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아 전제공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모레아 전제공국은 1349년에서 1460년까지 존재했던 동로마 제국의 자치 공국으로, 현재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했다. 1262년 동로마 제국이 아카이아 공국으로부터 요새를 회복한 것을 기원으로 하며, 황족이 전제공 칭호를 가지고 통치하는 형태를 취했다. 14세기 후반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마누일 칸타쿠지노스에 의해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며,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통치하에 미스트라스를 중심으로 문화적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내부 분열과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1460년 멸망했다.
"모레아스 전제공령"이라는 명칭은 당시의 공식 명칭이 아닌, 후대의 연구자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당시의 공식적인 행정 구분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 (Πελοπόννησος|펠로폰네소스el) 혹은 "펠롭스의 반도" (Πελόπος νήσος|펠로포스 니소스el)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섬", "반도"라는 지리적인 개념이 후기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대로 행정 구획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제4차 십자군(1204년) 이후 프랑크의 아카이아 공국으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기반으로 모레아 전제공국이 건국되었다.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아카이아 공국의 통치자 윌리엄 2세 빌르아르두앵이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에게 패배하면서 모레아 동부 대부분과 요새를 넘겨주었고, 이 영토가 모레아 전제공국의 핵심이 되었다.
모레아 전제공국의 역대 군주(데스포티스, Δεσπότης) 목록은 다음과 같다.
2. 명칭
"모레아스" (Μορέας, Μωρέας|모레아스, 모레아스el)라는 말은 13세기 이후, 반도의 형상이 "뽕나무 잎" (Μορέα, Μωρέα|모레아, 모레아el)과 닮은 데서 유래한 그리스 구어 표현이다. 십자군과 함께 온 서유럽인들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이 단어의 대격형 "모레아"를 주격으로 잘못 듣고, 자기 언어로 채택하여 "모레아" (Morea)로 만들었다. 서유럽 문헌 및 이를 채택한 일본어 문헌에서 이 명칭이 많이 사용되는 것은 이러한 경위 때문이다. 이것은 "미스트라스" (Μυζηθράς, Μυστράς|미지트라스, 미스트라스el)와 "미스트라" (Mistra)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부터 이어져 온 펠로폰네소스라는 말도 그대로 행정 용어로 남아, 두 개의 명칭이 병행하여 사용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소위 "전제공령" (Δεσποτάτο|데스포타토el)이라고 불리는 행정 기구의 기본적인 특징으로는 전제공 (δεσπότης|데스포티스el) 칭호를 가진 황족(황제의 동생, 어린 아들)이 행정·군사·사법의 전권을 가지고 통치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위인 전제공 칭호는 종신 보유 자격이며, 전권 행정관으로서의 전제공의 임기도 기본적으로 종신이지만 세습은 아니다.
3. 역사
1349년,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는 이 영토를 재편하여 아들 데스포테스 마누엘 칸타쿠제노스에게 분봉령으로 수여했다. 마누엘은 라틴 이웃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이 지역의 번영을 이끌었다. 1360년대에는 무라드 1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그리스-라틴 동맹이 맺어지기도 했다. 1380년 마누엘이 사망한 후,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모레아를 점령했고,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가 1383년에 데스포테스가 되었다. 그는 1407년까지 통치하며 비잔틴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맺어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또한 알바니아인들을 정착시켜 지역 경제를 부흥시키려 했고, 이들은 아르바나이트 공동체로 발전했으며, 일부는 15세기에 나폴리 왕국으로 이주하여 아르베레시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후 데스포테스는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들인 테오도로스 2세, 콘스탄티노스, 데메트리오스, 토마스였다. 15세기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라틴 세력이 약화되면서, 모레아 전제공국은 1430년에 결혼 지참금 협정과 콘스탄티노스의 파트라스 정복을 통해 반도 전체를 통합했다. 그러나 1446년 오스만 술탄 무라드 2세는 코린토스 지협의 헥사밀리온 성벽을 파괴했다.[1] 그의 공격으로 반도는 침략에 노출되었지만, 무라드는 이를 이용하기도 전에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시켰다.
