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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루바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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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콜루바라 전투는 1914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상대로 세 번째 침공을 감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세르비아는 열악한 장비와 보급에도 불구하고, 체르 전투에 이어 콜루바라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침공을 격퇴했다. 이 전투는 세르비아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사령관 교체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 또한, 세르비아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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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루바라 전투
전투 정보
전투 이름콜루바라 전투
일부제1차 세계 대전의 세르비아 전역의 일부
기간1914년 11월 16일 – 12월 15일
위치콜루바라 강, 세르비아 왕국
결과세르비아의 결정적인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지휘관 1라도미르 푸트니크
지보인 미시치
스테파 스테파노비치
파블레 유리시치 슈투름
밀로시 보자노비치
지휘관 2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리보리우스 리터 폰 프랑크}}
병력
병력 11군
2군
3군
우지체 군
병력 25군
6군
총 병력 1400,000명
총 병력 2450,000명
사상자
사상자 1총: 132,000명
22,000명 사망
91,000명 부상
사상자 2총: 273,000명
30,000명 사망
173,000명 부상
70,000명 포로
지도
1914년 11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 계획 지도
1914년 11월~12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 번째 세르비아 침공을 묘사한 지도.

2. 배경

1914년 6월 28일, 가브릴로 프린치프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하면서 7월 위기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암살 배후에 세르비아가 있다고 의심하여 7월 23일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세르비아는 이를 거부했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같은 날 세르비아는 사바 강과 다뉴브 강의 모든 다리를 파괴했다. 다음 날 베오그라드가 포격을 받으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동유럽에서의 전투는 1914년 8월 초 오스카르 포티오렉 장군의 지휘 하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동부 전선으로 병력이 이동하면서 실제 침공 병력은 약 20만 명으로 줄었다. 반면 세르비아는 완전 동원 시 약 4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주요 병력은 약 18만 명이었다.

세르비아 군인들이 시골을 행군하는 모습.


발칸 전쟁 직후 세르비아는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3만 6천 명 이상의 세르비아 군인이 사망했고 5만 5천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불가리아의 공격 위협 등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세르비아는 포병, 탄약, 심지어 제복까지 부족하여 완전 동원 시 약 5만 명의 병사들이 장비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현대식 소총, 기관총, 야포 등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는 발칸 전쟁에서 얻은 경험과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섰다. 세르비아는 8월 체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침략을 격퇴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이 중앙 연합국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를 기록했다. 이후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를 침공했지만, 드리나 전투에서 패배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세르비아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했다. 이 사건은 7월 위기(7월 위기)를 불러왔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암살 배후에 세르비아(세르비아)가 있다고 의심하여 7월 23일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통첩은 세르비아가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어졌고, 결국 세르비아는 이를 거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같은 날, 세르비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사바 강(사바 강)과 다뉴브 강(다뉴브 강)의 다리들을 모두 파괴했다. 다음 날 베오그라드(베오그라드)가 포격을 받으면서 제1차 세계 대전(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2. 2. 세르비아의 상황



발칸 전쟁(발칸 전쟁) 직후, 세르비아는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어 회복 중이었다. 3만 6천 명 이상의 세르비아 군인이 사망했고 5만 5천 명이 중상을 입었다.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얻은 신병은 거의 없었으며, 알바니아 반군 주둔과 불가리아의 공격 위협으로 세르비아군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세르비아는 포병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탄약 비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보급 문제는 기본적인 물품에까지 미쳤다. 많은 병사들은 지급된 외투와 샤이카차(샤이카차)라는 전통적인 세르비아 모자 외에는 제복조차 없었다. 소총 또한 심각하게 부족하여, 완전 동원 시 약 5만 명의 세르비아 병사들이 장비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현대식 소총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었고, 세르비아보다 두 배나 많은 기관총야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탄약과 교통, 산업 인프라도 훨씬 더 우수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발칸 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이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병사들보다 훈련이 잘 되어 있다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또한 세르비아 병사들은 무기 부족을 부분적으로 상쇄할 만큼 사기가 높았다.

2. 3.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침공 계획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고사령부(AOK)는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연결을 방해하고 바그다드 철도 건설을 저지하며, 중립국들의 참전을 막고 이탈리아가 새로운 전선을 형성할 가능성을 인지했다. 1914년 9월, 제문에서 발견된 "유럽의 새로운 분할" 지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해체되고 영토가 분할되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에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세르비아에 대한 세 번째 침공을 승인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의 보스니아 침공을 막아낸 후 재편성하여 겨울 전 마지막 침공을 준비했다. 오스카르 포티오렉 장군이 다시 지휘를 맡았고, 제6군 사령관이 되었다. 제5군은 리보리우스 프랑크 기사가 지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45만 명, 세르비아군은 40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포티오렉은 세르비아군이 붕괴 직전이라고 확신했다.

빈과 사라예보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들은 세르비아 점령 후 영토를 중립 발칸 국가들을 매수하는 데 사용하고, 모라바 강 서쪽의 세르비아인들을 추방하고 오스트리아 정착민들로 대체할 계획을 세웠다. 루드비히 탈로치는 포티오렉에게 세르비아인을 서유럽화할 것을 권고했다.

