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올로고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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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레올로고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은 제4차 십자군 이후 니케아 제국 등 후계 국가로 분열된 동로마 제국에서 1261년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며 시작되었다. 미하일 8세는 외교와 군사적 수단을 통해 제국을 방어하고 영토를 회복하려 했지만, 소아시아 방어 실패와 과도한 세금 부과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군대 감축과 화폐 가치 하락으로 국력을 약화시켰고, 내전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에게 영토를 빼앗겼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영토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쇠퇴하는 제국은 1341년 그의 죽음 이후 내전과 외세의 침략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는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위협과 내분으로 인해 통치 기반을 잃었고, 요안니스 5세는 오스만 제국에 신하가 되어야 했다. 마누일 2세는 오스만 제국의 포위 공격을 받았지만, 앙카라 전투 이후 일시적인 안정을 되찾았으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쇠퇴를 멈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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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올로고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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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호 | 그리스어: 그리스어 로마자 표기: Basileía Rhōmaíōn 라틴어: Imperium Romanum |
통칭 | 비잔티움 |
표어 | 그리스어: |
표어 로마자 표기 | Basileus Basileōn, Basileuōn Basileuontōn |
표어 (한국어 번역) | 왕 중의 왕, 왕들을 다스리는 자 |
수도 | 콘스탄티노폴리스 |
종교 | 그리스 정교회 (주로) 로마 가톨릭교회, 수니파 이슬람교 (소수) |
공용어 | 그리스어 (공식) 라틴어 아르메니아어 카탈루냐어 아로마니아어 고대 불가리아어 고대 아나톨리아 튀르크어 및 기타 남슬라브어 |
데모님 | 비잔티움 그리스인 |
정치 | |
정치 체제 | 절대 군주제 |
지도자 칭호 | 황제 |
주요 지도자 |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1261–1282)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1282–1328)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 (1295–1320)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1328–1341)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1341–1376)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1347–1354)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 (1376–1379) 요안니스 5세 (1379–1390)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 (1390) 요안니스 5세 (1390–1391)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1391–1425)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1425–1448)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1448–1453) |
역사 | |
성립 | 라틴족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정복 |
멸망 | 오스만 제국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
주요 사건 |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정복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1453년)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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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국가 | |
이후 국가 | |
인구 통계 | |
인구 (1281년) | 5,000,000명 |
2. 배경
제4차 십자군 이후 동로마 제국은 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공국, 트라페주스 제국과 같은 후계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제국의 나머지 영토는 프랑크족과 라틴족이 차지했으며, 이들은 명목상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황제의 지배를 받았다. 이러한 제국의 분열은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튀르크멘 토후국들에게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주었다.
초기에는 에페이로스 전제공국이 가장 강력한 후계 국가였으나, 결국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은 것은 니케아 제국이었다.[3] 니케아 제국은 라틴인과 셀주크 튀르크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 메안데르 계곡 전투에서 튀르크 군대를 격퇴했으며,[3] 이전의 니케아 공격에서는 셀주크 술탄이 전사하기도 했다. 서쪽의 라틴 제국은 아나톨리아로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고, 트라키아 지역에서 불가리아와 대립하며 힘을 소모하고 있었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의 왕위에는 당시 10세였던 요안니스 4세가 올랐다.[3]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공동 황제인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쥐고 있었다. 미하일 8세는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자 군 지휘관이었으며, 어린 황제의 섭정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강화하고 마침내 스스로 왕위에 올라 복원된 동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이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은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주목할 만한 부흥기를 맞이했다. 제국의 지식인들은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영광을 되찾으려 했고, 철학, 문학, 천문학, 역사 연구가 활발해졌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작품에 대한 주석 작업과 사본 제작이 번성했으며, 미술 분야에서는 이전의 평면적인 종교화에서 벗어나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새로운 화풍이 등장하여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의 걸작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문화적 부흥은 훗날 '팔레올로고스 왕조 르네상스'로 불리게 된다. 제국 멸망 전후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귀중한 사본들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망명했으며,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3.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1261-1282)
팔레올로고스 가문은 동로마 제국의 유력 귀족 가문으로, 니케아 제국 시대에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는 점차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그는 1259년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 라스카리스의 섭정이자 공동 황제가 되어 제국의 실권을 쥐었다.[3]
제4차 십자군 이후 분열된 제국의 여러 후계 국가 중 니케아 제국은 라틴 제국과 셀주크 왕조에 맞서며 제국의 명맥을 잇는 중심 역할을 했다.[3] 니케아 제국은 1246년까지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로니키 등 주요 지역을 확보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의 기반을 마련했다.[37]
1261년 7월, 니케아 제국의 장군 알렉시오스 스트라테고풀로스는 라틴 제국 군대의 부재를 틈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켰다.[37][3] 이 공적을 바탕으로 공동 황제였던 미하일 8세는 같은 해 12월, 정통 황제인 요안니스 4세를 실명시키고 유폐하여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37][3] 이로써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미하일 8세의 황제 찬탈은 아르세니오스 총대주교의 파문을 초래했으나, 미하일 8세는 그를 폐위시키고 요세프 1세를 임명하여 종교계의 반발을 억누르고 권력을 다졌다.[3] 미하일 8세의 통치(1261-1282)는 제국의 일시적인 부흥을 이끌었으나, 그의 정책들은 이후 제국이 겪게 될 여러 문제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3. 1.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제4차 십자군으로 세워진 라틴 제국 시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큰 피해를 입고 인구가 줄어들었다.[38][4]
니케아 제국에서 실권을 장악한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는 1259년 어린 황제 요한네스 4세 라스카리스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마침내 1261년 7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아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공적을 바탕으로 미카엘 8세는 단독 황제가 되어 요한네스 4세를 폐위시키고,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이자 가장 오래 지속된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은 미카엘 8세는 도시 재건에 힘썼다. 그는 많은 수도원과 공공건물을 복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39][5] 제4차 십자군에게 약탈당했던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그리스 정교회 전통에 따라 다시 단장되었다. 콘토스칼리온 항구와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서방 라틴인들의 새로운 공격에 대비하여 강화되었다.[39][5] 또한 병원, 숙박 시설, 시장, 목욕탕, 거리, 교회 등 많은 시설이 건설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개인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제4차 십자군 당시 불타버린 모스크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모스크가 건설되기도 했다.[5]
