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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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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신군은 사마천의 《사기》에 전기가 실린 인물로, 전국 시대 초나라의 정치가이다. 그는 초나라 회왕의 아들이자 경양왕의 동생으로 추정되며,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소양왕을 설득하여 초나라와 화친을 맺게 했다. 이후 초나라 영윤에 임명되어 회북 12개 현을 봉토로 받았으며, 전국사공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떨쳤다. 춘신군은 조나라를 구원하고 노나라를 병합하는 등 활약했으나, 고열왕 사후 측근 이원에게 암살당했다. 춘신군은 상하이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며, 상하이시는 그를 기려 춘신강, 선청 등의 명칭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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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신군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황헐
한자 표기黃歇
관직초나라 재상
작위춘신군
출생 시기미상
사망 시기기원전 238년
묘소상하이 춘선군 사당
기타 명칭춘신군
직업군사 장군, 정치인
봉군춘신군
주요 활동초나라 재상, 전국시대 사공자 중 한 명

2. 가계 배경

춘신군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상당 부분 한나라 역사가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 실린 그의 전기를 통해 알려졌다.[1] ''사기''에는 그의 가문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성씨를 근거로 그가 황나라의 후손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치앤 무와 양콴을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초나라 회왕의 아들이자 초나라 경양왕의 동생이라고 믿고 있다.[2]

2. 1. 황씨(黃氏) 후손설

사기》에는 춘신군의 가계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성씨를 근거로 그가 황나라의 후손일 것이라고 추측한다.[1] 그러나 치앤 무와 양콴을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초나라 회왕의 아들이자 초나라 경양왕의 동생이라고 믿고 있다.[1]

2. 2. 초나라 왕족설

사마천이 저술한 한나라 역사서 ''사기''에 실린 춘신군의 전기를 통해 그의 상당한 정보가 알려졌다.[1] ''사기''에는 그의 가문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성씨를 근거로 그가 황나라의 후손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치앤 무와 양콴을 포함한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초나라 회왕의 아들이자 초나라 경양왕의 동생이라고 믿고 있다.[2]

3. 생애

기원전 274년, 경양왕의 명을 받아 진나라로 사신으로 간 춘신군은, 진나라가 한과 위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소양왕에게 "강국인 진과 초가 다투면 서로 상처만 입고 약한 한과 위만 이롭게 할 뿐"이라고 설득하여 초나라와 화평하게 하였다. 이듬해 초나라는 화평의 증거로 태자 완(후일의 고열왕)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고, 춘신군은 그 시종으로서 진나라로 들어갔다.

기원전 264년, 초나라에서 경양왕이 병에 걸리자, 춘신군은 국외에 있는 태자 완을 제쳐두고 다른 공자들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진나라 재상 범저에게 태자 완을 귀국하도록 설득했다. 소양왕은 먼저 춘신군을 문병차 귀국시켜 상황을 살폈는데, 춘신군은 이 틈을 타 태자 완을 몰래 초나라로 귀국시키고 자신은 진나라에 남았다. 일이 발각된 후 소양왕은 분노하여 춘신군을 죽이려 했지만, 범저의 중재로 창문군을 대신 인질로 요구하여 춘신군은 초나라로 귀국할 수 있었다.[5] 3개월 후, 태자 완은 고열왕으로 즉위했다.

기원전 262년, 고열왕은 춘신군(황헐)의 공적을 인정하여 영윤에 임명하고, 회북(淮北)의 12을 하사하여 춘신군으로 불렀다. 춘신군은 식객 3천 명을 모았는데, 상객은 모두 구슬로 장식한 신을 신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순자도 있었으며, 춘신군은 순자를 난릉현(蘭陵縣)의 영(長官)으로 삼았다.

기원전 258년, 의 수도 한단이 진나라에 포위되자 평원군이 구원을 요청하였고, 춘신군은 이에 응하여 군사를 내어 진나라를 철수하게 하였다.

기원전 248년, 춘신군은 제나라와 접하는 중요한 땅인 회북을 직할 으로 삼을 것을 고열왕에게 건의하고, 회북 대신 강동(江東)을 받아 과거 의 성을 자신의 거성으로 삼았다. 『전국책』에 따르면, 이는 조나라 상경(상급 대신) 우경의 헌책을 일부 받아들여, 왕족들의 질투와 정치적 영향을 피하기 위해 수도에서 먼 곳으로 봉지를 옮긴 것이라고 한다.[6] 그 후 군세를 동원하여 노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241년, 초, 조, 위, 한, 연의 합종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했지만, 함곡관에서 패퇴했다(함곡관 전투). 이 실패로 고열왕은 춘신군을 책망하고 소원하게 되었다. 같은 해, 춘신군의 제안으로 초나라는 수춘으로 천도했다.

