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타쿠지노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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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칸타쿠지노스는 비잔틴 제국의 유력한 귀족 가문으로,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문의 기원은 소아시아 지역으로 추정되며,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제국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콤니노스 왕조 시대에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는 모레아 전제공국의 총독을 배출하고,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가 황제에 즉위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비잔틴 내전에서 패배한 후에도 가문은 펠로폰네소스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하며, 주변 국가들과의 혼인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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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타쿠지노스 왕조 - 요안니스 6세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는 14세기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안드로니코스 3세 사후 내전을 통해 제위를 찬탈했으나, 재위 기간 동안 여러 난관에 직면하며 제국 쇠퇴를 가속화했고 퇴위 후에는 수도사가 되었다. - 칸타쿠지노스 왕조 -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핑게르니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핑게르니스)는 비잔틴 제국 시대에 여러 귀족 가문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연결된 인물이다. -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 광주고등법원
광주고등법원은 1952년에 설치되어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를 관할하며, 제주와 전주에 원외재판부를 두고 있다. -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 1502년
1502년은 율리우스력으로 수요일에 시작하는 평년으로, 이사벨 1세의 이슬람교 금지 칙령 발표, 콜럼버스의 중앙아메리카 해안 탐험,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상관 설립, 크리미아 칸국의 킵차크 칸국 멸망, 비텐베르크 대학교 설립,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들의 신대륙 도착 등의 주요 사건이 있었다.
칸타쿠지노스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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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성씨 | 칸타쿠제노스 |
원어명 | Καντακουζηνός |
다른 이름 | 칸타쿠제누스 |
![]() | |
유형 | 귀족 가문 |
국가 | 비잔티움 제국 모레아 전제공국 |
작위 | 비잔티움 황제 데스포트 모레아의 데스포트 |
창시자 | |
가문 창시자 |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 |
첫 번째 황제 |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
설립 연도 | 11세기 |
황가 설립 연도 | 1347년 |
마지막 통치자 | |
비잔티움 제국 | 마태오스 칸타쿠제노스 |
모레아 전제공국 | 디미트리오스 1세 칸타쿠제노스 |
폐위 연도 | 비잔티움 제국: 1357년 모레아 전제공국: 1383년 |
분가 | |
분가 | 칸타쿠지노 |
2. 어원
동로마 제국 연구자인 콘스탄티노스 아만토스는 칸타쿠지노스의 어원이 스미르나 근처의 시필루스 산의 남쪽 지역인 쿠제나스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도널드 니콜에 따르면, 가문의 성씨의 기원은 "낭만적인 추측과 언어학적 추측 사이"에 있다. 니콜과 카즈단은 콘스탄티노스 아만토스가 제시한 어원을 지지하는데, 이에 따르면 칸타쿠제노스라는 이름은 ''kata-Kouzenan'' (κατὰ-κουζηνᾶν or κατὰ-κουζηνόνel, 문자 그대로 "쿠제나스 근처 또는 쿠제나스에서")에서 유래하며, 궁극적으로는 스미르나 근처 시필루스 산의 남쪽 부분의 이름인 쿠제나스라는 지역에서 유래한다.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쿠만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을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2] 콤니노스 왕조 시대에는 칸타쿠지노스 가문 구성원이 군인으로 입증되었다. 세바스토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그의 손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사르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이사키오스 2세의 누이인 이레네 앙겔리나와 결혼했다. 4차 십자군 시대에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지주 중 하나였다.[2]
3. 역사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도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계속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3세기에는 가문의 일원들이 펠로폰네소스와 니케아 제국에서 나타났으며, 그들 중 일부는 비잔틴 사회의 엘리트 계층인 '잘 태어난' 귀족(''eugeneis'')으로 받아들여졌다. 미하일 칸타쿠지노스는 1308년에 모레아의 초대 ''에피트로포스''(총독)로 임명되었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 6세는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를 거쳐 섭정과 황제(재위 1347–1354)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가 1341년 사망한 후, 그의 어린 아들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재위 1341–1391)가 왕위를 계승했다. 섭정을 둘러싼 분쟁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중심으로 한 귀족 파벌과, 황후 사보이의 안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 ''메가스 두크스'' 알렉시우스 아포카우코스로 구성된 섭정 회의 사이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 분쟁은 1341–1347년 비잔틴 내전으로 이어졌고, 요안니스 6세가 승리하여 수도를 장악하고 요안니스 5세의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칸타쿠지노스는 딸 헬레나 칸타쿠제네를 요안니스 5세와 결혼시키고 아들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를 공동 황제(재위 1353–1357)로 임명하여 자신의 왕조를 굳건히 하려 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5세는 1352–1357년 비잔틴 내전을 일으켜 칸타쿠지노스 가문을 몰아내고 단독 황제가 되었다. 요안니스 6세의 막내 아들 마누일 칸타쿠지노스는 1349년부터 1380년까지 모레아 전제공국에서 ''데스포테스''로 남아 있었다. 요안니스의 다른 딸들 중 마리아는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와 결혼했고, 테오도라는 오스만 에미레이트의 오르한 1세와 결혼했다.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의 두 아들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데메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잠시 모레아를 통치했다.[4] 비교적 적은 문헌이 남아 있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무자녀로 사망하였으며 수많은 후대의 칸타쿠지노스 가문원들과 역사학자 테오도르 스판두네스(Theodore Spandounes), 족보학자 위그스 부삭(Hugues Busac)의 아내는 마테오스에서 디미트리오스까지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간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진다.[5] 데메트리오스의 가능한 후손으로는 게오르기오스,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인 안드로니코스, Đurađ Branković와 결혼한 이레네, Branković의 궁정에서 일했던 토마스, 트레비존드의 다비드 콤네노스의 두 번째 아내가 된 헬레나 등이 있다.