이러한 재건 사업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이는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 부담으로 돌아갔다.[39][40][6]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새로운 문화 및 외교 관계를 발전시켰는데, 특히 맘루크와의 관계가 중요했다. 동로마 제국과 맘루크 왕조는 라틴인 세력과 이후 오스만 튀르크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3. 2. 대외 정책
룸 술탄국은 1240년대 몽골의 침략 이후 혼란에 빠지며 약화되었다.[41]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에 대한 주된 위협은 이슬람 세력이 아닌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되었다. 특히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는 베네치아와 프랑크인들이 라틴 제국의 통치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다시 세우려 할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상황은 1266년 카를루 1세가 호엔슈타우펜가로부터 시칠리아를 정복하면서 더욱 심각해졌다.[42] 1267년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카를루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돕는 대가로 동방 영토를 얻는 조약을 마련했다.[42]
서방의 위협에 맞서 미하일 8세는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는 1274년 리옹 2차 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교회 연합을 성사시켜, 콘스탄티노폴리스 침공에 대한 교황의 지지를 일시적으로 막아냈다.[9] 그러나 이 연합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클레멘스 4세의 후임자인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연합을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 교회를 파문했으며, 다시 카를루 1세의 침공 계획을 지지했다.[43] 또한 교회 연합 시도는 제국 내부, 특히 정교회 성직자들과 신자들 사이에서 큰 반발을 샀고, 미하일 8세는 '배신자'로 비난받기도 했다.[9]
외교적 노력이 한계에 부딪히자 미하일 8세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그는 카를루 1세의 야심을 꺾기 위해 아라곤 연합왕국의 국왕 페로 3세가 시칠리아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이러한 노력은 1281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는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져 시칠리아에서 카를루 1세의 앙주 가문 통치가 무너지고 페로 3세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는 결과를 낳았다.[43] 이 사건으로 카를루 1세의 동로마 침공 계획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미하일 8세는 재위 기간 동안 그리스와 발칸 반도에서 라틴인 세력을 몰아내고 제국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에게해의 여러 섬을 되찾고 펠로폰네소스에 모레아 전제공국의 기반이 되는 거점을 마련하는 등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43] 그러나 이러한 서방 정책에 집중하느라 제국의 인력과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했고, 이는 동쪽의 소아시아 방면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바로 이 시기에 1263년경 쇠위트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오스만 1세의 베이국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부상하고 있었다.[43] 미하일 8세의 치세 동안 소아시아 국경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지만, 그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미래의 더 큰 위협을 방치한 셈이 되었다. 또한, 군사 원정과 각종 건설 사업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국고를 압박했고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 부담을 지웠다.[6] 이는 훗날 오스만 제국이 낮은 세금을 내세워 불만 있는 농민들을 포섭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미하일 8세 사후, 제국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시대에는 결국 오스만 제국에게 소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빼앗겼다. 유럽 쪽에서는 세르비아 왕국이 강성해져 제국 영토를 침범했고, 스테판 우로쉬 4세 두샨은 스스로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야욕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과정에서 제노바와 베네치아에게 부여한 무역 특권으로 인해 제국의 경제는 이들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 점차 종속되어 재정난이 심화되었다. 말기에는 황제의 관마저 빚의 담보로 잡힐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했다.
3. 3. 국내 정책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는 니케아 제국에서 권력을 장악하여, 1259년 어린 황제 요한네스 4세 라스카리스의 섭정이자 공동 황제가 되었다. 1261년 7월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켰고, 이 공적을 바탕으로 단독 황제가 되어 요한네스 4세를 폐위시키고 유폐했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미하일 8세는 제국 부활 이후 다양한 국내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그의 건설 계획과 제국 내 잔존 라틴인들에 대한 군사 작전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지만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다.[43][9] 군대는 코무네노스 군대를 모델로 했으나 이전만큼 효과적이지 못했고,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었는데,[40][6] 이는 훗날 오스만 제국이 더 낮은 세금을 약속하며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종교 정책에서도 내부적인 갈등이 심화되었다. 미하일 8세는 서방 가톨릭 국가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리옹 2차 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형식적인 통합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가톨릭의 침략을 막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교회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많은 이들이 미하일 8세를 정교회 신앙을 저버린 배신자로 비난했다.[43][9] 이러한 반감 때문에 1282년 그가 사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안도했으며, 로마 교회와의 통합 정책으로 인해 정교회식 장례조차 거부되었다.[43][9]
후세에 "가장 교활한 그리스인"으로 불릴 정도로 지략이 뛰어났던 미하일 8세는 외교와 계략을 통해 제국을 방어하려 했지만, 그의 정책은 장기적으로 제국의 약화를 초래한 측면이 있다. 특히 유럽 쪽 영토 회복에 집중하는 동안 제국의 중요한 기반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의 방어는 소홀해졌다. 결국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시대에 이르러 신흥 강국 오스만 제국에게 소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빼앗기게 된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과정에서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에 부여한 무역 특권은 제국의 경제를 이들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제국의 재정은 극도로 궁핍해져, 말기에는 황제의 관마저 빚의 담보로 잡힐 정도였다.
3. 4. 유산
미하일 8세는 매우 활력이 넘치고 야심만만한 능력을 갖춘 황제였다. 그는 니케아 제국에서 권력을 장악하여 1259년 어린 황제 요한네스 4세 라스카리스의 섭정이자 공동 황제가 되었고, 1261년 7월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성공적으로 부활시켰다. 이 공적을 바탕으로 스스로 정황제가 되어 요한네스 4세를 폐위시키고 유폐하며,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이자 가장 오래 지속된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열었다.
미하일 8세는 제국을 확장하고 동로마 제국을 다시 한번 이 지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후세에 "가장 교활한 그리스인"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지략가였던 그는, 제2 리옹 공의회에서의 교회 통합 시도나 시칠리아 만종 사건 개입 등 다양한 계략과 외교 전략을 구사하여 샤를 당주와 같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제국을 방어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여전히 규모가 작았고, 제국의 운영은 외교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의 야심 찬 외교 정책과 여러 권력자들에게 제공한 뇌물 및 선물을 충당하기 위해 거둬들인 과도한 세금은 제국의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
그가 제국을 일시적으로 부흥시킨 것은 사실이나, 그의 정책은 장기적인 불안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유럽 지역의 영토 회복에 집중하는 동안 소아시아의 방어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졌고, 이는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시대에 신흥 강국 오스만 제국에게 소아시아 영토 대부분을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 유럽에서는 세르비아 왕국이 발흥하여 제국을 위협했고, 스테판 우로쉬 4세 두샨은 스스로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노리기도 했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제노바와 베네치아에 부여한 무역 특권은 장기적으로 제국의 경제를 이들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심각한 재정난을 야기했다. 제국 말기에는 황제의 관마저 빚의 담보로 잡힐 정도로 재정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미하일 8세의 유산은 제국의 일시적인 부흥과 동시에 쇠퇴의 씨앗을 뿌린 양면성을 지닌 것이었다.
