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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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키아스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아 자선 활동과 종교 행사에 기여했다. 그는 페리클레스 사후 귀족파의 지도자가 되어 민중파의 클레온과 대립했지만, 신중함과 온건한 성품으로 민중에게서도 호의를 얻었다. 니키아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스파르타와 평화를 협상하여 일시적으로 전쟁을 종식시켰으나, 알키비아데스와의 갈등으로 시칠리아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시라쿠사 포위전에서 패배한 후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으며,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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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아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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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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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니키아스 니케라투 키단티데스 |
로마자 표기 | Nikias Nikēratou Kydantidēs |
출생 | 기원전 470년경 |
출생지 | 아테네, 그리스 |
사망 | 기원전 413년경 (56-57세) |
사망지 | 시라쿠사, 시칠리아 |
소속 | 아테네 |
계급 | 스트라테고스 |
업적 | |
주요 업적 | 니키아스 평화 조약 |
전투 | |
참전 전투 |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칠리아 원정 |
2. 초기 생애와 배경
니키아스는 아테네의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니케라토스로부터 라우리온의 은광을 포함한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크세노폰은 니키아스가 광산에서 1,000명이 넘는 노예를 고용했다고 기록했다.[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니키아스는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데 힘써 아테네에서 자선 활동에 돈을 쓰고 많은 종교 축제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아테나 여신상과 디오니소스 신전 건립 비용을 지불하기도 했다.[2]
2. 1. 정치적 부상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정부의 수장이었던 시기에 니키아스는 정치적으로 부상하였다.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후, 니키아스는 귀족(보수)파의 지도자로 여겨지면서 중요한 아테네 정치인이 되었다. 따라서 니키아스는 클레온의 민중파 또는 민주당의 정적이 되었다.[3]후대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니키아스는 그의 부를 이용하여 인기를 얻었다.[4] 그는 아테네 희곡, 스포츠 행사, 공공 전시회, 그리고 새롭거나 복원된 조각상과 사원을 위한 합창단에 자금을 지원하고 조직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특히 니키아스의 관대함의 한 예로 델로스 축제에 대한 그의 자금 지원을 언급한다. 니키아스는 델로스와 르네아 섬 사이에 배로 만든 다리를 건설하는 데 자금을 지원했다. 배들은 화환과 도금, 그리고 값비싼 직물로 장식되었다. 그런 다음 화려하게 차려입은 그리스 합창단이 배 위를 걸어갔다. 니키아스는 델로스 사람들에게 이 행사를 미래에도 계속할 수 있도록 1만 드라크마의 기금을 제공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이러한 내용은 기둥에 새겨졌다.[3]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아테네를 대표하는 시민 중 한 명으로 꼽았다.[14] 니키아스는 온건한 정견을 가졌으며, 클레온의 호전적인 정책에 반대하고, 아테네에 유리한 조건으로 스파르타와의 평화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5]
2. 2. 델로스 축제 후원
플루타르코스는 니키아스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예시로 델로스 축제 후원을 언급했다. 니키아스는 델로스와 르네아 섬 사이에 배로 만든 다리를 건설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배와 합창단을 통해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또한, 델로스 사람들에게 기금을 제공하고 자신의 이름을 새긴 기둥을 세워 축제의 지속적인 개최를 지원했다.3. 군사 활동
니키아스는 기원전 427년과 425년에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되었다. 그는 신중한 지휘관으로 평가받았으며, 플루타르코스는 "니키아스는 모든 어렵고 장기적인 작전을 거절했다. 그가 지휘권을 맡으면 안전한 일을 하려고 했다"고 기록했다.[3] 그는 전장에서 공정한 전투원으로 인정받았으며, 다른 병사만큼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3]
기원전 421년 초, 아테네에서 평화 협상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니키아스는 그 제창자 중 가장 적극적이었다.[15] 이 평화 조약은 그해 3월경 발효되어 「니키아스의 평화」라고 불린다.