3. 1. 중세 동로마 제국 시기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쿠만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을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2] 콤니노스 왕조 시대에는 칸타쿠지노스 가문 구성원이 군인으로 입증되었다. 세바스토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그의 손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사르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이사키오스 2세의 누이인 이레네 앙겔리나와 결혼했다. 4차 십자군 시대에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지주 중 하나였다.[2]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도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미카일 칸타쿠지노스는 1308년에 모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아들인 요안니스 6세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친우로서 국정을 담당하였다.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 사후, 섭정이었던 요안니스 6세는 섭정단을 전복하려는 반대세력과의 내전에 돌입, 1347년 승리하여 요안니스 5세와 공동황제가 되었다. 요안니스 6세의 장남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도 공동 황제였으나, 포로로 잡혀 사임했다. 요안니스 6세의 작은 아들인 마누일 칸타쿠지노스는 1349년부터 1380년까지 모레아의 데스포티스였다. 요안니스 6세의 딸들 중 엘레나 칸타쿠지니는 요안니스 5세와, 마리아 칸타쿠지니는 에페이로스의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와, 테오도라 칸타쿠지니는 오르한 1세와 결혼했다.[3]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의 두 아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데메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잠시 모레아를 통치했다.[4]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자녀 없이 사망했으며, 후대의 칸타쿠지노스 가문원들과 역사학자 테오도르 스판두네스, 족보학자 위그스 부삭의 아내는 마테오스에서 디미트리오스까지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간다고 일반적으로 여겨진다.[5]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아나톨리아(소아시아)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1094년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 황제 치세에 가문 구성원이 쿠만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이면서 처음 등장한다. 12세기부터 그들의 관심사와 재산은 제국 유럽 지역, 즉 그리스 본토에 더 많이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많은 비잔틴 귀족 가문들처럼, 그들은 군사 귀족의 일원으로서 귀족으로 성장했다.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면서 그들은 당시 '강력한 자'라는 뜻의 ''디나토이''로 알려진 사회 계급의 일부가 되었다. 콤네노스 왕조 시대에는 가문 구성원들이 군 고위 관리로 확인된다. ''세바스토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황제 치하의 장군이었으며 1150년부터 1153년 사이에 여러 차례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손자로 추정되는 ''카이사르''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이삭 2세 앙겔로스의 여동생인 이레네 앙겔리나와 결혼했다. 제4차 십자군 시점에는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자 중 하나였으며, 펠로폰네소스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3. 2. 동로마 제국 후기 (팔레올로고스 왕조)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쿠만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을 때 처음으로 등장한다.[2] 콤니노스 왕조 시대에는 칸타쿠지노스 가문 구성원이 군인으로 입증되었다. 세바스토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그의 손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사르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이사키오스 2세의 누이인 이레네 앙겔리나와 결혼했다. 4차 십자군 시대에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지주 중 하나였다.[2]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도 칸타쿠지노스 가문은 계속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3세기에는 가문의 일원들이 펠로폰네소스와 니케아 제국에서 나타났으며 그들 중 일부는 비잔틴 사회의 엘리트 계층인 '잘 태어난' 귀족(''eugeneis'')으로 받아들여졌다. 미하일 칸타쿠지노스는 1308년에 모레아의 초대 ''에피트로포스''(총독)로 임명되었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 6세는 ''메가스 도메스티코스''를 거쳐 섭정과 황제(재위 1347–1354)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가 1341년 사망한 후, 그의 어린 아들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재위 1341–1391)가 왕위를 계승했다. 섭정을 둘러싼 분쟁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중심으로 한 귀족 파벌과, 황후 사보이의 안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 ''메가스 두크스'' 알렉시우스 아포카우코스로 구성된 섭정 회의 사이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 분쟁은 1341–1347년 비잔틴 내전으로 이어졌고, 요안니스 6세가 승리하여 수도를 장악하고 요안니스 5세의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칸타쿠지노스는 딸 헬레나 칸타쿠제네를 요안니스 5세와 결혼시키고 아들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를 공동 황제(재위 1353–1357)로 임명하여 자신의 왕조를 굳건히 하려 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5세는 1352–1357년 비잔틴 내전을 일으켜 칸타쿠지노스 가문을 몰아내고 단독 황제가 되었다. 요안니스 6세의 막내 아들 마누일 칸타쿠지노스는 1349년부터 1380년까지 모레아 전제공국에서 ''데스포테스''로 남아 있었다. 요안니스의 다른 딸들 중 마리아는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와 결혼했고, 테오도라는 오스만 에미레이트의 오르한 1세와 결혼했다.