4.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1282-1328)
안드로니코스 2세는 미하일 8세의 아들로, 1282년 24세의 나이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4. 1. 대외 정책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서방과 동방의 문제에 동시에 직면했다. 서방에서는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 왕이 이끄는 세르비아인들이 1282년 발칸 반도를 침공하여 스코페를 점령했고[13], 1290년대 내내 마케도니아 지역을 계속 공격했다. 동로마 제국의 반격은 효과가 없었기에 안드로니코스 2세는 외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섯 살 된 딸 시모니스를 세르비아 왕과 결혼시키고, 오흐리드부터 슈티프, 스트루미차에 이르는 여러 요새를 '지참금' 명목으로 넘겨주었다.[13] 하지만 세르비아는 이후에도 영토 확장을 멈추지 않았다.동방에서는 아버지 미하일 8세와 달리 아나톨리아 반도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13], 여러 방법으로 튀르크족을 몰아내려 노력했다. 그의 첫 조치는 아나톨리아로 궁정을 옮겨 요새 건설을 더 잘 감독하고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것이었다.[14] 그의 장군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페노스는 유능한 지휘관으로, 메안데르 계곡에서 튀르크족을 상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그가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여 두 눈을 잃게 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유능한 장수를 잃었다.[14] 이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아들 미하일 9세와 헤타이레이아 대장군 게오르기우스 무잘론을 보내 니코메디아를 포위한 튀르크군을 공격하게 했으나, 1302년 바페우스 전투에서 패배했다.
포기하지 않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로제 데 플로르가 이끄는 6,500명 규모의 카탈루냐인 용병대(알모가바르)를 고용했다. 카탈루냐 출신의 이 용병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과의 전투 경험이 풍부했으며, 막대한 비용을 받고 아나톨리아에서 튀르크족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14] 그러나 용병대장 로제 데 플로르가 안드로니코스 2세를 만나러 가던 중 암살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제국에 반기를 들고 트라키아의 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아나톨리아는 튀르크족의 침략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다시 외교로 눈을 돌려 페르시아의 일 칸국에 튀르크족을 공격할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동맹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14]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는 황실 내부의 잦은 내란이 심각한 문제였다. 할아버지와 손자, 장인과 사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제위를 둘러싼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오스만 제국이나 세르비아 왕국, 북이탈리아 도시 세력들이 개입하여 제국은 안팎으로 혼란에 빠지며 쇠퇴를 거듭했다.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계속된 공격으로 제국의 영토는 계속 줄어들어, 14세기 중반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리스 일부 지역만을 유지하는 이름뿐인 소국으로 전락했다. 일부 지식인과 일반 민중은 제국의 몰락이 신의 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대에 제국은 결국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까지 전락했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군대에게 여러 차례 포위되었다. 제국 측도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와 그 아들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세스가 서유럽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동서 교회의 합동을 추진하며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등 자존심을 버린 외교 노력을 펼쳤지만 실질적인 원군은 얻지 못했다.
4. 2. 국내 정책

안드로니코스 2세는 정교회와 가톨릭교회의 통합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군대를 대규모로 감축하고, 그의 아버지 미하일 8세가 공들여 구축했던 해군을 사실상 해체했다.[13] 이 조치로 제국 전역의 세금 감면이 가능해져[13] 그의 인기는 높아졌으나, 외부 위협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대응 능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는 또한 ''히페르피론''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고,[13] pronoia|프로노이아영어 제도를 통해 군사적 의무를 지던 엘리트 계층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제국의 군사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러한 정책들은 미하일 8세가 남긴 일부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국력을 회복하려던 아버지의 노력을 무위로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미하일 8세가 제국 외부 문제 해결에 주력했던 반면, 안드로니코스 2세는 주로 제국 내부 문제에 집중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정책은 제국의 대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결국 제국 내부의 위협으로 인해 퇴위하게 되었다. 1320년, 그의 손자인 젊은 안드로니코스 3세는 황제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했다.[15] 이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형제 마누엘 팔레올로고스가 안드로니코스 3세 측근에 의해 우발적으로 살해되고, 이 충격으로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버지이자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인 미카일 9세가 사망한 사건 이후에 벌어졌다. 상속권 박탈에 반발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파격적인 감세 약속으로 지지 세력을 모아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15]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를 막을 힘이 부족했고, 결국 1321년 손자에게 트라키아를 분봉령으로 내주고 1322년에는 공동 황제로 인정해야 했다.[15] 이후 불가리아인과 세르비아인이 개입한 소규모 내전을 거쳐,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28년 퇴위하여 수도원에 들어갔고 1332년에 사망했다.[15]
내전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제국 부흥을 시도했다.[15] 비록 당시 소아시아는 튀르크족에게 넘어갈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과거 1091년의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동로마 제국이 영토를 회복했던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 동로마 제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황실 내부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제위 다툼과 내란이었다. 조부와 손자, 장인과 사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이러한 내부 분열 때마다 오스만 제국, 세르비아 왕국,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 등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서 제국은 안팎으로 혼란에 휩싸여 쇠퇴를 거듭했다. 계속된 영토 상실로 14세기 중반에는 제국의 영역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리스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이름뿐인 소국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지식인과 민중은 제국의 몰락을 신의 징벌로 여기기도 했다.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시대에 제국은 결국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했으며,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러 차례 오스만 군대에 포위되었다.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 그의 아들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11세 등 후기 황제들은 서유럽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동서 교회의 통합을 추진하며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등 필사적인 외교 노력을 펼쳤지만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1453년 5월 29일,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와의 약 2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고(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전사했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은 천년 이상, 고대 로마 제국부터 계산하면 2천년이 넘는 긴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제국 멸망 후에도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제들인 데메트리오스와 토마스 팔레올로고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모레아스 전제 공국을 거점으로 1460년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오스만 제국에 항복했다. 토마스는 이탈리아로 망명했고, 그의 딸 조에(소피아)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결혼하여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혈통을 러시아로 전했다. 일부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이탈리아와 영국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오스만 왕조의 메흐메트 2세는 스스로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를 자처하며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지배자의 종교가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바뀌고, 제도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으며, 지배 민족이 튀르크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지속적인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4. 3. 내전과 퇴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정책은 제국의 외부 문제 해결에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결국 그의 퇴위를 불러온 것은 제국 내부의 위협이었다. 1320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자신의 젊은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의 상속권을 박탈했다.[49][15] 이 결정은 안드로니코스 3세의 동생 마누엘이 연애 문제로 안드로니코스 3세 측근에게 살해당하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마저 사망한 비극적인 사건 직후 내려졌다.상속권을 빼앗긴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장 반대 세력을 조직했다. 그는 할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 2세가 시행했던 것보다 더 관대한 감세를 약속하며 지지 세력을 성공적으로 끌어모았다.[49][15] 안드로니코스 2세는 젊은 손자의 도전을 막을 힘이 부족했다. 결국 1321년 트라키아를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분봉령으로 넘겨주었고,[49][15] 1322년에는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49][15] 이후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각기 다른 편에 개입한 소규모 내전 끝에, 안드로니코스 2세는 퇴위하여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그는 1332년 수도원에서 사망했다.[49][15] 안드로니코스 2세의 정책 실패, 노령, 그리고 손자에 대한 불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강제 퇴위로 이어졌다.[15]
4. 4. 유산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아버지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보다 비잔티움의 내부 문제 해결에 더 집중하려 했으나, 그가 선택한 정책들은 오히려 국가의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49][15] 그의 외교 정책 실패까지 겹치면서 제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그의 실패와 노령, 그리고 손자와의 갈등 등으로 인해 강제로 퇴위당했다.[49][15]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 동로마 제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황실 내부에서 끊이지 않았던 제위 다툼과 내란이었다. 조부와 손자, 장인과 사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러한 분쟁에는 오스만 제국, 세르비아 왕국,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 등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서 제국은 안팎으로 혼란에 휩싸이며 쇠퇴를 거듭했다. 계속된 내우외환 속에서 제국의 영토는 계속 줄어들어, 14세기 중반에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리스 일부 지역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소국으로 전락하여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일부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서는 제국의 몰락이 신의 벌이라는 생각마저 퍼지게 되었다.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시대에 이르러 제국은 결국 오스만 제국의 속국 신세로 전락했으며,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러 차례 오스만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제국은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와 그의 아들들인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11세 등이 서유럽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며 동서 교회의 통합을 추진하고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등 필사적인 외교 노력을 펼쳤으나, 실질적인 군사 원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1453년 5월 29일,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와의 약 2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었고(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시가전 중에 전사했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은 1000년 이상, 고대 로마 제국부터 계산하면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의 막을 내렸다.
