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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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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불해는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로, 생몰 연도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기원전 337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관료 기구 통제 방법, 즉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는 술(術)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무위(無爲)의 통치를 주장했다. 신불해의 사상은 형명(形名)으로 대표되며, 이는 성과에 따라 보상하고 능력만을 기준으로 관직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그의 사상은 한비자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진시황, 한나라 황제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신불해의 저서 《신자》는 현재는 소실되었지만, 그의 사상은 중국 정치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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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해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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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신불해
로마자 표기Sin Buhai
한자申不害
출생기원전 400년경
사망기원전 337년경
직업사상가, 정치인
국적중국
생애
활동 시기전국시대
섬긴 군주한 소후
주요 업적법술 사상 확립, 한나라 부강
사상
주요 사상법가 (법술)
영향한비자 등 후대 법가 사상가들에게 영향

2. 생애와 시대적 배경

신불해의 사망 연도(기원전 337년)는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지만, 그 외의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치앤 무는 신불해가 60세에서 70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독일의 중국학자 알프레드 포르케는 기원전 397년과 407년 사이를 절충하여 기원전 400년을 출생 연도로 보았으며, 타오 지앙 교수는 2021년 논문 "초기 중국의 도덕-정치 철학의 기원"에서 이 연도를 사용했다. 때로는 출생 연도가 아예 언급되지 않기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신불해가 조후 8년에 재상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기원전 351년으로 본다. 하지만 중국학자 허리 크릴은 신불해의 재상 임명과 조후 8년이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한 후인 기원전 354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 더 오래된 문헌인 ''전국책''에는 신불해가 이 사건 당시 조후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

신불해는 수수께끼 같은 문체로 알려져 있었으며, 전한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2장 분량의 저서 《신자》(申子중국어)를 저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은 거의 전적으로 정부 행정 철학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는 소실되었다. 기원전 141년, 한 무제 치세에 유학자들의 영향으로 신불해는 다른 "법가" 사상가들과 함께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금지하는 목록에 올랐다. 그 이후 신불해의 사상에 관한 연구는 급격히 쇠퇴했지만, 기술과 보고서 점검으로 구성된 그의 기본적인 사상은 행정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한나라 시대에 널리 읽혔던 《신자》는 양나라 (502–556) 때 소실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당나라 역대 사서의 목록에 다시 등장했지만, 그 흔적은 631년에 편찬된 《군서지요》와 786년경에 편찬된 《이림》에 남아있는 인용문으로만 존재한다. 청나라 시대에 이 작품의 내용을 재구성하려는 세 번의 주요 시도가 있었고, 마지막 언급은 1616년, 그리고 1700년의 도서 목록에서 발견되었다.[6] 그 조각들은 중국학자 허리 크릴이 1974년에 《신불해: 기원전 4세기의 중국 정치 철학자》로 재구성했으며, 한국 학자 양순자가 신불해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더 현대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2. 1. 생애

치앤 무는 신불해가 60세에서 70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신불해의 사망 연도는 기원전 337년으로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지만,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독일의 중국학자 알프레드 포르케는 기원전 397년과 407년 사이를 절충하여 기원전 400년을 출생 연도로 보았으며, 타오 지앙 교수는 2021년 논문 "초기 중국의 도덕-정치 철학의 기원"에서 이 연도를 사용했다. 때로는 출생 연도가 아예 언급되지 않기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신불해가 조후 8년에 재상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기원전 351년으로 본다. 하지만 중국학자 허리 크릴은 신불해의 재상 임명과 조후 8년이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한 후인 기원전 354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 더 오래된 문헌인 ''전국책''에는 신불해가 이 사건 당시 조후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

신불해는 수수께끼 같은 문체로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 귀속되는 글들은 전한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는 현재는 소실된 2장 분량의 저서인 《신자》(申子중국어)를 저술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책은 거의 전적으로 정부 행정 철학을 다루고 있다. 기원전 141년, 유학자들의 영향으로 한 무제 치세에는 신불해의 이름이 다른 "법가"(법가, 나중에 상앙에게 더 정확하게 묘사될 법가)로 분류된 사상가들과 함께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금지하는 목록에 올랐다. 그 이후부터 신불해의 사상에 관한 연구는 급격히 쇠퇴했지만, 그의 기본적인 사상, 특히 기술과 보고서 점검으로 구성된 많은 부분이 행정에서 계속 사용되었으며,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한나라 시대에 널리 읽혔던 《신자》는, 아직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한비자와 비교했을 때, 양나라 (502–556) 때 소실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당나라 역대 사서의 목록에 다시 등장했지만, 그 흔적은 631년에 편찬된 《군서지요》와 786년경에 편찬된 《이림》에 남아있는 인용문으로만 존재한다. 청나라 시대에 이 작품의 내용을 재구성하려는 세 번의 주요 시도가 있었고, 마지막 언급은 1616년, 그리고 1700년의 도서 목록에서 발견되었다.[6] 그 조각들은 중국학자 허리 크릴(1974)에 의해 《신불해: 기원전 4세기의 중국 정치 철학자》에 재구성되었으며, 이는 한국 학자 양순자가 신불해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더 현대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2. 2. 시대적 배경