춘신군의 식객 중 한 명인 조나라 사람 이원은 여동생 이환을 고열왕에게 바쳐 출세하려 꾀했다. 춘신군은 이원의 여동생을 총애하여 임신까지 하게 되었는데, 이원은 고열왕에게 후사가 없는 점[7]을 이용하여 춘신군에게 이원의 여동생을 고열왕에게 바치도록 부추겼다. 춘신군은 이 계략에 넘어가 이원의 여동생을 고열왕에게 바쳤고, 이원의 여동생은 왕후가 되었으며, 이원은 요직에 올랐다.

이후 이원은 사건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여 춘신군을 죽이려 하였다. 춘신군의 식객 주영이 위기를 느껴 이원을 살해하도록 건의했지만, 춘신군은 이원을 가볍게 여겨 이를 무시했다. 주영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쳤다.

기원전 238년, 고열왕이 병사하자, 장례식에 가던 춘신군은 이원의 자객에게 수행원들과 함께 살해당했고, 그의 머리는 성 밖에 버려졌다. 그리고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이원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이 즉위하여 유왕이 되었다.

3. 1. 진(秦)나라 사신 시절

기원전 274년, 춘신군은 경양왕의 명으로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진나라는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춘신군은 소양왕에게 "진나라와 초나라가 싸우면 양쪽 모두에게 손해이며, 약한 한나라와 위나라만 이롭게 할 뿐"이라고 설득했다.[1] 소양왕은 춘신군의 설득을 받아들여 초나라와 화친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273년, 초나라는 평화의 증표로 태자 완(고열왕)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고, 춘신군은 태자를 수행하여 진나라에 들어갔다.[5]

3. 2. 태자 완(完) 구출

기원전 264년, 초나라에서 경양왕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춘신군은 태자 완이 귀국하지 못하면 다른 공자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춘신군은 진나라 재상 범저를 설득하여 태자 완을 귀국시킬 것을 청했다. 소양왕은 춘신군을 먼저 초나라로 보내 상황을 살피게 했으나, 춘신군은 태자 완을 몰래 초나라로 귀국시키고 자신은 진나라에 남았다. 일이 발각되자 소양왕은 분노하여 춘신군을 죽이려 했으나, 범저의 중재로 목숨을 건지고 초나라로 귀국할 수 있었다.[1] 3개월 후, 태자 완은 고열왕으로 즉위했다.

3. 3. 영윤(令尹) 시절

기원전 263년 고열왕(頃襄王)이 즉위하였다. 기원전 262년, 고열왕은 황헐(黃歇)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영윤(令尹)에 임명하고 춘신군(春申君)이라는 칭호를 내렸으며, 회북(淮北) 12을 봉토로 하사하였다.[6] 춘신군은 전국사공자의 한 명으로서 3,000명이 넘는 식객을 거느렸다. 식객 중에는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도 있었는데, 춘신군은 그를 난릉현(蘭陵縣)의 영(長官)으로 삼았다.

기원전 258년, 나라의 수도 한단이 진나라에 포위되자 평원군이 구원을 요청해왔다. 춘신군은 이에 응하여 군사를 보냈고, 진나라는 한단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기원전 248년, 춘신군은 고열왕에게 「회북은 제나라와 접해 있는 중요한 땅이니 직할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하고, 회북 대신 강동(江東)을 봉토로 받았다. 『전국책』에 따르면, 이는 조나라 상급 대신 우경의 헌책을 일부 받아들여, 왕족들의 질투와 정치적 영향을 피하기 위해 수도에서 먼 곳으로 봉지를 옮긴 것이라고 한다.[6] 이후 춘신군은 옛 나라의 성을 자신의 거성(居城)으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241년, 춘신군은 초, 조, 위, 한, 연 5개국의 합종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함곡관에서 패배하였다(함곡관 전투). 이 일로 고열왕은 춘신군을 책망하며 멀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춘신군의 제안으로 초나라는 수춘으로 수도를 옮겼다.