제국 멸망 이후에도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형제들인 데메트리오스와 토마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모레아스 전제 공국에서 1460년까지 저항을 이어갔으나, 결국 오스만 제국에 항복했다. 토마스는 이탈리아로 망명했으며, 그의 딸 조에(소피아)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결혼하여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혈통을 러시아로 이었다. 일부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이탈리아와 영국 등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스스로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를 자처하며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내세웠다. 그러나 지배자의 종교가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바뀌었고, 제국의 제도와 지배 민족(터키인) 또한 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실질적인 연속성을 갖기는 어려웠다.
5.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1328-1341)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는 1328년부터 1341년까지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여러 대내외적 도전에 직면했으며, 이는 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5. 1. 대외 정책
안드로니코스 3세의 통치는 동로마 제국의 운명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진정한 시도로 평가받는다. 그의 노력은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주변의 여러 적대 세력은 쇠퇴하는 제국에 결국 큰 타격을 입혔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아나톨리아 반도였다. 1261년까지 제국의 수도였던 니케아는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포위된 상태였다. 1329년 여름, 안드로니코스 3세는 니케아 구원을 시도했으나 6월 10일 펠레카논 전투에서 패배했고,[16][50] 결국 1331년 니케아는 함락되었다. 그는 니코메디아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남은 영토마저 잃지 않기 위해 오스만 튀르크에게 공물을 바치려 했으나, 오스만 튀르크는 1337년 니코메디아마저 점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에게해에서 몇 가지 성공을 거두었다. 1329년에는 키오스섬을 되찾았고,[16][50] 1335년에는 튀르크계 아미르인 아이딘의 우무르 베그와 재정적 지원을 포함한 동맹을 맺어, 라틴인들에게 빼앗겼던 레스보스섬과 포카이아를 회복할 수 있었다.[16][50]

유럽에서는 성과가 엇갈렸다. 1333년 테살리아를 제국 통치 하에 두었지만, 세르비아는 다시 남쪽으로 확장을 시작했다. 특히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한 시르기안네스 팔레올로고스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은 1334년 동로마 제국의 주요 요새 5개를 점령하고 새로운 국경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16][50] 이로 인해 안드로니코스 3세는 마케도니아에서 세르비아의 지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루소카스트론 전투에서는 이반 알렉산더르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외교를 통해 1341년 에페이로스를 다시 제국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16][50] 결과적으로 제국은 아나톨리아 영토를 상실하며 유럽 영토 위주로 축소되었지만,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롭게 확장된 영토는 스테판 두샨(1331년부터 세르비아 통치자)의 위협에 직면했다. 스테판 두샨은 이 땅들을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으려 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1341년)과 이어진 혼란은 제국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16][50]
안드로니코스 3세의 치세는 제국의 입지가 점점 위태로워지는 가운데 나타난 마지막 부흥기 중 하나였다. 그는 제노바인들을 상대로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에페이로스와 테살리아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등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 Ἰωάννης Καντακουζηνός|이오아니스 칸타쿠지노스el )와 같은 유능한 인물들과 협력했다. 그러나 펠레카논 전투에서의 패배,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 같은 적들에 대한 연이은 실패는 제국의 힘을 더욱 약화시켰다. 외교적 수단 역시 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점차 효용성을 잃어갔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제국에 결정타가 되었다. 그의 어린 아들 요안니스 5세를 둘러싼 섭정단 내부의 갈등은 결국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으로 이어졌고, 이는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의 황제 즉위와 함께 동로마 제국이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재앙을 초래했다.[17][16]
5. 2. 유산
안드로니코스 3세의 통치는 동로마 제국의 입지가 점점 위태로워지는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전성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제노바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벌였고, 에피로스와 테살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일부 회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안드로니코스 2세와의 내전 당시 자신을 지지했던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와 같은 유능한 행정가들과 협력하기도 했다.그러나 펠레카논 전투와 같은 주요 전투에서 세르비아 및 새롭게 부상하는 오스만 세력에게 패배하면서 제국의 힘은 더욱 소모되었다. 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약화되면서, 적대 세력들은 황제가 약속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고 외교적 영향력 또한 감소했다.[17]
제국이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가운데,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제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의 아홉 살 된 아들 요안니스 5세를 두고 왕조 내 경쟁으로 분열된 섭정단(사보이의 안나,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과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를 황제로 추대하려는 귀족 세력 사이에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51][17] 이 내전은 결국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가 요안니스 6세로 즉위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동로마 제국이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재앙을 초래했다.[50][16]