신불해의 사망 연도는 기원전 337년으로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지만, 그 외의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치앤 무는 그가 60세에서 70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독일의 중국학자 알프레드 포르케는 출생 연도를 397년과 407년 사이인 기원전 400년으로 보았다. 타오 지앙 교수는 2021년 논문 "초기 중국의 도덕-정치 철학의 기원"에서 이 연도를 사용했다. 때로는 출생 연도가 아예 언급되지 않기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신불해가 조후 8년에 재상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통적으로는 기원전 351년으로 본다. 하지만 크릴은 신불해의 재상 임명과 조후 8년이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한 후인 기원전 354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 더 오래된 문헌인 ''전국책''에는 신불해가 이 사건 당시 조후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

3. 사상

신불해의 사상은 크게 술(術), 형명(形名), 무위(無爲)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 술(術): 신불해는 관료제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술(術)'을 강조했다. 군주가 직접 세세한 일에 관여하기보다는, 유능한 신하를 선발하고 그들의 성과를 철저히 감독하여 상벌을 내리는 방식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군주의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 형명(形名): '형명(形名)'은 명분(名)과 실제(形)를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신불해는 신하의 말과 실제 행동, 직위와 성과를 비교하여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한 명성이 아니라 실제 능력과 성과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고 관리하는 방식이었다.[19][20][21]
  • 무위(無爲): 신불해는 군주가 직접 행동하기보다는, 신하들이 스스로 일하도록 하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무위(無爲)'의 통치 방식을 강조했다. 군주는 자신의 의도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신하들을 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40][44]


신불해의 사상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실용적인 통치 철학이었다. 그는 (法)을 강조한 상앙과 달리, 술(術)과 형명(形名)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고 관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무위(無爲)를 통해 군주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신하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통치 방식을 제시했다. 이러한 신불해의 사상은 한비자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중국 정치 철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3. 1. 술(術)

신불해는 그의 수수께끼 같은 문체로 유명했다. 그는 현재는 소실된 2장 분량의 저서인 《신자》(申子중국어)를 저술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책은 거의 전적으로 정부 행정 철학을 다루고 있다.[6] 기원전 141년, 한 무제 치세에는 유학자들의 영향으로 신불해의 이름이 다른 "법가" 사상가들과 함께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금지하는 목록에 올랐다.[6] 그 이후부터 신의 사상에 관한 연구는 급격히 쇠퇴했지만, 그의 기본적인 사상, 특히 기술과 보고서 점검으로 구성된 많은 부분이 행정에서 계속 사용되었다.[6]

한나라 시대에 널리 읽혔던 《신자》는 양나라(502–556) 때 소실된 것으로 기록되었다.[6] 당나라 역대 사서의 목록에 다시 등장했지만, 그 흔적은 631년에 편찬된 《군서지요》와 786년경에 편찬된 《이림》에 남아있는 인용문으로만 존재한다.[6] 청나라 시대에 이 작품의 내용을 재구성하려는 세 번의 주요 시도가 있었고, 마지막 언급은 1616년, 그리고 1700년의 도서 목록에서 발견되었다.[6]

신불해는 초기 한(韓)나라의 법을 통일하지는 않았지만, "깨달은 것"은 "관료 기구 통제 방법"이 봉건 정부와 섞이거나, 단순히 "일군의 '훌륭한 사람들'을 모으는 것"으로는 안 되며, 직무에 적합한 사람들로 채워져야 한다는 점이었다.[7] 따라서 신불해는 공자만큼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들의 수행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를 강조했다.[7]

신불해는 군주는 자신의 영토 상황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어야 하지만, 세부 사항에 매달릴 여유가 없으며, 개인적인 임명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7] 독립적으로 보고 듣는 방법은 세부 사항을 기계적 또는 운영적 의사 결정(법 또는 "방법")을 통해 범주로 묶는 것이다.[7]

한비자와 비교하면, 그의 시스템은 여전히 강력한 군주를 필요로 하며, 어떤 신하도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7] 신불해의 이상적인 군주는 여전히 가능한 가장 광범위한 주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지적이어야 하며, 모든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하며, 관료 기구를 무제한으로 통제해야 한다.[7] ''법''(法 "방법")을 옹호하면서 신불해는 군주의 권력에 가장 큰 위협은 내부에서 온다고 믿었고, 한비자와 달리 신하들에게 의무나 충성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다.[7]

신불해의 교리는, 사후에 한비자가 술(術) 또는 기술(신불해가 사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용어)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거의 전적으로 "군주의 역할과 그가 관료 기구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 즉, 그 관리와 인력 통제, 유능한 신하의 선발, 그들의 수행, 권력의 독점, 그리고 군주와 신하 간의 통제를 다루는 것으로 묘사되며, 이는 그가 무위로 특징지었다.[8][13][9] 따라서 그것들은 관료 기구를 통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쉽게 간주될 수 있다.[8][13][9]

더 구체적으로, 신불해의 방법(법)은 "성과를 면밀히 조사하고 그 근거에 따라 보상을 주고, 능력만을 기준으로 관직을 수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10] 유향은 신불해가 사람들의 군주에게 형벌보다는 술(術)을 사용하고, 매우 엄격하게 감독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설득에 의존하도록 조언했다고 기록했다.[11] 유향은 신불해의 "주요 강령"이 (''형명'' 刑名)이라고 여겼다.[12] 관료의 권력에 대한 동등하게 적용되는 견제를 나타내는 형명은 기술, 성과 및 (드물게) 연공서열의 심사를 통해 직무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

신불해의 인사 통제, 또는 정명론("사무 직함"이라고 대략 번역)은 "엄격한 성과 관리"를 통해 성과와 직위를 연관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했다.[13] 이는 "법가" 통치술[24]과 그 도교 파생물의 핵심적인 원리가 되었다.

