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칼리아스 2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칼리아스 2세는 아테네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외교관, 군사 지도자, 그리고 정치가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칼리아스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종식시켰으며, 델로스 동맹과 아테네의 외교 활동에 기여했다.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말년에 대한 정보는 단편적으로 전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테나이의 군인 - 칼리마코스 (문관)
    칼리마코스는 마라톤 전투 당시 아테네 군대의 폴레마르코스이자 10명의 장군 중 한 명으로, 밀티아데스의 설득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아테네군의 우익을 지휘하며 페르시아 군 포위에 기여했으나 전사하여 그의 용맹함을 기리는 조각상과 벽화가 세워졌다.
  • 아테나이의 외교관 - 니키아스
    니키아스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자선 활동을 했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스파르타와 평화를 협상했으나 시칠리아 원정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 아테나이의 외교관 - 데모스테네스
    데모스테네스는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웅변가로, 필리포스 2세의 팽창에 맞서 아테네의 독립을 옹호했으며 강력한 설득력과 애국심으로 시민들을 고취시킨 인물이다.
  • 마라톤 전투 - 아이스킬로스
    아이슈킬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로서, 페르시아 전쟁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과 비극 형식의 혁신을 통해 그리스 비극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신과 인간의 관계, 정의와 복수 등을 탐구하며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 마라톤 전투 - 밀티아데스
    밀티아데스는 기원전 6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 아테나이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트라키아 헤르소네소스의 참주였으나 아테네로 귀환하여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지만 파로스 섬 공략 실패 후 민중 기만죄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칼리아스 2세
지도
기본 정보
이름칼리아스
아버지칼리아데스
직업외교관
군인
출생아테네
사망기원전 406년 경
가문
가문칼리아스 가문
주요 활동
페르시아와의 강화기원전 449년 경 페르시아 전쟁 종결을 위한 강화 협상
강화 조건페르시아의 에게해에서의 철수 및 아테네의 키프로스 포기
군사 활동
전투 참여포티다이아 전투 참전
정치적 역할
정치적 입장친 과두정파

2. 생애

칼리아스는 칼리아데스의 아들로 아테나이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11] 그의 가문은 국가 소유의 라우리온 은광산에 노예를 제공하는 일을 하였고, 그 자신도 아테나이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11][2] 칼리아스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사제 의상을 입고 싸웠다.[3] 플루타르코스는 전쟁 후에 적병이 칼리아스를 왕으로 착각해 금이 시궁창 어디에 숨겨져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칼리아스는 그 병사를 죽이고, 몰래 금을 취하였지만, 그 사건에 대해 소문이 돌았고, 이후 희극 시인들은 그의 가문에 ‘라코폴리티’(시궁창으로 부유해진)이라는 명칭을 주었다고 한다.[11] 그의 아들 히포니쿠스는 군 사령관이 되었다.[7] 밀티아데스가 죽을 무렵, 칼리아스는 키몬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빚을 갚는 대가로 키몬의 누이 엘피니케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고, 키몬은 이에 동의했다.

이 시기 유능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의 후원자로서, 칼리아스는 외교관과 아테나이 특사와 델로스 동맹의 임무를 맡았다.[11][2] 기원전 461년경, 그는 특사로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적어도 한 차례 이상의 임무를 맡았다.[11][2]

기원전 449년경, 키몬이 죽은 직후[11][12], 칼리아스는 수사로 가서 〈칼리아스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종식되었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11] 칼리아스는 레기온과 레온티노이와 평화 조약을 협상하는 책임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446년/445년에는 스파르타와 〈30년 평화 조약〉을 맺는 데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13]

기원전 432년, 포티다이아가 아테나이에 반란을 일으키자 코린토스에 정벌군 파견에 즈음하여 칼리아스는 다른 4명의 장군과 함께 중장보병 2,000명을 이끌고 할키디키반도로 파견되었다.[14] 그들은 피드나를 포위 중인 아르케스트라토스 등이 이끄는 선행 부대와 합류했다. 이들은 이어 베로이아, 스토레프사를 공격한 것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포티다이아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당시 반(反)아테나이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마케도니아의 페르디카스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과 합류해 기고노스로 향했다.