마지막 황제의 형제인 데스포테스 데메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와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모레아가 최근 오스만 공격에서 회복 중이었기에 그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통치는 인기가 없었고, 그 결과 1453-1454년 모레아 반란이 일어나 그들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 군대를 초청했다. 이때, 영향력 있는 그리스 ''아르콘'' 다수가 메흐메트와 평화를 맺었다.[2] 데스포테스들의 무능한 통치가 수년 동안 이어지고 술탄에게 연례 조공을 지불하지 못했으며, 결국 오스만 지배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자, 메흐메트는 1460년 5월 모레아로 진격했다. 데메트리오스는 결국 오스만의 포로가 되었고, 그의 동생 토마스는 도망쳤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오스만은 그리스인들이 소유한 거의 모든 도시를 복속시켰다.
몇몇 거점은 한동안 저항했다. 모넴바시아는 항복을 거부했고, 잠시 동안 카탈루냐 해적의 지배를 받았다. 주민들이 그를 몰아낸 후, 그들은 1460년 말까지 교황의 보호를 받기로 토마스의 동의를 얻었다. 마니 반도는 지역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 아래 저항했고, 그 지역은 이후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다. 마지막 거점은 모레아 북서부에 위치한 살메니코였다. 그라이차스 팔레올로고스가 그곳의 군사 사령관이었으며, 살메니코 성 (일명 오르기아 성)에 주둔했다. 살메니코는 결국 항복했지만, 그라이차스와 그의 수비대, 일부 주민들은 1461년 7월까지 성에서 버티다가 탈출하여 베네치아 영토에 도달했다. 이것으로 비잔틴 제국은 종말을 맞이했다.[3][4][5][6][7]
1461년 이후, 오스만이 소유하지 않은 유일한 영토는 베네치아가 소유한 모돈과 모레아 남단의 코로니, 아르고스가 있는 아르골리스, 그리고 나플리온 항구였다. 모넴바시아는 이후 1463-1479년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이 시작될 때 베네치아에 스스로 항복했다.
3. 1. 전제공국 성립 이전
"모레아 전제공국"이라는 명칭은 당시의 공식 명칭이 아닌, 후대의 연구자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당시의 공식적인 행정 구분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 (Πελοπόννησοςel) 혹은 "펠롭스의 반도" (Πελόπος νήσοςel) 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섬" 또는 "반도"라는 지리적인 개념이 후기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대로 행정 구획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모레아스" (Μορέας, Μωρέας el/ Moreas) 라는 말은 13세기 이후, 반도의 형상이 "뽕나무 잎" (모레아, Μορέα, Μωρέαel)과 닮은 데서 유래한 그리스 구어 표현이다. 십자군과 함께 온 서유럽인들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이 단어의 대격형 "모레아"를 주격으로 잘못 듣고, 자기 언어로 채택하여 "모레아" (Morea)로 만들었다. 서유럽 문헌 및 이를 채택한 일본어 문헌에서 이 명칭이 많이 사용되는 것은 이러한 경위 때문이다. 이것은 "미스트라스" (Μυζηθράς, Μυστράςel / Mystras)와 "미스트라" (Mistra)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고대부터 이어져 온 펠로폰네소스라는 말도 그대로 행정 용어로 남아, 두 개의 명칭이 병행하여 사용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소위 "전제공령" (Δεσποτάτοel)이라고 불리는 행정 기구의 기본적인 특징으로는 전제공 (δεσπότηςel) 칭호를 가진 황족 (황제의 동생, 어린 아들)이 행정·군사·사법의 전권을 가지고 통치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제공 칭호는 종신 보유 자격이며, 전권 행정관으로서의 전제공의 임기도 기본적으로 종신이지만 세습은 아니다.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395년)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일부가 된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6세기에 슬라브족의 침입을 받아 그 대부분을 점령당했다. 코린토스, 스파르타인이 이주한 모넴바시아 등, 겨우 반도 동부의 연안 지대만이 그리스계 주민의 손에 남았고, 테마·엘라스(7세기 말 창설)에 편입되어 동로마 지배 재건의 거점이 되었다. 슬라브족의 정복과 동화는 10세기에는 거의 완료되어 반도는 테마·엘라스에서 분할되어 테마·펠로폰네소스라는 독립 행정 구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이게토스 산맥에 거주하는 멜링족, 반도 남부에 거주하는 에제레트족 등, 일부 슬라브 부족은 동화되지 않고 존속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제국의 중앙 권력의 통제가 그리 강하게 미치지 못했고, 대토지 소유자가 큰 세력을 가졌다. 제국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한 12세기 후반에 아르고스를 거점으로 부상한 레온 스그로스와 같은 반독립적인 군주도 이러한 유력자 출신으로 보인다.