한나라 시대 형사 사건 결정 기록을 담당하는 정부 서기관을 형명(Xing-Ming)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한비자가 사용한 용어이며, 사마천(기원전 145년 또는 135년 ~ 기원전 86년)과 유향(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은 이를 신불해(기원전 400년 ~ 기원전 337년경)의 학설로 귀속시켰다.[26][15] 유향은 신불해의 학설을 형명으로 정의하기까지 한다.[16] 신불해는 실제로 더 오래되고 철학적으로 일반적인 등가물인 명실(ming-shih)을 사용하여 "법가 명칭론"을 명가의 명칭과 현실(ming shih) 논쟁과 연결시켰다.[17] 이러한 논의는 한비자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8]

사마천과 유향은 형명을 "실제 결과를 명(Ming)에 따라 책임지게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19][20] 명(Ming)은 때때로 언어의 의미를 가지며, 이는 장차 관리가 될 사람의 진술을 그의 행동의 현실과 비교하기 위한 것이거나, 또는 평판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 실제 행동(xing "형태" 또는 shih "현실")과 비교된다.[21] 형명(또는 명실)은 "훌륭한" 사람을 찾는 대신, 특정 직책에 적합한 사람을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정권에 대한 전체적인 조직적 지식이 필요하다.[22] 그러나 더 간단하게는 장관들이 특정 비용과 시간 틀을 제시하는 제안을 할 수 있게 하여 그 정의를 경쟁하는 장관들에게 맡길 수 있는데, 이는 한비자가 선호하는 학설이다. 정확성을 선호하는 이 학설은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하는 경향을 억제한다;[23] 명(Ming)의 정확한 표현은 프로젝트 실현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24]

논리학자 등석 (기원전 501년 사망)은 유향에 의해 형명(Xing-Ming)의 원리의 기원으로 인용된다.[25] 정나라의 하급 관리로 근무하면서 그는 형벌법전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25] 소송과 관련하여 그는 모순되는 명제의 허용 가능성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법률, 법적 원칙 및 정의 해석에 대한 논쟁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25]

신불해는 무위를 통해 이를 해결하며, 관여하지 않고 관리의 말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26] 신불해는 "군주는 정책을 통제하고, 신하는 사무를 관리한다. 열 번 말해서 열 번 맞고, 백 번 행동해서 백 번 성공하는 것은 남을 신하로 섬기는 자의 일이지,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27] 주장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수동적인 마음 챙김("음의 방법")을 통해 이를 그의 업적과 객관적으로 비교하려고 하면서, 신불해의 군주는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으며, 주장에 근거하여 명칭(직함/직위)을 부여한다.[26]

신불해는 가시적인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지지했으며,[28] 명실(ming-shih)을 사용하여 조사하고 임명했지만, 한나라의 법률 시스템은 명확하지 않아, 균일한 보상과 처벌을 금지했다. 우리는 신불해가 보상과 처벌(상앙의) 학설을 옹호했다고 추정할 근거가 없으며, 한비는 그가 법을 통일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29]

사기(史記)의 주석에는 지금은 소실된 책을 인용하며 신불해(申不害)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음(陰), '수동적 마음챙김'을 사용하여 신하들을 감독하고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면, 책임감이 깊이 새겨진다."[46] 관자(管子) 역시 이렇게 말한다: "음(陰)은 무위(無爲)의 방식이다. 음(陰)은 어떤 것에도 더하거나 빼지 않는다. 어떤 것에 형태에 근거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 - 이것이 음(陰)의 방법이다."[46] 음(陰)은 군주의 의도, 호불호, 의견을 감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지침에도 불구하고, 군주의 임무는 여전히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었음이 분명하다.[46]

중국학자 존 메이컴(John Makeham)은 이렇게 설명한다: "언행을 평가하려면 군주의 냉정한 주의가 필요하다; (음(陰)은) 마음을 백지 상태로 만들고,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고 어떤 사람의 주장의 모든 세부 사항을 기록한 다음, 원래 주장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기술 또는 기법이다." 통치에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고수하려면 군주가 어떤 간섭이나 주관적인 고려도 하지 않아야 한다.

한비자 제43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 2. 형명(形名)

신불해는 수수께끼 같은 문체로 유명했다. 전한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신자》(申子중국어) 2장 분량을 저술한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이 책은 주로 정부 행정 철학을 다루었다. 기원전 141년, 한 무제 치세에 유학자들의 영향으로 신불해는 다른 "법가" 사상가들과 함께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6]

양나라 (502–556) 때 소실된 것으로 기록된 《신자》는 당나라 역대 사서 목록에 다시 등장했지만, 631년 편찬된 《군서지요》와 786년경 편찬된 《이림》의 인용문으로만 그 흔적이 남아있다. 청나라 시대에 세 번의 재구성 시도가 있었고, 마지막 언급은 1616년과 1700년 도서 목록에서 발견되었다.[6]

신불해의 교리는 사후 한비자가 술(術)이라 칭한 것으로, "군주의 역할과 관료 기구 통제 방법"을 주로 다룬다.[8] 유향은 신불해가 군주에게 형벌보다 술(術)을 사용하고, 엄격한 감독과 책임을 위해 설득에 의존하도록 조언했다고 기록했다.[11] 유향은 신불해의 "주요 강령"이 형명(刑名)이라고 보았다.[12] 형명은 기술, 성과, 연공서열 심사를 통해 관료의 권력에 대한 견제를 적용하여 적합한 인물을 찾는다.