6.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의 흥망성쇠 (1341–1357)
1341년 동로마 제국은 새로운 쇠퇴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제국은 전쟁과 내전 외에도 여러 심각한 재앙으로 황폐화되었다.[52][18] 특히, 크게 줄어든 제국 영토에 페스트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1347년 첫 발병 이후 1360년대와 1420년대 사이에 8차례의 추가 발병이 기록될 정도로 제국을 괴롭혔다. 도시에서는 세금 제도를 악용하는 부패한 부유층과 정부의 과도한 요구에 시달리는 토지 없는 농민들 사이의 사회적 불안이 만연했다.[52][18]
과거 7~8세기에 제국을 괴롭혔던 종교 논쟁 역시 헤시카즘 논쟁[18]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났으며, 이는 결국 동방 정교회의 공식 교리가 되었다.[52][18] 또한, 잦은 지진은 제국의 기반 시설을 파괴했다. 대표적으로 1354년 지진으로 갈리폴리 요새가 무너지자,[52][18] 오스만 튀르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새를 점령하여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세르비아가 남쪽으로 계속 압력을 가해 에페이로스 지역에 대한 제국의 명목상 통치권마저 상실하게 만들었다. 계속된 내전과 이러한 재앙들로 인해 제국의 영토는 더욱 축소되었고, 내전이 끝날 무렵 동로마 제국은 사실상 작은 도시 국가로 전락하여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6. 1.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1341-1347)
요안니스 5세는 즉위 당시 9세(또는 10세[18])에 불과하여, 어머니 안나 황후,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로 구성된 섭정단의 보좌를 받았다.[52][18]그러나 야심가였던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도움을 받은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는, 칸타쿠지노스의 야심이 어린 황제 요안니스 5세의 통치를 위협한다고 안나 황후를 설득하며 내분을 조장했다. 1341년 9월, 칸타쿠지노스가 트라키아에 머무는 동안, 요안니스 14세는 스스로 섭정을 선언하고 칸타쿠지노스와 그의 지지자 및 가족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52][18] 같은 해 10월, 안나 황후는 칸타쿠지노스에게 모든 지휘권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53][19]
칸타쿠지노스는 이 명령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총대주교로부터 요안니스 5세의 통치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디디모티코에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52][18] 칸타쿠지노스가 실제로 황제가 되기를 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총대주교의 도발적인 행동은 결국 칸타쿠지노스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싸우도록 만들었고, 이는 파괴적인 내전으로 이어졌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국경을 방어할 병력조차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내전 중 양측은 외국 용병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칸타쿠지노스는 튀르크인과 세르비아인을 용병으로 고용했으며, 그의 주요 튀르크 용병 공급원은 안드로니코스 3세 시절 명목상의 동맹이었던 아이딘 베이국이었다. 요안니스 5세의 섭정단 역시 튀르크 용병을 활용했다. 결정적으로 칸타쿠지노스는 1345년 자신의 딸을 오스만 베이국의 술탄 오르한 가지와 결혼시키면서 강력한 지원을 확보했다.

1347년, 칸타쿠지노스는 마침내 승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그러나 그는 안나 황후와 당시 15세였던 요안니스 5세와 타협하여, 자신이 상급 황제(senior emperor)가 되고 요안니스 5세는 하급 황제(junior emperor)로서 공동 통치하는 방식으로 합의를 맺었다.[54][20] 하지만 이러한 불안정한 권력 공유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칸타쿠지노스에게는 아들 마태오스 칸타쿠지노스가 있었는데, 요안니스 5세와 마태오스가 성장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칸타쿠지노스는 자신의 딸을 요안니스 5세와 결혼시켜 사위로 삼음으로써[20] 두 가문을 묶으려 했지만, 이 조치 역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1353년, 칸타쿠지노스는 여전히 평화를 기대했지만, 요안니스 5세가 마태오스를 공격하면서 내전이 다시 불붙었다.[20] 이 과정에서 요안니스 5세는 폐위되어 에게해의 몇 안 되는 제국령 섬 중 하나인 테네도스로 추방되었고, 칸타쿠지노스는 아들 마태오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5세는 포기하지 않았다. 1354년, 그는 오스만 군대의 지원을 받아 트라키아로 진격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지지와 제노바의 도움으로 그해 11월 성공적인 쿠데타를 일으켰다. 결국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는 퇴위하여 수도원으로 은퇴했고, 1383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회고록을 집필하며 지냈다.[21]
아버지의 실각에도 불구하고 마태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 5세에게 계속 저항했다. 그는 매형인 오스만 술탄 오르한으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았으나, 1356년 여름 군사 작전을 시작하자마자 포로로 잡혔다. 결국 1357년 황제위 주장을 포기해야 했고, 이후 모레아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사망 시기는 1383년 또는 1391년으로 추정됨).[21] 이 길고 파괴적인 내전 끝에 요안니스 5세는 마침내 제국의 단독 통치자로 확고히 자리 잡았지만, 그 대가는 25년에 걸친 내분으로 제국의 모든 자원이 고갈되는 것이었다.
6. 2. 요안니스 6세의 통치와 몰락 (1347–1357)
1347년 내전 끝에 요안니스 6세는 요안니스 5세의 섭정이자 공동 황제로 즉위했지만, 두 황제의 불안정한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요안니스 6세에게는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요안니스 5세와 마테오스가 성장하면서 둘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요안니스 5세가 요안니스 6세의 딸 헬레네와 혼인하여[54] 사위가 되는 등 가문 간의 결속을 다지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외부적으로는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두샨이 제국의 서부 영토인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에페이로스를 점령하며 제국을 위협했다. 이에 요안니스 6세는 오스만 베이국과 다시 동맹을 맺어 세르비아의 추가 침공을 막고자 도움을 확보했다. 내부적으로는 테살로니카를 장악했던 열심당이 독자적으로 행동했으나, 1350년 요안니스 6세는 열심당 내부의 분열을 이용해 테살로니카를 다시 제국의 통치하에 두었다. 1351년, 요안니스 6세는 블라케르나이 궁전에서 열린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주재하여 논란이 많았던 헤시카스모스를 정통 교리로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1354년, 칼리폴리스(현재의 겔리볼루)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도시가 파괴되자, 기회를 틈탄 오스만 베이국 군대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오스만 세력의 유럽 진출 교두보가 마련되었다.
