 관계
무주 구시(久視) 원년(700년) 이후 의정도 이 절에 와서 불경을 번역하였다. 현장과, 그와 함께 범어 경전을 번역한 신라의 승려 원측도 서명사에 있었다. 불교 역사가로 이름 높았던 도선이 이 절의 상좌(上座)로 있기도 했다. 그의 저술인 『속고승전』(續高僧傳)이나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 그의 제자 도세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 등이 이곳 서명사에서 편찬되었다.당 왕조 중기에는 혜림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나 원소의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이 이 절에서 저술되었다. 일본의 승려 구카이도 서명사에 온 적이 있으며, 《원형석서》(元亨釋書)나 《부상략기》(扶桑略記) 등의 문헌은 나라의 다이안지(大安寺)가 이곳 서명사를 모델로 지어졌다고 적고 있다.
서명사는 인도의 기원정사를 모델로 건립되었으나, 서명사 자체가 일본의 다이안지의 모델이 되었다는 설이 『부상략기』, 『겐코샤쿠쇼』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Ordinary mind as the way: the Hongzhou school and the growth of Chan Buddhism
Oxford University Press
[2]
간행물
The Buddhist temple hall
http://dx.doi.org/10[...]
Routledge
201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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