한나라 시대 형사 사건 결정 기록 담당 정부 서기관은 형명(Xing-Ming)으로 불렸는데, 사마천(기원전 145년 또는 135년 ~ 기원전 86년)과 유향(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은 이를 신불해(기원전 400년 ~ 기원전 337년경)의 학설로 보았다.[26][15] 유향은 더 나아가 신불해의 학설을 형명으로 정의한다.[16] 신불해는 더 오래되고 철학적으로 일반적인 명실(ming-shih)을 사용하여 "법가 명칭론"을 명가의 명칭과 현실(ming shih) 논쟁과 연결했다.[17]

사마천과 유향은 형명을 "실제 결과를 명(Ming)에 따라 책임지게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19][20] 명(Ming)은 때때로 언어의 의미를 가지며, 장차 관리가 될 사람의 진술과 행동의 현실을 비교하거나, 평판을 의미하며 실제 행동(xing "형태" 또는 shih "현실")과 비교된다.[21] 형명(또는 명-실)은 "훌륭한" 사람 대신 특정 직책에 적합한 사람을 찾지만, 정권에 대한 전체적인 조직적 지식이 필요하다.[22]

등석 (기원전 501년 사망)은 유향에 의해 형명(Xing-Ming) 원리의 기원으로 인용된다. 정나라 하급 관리로 근무하며 형벌법전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25]

3. 3. 무위(無爲)

申子중국어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신자》는 정부 행정 철학을 다루고 있다. 신불해의 사상은 한 무제 치세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으나, 그의 기본적인 사상, 특히 기술과 보고서 점검은 행정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신불해는 "깨달은 것"은 "관료 기구 통제 방법"이 봉건 정부와 섞이거나, 단순히 "일군의 '훌륭한 사람들'을 모으는 것"으로는 안 되며, 직무에 적합한 사람들로 채워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들의 수행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를 강조했다.[7]

신불해는 군주는 자신의 영토 상황을 잘 알고 있어야 하지만, 세부 사항에 매달려서는 안 되며, 독립적으로 보고 듣는 방법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시스템은 강력한 군주를 필요로 하며, 신하를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 신불해의 이상적인 군주는 광범위한 주권을 가지고, 지적이며, 모든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관료 기구를 무제한으로 통제해야 한다.[7]

신불해의 교리는 사후에 한비자가 술(術)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군주의 역할과 그가 관료 기구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다룬다. 이는 관리와 인력 통제, 유능한 신하의 선발, 그들의 수행, 권력의 독점, 그리고 군주와 신하 간의 통제를 포함하며, 신불해는 이를 무위로 특징지었다.[8][13][9]

신불해의 방법(법)은 "성과를 면밀히 조사하고 그 근거에 따라 보상을 주고, 능력만을 기준으로 관직을 수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10] 유향은 신불해가 형벌보다는 술(術)을 사용하고, 매우 엄격하게 감독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설득에 의존하도록 조언했다고 기록했다.[11] 유향은 신불해의 "주요 강령"이 ''형명''(刑名)이라고 여겼다.[12] 형명은 기술, 성과 및 연공서열의 심사를 통해 직무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

신불해의 인사 통제는 "엄격한 성과 관리"를 통해 성과와 직위를 연관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했다.[13] 이는 "법가" 통치술[24]과 그 도교 파생물의 핵심적인 원리가 되었다.

사마천과 유향은 형명을 "실제 결과를 명(Ming)에 따라 책임지게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19][20] 명(Ming)은 언어의 의미를 가지며, 장차 관리가 될 사람의 진술을 그의 행동의 현실과 비교하기 위한 것이거나, 또는 평판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 실제 행동과 비교된다.[21] 형명(또는 명-실)은 "훌륭한" 사람을 찾는 대신, 특정 직책에 적합한 사람을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정권에 대한 전체적인 조직적 지식이 필요하다.[22]

신불해는 무위를 통해 관리의 말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26] 그는 "군주는 정책을 통제하고, 신하는 사무를 관리한다. 열 번 말해서 열 번 맞고, 백 번 행동해서 백 번 성공하는 것은 남을 신하로 섬기는 자의 일이지,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27] 신불해의 군주는 주장에 근거하여 명칭(직함/직위)을 부여한다.[26]

신불해는 가시적인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지지했지만,[28] 한나라의 법률 시스템은 명확하지 않아, 균일한 보상과 처벌을 금지했다.

신불해를 따라 한비자무위를 강력히 옹호했다. 한 무제 시대까지의 한나라 통치자들은 그들의 활동을 "주로 고위 관료의 임명과 해임에 국한"했는데, 이는 명백히 진나라에서 물려받은 "법가"적 행태였다.[30]

신불해는 정부가 적절한 방법(법, 法)에 의존하여 조직되고 감독되면 통치자는 거의 할 필요가 없고, 해야 할 일도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31] 논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신불해는 가까운 자들은 애정을 느끼고 먼 자들은 그를 갈망할 것이라는 말[33]은 통치자와 신하의 관계를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던 한비자와 대조를 이룬다.[34]

그러나 신불해는 여전히 통치자에게 가장 유능한 신하가 가장 큰 위험이라고 믿었으며,[35] 그들에게 기술 없이 충성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36] 신불해는 통치자가 자신의 약점과 고문에게 의존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 겉으로 위장하는 모습을 그린다고 하였다.[38]

신불해는 통치자에게 자신의 조언을 지키고, 동기를 숨기고, 무위 속에 자신의 발자취를 감추며, 어리석고 무능한 모습을 이용하라고 조언한다. 신불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39]