제4차 십자군(1204년)의 결과, 동로마 제국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어 그 구 영토에는 라틴 제국이 건설되었다. 각지는 십자군 기사가 사전 협정에 따라 각각 영지로 받게 되었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프랑스·부르고뉴의 기사 기욤 1세 드 샴리트와 샹파뉴의 기사 조프로와 1세 드 빌아르두앙에게 주어졌다. 그들은 아카이아 공국을 건국하고(1205년), 스그로스 등 현지 유력자의 저항을 배제하고 반도를 정복해 나갔다.
3. 2. 전제공국의 성립
제4차 십자군 이후 프랑크의 아카이아 공국에서 빼앗은 영토를 바탕으로 모레아 전제공국이 건국되었다. 1259년, 윌리엄 2세 빌르아르두앵은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에게 패배하여 모레아 동부 대부분과 요새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 영토가 모레아 전제공국의 핵심이 되었다.
1349년,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는 이 영토를 재편하여 아들 데스포테스 마누엘 칸타쿠제노스에게 분봉령으로 수여하면서 모레아 전제공국이 성립되었다. 마누엘은 라틴 이웃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지역 번영을 이끌었고, 1360년대에는 무라드 1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그리스-라틴 동맹이 맺어지기도 했다.
3. 3. 모레아 전제공국의 발전
모레아 전제공국은 제4차 십자군(1204년) 이후 프랑크의 아카이아 공국에서 빼앗은 영토를 기반으로 건국되었다.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아카이아 공국의 통치자 윌리엄 2세 빌르아르두앵이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에게 패배하면서, 모레아 동부 대부분과 요새를 넘겨주었고 이 영토가 모레아 전제공국의 핵심이 되었다.
1349년,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는 이 영토를 재편하여 아들 데스포테스 마누엘 칸타쿠제노스에게 분봉령으로 수여했다. 마누엘은 라틴 이웃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이 지역의 번영을 이끌었다. 1360년대에는 무라드 1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그리스-라틴 동맹이 맺어지기도 했다.
1383년에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가 데스포테스가 되어 1407년까지 통치하며 비잔틴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한편, 알바니아인들을 정착시켜 지역 경제를 부흥시키려 했다. 이들은 아르바나이트 공동체로 발전했으며, 일부는 15세기에 나폴리 왕국으로 이주하여 아르베레시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후 데스포테스는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들인 테오도로스 2세, 콘스탄티노스, 데메트리오스, 토마스였다. 15세기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라틴 세력이 약화되면서, 모레아 전제공국은 1430년에 결혼 지참금 협정과 콘스탄티노스의 파트라스 정복을 통해 반도 전체를 통합했다.
그러나 1446년 오스만 술탄 무라드 2세는 코린토스 지협의 헥사밀리온 성벽을 파괴했다.[1] 그의 공격으로 반도는 침략에 노출되었지만, 무라드는 이를 이용하기도 전에 사망했다.