결국 1353년, 요안니스 5세가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의 영지인 트라키아를 공격하면서[54] 두 황제 사이의 내전이 다시 불붙었다. 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요안니스 5세는 권력에서 밀려나 제국에 얼마 남지 않은 에게해의 섬 중 하나인 테네도스 섬으로 유배되었다. 요안니스 6세는 자신의 아들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를 공동 황제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요안니스 5세는 포기하지 않았다. 1354년, 그는 오스만 군대의 지원을 받아 트라키아로 진군했다. 오스만 군대의 개입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불안에 휩싸였고, 같은 해 11월 요안니스 5세는 제노바 공화국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인 쿠데타를 일으켰다. 결국 요안니스 6세는 퇴위하여 수도원으로 은퇴했고, 그곳에서 회고록을 쓰며 지내다 1383년에 사망했다.[55]
아버지 요안니스 6세의 퇴위에도 불구하고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 5세에게 계속 저항했다. 그는 자신의 처남이기도 한 오스만 술탄 오르한 1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356년 여름에 체포되었다. 마테오스는 1357년에 황제 주장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고, 이후 모레아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55] 25세의 나이에 요안니스 5세는 마침내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지만, 오랜 내전과 외세의 개입은 이미 제국의 국력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소진시킨 뒤였다.[21]
6. 3. 튀르크인 이민자
동로마 제국의 내전으로 황폐화되고 인구가 감소된 땅은 정복과 무역이 혼합된 방식으로 이주해 온 튀르크인들로 채워졌다.[55] 그러나 이는 동로마 제국의 힘을 회복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과거 아나톨리아, 그리스, 마케도니아 및 키프로스, 크레타와 같은 주요 섬들에 걸쳐 있던 제국의 영향력은 이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 등 몇몇 도시와 모레아 전제공국 등 일부 지역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튀르크인들의 이주는 제국의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유럽 지역에 새로운 세력 기반을 마련한 오스만 튀르크라는 강력한 적대 세력의 등장을 야기했기 때문이다.1341년, 요안니스 5세가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사보이의 안나,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그리고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 총대주교로 구성된 섭정단이 꾸려졌다.[18] 그러나 야심가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도움을 받은 칼레카스 총대주교는 칸타쿠제노스가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황후 안나를 설득하며 내전을 촉발했다. 1341년 9월, 칸타쿠제노스가 트라키아에 머무는 동안 칼레카스는 스스로 섭정을 선언하고 칸타쿠제노스와 그의 지지자 및 가족들을 공격했다.[18] 10월에는 황후 안나가 칸타쿠제노스에게 지휘권을 포기하라고 명령했지만[19], 칸타쿠제노스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디디모티코에서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며 요안니스 5세의 통치를 칼레카스로부터 보호하겠다고 나섰다. 칸타쿠제노스의 본심이 황제 즉위에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총대주교의 도발적인 행동은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고, 결국 비잔티움 내전 (1341년-1347년)이 시작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국경을 방어할 병력조차 부족했기에, 내전의 양측은 모두 외국인 용병에 의존해야 했다. 칸타쿠제노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 시절 명목상의 동맹이었던 아이딘의 베이를 비롯한 튀르크인과 세르비아인 용병을 고용했다. 요안니스 5세의 섭정단 역시 튀르크 용병을 활용했다. 특히 칸타쿠제노스는 1345년 자신의 딸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오르한과 결혼시키면서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지원을 확보했다. 1347년, 칸타쿠제노스는 마침내 승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지만, 황후 안나 및 당시 15세였던 요안니스 5세와 타협하여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이 합의에서 요안니스 5세는 칸타쿠제노스보다 하위의 지위에 놓였다.[20] 그러나 이 불안정한 공동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요안니스 5세는 이제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에 가하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1360년대에 들어 튀르크족은 트라키아를 계속해서 진격하며 비잔티움, 불가리아, 세르비아 정착지를 점령했다.
7.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1354-1391)
요안니스 5세는 오스만 튀르크인들이 동로마 제국에 가하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1360년대 오스만 튀르크인들은 트라키아를 통해 계속해서 진입하며 동로마, 세르비아, 불가리아인들의 정착촌을 점령해 나갔다.
오스만 제국의 압박이 거세지자, 요안니스 5세는 전임 황제들처럼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서방 세계, 특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2]
하지만 다른 유럽과의 관계는 도움이 되었다. 그의 사촌인 사보이의 아마데우스 6세는 1366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갈리폴리 요새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에 넘겨주었다. 이는 오스만 튀르크인들의 트라키아 진출을 잠시나마 저지하려는 시도였다.[22] 그럼에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1369년 오스만 제국이 아드리아노플(일부 자료는 1365년으로 기록)[22]을 점령하자, 요안니스 5세는 직접 로마로 가서 교황을 만나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며 지원을 호소했다.[22]
그러나 1371년, 요안니스 5세는 별다른 소득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야 했고, 발칸 반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7. 1. 서방 세계에 간청
전임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나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처럼, 요안니스 5세 역시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교황에게 접근했다. 그는 두 교회의 통합을 약속하며 도움을 청했고, 약속 이행의 담보로 아들인 마누일 2세를 내놓았다. 과거 동로마 제국이 서방에 지원을 요청했을 때, 때로는 약탈을 일삼는 십자군 때문에 피해를 보기도 했지만, 제1차 십자군처럼 큰 이득을 얻은 경우도 있었다. 요안니스 5세는 이러한 성공적인 십자군 원정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로마 제국이 처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56]한편, 1371년 세르비아는 군대를 모아 트라키아에서 오스만 투르크족을 몰아내려 했으나, 마리차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에 압도적으로 패배하며 군대가 전멸했다.[22] 이 전투의 결과로 살아남은 많은 세르비아 영주들은 오스만 술탄 무라드 1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요안니스 5세는 패배한 세르비아로부터 세레스를 빼앗은 뒤 무라드 1세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22][23]
7. 2.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된 요안니스 5세
1371년, 세르비아 군대는 트라키아에서 오스만 제국 군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준비했으나, 오스만 군은 마리차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했다.[56] 이 전투의 결과로 많은 발칸 반도의 영주들이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 역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패배한 세르비아로부터 세레스를 빼앗은 후, 황제 요안니스 5세는 결국 무라트 1세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56][57]요안니스 5세의 통치는 순탄치 않았으며, 결국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1세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설상가상으로 1373년, 그의 장남이자 제위 계승자였던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23] 흥미롭게도 이 반란은 무라트 1세의 아들 사브치 베이가 일으킨 반란과 같은 시기에 일어났으며,[23] 두 아들은 각자의 아버지에 대항하여 권력을 잡으려 했다. 이에 요안니스 5세와 무라트 1세는 협력하여 아들들의 반란을 진압했다.[23] 요안니스 5세는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와 손자 요안니스 7세의 눈을 일부 멀게 하는 형벌을 내렸고, 무라트 1세는 자신의 아들 사브치를 처형했다.[24] 이후 요안니스 5세의 둘째 아들인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가 공동 황제이자 새로운 제위 계승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4세와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제노바와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그들은 요안니스 5세를 몰아내고 그와 마누일 2세를 투옥하는 데 성공했다.[24] 권력을 잡은 안드로니코스 4세는 오스만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전략적 요충지인 갈리폴리 요새를 오스만 제국에 넘겨주었다. 이는 이전에 아메데오 6세 디 사보이아가 동로마 제국을 지원하며 탈환했던 성과를 무위로 돌리는 행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 역시 감옥에서 탈출하여 오스만 술탄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24] 결국 안드로니코스 4세는 다시 패배했고, 체포를 피해 가족 및 인질들과 함께 갈라타의 제노바인 거주 구역으로 도피했다. 제위와 안정을 되찾는 데 급급했던 요안니스 5세는 1381년, 안드로니코스 4세와 조약을 맺어 그를 다시 제위 계승자로 인정하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 역시 계승 서열에 포함시켰다.[24] 이로 인해 마누일 2세는 다시 한번 계승권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공동 황제 자리에서 밀려난 마누일 2세는 배신감을 느끼고 1382년 테살로니카로 가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테살리아와 에피루스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하며 명목상으로나마 제국의 영토를 넓히려 했으나, 이는 오스만 술탄의 주의를 끌었다.[24] 무라트 1세는 1383년 테살로니카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 포위는 1387년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안드로니코스 4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는 할아버지 요안니스 5세와 다시 제위 계승 문제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1387년 테살로니카가 결국 오스만 군에 함락되자,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마누일 2세는 아버지 요안니스 5세에게 돌아가 술탄의 승인 하에 화해를 시도했다.[25] 하지만 요안니스 5세는 둘째 아들 마누일을 받아들이면 손자 요안니스 7세가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마누일을 렘노스 섬으로 유배 보냈다.[25] 결국 요안니스 7세는 할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마누일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요안니스 5세와 화해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요안니스 7세는 제노바로 가서 새로운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요안니스 5세를 몰아내려 했다.