칼리아스 등은 마케도니아인 부대를 오륜토스로 파견하고, 본대는 적(포티다이아, 코린토스 연합군)을 따라 포티다이아로 향했다. 이곳에서 아테나이 군과 포티다이아와 코린토스 연합군과 교전을 벌였다.(포티다이아 전투)[15] 아테나이 군은 포티다이아, 코린토스 연합군에 패배를 당했고, 칼리아스도 전사했다.[16]

아테네로 돌아온 칼리아스의 운명은 불확실하며, 그의 말년에 대한 정보는 단편적이다. 데모스테네스에 따르면, 그는 50탈렌트(무게)의 벌금을 부과받았다.[6] 다른 자료에 따르면[4] 아테네인들은 평화의 제단을 헌납하고 칼리아스에게 특별한 영예를 부여하기로 투표했다.

2. 1. 가문과 초기 활동

칼리아스는 칼리아데스의 아들로 아테나이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11] 그의 가문은 국가 소유의 라우리온 은광산에 노예를 제공하는 일을 하였고, 그 자신도 아테나이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11][2] 칼리아스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사제 의상을 입고 싸웠다.[3] 플루타르코스는 전쟁 후에 적병이 칼리아스를 왕으로 착각해 금이 시궁창 어디에 숨겨져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칼리아스는 그 병사를 죽이고, 몰래 금을 취하였지만, 그 사건에 대해 소문이 돌았고, 이후 희극 시인들은 그의 가문에 ‘라코폴리티’(시궁창으로 부유해진)이라는 명칭을 주었다고 한다.[11] 그의 아들 히포니쿠스는 군 사령관이 되었다.[7] 밀티아데스가 죽을 무렵, 칼리아스는 키몬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빚을 갚는 대가로 키몬의 누이 엘피니케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고, 키몬은 이에 동의했다.

이 시기 유능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의 후원자로서, 칼리아스는 외교관과 아테나이 특사와 델로스 동맹의 임무를 맡았다.[11][2] 기원전 461년경, 그는 특사로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적어도 한 차례 이상의 임무를 맡았다.[11][2]

2. 2. 외교 활동과 평화 조약 체결

칼리아스는 칼리아데스의 아들로 아테나이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국가 소유의 라우리온 은광산에 노예를 제공하는 일을 하였고, 아테나이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11] 그는 페리클레스의 후원자로서 외교관과 아테나이 특사, 델로스 동맹의 임무를 맡았다.[11]

기원전 461년경, 칼리아스는 특사로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파견되었다.[11] 기원전 449년경, 키몬이 죽은 직후[11][12], 칼리아스는 수사로 가서 〈칼리아스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종식되었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11] 칼리아스는 레기온과 레온티노이와 평화 조약을 협상하는 책임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446년/445년에는 스파르타와 〈30년 평화 조약〉을 맺는 데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13]

2. 3. 포티다이아 전투와 죽음

칼리아스는 칼리아데스의 아들로 아테나이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국가 소유의 라우리온 은광산에 노예를 제공하는 일을 하였고, 그 자신도 아테나이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11] 칼리아스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사제 의상을 입고 싸웠다.[3] 플루타르코스는 전쟁 후에 적병이 칼리아스를 왕으로 착각해 금이 시궁창 어디에 숨겨져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칼리아스는 그 병사를 죽이고, 몰래 금을 취하였지만, 그 사건에 대해 소문이 돌았고, 이후 희극 시인들은 그의 가문에 ‘라코폴리티’(시궁창으로 부유해진)이라는 명칭을 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 유능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의 후원자로서, 칼리아스는 외교관과 아테나이 특사와 델로스 동맹의 임무를 맡았다.[11] 기원전 461년경, 그는 특사로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적어도 한 차례 이상의 임무를 맡았다.[11] 기원전 449년경, 키몬이 죽은 지 얼마 뒤[11][12],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칼리아스 평화조약〉이라고 불린 평화조약을 마무리 짓기 위해 수사로 갔다. 이 조약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끝냄과 동시에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의 공격으로부터 안전망을 얻은 것이었다.[11] 칼리아스는 또한 레기온과 레온티노이와 평화조약을 협상하는 책임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기원전 446년 /445년) 스파르타와 맺은 〈30년 평화 조약〉으로 알려진 조약의 협상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13]