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의 두 아들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데메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잠시 모레아를 통치했다.[4] 비교적 적은 문헌이 남아 있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무자녀로 사망하였으며 수많은 후대의 칸타쿠지노스 가문원들과 역사학자 테오도르 스판두네스(Theodore Spandounes), 족보학자 위그스 부삭(Hugues Busac)의 아내는 마테오스에서 디미트리오스까지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간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진다.[5] 데메트리오스의 가능한 후손으로는 게오르기오스,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인 안드로니코스, Đurađ Branković와 결혼한 이레네, Branković의 궁정에서 일했던 토마스, 트레비존드의 다비드 콤네노스의 두 번째 아내가 된 헬레나 등이 있다.
4. 주요 인물
5.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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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타쿠지노스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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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타쿠지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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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아들 |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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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네스 세바스토스 ∞ 마리아 콤네네 (안드로니코스 콤네노스의 딸) | 요한네스 카이사르 ∞ 이레네 안젤리나 (안드로니코스 안젤로스의 딸) | 미카엘 ∞ 안젤리나 (요한 두카스의 딸) | 마누엘 니케아의 핑크르네스 | 미카엘 메가스 코노스타울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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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네스 핑크르네스, 트라케시안 테마의 공작 ∞ 이레네 팔레올로기나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의 딸) | 미카엘 모레아의 총독 ∞ 테오도라 |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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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 1.알렉시오스 필레스 2.불가리아의 콘스탄틴 티흐 3.불가리아의 이바일로 | 안나 ∞ 니케포로스 1세 안젤로스 에피루스 전제군주 | 테오도라 ∞ 1.게오르기우스 무잘론 메가스 로고테테스 2.요한 라울 | 요한 6세 비잔틴 황제 (1347-1354) ∞ 이레네 아산-미소 (안드로니코스 아센의 딸) | 니케포로스 세바스토크라토르 | (딸) ∞ (가이) 콘스탄틴 2세 아르메니아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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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메사존 | 마테오스 비잔틴 공동 황제 (1353-1357) ∞ 이레네 팔레올로기나 | 마누엘 모레아 전제군주 ∞ 잠비아/이자벨 드 루시냥 ((가이) 콘스탄틴 2세의 딸, 아르메니아 왕) | 마리아 ∞ 니케포로스 2세 오르시니 에피루스 전제군주 | 테오도라 ∞ 오르한 비티니아의 에미르 | 헬레나 ∞ 요한 5세 팔레올로고스 팔레올로고스 가문 | 테오도라 ∞ 트라페준타의 알렉시오스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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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얀자 세르비아 노보 브르도의 귀족 | 데메트리우스 세르비아 작가 | 테오도라 ∞ 트라페준타의 알렉시오스 4세 | 게오르기우스 사차타이 장군 | 안드로니코스 메가스 도메스티코스 | 토마스 세르비아의 마그나테, 장군 | 이레네 ∞ 쥬라지 브란코비치 세르비아 전제군주 | 헬레나 ∞ 트라페준타의 다비드 | 딸 ∞ 조지아의 조지 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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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찬탈자 마니의 관리자 | 데메트리오스 | 조에 ∞ 제임스 2세 드 플로리 키프로스의 관직 | 안나 ∞ 블라디슬라브 헤르체고비치 헤르체고비나의 성 사바 공작 | 딸 |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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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 샬라 드 플로리 ∞ 유게 부자크 | 유도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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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 테오도르 스판두네스 역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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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세이타노글루 파나리오트-루마니아 분파 왈라키아 & 몰다비아의 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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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각주
참조
[1]
서적
Studies in Genealogy and Family History in Tribute to Charles Evans on the Occasion of His Eightieth Birthday
Salt Lake City, Utah :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Scholarship in Genealogy
[2]
간행물
Kazhdan (1991), p. 1103
[3]
간행물
Kazhdan (1991), p. 1103
[4]
간행물
Kazhdan (1991), p. 1103
[5]
간행물
Nicol (1968), 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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