3. 3. 1. 안정기
기욤 2세 드 빌아르두앵 (재위 1246년 - 1278년)은 1248년 모넴바시아 시를 정복하고 1249년 미스트라스를 축성하면서 아카이아 공국의 최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펠라고니아 전투 (1259년)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에게 미스트라스, 모넴바시아, "대 마니 성", 게라키를 할양하고 석방되었다(1262년). 이 지역들은 훗날 모레아스 전제공령의 기반이 되었다.[1]
펠로폰네소스 반도에는 황제가 임명한 "케팔리"라는 군정관이 파견되어 행정과 군 지휘를 담당했다. 행정부는 처음에는 모넴바시아에 있다가 이후 미스트라스로 이동했다. 케팔리는 처음에는 1년 임기였으나 1308년경부터 불규칙적인 임기로 바뀌었고, 팔레올로고스 가문 출신 유력자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영토 확대에 따라 "국지 수장"(메리키 케팔리)이 하부 조직으로 창설되었고, 기존의 군정관은 "전역 수장"(카솔리키 케팔리)으로 구분되었다.[2]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황제 (1347년 - 1354년)는 제국의 지방 행정직을 친족으로 채우는 정책을 펼쳤다. 1349년 차남 마누일 칸타쿠제노스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파견하여 모레아스 전제공령이 성립되었다. 마누일은 황폐해진 반도에 질서를 확립하고 제국의 지배를 재건했으며, 미스트라스를 도시로 발전시켰다. 그는 미스트라스에 궁전을 건설하고 성당 건립을 지원했으며, 인구 증가에 대응하여 성벽을 신설하고 시역을 확장했다.[3]
마누일 사후, 형 마테오스가 잠시 전제공직을 대행했다. 마테오스의 아들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황제 (1341년 - 1391년)가 파견한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에게 반발하여 무력으로 대항했으나(1383년 - 1384년) 곧 사망했고, 테오도로스가 전제공으로 취임했다. 이후 모레아스 전제공은 팔레올로고스 가문 출신으로 채워졌다.[4]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는 내정을 정비하고 알바니아인을 이주시켜 국력을 강화했다. 그는 토착 유력자 세력과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직면했으며, 1394년과 1397년 두 차례 침공을 받았다.[5]
앙카라 전투 (1402년) 이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안정기를 맞이했다.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1391년 - 1425년)는 차남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를 전제공으로 파견하고, 1415년 코린토스 지협에 헥사밀리온 성채를 건설하는 등 전제공령의 내정을 정비했다.[6]
3. 3. 2. 통치 체제의 변화
1428년 테오도로스 2세가 은퇴하여 수도원에 들어감에 따라, 모레아 전제공국은 한 명의 전제공이 아닌 여러 명의 전제공이 함께 다스리는 공동 통치 체제로 바뀌었다. 이때 통치자로 임명된 콘스탄티노스(훗날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모레아 전제공국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공동 통치자로 함께 임명된 막내 동생 토마스와 협력하여 아카이아 공국 등 라틴 세력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고, 1429년에는 파트라를 점령하고, 이듬해 1430년에는 아카이아 공국 전체를 합병했다. 이로써 곳곳에 흩어져 있던 베네치아인들의 거점을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체가 동로마·그리스인의 손으로 돌아왔고, 이는 "중세 헬레니즘"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3. 3. 콘스탄티노스 11세의 통치
1428년 테오도로스 2세가 은퇴하고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모레아 전제공국은 여러 명의 전제공이 함께 다스리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때 전제공이 된 콘스탄티노스(훗날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모레아 전제공국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함께 통치하게 된 막내 동생 토마스와 협력하여 아카이아 공국 등 라틴 세력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고, 1429년에는 파트라를 점령하고, 1430년에는 아카이아 공국 전체를 합병했다. 이로써 베네치아인들의 거점을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체가 동로마·그리스인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중세 헬레니즘"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1443년, 콘스탄티노스는 형 테오도로스 2세의 뒤를 이어 미스트라스의 전제공이 되었고, 동로마 제국 부흥을 위해 더욱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는 북쪽에서 결성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연합인 바르나 십자군과 함께 그리스 본토 침공 작전을 시작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던 아테네 공국을 복속시키고 아티카 지방을 지배하에 두었으며, 테살리아 남부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북쪽의 십자군이 바르나 전투(1444년)에서 크게 패배하면서 이 원정 계획은 중단되었고, 전제공군은 반도로 돌아왔다. 1446년 11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2세(1421년 - 1451년)는 아테네 공국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펠로폰네소스를 침공하여 헥사밀리온을 파괴하고 반도 북부를 유린했다. 콘스탄티노스는 평화를 맺고 오스만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 원정 계획은 반도 전체를 통일하고 전제공국의 절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동로마 제국과 모레아 전제공국이 가진 힘의 한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3. 4. 멸망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동로마 제국의 유일한 잔존 영토는 모레아 전제공국이었으나, 내부 분열과 오스만 제국 등 외부 세력의 간섭으로 어려움을 겪었다.[2]
1453년 가을, 알바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458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침공했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데메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내전이 벌어졌다.