기원전 416년,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을 계획했고, 니키아스는 알키비아데스, 라마쿠스와 함께 사령관으로 출발했지만, 애초부터 작전에 반대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 상륙 전에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라마쿠스도 시라쿠사 포위 중 전사했다. 스파르타는 시라쿠사 구원을 위해 장군 기리포스를 파견했고, 아테네도 데모스테네스(장군)와 에우뤼메돈이 이끄는 증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아테네군은 스파르타·코린토스·시라쿠사 연합군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고 에우뤼메돈은 전사했으며,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항복하여 기리포스에게 몸을 의탁했다. 포로 7000명과 함께 시라쿠사 근교의 채석장으로 보내졌고, 기리포스의 명령에 반하여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처형되었다.[19]
3. 1. 초기 군사 작전
니키아스는 기원전 427년 레스보스섬의 반란을 진압한 후 해군을 이끌고 미노아섬을 공략했다.[16] 기원전 426년에는 밀로스섬에 출격하여 타나그라 전투(기원전 426년)에서 승리했다.[17] 기원전 425년에는 퓔로스 지방에서 스파르타군의 공세 때 클레온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으나, 같은 해 9월 아테네군의 반격에 참가하여 코린토스 영토를 공격했다.[18] 기원전 424년에는 키테라섬 공략에 참여했다.[18]3. 2. 스파르타와의 휴전 (기원전 423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측 모두 10년 동안 쇠진해 있었다.아테네 장군 라케스는 니키아스의 지지를 받아 기원전 423년 아테네 의회에서 스파르타의 유능한 장군 브라시다스의 진격을 막기 위해 스파르타와의 휴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16][17][18] 그러나 "라케스의 휴전"은 브라시다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고 1년 만에 무너졌다.[14][15] 브라시다스는 스파르타 포로들을 해방시키려는 희망으로 스키오네와 멘데를 점령하려 아테네로 진격했다. 이에 아테네는 니키아스의 지휘 아래 증원군을 파견하여 멘데를 탈환했다.[19]
4. 니키아스의 평화 (기원전 421년)
기원전 423년, 아테네 장군 라케스는 니키아스의 지지 하에 아테네 의회에서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의 진격을 막기 위해 스파르타와의 휴전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라케스의 휴전'은 1년 만에 무너졌다. 브라시다스는 스키오네와 멘데를 점령했고, 아테네는 니키아스의 지휘 아래 증원군을 파견해 멘데를 탈환했다.
클레온이 암피폴리스를 구출하기로 결정하면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휴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브라시다스와 클레온이 모두 전사하면서 양측의 주전파 핵심 인물들이 제거되었다.
이후 니키아스와 스파르타 왕 플레이스토아낙스는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의 평화를 협상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시적으로 종식시켰다.
4. 1. 평화 조약의 내용
니키아스의 평화는 전쟁 이전 상황으로 복귀하는 것을 본질로 하였다. 대부분의 전시 획득물은 반환되어야 했다. 특히 암피폴리스는 아테네로 반환되어야 했고, 아테네는 스파크테리아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석방해야 했다. 그리스 전역의 사원은 모든 도시의 신자들에게 개방될 것이며, 델포이 신탁은 자치권을 회복할 것이었다. 아테네는 아리스티데스 시대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속국들로부터 공물을 계속 거둘 수 있었지만, 아테네는 그들을 강제로 동맹국으로 만들 수 없었다. 아테네는 또한 헬롯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스파르타를 돕기로 동의했다. 스파르타의 모든 동맹국이 평화 조약에 서명하는 데 동의했지만, 보이오티아, 코린토스, 엘리스, 메가라는 제외되었다.5.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29년에 사망한 후, 니키아스는 귀족(보수)파의 지지를 받으며 아테네의 주요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는 클레온이 이끄는 민중 또는 민주당의 라이벌이었다.[3]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니키아스는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아테네 희곡, 스포츠 행사, 공공 전시회 등에 자금을 지원하며 인기를 얻었다.[4] 특히 델로스 축제에 대한 그의 자금 지원은 화환과 도금으로 장식된 배로 만든 다리를 건설하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그리스 합창단을 행진하게 하는 등 매우 화려했다. 니키아스는 델로스 사람들에게 1만 드라크마를 기부하고, 이 행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했다.[3]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서 더욱 영향력 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평화에 반대하며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에 대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르고스를 설득하여 동맹을 맺게 했다.[3]