기원전 432년, 포티다이아가 아테나이에 반란을 일으키자 코린토스에 정벌군 파견에 즈음하여 칼리아스는 다른 4명의 장군과 함께 중장보병 2,000명을 이끌고 할키디키반도로 파견되었다.[14] 그들은 피드나를 포위 중인 아르케스트라토스 등이 이끄는 선행 부대와 합류했다. 이들은 이어 베로이아, 스토레프사를 공격한 것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포티다이아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당시 반(反)아테나이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마케도니아의 페르디카스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과 합류해 기고노스로 향했다.

칼리아스 등은 마케도니아인 부대를 오륜토스로 파견하고, 본대는 적(포티다이아, 코린토스 연합군)을 따라 포티다이아로 향했다. 이곳에서 아테나이 군과 포티다이아와 코린토스 연합군과 교전을 벌였다.(포티다이아 전투)[15] 아테나이 군은 포티다이아, 코린토스 연합군에 패배를 당했고, 칼리아스도 전사했다.[16]

2. 4. 귀환 후 행적과 논란

칼리아스는 아테네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족은 라우리온의 국영 은광에 노예를 제공했다.[2] 그는 사제복을 입고 마라톤 전투(490)에 참전했다.[3] 플루타르코스는 전투 후 한 적군 병사가 칼리아스를 왕으로 착각하여 많은 양의 금이 숨겨진 곳을 알려주었고, 칼리아스는 그를 죽이고 보물을 챙겼다고 전한다. 이 소문으로 희극 시인들은 그의 가족에게 ''라코플루티''라는 별명을 붙였다.

밀티아데스 사후, 칼리아스는 키몬의 누이 엘피니케와 결혼했다. 페리클레스의 지지자였던 칼리아스는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의 외교관이자 대사 역할을 수행했으며,[2] 기원전 461년경 페르시아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다.[2]

키몬이 죽은 후, 기원전 449년경,[2][4] 칼리아스는 수사로 가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칼리아스의 평화 조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 이 조약으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종식되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폴리스들이 페르시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다.[2] 칼리아스는 레기온과 레온티노이와의 평화 조약, 스파르타와 체결한 30년 평화 조약 체결에도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5]

아테네로 돌아온 칼리아스의 운명은 불확실하며, 그의 말년에 대한 정보는 단편적이다. 데모스테네스에 따르면, 그는 50탈렌트(무게)의 벌금을 부과받았다.[6] 다른 자료에 따르면[4] 아테네인들은 평화의 제단을 헌납하고 칼리아스에게 특별한 영예를 부여하기로 투표했다. 그의 아들 히포니쿠스는 저명한 군사 지도자로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알려졌다.[7]

3. 평가

참조

[1] 서적 Eupolis: Poet of Old Comedy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Encyclopedia of the Ancient Greek World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3] 문서 Callias and Hipponicus
[4] 서적 Ancient Greece: Social and Historical Documents from Archaic Times to the Death of Alexander the Great Taylor & Francis
[5] 서적 The Athenian Tribute Lists 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 at Athens
[6] encyclopedia Brill's New Pauly
[7] 서적 The People of Plato, p. 172-3
[8] 문서 トゥキュディデス, I. 61
[9] 문서 トゥキュディデス, I. 62
[10] 문서 トゥキュディデス, I. 63; ディオドロス, XII. 37
[11] 서적 Encyclopedia of the Ancient Greek World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12] 서적 Ancient Greece: Social and Historical Documents from Archaic Times to the Death of Alexander the Great Taylor & Francis
[13] 서적 The Athenian Tribute Lists American School of Classical Studies at Athens
[14] 문서 투키디데스, I. 61
[15] 문서 투키디데스, I. 62
[16] 문서 ibid, I. 63; 디오도로스, XII 3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