메흐메트 2세는 이러한 상황을 틈타 1460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7년 후 미스트라스를 점령했다.[2] 데메트리오스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었고, 토마스는 코르푸 섬을 거쳐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그해 여름까지 모넴바시아 등을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거의 전 지역이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면서 모레아 전제공국은 멸망했다.[2]
일부 그리스인들은 마니 등 산악 지대로 피신하거나,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에 합류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2]
4. 역대 군주
이름 재위 기간 비고 Μανουήλ Καντακουζηνός|마누일 칸타쿠지노스el 1349년 - 1380년 Ματθαίος Καντακουζηνός|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el 1380년 - 1383년 통치 직무 대행 Δημήτριος Α Καντακουζηνός|디미트리오스 1세 칸타쿠지노스el 1383년 존엄공, 대립 통치자 Θεόδωρος Α Παλαιολόγος|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el 1382년 - 1407년 Θεόδωρος Β Παλαιολόγος|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el 1407년 - 1443년 1428년까지 단독 통치, 이후 공동 통치 Κωνσταντίνος Παλαιολόγος|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el 1428년 - 1448년 공동 통치자, 1443년부터 미스트라스에서 통치 Θωμάς Παλαιολόγος|토마스 팔레올로고스el 1428년 - 1460년 공동 통치자, 1430년 전제공 취임, 1448년까지 글라렌차에서, 1449년부터 파트라에서 통치 Δημήτριος Β Παλαιολόγος|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el 1449년 - 1460년 공동 통치자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의 아들로 테살로니키를 통치한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재위 1327년 - 1328년경)를 "전제공 디미트리오스 1세"로 보는 견해도 있다.
4. 1. 에피트로포스 (Επίτροπος)
이름 | 재위 기간 |
---|---|
미하일 칸타쿠지노스 | 1308년 - 1316년 |
안드로니코스 아센 | 1316년 - 1322년 |
4. 2. 데스포티스 (Δεσπότης)
모레아 전제공국의 데스포티스(Δεσπότης) 목록은 다음과 같다.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Μανουήλ Καντακουζηνός|마누일 칸타쿠지노스el | 1349년 - 1380년 | |
Ματθαίος Καντακουζηνός|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el | 1380년 - 1383년 | 통치 직무 대행 |
Δημήτριος Α Καντακουζηνός|디미트리오스 1세 칸타쿠지노스el | 1383년 | 존엄공, 대립 통치자 |
Θεόδωρος Α Παλαιολόγος|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el | 1382년 - 1407년 | |
Θεόδωρος Β Παλαιολόγος|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el | 1407년 - 1443년 | 1428년까지 단독 통치, 이후 공동 통치 |
Κωνσταντίνος Παλαιολόγος|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el | 1428년 - 1448년 | 공동 통치자, 1443년부터 미스트라스에서 통치, 비잔티움 제국의 최후 황제 (재위: 1449년 - 1453년) |
Θωμάς Παλαιολόγος|토마스 팔레올로고스el | 1428년 - 1460년 | 공동 통치자, 1430년 전제공 취임, 1448년까지 글라렌차에서, 1449년부터 파트라에서 통치 |
Δημήτριος Β Παλαιολόγος|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el | 1449년 - 1460년 | 공동 통치자 |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의 아들로 테살로니키를 통치한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재위 1327년 - 1328년경)를 "전제공 디미트리오스 1세"로 보는 견해도 있다.