5. 1. 알키비아데스의 책략
알키비아데스는 니키아스 평화 조약 체결 후 공격적인 아테네의 행동을 옹호하며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역사가 아놀드 W. 고메와 라파엘 쉴리, 그리고 투키디데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인들이 니키아스와 라케스를 통해 조약을 협상하고 자신의 젊음을 이유로 그를 무시한 것에 불쾌감을 느꼈다고 기록했다.[5][6][7]조약 해석에 대한 분쟁으로 인해 스파르타인들은 모든 미해결 문제를 처리할 완전한 권한을 가진 사절들을 아테네로 파견했다. 아테네인들은 처음에 이 사절들을 잘 받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이 에클레시아(아테네 의회)에 연설하기 전에 비밀리에 그들을 만나 의회가 오만하고 야심이 크다고 말했다.[8] 그는 그들에게 스파르타를 대표하는 외교적 권한을 포기하고 대신 아테네 정치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그들을 돕도록 촉구했다.[9] 대표들은 동의했고, 알키비아데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스파르타와의 합의를 진심으로 원했던 니키아스에도 불구하고 그와 거리를 두었다.[8]
다음 날, 의회에서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에게 스파르타가 협상할 권한을 어떻게 부여했는지 물었고, 그들은 합의한 대로 완전하고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그들이 전날 말했던 것과 정면으로 모순되었고, 알키비아데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의 성격을 비난하고, 그들의 목표에 의혹을 제기하며, 그들의 신뢰성을 파괴했다. 이 계략은 알키비아데스의 지위를 높이고 니키아스를 곤경에 빠뜨렸으며, 알키비아데스는 그 후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증가하는 권력을 이용하여 아르고스, 만티네이아, 엘리스 및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국가들 사이의 동맹을 조직하여 스파르타의 지역적 지배력을 위협했다. 그러나 이 동맹은 기원전 418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결국 패배했다.[10]
6. 니키아스와 히페르볼로스 (기원전 416-415년)
기원전 416년과 415년 사이에 히페르볼로스(Hyperbolos)와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사이에는 복잡한 갈등이 있었다. 히페르볼로스는 이들 중 한 명을 도편 추방하려고 했지만,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는 그들의 영향력을 합쳐 민중을 설득하여 히페르볼로스를 추방시켰다.[11] 이 사건은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 각자가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투표하는 개인적인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7]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이러한 책략에 분노하여 도편 추방 제도가 다시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12]
7. 시칠리아 원정 (기원전 415-413년)
기원전 415년, 시칠리아의 도시 세게스타(그리스어: 에게스타)의 사절들이 아테네에 도착하여 셀리누스와의 전쟁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니키아스는 원정에 반대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원정을 통해 부와 제국을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니키아스는 알키비아데스, 라마쿠스와 함께 원정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414년, 아테네는 데모스테네스와 에우뤼메돈의 지휘 아래 함선 73척과 병사 5,000명을 시칠리아로 파견하여 니키아스와 그의 부대를 지원했다. 아테네 군대는 시라쿠사를 포위했지만, 혼란스러운 야간 작전에서 길리푸스에게 패배하고 라마쿠스와 에우뤼메돈이 전사하면서 니키아스가 단독 지휘를 맡게 되었다.
패배 후 데모스테네스는 철수를 제안했지만, 니키아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처벌받는 것보다 적에게 죽는 것을 택하겠다며 거절했다.
7. 1. 원정군 지휘관 임명
기원전 415년, 시칠리아 도시 세게스타의 사절들이 아테네에 도착하여 셀리누스와의 전쟁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어진 논의에서 니키아스는 아테네의 개입에 강력히 반대하며, 전쟁 비용이 과도하게 많이 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원정을 지지했던 알키비아데스의 성격과 동기를 공격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 원정이 도시에 부를 가져다주고 페르시아 전쟁과 같이 제국을 확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3]니키아스의 제안에 따라 함대 규모는 크게 증가했다. 삼단노선 140척, 중보병 5,100명, 그리고 궁수, 투석병, 경무장병 약 1,3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였다.[13] 니키아스는 필요한 병력에 대한 높은 추산치로 의회를 충격에 빠뜨리려 했지만, 오히려 시민들의 열의를 더욱 고조시켰다.