> 만약 통치자의 지혜가 드러나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항하여 대비할 것이다. 만약 그의 지혜 부족이 드러나면, 그들은 그를 속일 것이다. 만약 그의 지혜가 드러나면,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을) 덮어버릴 것이다. 만약 그의 지혜 부족이 드러나면, 그들은 그를 피할 것이다. 만약 그의 욕망의 부족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그의 진정한 욕망을 염탐할 것이다. 만약 그의 욕망이 드러나면, 그들은 그를 유혹할 것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통치자는) '나는 그들을 알 수 없다. 나는 무위의 방법을 통해서만 그들을 통제한다'라고 말한다.[40]

행정적 방법(법, 法)을 통해 행동함으로써 통치자는 자신의 의도, 호불호, 기술 및 의견을 숨긴다. 스스로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조종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41] 통치자는 정부 기능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재능이 있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유능한 관리의 서비스를 확보하는 데 더 능숙하다.

> 통치자는 빛을 비추는 거울과 같아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아름다움과 추함이 드러난다. (또는) 균형을 이루는 저울과 같아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가벼움과 무거움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행정적) 방법(법, 法)은 완전한 묵인이다. (그의) 개인적 (관심사)를 공공의 (복지)와 결합하여 그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행동하지 않지만, 세상 자체가 완전하다.

이 무위(또는 비행동)는 "법가"의 정치 이론을 종결하고, 중국 정치의 자치적 전통을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전략의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의 (제한된) 비행동은 그의 권력과 정치체의 안정을 보장한다.[45]

사기(史記)의 주석에는 지금은 소실된 책을 인용하며 신불해(申不害)가 "음(陰), '수동적 마음챙김'을 사용하여 신하들을 감독하고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면, 책임감이 깊이 새겨진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관자(管子) 역시 "음(陰)은 무위(無爲)의 방식이다. 음(陰)은 어떤 것에도 더하거나 빼지 않는다. 어떤 것에 형태에 근거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 - 이것이 음(陰)의 방법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음(陰)은 군주의 의도, 호불호, 의견을 감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46]

4. 평가와 영향

신불해의 사상은 그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행정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기술과 보고서 점검으로 구성된 그의 기본적인 사상은 행정에서 계속 사용되었다.[6]

마이클 로위(Michael Loewe)는 캠브리지 중국사에서 법가 학파들의 상호 보완성을 주장했다. 한비는 두 학파 모두를 "왕과 황제의 도구"라고 불렀고, 이사 또한 그 둘을 똑같이 칭찬하며, 그들 사이에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다. 로위는 신불해가 영향력이 있었다면, 《상군서(商君書)》의 교리만으로는 기대할 수 없었던 것보다, 신불해의 영향이 진나라 정부를 더욱 세련되고 합리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48]

크릴은 신불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진시황, 한나라가이(賈誼), 한 문제, 한 경제, 조조(晁錯), 동중서, 공손홍, 한 선제, 수 문제, 제갈량 등을 상세히 설명한다. 제갈량은 유교 지향적인 대신이었지만, 한비와 신불해의 저작에 매우 중요성을 부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8]

사기이사가 신불해에게서 비롯된 "감독하고 책임을 묻는" 것을 반복적으로 권고했다고 기록한다. 진시황이 세운 비석은 그를 정부를 장악하고 형명을 확립한 현인으로 기념한다. 사기는 한 문제가 "본질적으로 형명을 좋아했다"고 기록한다.[49]

학자 가이는 한 문제에게 그의 후계자가 신불해의 방법을 사용하여 "많은 관리들의 기능을 감독하고 정부의 사용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라고 조언했다. 한 경제의 두 조언자는 형명(Xing-Ming)의 제자였으며, 한 명은 최고 성적의 시험을 통과했고, 제후들에게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경고했다.[49]

유교의 영향으로 신불해에 대한 노골적인 논의는 금지되었으나, 과거 시험을 창시한 황제인 한 무제는 법가 사상에 익숙했고 호의적이었다. 과거 시험은 형명(Xing-Ming)에 관한 책을 쓴 공손홍의 지지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 선제는 유향에 의해 여전히 신불해를 즐겨 읽고, 형명(Xing-Ming)을 사용하여 부하들을 통제하고 법적 사건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49]

한 경제는 신불해의 교리에 두 명의 멘토를 두었고, 법가조조(晁錯)를 임명했다. 조조한서에 의해 신불해, 상앙, 형명(Xing-Ming) 교리의 제자로 여겨진다.[49]

과거 시험 옹호자인 동중서의 인사 시험 및 통제에 관한 저술은 한비자와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형명(Ming-shih)을 사용하지만, 한비자와는 달리 처벌에 반대한다. 과거 시험은 ''형명''(xingming)에 관한 책을 쓴 공손홍의 지지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다.[49]

유교가 부상하면서 형명이라는 용어는 사라졌고, 동한 시대 초기에 그 완전하고 원래의 의미는 잊혀졌다. 그러나, 후대 왕조에서 다시 나타났으며, 수 문제유교에서 그의 호의를 철회하고, "형명(Xing-Ming)과 권위주의 정부를 옹호하는 집단"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9]