3. 4. 몰락과 죽음

기원전 238년, 고열왕이 죽자, 이원은 춘신군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11] 이원은 자객을 보내 장례식에 참석하러 가던 춘신군을 자문(棘門)에서 암살하도록 지시했다. 춘신군은 자객에게 종자와 함께 살해되었고, 그의 목은 성 밖에 버려졌다.[11] 이원은 춘신군을 제거한 후, 그의 일가족 또한 모두 몰살했다.[11]

이원의 여동생이 낳은 춘신군의 아들은 훗날 유왕으로 즉위했다.[11] 사마천은 《사기》 춘신군 열전에서 "마땅히 끊어야 할 때 끊지 않으면, 도리어 그 난을 초래한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춘신군이 이원의 계략에 빠져 죽음을 맞이한 것을 평가했다.

4. 유왕과의 관계 논란

전국책》에 따르면, 초 유왕은 춘신군의 사생아였다고 한다. 초 고열왕에게는 많은 후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었다. 이원은 그의 여동생을 춘신군에게 바쳤고, 그녀가 춘신군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임신 여부가 명확해지기 전에, 춘신군은 그 여자를 왕에게 바쳤다. 그녀는 웅한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그는 태자가 되어 나중에 초 유왕이 되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춘신군의 열전의 일부로 이 이야기를 기록했지만, 황십산, 전목, 양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를 위서로 여긴다. 초 고열왕은 최소한 초 애왕, 부추, 창평군 등 다른 세 아들을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초나라의 마지막 세 왕이었다.[1]

5. 현대의 평가 및 유산

춘신군은 과거 자신의 봉지였던 오나라 지역, 특히 상하이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오나라의 "세 강"인 동강, 루강, 우쑹 강에 수리 시설을 건설하여 홍수를 예방하고 농업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하이의 "어머니 강"인 황푸 강은 춘신군의 성씨인 황에서 유래되었으며, 황푸 강은 춘신강(春申江) 또는 선강(申江)이라고도 불린다.[2]

상하이는 춘신군을 기려 선청(申城), 즉 '선의 도시'라고도 불린다.[2] 2002년, 상하이 시 정부는 고대 사찰 부지에 춘신군 사당을 재건했는데, 이 사당은 그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쑹장 구의 춘신 마을에 있다. 사당은 유명한 쑹장 출신 예술가 스저춘, 청스파, 정웨이(郑为|정위중국어)의 서예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2]

6. 미디어에서의 묘사

만화 《킹덤》에서는 냉소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소설 《미월전》과 동명의 TV 드라마에서는 춘신군이 미월(芈月, 훗날의 선태후)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첫사랑으로 묘사된다.

참조

[1] 웹사이트 Biography of Lord Chunshen http://www.guoxue.co[...] 2013-11-22
[2] 뉴스 Shanghai rebuilds Lord Chunshen Temple http://news.xinhuane[...] 2013-11-27
[3] 뉴스 春申君黄歇生于韩国?史学家:应生于楚 http://www.hb.xinhua[...] 2013-11-27
[4] 문서 「歇」の'''アツ'''という読みは『史記九 列伝二』([[明治書院]] 新釈漢文大系、ISBN 4625570891)より。『漢語林』([[大修館書店]]、ISBN 4-469-03116-X)によれば'''ケツ'''(漢音)・'''ケチ'''(呉音)。他にも[http://www.sanrui.co.jp/php/ikpfull08.php5?YomiIn=%9F%5B&Dic1=1&Dic3=3 '''カツ''']、[[wikt:歇|'''コチ''']](呉音)という発音も見かけられるが、これらの用例などは不明。
[5] 서적 李開元の『末代楚王史跡鉤沈』
[6] 서적 『戦国策』「楚策四」
[7] 서적 『[[史記会注考証|史記索隠]]』によると、「楚君(考烈王)に子がなかったと述べているが、幽王・[[哀王 (楚)|哀王]]以外にも子(楚の最後の王の負芻(諸説あり)や公子啓([[昌平君]])など)を儲けているので、これは誤りである」と述べている。
[8] 서적 『[[列女伝]]』では叔父とする。
[9] 문서 歇의 음훈은 대개 '쉴 헐'로 알려져 있으나, 또 다른 음훈은 '사람 이름 알'이다. 즉 '''황알'''이 올바른 표기이나, '''황헐'''로 표기하는 관습이 지배적이므로 고치지 않는다.
[10] 문서 다만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따르면 「초군(楚君, 고열왕)에게는 자식이 없었다고 하지만 유왕 말고도 아들(초의 마지막 왕이었던 부추負芻 등)이 있었으니 이는 틀린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11] 문서 춘신군과 유왕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여불위]](呂不韋)와 [[시황제]](始皇帝)가 있고, 이 두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보는 역사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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