결국 니키아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알키비아데스, 라마쿠스와 함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세 사람은 시칠리아에서 아테네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13]
7. 2. 시라쿠사 포위전
기원전 415년, 시칠리아 도시 세게스타(그리스어: 에게스타)의 사절들이 아테네에 도착하여 셀리누스와의 전쟁에서 지원을 호소했다. 니키아스는 아테네의 개입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 원정이 도시에 부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하며 원정을 지지했다. 결국 니키아스는 알키비아데스와 라마쿠스와 함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13]기원전 414년, 아테네는 데모스테네스와 에우뤼메돈이 지휘하는 함선 73척과 병사 5,000명을 시칠리아로 파견하여 니키아스와 그의 부대가 시라쿠사 포위전을 수행하도록 지원했다. 아테네 군대는 시라쿠사를 점령하려 했고, 아테네 함대는 바다에서 도시로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초기 성공 후, 아테네 군대는 혼란스러운 야간 작전에서 스파르타의 지원군을 이끈 길리푸스에게 패배했다. 아테네 사령관 라마쿠스와 에우뤼메돈은 전사했고, 니키아스는 병에도 불구하고 시라쿠사 포위전의 단독 지휘를 맡게 되었다.[19]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가 즉시 시라쿠사 포위를 포기하고 아테네로 돌아가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니키아스는 거절했다.
7. 3. 패배와 니키아스의 죽음

헤르모크라테스가 지휘하는 시라쿠사군과 스파르타군은 아테네군을 항구에 가두는 데 성공했고, 아테네군은 시라쿠사 전투 제2차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19]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가 즉시 시라쿠사 포위를 포기하고 알키비아데스가 부추긴 스파르타의 아티카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아테네로 돌아가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니키아스는 이를 거절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니키아스는 패배할 경우 자신을 비난할 아테네 시민들에게 살해당하는 것보다 적에게 죽는 것을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시라쿠사군의 매복에 걸려 항복해야만 했다. 니키아스도 곧 포로로 잡혔고, 기리포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동맹군에 의해 처형되었다.[19] 생존한 아테네 병사 대부분은 시라쿠사 근처의 채석장에 수용되었는데(다른 곳에 수용할 공간이 없었기 때문), 그곳에서 많은 수가 질병과 기아로 서서히 죽어갔다. 아테네로 돌아온 생존자는 극소수였다.
8. 평가
투키디데스는 니키아스의 최후에 대해 "그의 평소 언행이 하나같이 덕에 어긋나는 바가 없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불운의 극치로 끝나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20] 플라톤의 대화편 『라케스』에서 니키아스는 지혜와 판단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8. 1. 긍정적 평가
니키아스는 신중하고 온건한 성격으로, 아테네의 안정과 평화를 추구했던 인물이다.[15] 그는 라우리온의 은광에서 얻은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는데,[1] 이를 아테네의 자선 활동과 종교 축제 지원에 사용하여 사회에 환원했다.[2] 플루타르코스는 니키아스가 아테나 동상과 디오니소스 신전 건립 비용을 지불했다고 기록했다.[2]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니키아스는 군사 작전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밀로스섬에 출격하여 타나그라 전투(기원전 426년)에서 승리하였고,[17] 코린토스인을 매복으로 쓰러뜨리거나 시라쿠사 기병이 지나갈 평원에 가시덤불을 깔아 승리하는 등 치밀함과 기지를 발휘했다.[21]
아리스토텔레스는 니키아스를 아테네를 대표하는 시민 중 한 명으로 꼽았으며,[14]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니키아스의 평소 언행이 덕에 어긋나는 바가 없었다고 평가했다.[20] 플라톤의 대화편 『라케스』에서는 지혜와 판단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8. 2. 부정적 평가
니키아스는 지나치게 신중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중요한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특히, 시칠리아 원정에서 그의 우유부단함은 아테네의 패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19] 클레온(정치가)과의 갈등[15], 기원전 425년에 클레온에게 지휘권을 넘겨준 사건[22] 등은 그의 정치적 한계를 보여준다.참조
[1]
논문
Ways and Means
http://dx.doi.org/10[...]
20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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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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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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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s. Nic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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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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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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