4. 1. 평가

신불해는 그의 수수께끼 같은 문체로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서 비롯된 글들은 전한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현재는 소실된 2장 분량의 저서인 《신자(申子)》(申子|신자중국어)를 저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은 거의 전적으로 정부 행정 철학을 다루고 있다. 기원전 141년, 한 무제 치세에는 유학자들의 영향으로 신불해의 이름이 다른 "법가(法家)"(후에 상앙에게 더 정확하게 묘사될 법가) 사상가들과 함께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금지하는 목록에 올랐다.[6]

한나라 시대에 널리 읽혔던 《신자》는 양나라 (502–556) 때 소실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당나라 역대 사서의 목록에 다시 등장했지만, 그 흔적은 631년에 편찬된 《군서지요》와 786년경에 편찬된 《이림》에 남아있는 인용문으로만 존재한다. 청나라 시대에 이 작품의 내용을 재구성하려는 세 번의 주요 시도가 있었고, 마지막 언급은 1616년, 그리고 1700년의 도서 목록에서 발견되었다.[6]

신불해는 초기 한(韓)나라의 법을 통일하지는 않았지만, "깨달은 것"은 "관료 기구 통제 방법"이 봉건 정부와 섞이거나, 단순히 "일군의 '훌륭한 사람들'을 모으는 것"으로는 안 되며, 직무에 적합한 사람들로 채워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신불해는 공자만큼 유능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들의 수행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를 강조했다.[7]

신불해는 군주는 자신의 영토 상황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어야 하지만, 세부 사항에 매달릴 여유가 없으며, 개인적인 임명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립적으로 보고 듣는 방법은 세부 사항을 기계적 또는 운영적 의사 결정(법 또는 "방법")을 통해 범주로 묶는 것이다.[7]

한비자와 비교하면, 그의 시스템은 여전히 강력한 군주를 필요로 하며, 어떤 신하도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 신불해의 이상적인 군주는 가능한 가장 광범위한 주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지적이어야 하며, 모든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하며, 관료 기구를 무제한으로 통제해야 한다. 상앙과는 달리 그는 단순히 그들의 수장일 뿐이다. '법'(法, 방법)을 옹호하면서 신불해는 군주의 권력에 가장 큰 위협은 내부에서 온다고 믿었고, 한비자와 달리 신하들에게 의무나 충성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다.[7]

신불해의 교리는, 사후에 한비자가 술(術)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군주의 역할과 그가 관료 기구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 즉, 관리와 인력 통제, 유능한 신하의 선발, 그들의 수행, 권력의 독점, 그리고 군주와 신하 간의 통제를 다루는 것으로 묘사되며, 이는 그가 무위로 특징지었다.[8][13][9]

신불해의 방법(법)은 "성과를 면밀히 조사하고 그 근거에 따라 보상을 주고, 능력만을 기준으로 관직을 수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10] 유향은 신불해가 사람들의 군주에게 형벌보다는 술(術)을 사용하고, 매우 엄격하게 감독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설득에 의존하도록 조언했다고 기록했다.[11] 유향은 신불해의 "주요 강령"이 형명이라고 여겼다.[12] 관료의 권력에 대한 견제를 나타내는 형명은 기술, 성과, 연공서열의 심사를 통해 직무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

신불해의 인사 통제, 또는 정명론("사무 직함"이라고 대략 번역)은 "엄격한 성과 관리"를 통해 성과와 직위를 연관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했다.[13] 이는 "법가" 통치술[24]과 그 황-노 도교 파생물의 핵심적인 원리가 되었다.

한나라 시대 형사 사건 결정 기록을 담당하는 정부 서기관을 형명(Xing-Ming)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한비자가 사용한 용어이며, 사마천(기원전 145년 또는 135년 ~ 기원전 86년)과 유향(기원전 77년 ~ 기원전 6년)은 이를 신불해(기원전 400년 ~ 기원전 337년경)의 학설로 귀속시켰다.[26][15] 유향은 신불해의 학설을 형명으로 정의하기까지 한다.[16] 신불해는 실제로 더 오래되고 철학적으로 일반적인 등가물인 명실(ming-shih)을 사용하여 "법가 명칭론"을 명가의 명칭과 현실(ming shih) 논쟁과 연결시켰다.[17]

사마천과 유향은 형명을 "실제 결과를 명(Ming)에 따라 책임지게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19][20] 명(Ming)은 때때로 언어의 의미를 가지며, 이는 장차 관리가 될 사람의 진술을 그의 행동의 현실과 비교하기 위한 것이거나, 또는 평판을 의미하며, 이는 다시 실제 행동(xing "형태" 또는 shih "현실")과 비교된다.[21] 형명(또는 명실)은 "훌륭한" 사람을 찾는 대신, 특정 직책에 적합한 사람을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정권에 대한 전체적인 조직적 지식이 필요하다.[22] 더 간단하게는 장관들이 특정 비용과 시간 틀을 제시하는 제안을 할 수 있게 하여 그 정의를 경쟁하는 장관들에게 맡길 수 있는데, 이는 한비자가 선호하는 학설이다. 정확성을 선호하는 이 학설은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하는 경향을 억제한다;[23] 명(Ming)의 정확한 표현은 프로젝트 실현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24]

논리학자 등석 (기원전 501년 사망)은 유향에 의해 형명(Xing-Ming)의 원리의 기원으로 인용된다. 정나라의 하급 관리로 근무하면서 그는 형벌법전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25]