요안니스 7세의 반란은 초기에 성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지만,[25] 마누일 2세는 제국의 남은 영토와 군사력을 모아 요안니스 7세에 맞섰다. 마누일은 또한 로도스에 근거지를 둔 성 요한 기사단에게 귀중한 종교 유물을 "기증"하는 대가로 지원을 받았다.[25] 요안니스 7세는 1408년 사망할 때까지 동로마 황제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는 마누일 2세를 아버지 요안니스 5세와 함께 동로마의 공동 황제로 인정했으며, 마침내 1391년 요안니스 5세가 사망하자 마누일 2세를 유일한 황제로 인정했다.[26]
8. 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1373-1394)
요안니스 5세의 통치는 순탄치 않았으며, 결국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1세의 신하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어려움은 1373년, 그의 장남이자 제위 계승자였던 안드로니코스 4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57] 흥미롭게도 이 반란은 무라드 1세의 아들 사비 셀레비의 반란과 동시에 일어나, 두 사람은 각자의 아버지에 대항하여 협력했다.[57]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두 통치자는 아들들의 반란에 맞서 협력했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57] 요안니스 5세는 안드로니코스 4세와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의 눈을 부분적으로 멀게 하는 형벌을 내렸고, 무라드 1세는 아들 사비 셀레비를 처형했다.[58] 이후 요안니스 5세의 차남인 마누일 2세가 공동 황제이자 새로운 제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4세와 요안니스 7세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제노바와 튀르크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요안니스 5세를 몰아내고 그와 마누일 2세를 투옥했다.[58] 이 과정에서 안드로니코스 4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 대가로 사부아의 아마데오가 확보했던 갈리폴리 요새를 오스만 제국에게 넘겨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 역시 탈출하여, 오스만 술탄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지원을 받아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다.[58]
안드로니코스 4세는 체포를 피해 가족 및 인질들과 함께 제노바인들의 거점인 갈라타로 피신했다. 제위 유지와 안정에만 몰두했던 요안니스 5세는 1381년 안드로니코스 4세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안드로니코스 4세와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를 다시 후계자로 인정하고, 마누일 2세를 후계자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58]
자신이 공동 황제에서 강등된 것에 배신감을 느낀 마누일 2세는 1382년 테살로니키로 가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테살리아와 에피루스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며 명목상이나마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고, 이는 오스만 술탄 무라드 1세의 주의를 끌었다.[58] 무라드 1세는 1383년부터 테살로니키에 대한 포위를 시작하여 1387년까지 지속했다. 그 사이 안드로니코스 4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는 할아버지 요안니스 5세와 다시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1387년 테살로니키가 오스만 군에 항복하면서 입지가 불안해진 마누일 2세는 요안니스 5세에게 돌아와 술탄의 동의 하에 화해를 시도했다.[59] 그러나 요안니스 5세는 둘째 아들을 받아들이면 이번에는 손자 요안니스 7세가 반발할 것을 우려하여 마누일 2세를 림노스섬으로 추방했다.[59] 결국 요안니스 7세는 할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마누일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아버지와 화해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안니스 7세는 제노바로 가서 새로운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의 지원을 얻어 요안니스 5세를 타도하고자 했다.
요안니스 7세의 반란은 초기에 성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지만,[59] 마누일 2세는 제국의 남은 영토와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그는 로도스섬에 주둔하던 구호기사단에게 귀금속으로 만든 종교 유물을 기증하며 지원을 확보했다.[59] 요안니스 7세는 1408년 사망할 때까지 동로마 황제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술탄 바예지드 1세는 마누일 2세를 아버지 요안니스 5세와 함께 공동 황제로 인정했고, 마침내 1391년 요안니스 5세가 사망하자 마누일 2세를 단독 황제로 인정했다.[60]
이처럼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기에는 황실 내부에서 조부와 손자, 부자, 장인과 사위 등 가까운 친족 사이에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내분에 오스만 제국, 세르비아 왕국,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 등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서 제국은 안팎으로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고 쇠퇴를 거듭했다. 거듭된 내전과 외침으로 제국의 영토는 계속 줄어들어, 14세기 중반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 등 극히 일부 지역만을 유지하는 소국으로 전락했다.
9.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1391-1420)
마누일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일부 영토를 되찾는 데 성공하며 말년까지 제위를 유지했다. 이러한 성과는 주로 동방에서 몽골 세력이 다시 부상하고, 마누일 2세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1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덕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아들 요안니스 8세 대에 이르러 이러한 성과 대부분이 물거품이 되었다.
마누일 2세가 즉위했을 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와의 관계였다. 특히 바예지드 1세가 마누일 2세의 조카이자 경쟁자였던 요안니스 7세를 총애하면서 마누일 2세의 입지는 더욱 불안정해졌다.[26] 마누일 2세가 요안니스 7세와 화해를 시도하자 바예지드 1세는 격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내 모스크 추가 건설과 튀르크인 정착촌 건설 등을 요구하며 압박했다.[26] 이러한 초기 갈등은 이후 오스만 제국과의 긴장 관계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로 이어지게 된다.