4. 2. 1. 칸타쿠지노스 가문 (1349년 ~ 1383년)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황제의 아들인 마누엘 칸타쿠제노스가 1349년부터 1380년까지 재위했다. 1380년부터 1383년까지는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황제의 또 다른 아들인 마태오 칸타쿠제노스가 재위했다. 1383년에는 마태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 칸타쿠제노스가 재위했다.이름 | 재위 | 관계 |
---|---|---|
마누엘 칸타쿠제노스 | 1349년–1380년 |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 황제의 아들 |
마태오 칸타쿠제노스 | 1380년–1383년 |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황제의 아들 |
데메트리오스 1세 칸타쿠제노스 | 1383년 | 마태오의 아들 |
4. 2. 2. 팔레올로고스 가문 (1383년 ~ 1460년)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그의 아들 마누엘 칸타쿠지노스에게 모레아를 분봉령으로 수여한 후, 경쟁 관계였던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1380년 마누엘의 사후 모레아를 점령했다.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가 1383년에 모레아의 데스포테스(Despotes, 궁정 작위)가 되었다.[2] 테오도로스 1세는 1407년까지 통치하며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공고히 했고, 확장하는 오스만 제국과 관계를 맺어 종주권을 인정했다.[2] 그는 또한 지역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알바니아인들을 정착시켰다.[2]이후 테오도로스 1세의 형제인 황제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들인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데메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가 데스포테스가 되었다.
15세기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라틴 세력이 약화되면서 모레아 전제공국은 영토를 확장했다.[2] 그러나 1446년 오스만 술탄 무라드 2세는 코린토스 지협의 헥사밀리온 성벽을 파괴하여 반도가 침략에 노출되었다.[2] 그의 후계자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켰다.[2] 데스포테스 데메트리오스와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오스만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1460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모레아는 정복되었다.[2]
다음은 팔레올로고스 가문 출신 모레아 전제공들의 목록이다.
이름 | 재위 기간 | 관계 |
---|---|---|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 | 1383년 ~ 1407년 | 황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 |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 | 1407년 ~ 1443년 | 황제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 1428년 ~ 1449년 | 황제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 1449년부터 1453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 1428년 ~ 1460년 | 황제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 |
데메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 1449년 ~ 1460년 | 황제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의 아들 |
4. 3. 명의 군주
-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Θωμάς Παλαιολόγος|토마스 팔레올로고스el, 재위: 1460년 - 1465년)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이자 비잔티움 망명황제.
-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 (재위: 1465년 - 1502년) 토마스 팔라이올로고스의 아들이자 비잔티움 망명황제.
참조
[1]
서적
Faiths Across Time: 5,000 Years of Religious History [4 Volumes]: 5,000 Years of Religious History
ABC-CLIO
[2]
웹사이트
Contemporary Copy of the Letter of Mehmet II to the Greek Archons 26 December 1454 (ASV Documenti Turchi B.1/11)
http://angiolello.ne[...]
2013-07-27
[3]
웹사이트
Monemvasia.com website
http://www.monemvasi[...]
[4]
웹사이트
The Greek Travel website
http://www.thegreekt[...]
[5]
웹사이트
Katsoulakos.Com website
http://katsoulakos.c[...]
2016-11-23
[6]
웹사이트
Apodimos.com website
http://www.apodimos.[...]
2013-09-11
[7]
간행물
Monemvasia
https://archive.org/[...]
1907
[8]
간행물
Despots, Emperors, and Balkan Identity in Exile
20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