신불해는 무위를 통해 이를 해결하며, 관여하지 않고 관리의 말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26] 신불해는 "군주는 정책을 통제하고, 신하는 사무를 관리한다. 열 번 말해서 열 번 맞고, 백 번 행동해서 백 번 성공하는 것은 남을 신하로 섬기는 자의 일이지,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27] 주장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수동적인 마음 챙김("음의 방법")을 통해 이를 그의 업적과 객관적으로 비교하려고 하면서, 신불해의 군주는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으며, 주장에 근거하여 명칭(직함/직위)을 부여한다.[26]

신불해는 가시적인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지지했으며,[28] 명실(ming-shih)을 사용하여 조사하고 임명했지만, 한나라의 법률 시스템은 명확하지 않아, 균일한 보상과 처벌을 금지했다. 우리는 신불해가 보상과 처벌(상앙의) 학설을 옹호했다고 추정할 근거가 없으며, 한비는 그가 법을 통일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29]

회남자는 한비자의 설명을 따랐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신불해가 살았을 때 한(韓)나라의 관리들이 서로 목적이 달랐고 어떤 관행을 따라야 할지 몰랐다고 말한다.

사기이사가 신불해에게서 비롯된 "감독하고 책임을 묻는" 것을 반복적으로 권고했다고 기록한다. 진시황이 세운 비석은 그를 정부를 장악하고 형명을 확립한 현인으로 기념한다. 사기는 한 문제가 "본질적으로 형명을 좋아했다"고 기록한다.

학자 가이(賈誼)는 한 문제에게 그의 후계자가 신불해의 방법을 사용하여 "많은 관리들의 기능을 감독하고 정부의 사용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라고 조언했다.

과거 시험이 실시될 무렵, 유교의 영향으로 신불해에 대한 노골적인 논의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를 창시한 황제인 한 무제는 법가 사상에 익숙했고 호의적이었으며, 과거 시험은 공손홍의 지지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는 형명(Xing-Ming)에 관한 책을 썼다. 한 선제는 유향에 의해 여전히 신불해를 즐겨 읽고, 형명(Xing-Ming)을 사용하여 부하들을 통제하고 법적 사건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한 경제는 또한 신불해의 교리에 두 명의 멘토를 두었고, 또 다른 법가인 조조(晁錯)를 임명했다. 조조는 한서에 의해 신불해, 상앙, 형명(Xing-Ming)의 교리의 제자로 여겨진다.

과거 시험의 옹호자인 동중서의 인사 시험 및 통제에 관한 저술은 한비자와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형명(Ming-shih)을 사용하지만, 한비와는 달리 처벌에 반대한다. 동의 옹호와는 별개로, 과거 시험은 공손홍의 지지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는 ''형명''(xingming)에 관한 책을 썼다.

한 선제는 유향에 의해 여전히 신불해를 즐겨 읽고, 형명(Xing-Ming)을 사용하여 부하들을 통제하고 법적 사건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유교에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유교가 부상하면서 그 용어는 사라졌다. 동한 시대 초기에 그 완전하고 원래의 의미는 잊혀졌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 왕조에서 나타나며, 수 문제유교에서 그의 호의를 철회하고, "형명(Xing-Ming)과 권위주의 정부를 옹호하는 집단"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9]

5. 신자(申子)

申子|신자중국어는 전한 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2장 분량의 저서로, 현재는 소실되었지만 거의 전적으로 정부 행정 철학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141년, 한 무제 치세에는 유학자들의 영향으로 신불해의 이름이 다른 "법가"(법가, 나중에 상앙에게 더 정확하게 묘사될 법가)로 분류된 사상가들과 함께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금지하는 목록에 올랐다. 그 이후부터 신의 사상에 관한 연구는 급격히 쇠퇴했지만, 그의 기본적인 사상, 특히 기술과 보고서 점검으로 구성된 많은 부분이 행정에서 계속 사용되었으며,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6]

한나라 시대에 널리 읽혔던 《신자》는 한비자와 비교했을 때, 양나라(502–556) 때 소실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당나라 역대 사서의 목록에 다시 등장했지만, 그 흔적은 631년에 편찬된 《군서지요》와 786년경에 편찬된 《이림》에 남아있는 인용문으로만 존재한다. 청나라 시대에 이 작품의 내용을 재구성하려는 세 번의 주요 시도가 있었고, 마지막 언급은 1616년, 그리고 1700년의 도서 목록에서 발견되었다.[6] 그 조각들은 중국학자 허리 크릴(1974)에 의해 《신불해: 기원전 4세기의 중국 정치 철학자》에 재구성되었으며, 이는 한국 학자 양순자가 신불해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더 현대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6. 현대적 의의

신불해는 그의 독특한 통치 철학으로 인해 현대에 와서도 주목받고 있다. 그의 사상은 행정, 특히 관료제 운영에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신불해의 사상은 한(漢)나라 시대에 널리 읽혔으며, 그의 저서 《신자》는 비록 소실되었지만, 여러 문헌에 인용된 형태로 남아있다. 기술과 보고서 점검을 통한 행정 방식은 후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6] 신불해는 상앙처럼 법을 통일하지는 않았지만, 관료 기구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직무에 적합한 사람을 선발하고 그들의 수행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공자의 인재 선발 강조와도 유사하지만, 신불해는 "끊임없는 감시"를 더욱 강조했다.[7]

신불해는 군주가 세부 사항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보고 듣는 방법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군주의 권력에 대한 위협을 경계했으며, 특히 내부의 위협을 강조했다. 한비자와 달리 신하의 의무나 충성을 강조하지 않았다.[7] 그의 핵심 교리인 술(術)은 군주가 관료 기구를 통제하는 방법(관리와 인력 통제, 유능한 신하 선발, 성과 평가, 권력 독점 등)을 다루며, 무위로 특징지어진다.[8][13][9] 신불해는 성과를 면밀히 조사하고 능력에 따라 관직을 수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10] 유향에 따르면, 신불해는 형벌보다는 술(術)을 사용하고 설득을 통해 감독과 책임을 묻도록 조언했다.[11]

신불해의 인사 통제 방식인 정명론은 "엄격한 성과 관리"를 통해 성과와 직위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도교에도 영향을 미쳤다.[13][14] 사마천과 유향은 형명을 "실제 결과를 명(Ming)에 따라 책임지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19][20] 명(Ming)은 언어 또는 평판을 의미하며, 실제 행동과 비교된다.