9. 1. 1394년까지의 군신관계
마누일 2세의 최우선 과제는 바예지드 1세와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요안니스 7세가 바예지드 1세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마누일 2세는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결국 협정을 맺었으나, 오스만 제국 술탄 바예지드 1세는 마누일 2세가 자신의 조카인 요안니스 7세와 화해하려는 시도에 격분했다.[60][26] 마누일 2세는 요안니스 7세가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외교를 통해 위협을 종식시키려 했다. 바예지드 1세는 처음에는 마누일 2세의 처형을 명령했지만, 곧 분노를 가라앉히고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스크를 추가로 건설하고 튀르크인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요구했다.[60][26]그러나 마누일 2세는 술탄에게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고 술탄의 요구에 응답조차 하지 않는 대담한 행보를 보였다. 이에 분노한 바예지드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 시작했다.[26] 1394년에 시작된 포위 공격은 8년 동안 이어졌다. 마누일 2세는 도시가 미온적인 봉쇄는 견딜 수 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방어할 군사력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기에는 서방 세계의 대규모 반격인 니코폴리스 십자군이 예정되어 있어 상황이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28] 그러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는 군대를 강행군시켜 예상치 못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십자군 병력이 목숨을 잃었고, 바예지드는 이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전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게 되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마누일 2세는 과거 자신의 적대자였던 요안니스 7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를 맡기고 서방 세계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399년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그는 베네치아, 파도바, 밀라노, 파리, 런던을 방문했고, 런던에서는 영국의 헨리 4세 국왕을 만나 환대를 받으며[28] 마상 시합에 초대받기도 했다. 그러나 마누일 2세는 서방 기독교 세계로부터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동로마 제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아나톨리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바예지드 1세는 여러 투르크멘 부족을 오스만 제국의 통제하에 두려 시도했는데, 이는 아나톨리아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여기던 티무르 제국의 군주 티무르를 자극했다. 결국 티무르는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29] 이 패배 소식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인들 사이에 큰 혼란을 일으켰고, 그들은 베네치아와 제노바 선박의 도움을 받아 유럽으로 필사적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30]
한편, 아직 유럽에 머물고 있던 마누일 2세는 1403년, 오스만 제국의 포위에서 벗어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가 없는 동안 수도를 지키던 요안니스 7세는 충성을 지키며 마누일 2세에게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또한, 티무르와의 전쟁으로 약화되고 오스만 제국 공위 시대에 접어들어 내부 분열을 겪던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왕자는 동로마 제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테살로니카를 반환하는 등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였다.[30]
9. 2. 반란과 동로마 제국의 부활 (1394-1402)
마누일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에게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고 술탄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이에 분노한 바예지드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기로 결정했다.[60] 1394년에 시작된 포위 공격은 8년 동안 지속되었다. 마누일 2세는 도시의 방어 능력만으로는 포위를 견딜 수 없으며, 성벽을 지킬 병력 또한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기에는 서방 세계의 대규모 반격인 니코폴리스 십자군 원정이 계획되어 희망이 보였다.[62] 그러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은 큰 희생을 치르며 패배했고, 바예지드 1세는 이제 모든 군사력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상황이 절박해지자, 마누일 2세는 서방의 지원을 얻기 위해 직접 나섰다. 그는 한때 자신의 제위를 노렸던 조카 요안니스 7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를 맡기고, 1399년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베네치아, 파도바, 밀라노, 파리, 런던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하며 도움을 요청했고,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4세로부터 환대를 받으며[62] 마상창시합 관람 등의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누일 2세는 서방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한편, 마누일 2세는 바예지드 1세와의 관계를 관리해야 했다. 그는 조카 요안니스 7세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을 우려하여 외교적으로 위협을 해소하고자 했으나, 바예지드는 마누일 2세가 요안니스 7세와 화해하려는 시도에 격분했다.[26] 바예지드는 마누일 2세의 처형을 명령하기도 했지만, 결국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 모스크와 튀르크인 거주지를 건설할 것을 요구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26]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꾼 것은 예상치 못한 동방의 세력이었다.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제국을 이끌던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하여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의 오스만 군대를 격파했다. 이 패배 소식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인들 사이에 큰 혼란을 일으켰고, 그들은 동로마 제국이 제공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앙카라 전투에서의 오스만 제국의 패배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1403년, 유럽에서 돌아온 마누일 2세는 오스만 제국의 포위가 풀린 수도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가 없는 동안 수도를 지킨 요안니스 7세는 마누일 2세에게 충성을 보이며 도시를 반환했고, 심지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테살로니키를 되찾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예상치 못한 승리로 동로마 제국은 상당한 이득을 얻었다. 요안니스 7세는 오스만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난 주변 기독교 세력들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 과거와 같은 내분을 방지하고자 했다. 또한, 바예지드 1세의 아들 중 하나인 쉴레이만 첼레비와 조약을 맺어 동로마 제국이 더 이상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확인받았다. 제국은 아토스 산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바르나에 이르는 흑해 연안 영토를 회복했으며, 여러 에게해 제도에 대한 영향력도 되찾았다. 이는 훗날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피해 피난처를 찾는 이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바예지드 1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분열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오스만 제국 섭정 시대)을 벌였다. 동로마 제국은 이 과정에서 현명하게 처신하여 최종 승자인 메흐메트 1세를 지지했고, 메흐메트 1세는 술탄이 된 후 동로마 제국의 호의를 기억하여 제국 영토에 대한 추가적인 침략을 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은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고 숨을 돌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9. 3. 오스만 제국의 공위시대 (1402-1413)
앙카라 전투(1402년)에서 오스만 제국이 티무르 제국에 패배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 직전에 놓였던 상황을 고려할 때, 이 패배로 얻은 이득은 매우 컸다.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요안니스 7세는 동로마 제국을 위해 여러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주변 기독교 국가들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 과거 안드로니코스 3세 시대 후반의 혼란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둘째로, 바예지드 1세의 아들이자 아나톨리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쉴레이만 첼레비와 조약을 맺어,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확인받았다. 또한, 제국은 아토스산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바르나에 이르는 흑해 연안 지역, 그리고 여러 에게해 제도에 대한 권리를 확보했다. 특히 에게해 제도의 확보는 훗날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피해 피난처를 찾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에서는 바예지드 1세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분열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곧바로 내전에 돌입했다. 이 오스만 공위시대는 1402년부터 1413년까지 이어졌으며, 최종적으로 메흐메드 1세가 승리자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 과정에서 메흐메드 1세를 지지하는 현명한 외교적 선택을 했다. 메흐메드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이러한 호의를 기억하여, 술탄이 된 후에도 자신의 신하들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어느 정도 통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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