신불해는 무위를 통해 관리의 말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26] 그는 "군주는 정책을 통제하고, 신하는 사무를 관리한다"고 말했다.[27] 주장을 기록하고 객관적으로 비교하면서, 신불해의 군주는 주장에 근거하여 직함을 부여했다.[26] 그는 가시적인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지지했지만,[28] 한나라의 법률 시스템은 명확하지 않아 균일한 보상과 처벌을 금지했다.

6. 1. 한계점

신불해는 관리 선발과 감시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의 시스템은 몇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신불해는 군주가 영토 상황을 잘 알아야 하지만 세부 사항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독립적으로 보고 듣는 방법을 통해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시스템은 여전히 강력한 군주에게 의존했으며, 신하를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상적인 군주는 광범위한 주권과 지적 능력을 갖추고 모든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했다. 상앙과는 달리 신불해는 신하들에게 의무나 충성을 강조하지 않았고, 군주의 권력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내부에서 온다고 믿었다.

신불해의 교리, 즉 술(術)은 주로 군주의 역할과 관료 통제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 관리와 인력 통제, 유능한 신하 선발, 성과 평가, 권력 독점, 군주와 신하 간의 통제가 핵심 요소였다. 신불해는 성과를 면밀히 조사하고 능력에 따라 관직을 수여하는 데 중점을 뒀다. 유향은 신불해가 형벌보다는 술(術)을 사용하고, 엄격한 감독과 책임을 묻기 위해 설득에 의존하도록 조언했다고 기록했다.

신불해의 인사 통제, 즉 정명론은 "엄격한 성과 관리"를 통해 성과와 직위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는 "법가" 통치술과 도교 파생물의 핵심 원리가 되었다. 사마천과 유향은 형명을 "실제 결과를 명(Ming)에 따라 책임지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명(Ming)은 언어의 의미 또는 평판을 의미하며, 실제 행동과 비교된다. 형명은 "훌륭한" 사람을 찾는 대신 특정 직책에 적합한 사람을 찾을 수 있지만, 정권에 대한 전체적인 조직적 지식이 필요했다. 장관들이 특정 비용과 시간 틀을 제시하는 제안을 하고, 그 정의를 경쟁하는 장관들에게 맡기는 방식은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하는 경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등석은 형명 원리의 기원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신불해는 무위를 통해 관리의 말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그는 "군주는 정책을 통제하고, 신하는 사무를 관리한다"고 말했다. 주장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객관적으로 비교하면서, 신불해의 군주는 주장에 근거하여 직함을 부여했다.

신불해는 가시적인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지지했지만, 한나라의 법률 시스템은 명확하지 않아 균일한 보상과 처벌을 금지했다. 신불해가 상앙의 보상과 처벌 학설을 옹호했다고 추정할 근거는 없으며, 한비자는 그가 법을 통일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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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적 What Is Taoism? https://books.google[...]
[40] 서적 From Destiny to Dao: A Survey of Pre-Qin Philosophy in China https://books.google[...]
[41] 서적 Chinese Thought: An Introduction https://books.google[...]
[42] 서적 What Is Taoism?
[42] 서적 The Ideal Chinese Political Leader
[43] 서적 Shen Pu-hai: A Chinese Political Philosopher of the Fourth Century B.C.
[44] 서적 What Is Taoism? https://books.google[...]
[45] 서적 The Ideal Chinese Political Leader
[46] 서적 Name and Actuality in Early Chinese Thought https://books.google[...]
[46] 간행물 The Legalist Concept of Hsing-Ming: An Example of the Contribution of Archaeological Evidence to the Re-Interpretation of Transmitted Texts
[47] 서적 Ultimate Wisdom or Applied Psychology?
[47] 서적 What Is Taoism? https://books.google[...]
[47] 간행물 The Meaning of Hsing-Ming
[47] 서적
[47] 서적
[47] 서적 A Brief History of Ancient China
[48]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I: Ch'in and Han Empires https://books.google[...]
[49] 간행물 The Legalist Concept of Hsing-Ming: An Example of the Contribution of Archaeological Evidence to the Re-Interpretation of Transmitted Texts https://www.jstor.or[...]
[49] 서적 What Is Taoism? https://books.google[...]
[49] 서적 Shen Pu-Hai: A Chinese Political Philosopher of the Fourth Century B. C.
[49] 간행물 The Meaning of Hsing-Ming
[49] 서적 Han-shu
[49] 서적 Han-shu II
[49] 서적 China in Search of a Harmonious Society https://books.google[...]
[49] 간행물 Chia I's "Techniques of the Tao" and the Han Confucian Appropriation of Technical Discourse
[49] 서적 Dao Companion to the Han Feizi https://books.google[...]
[50] 문의 申不害(しんふがい)の著した書物(著作)を読み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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