포티오렉은 세르비아 북부와 서부를 가로지르는 공격을 계획했다. 제5군은 발레보를 점령하고 콜루바라 강 북쪽을 포위하며, 제6군은 야고드냐 고원을 확보하고 남쪽에서 세르비아군을 우회하는 것이었다. 주요 목표는 세르비아의 임시 수도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니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3. 전투 경과

1914년 11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군을 추격하여 오브레노바츠-발례보 철도를 점령하려 했으나, 세르비아군은 한동안 저지했다. 그러나 추운 날씨와 탄약 부족, 장기간의 후퇴로 세르비아군의 사기가 급락했고, 라도미르 푸트니크는 군대를 재편성하고 발례보를 포기, 콜루바라 강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명령했다.

발례보의 콜루바라 강


1914년 11월 콜루바라 전투 당시 세르비아군이 참호를 구축했던 콜루바라 강변 근처의 브라체 브르도 절벽


세르비아군은 후퇴 과정에서 다리와 통신선을 파괴하고 중장비를 버려야 했다. 니콜라 파시치는 협상국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고, 프랑스는 탄약과 보급품을 제공했지만, 러시아영국은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지 못했다. 11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발례보에 진입하자 비엔나에서는 축하 행사가 열렸고, 프란츠 요제프 1세오스카르 포티오레크를 칭찬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의 초토화 작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진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콜루바라 강을 따라 구축된 세르비아군의 방어진지는 수개월 전에 준비된 것이었고, 푸트니크의 철수는 세르비아군 피해를 최소화했다. 세르비아는 또한 니슈로 가는 길을 막는 야전 요새도 구축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1월 16일 콜루바라 강에 도착하여 다음 날 공격을 개시했으나, 세르비아군은 5일 동안 폭우와 강설 속에서 전투를 벌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후퇴시켰다. 양측 모두 큰 사상자를 냈고, 많은 병사들이 동상과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베오그라드 남쪽에 위치한 라자레바츠를 주요 공격 목표로 삼았으나, 세르비아군의 방어가 더 잘 된 우측 측면을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11월 18일 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추가 공격 위치로 이동했고, 다음 날 아침 공격이 시작되어 주요 목표는 라자레바츠 주변의 세르비아 제2군 방어선 돌파, 세르비아 제1군을 고르니밀라노바츠 방향으로 후퇴, 초브카와 브라체 브르도 마을 주변 세르비아군 진지 공격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1월 19일 저녁 브라체 브르도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지를 점령했고, 세르비아 제1군은 다음 날 후퇴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1월 21일 제1군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가하여 세르비아군을 후퇴시켰고, 말렌 산으로 진격하여 제1군을 몰아내려 했으나, 세르비아군은 3일간의 전투 끝에 철수했다. 포티오렉은 추격하지 않고 세르비아군이 질서정연하게 철수하도록 했다. 세르비아 제1군이 철수하는 동안 제2군과 제3군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11월 24일까지 포티오렉은 세르비아가 며칠 안에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점령 후 세르비아 총독으로 스테판 사르코티치를 임명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1월 25일 추가 이득을 얻었고, 포격으로 세르비아군을 초브카와 브라체 브르도에서 몰아냈다. 11월 26일, 그들은 사바 강과 합류하는 콜루바라 강을 건너려고 시도했고, 초기 공격에서 성공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반격하여 침입자들을 후퇴시키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50% 사상자를 내게 하여 공세가 중단되도록 했다. 11월 27일, 세르비아군은 초브카와 브라체 브르도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2월 초, 세르비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지보진 미시치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 제1군은 19km 후퇴하여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기회를 얻었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제2군과 제3군은 고지대의 여러 중요한 지점을 점령했고, 우지체 군은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격퇴했다. 세르비아군의 공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기습했고,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베오그라드 거리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보급을 받은 세르비아군은 베오그라드를 향해 전진했다. 공세의 초기 성공은 세르비아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12월 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우지체와 발레보를 향해 후퇴했다. 세르비아군은 상대방이 참호를 구축하고 세르비아군의 진격을 막으려 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어떤 방어망도 구축하지 못했고 세르비아군의 공세를 막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 세르비아 제3군은 수보보르 산에서 제6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발레보를 급습했다.

12월 9일까지 베오그라드 주변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반격은 힘을 잃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도심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10일, 세르비아군은 드리나 강 하류를 점령하고 살아남은 대부분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드리나 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

12월 13일, 프랑크는 포티오렉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베오그라드에 더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렸다. 그 결과 포티오렉은 도시에 있는 군대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2월 14일과 15일에 베오그라드를 떠나 사바 강과 다뉴브 강에 있는 강 모니터의 호위를 받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로 후퇴했다. 세르비아군은 12월 15일에 베오그라드로 재진입했고 다음 날이 끝날 무렵 도시 전체를 장악했다.

3. 1.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세 차례 침공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인들이 노획한 세르비아 포병 옆에 서 있다.


푸트니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세르비아 심장부로 깊숙이 진격하면서 보급선이 과도하게 늘어날 것이고, 세르비아군은 세르비아 내륙의 철도 기지를 계속 장악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1월 10일, 그는 전면적인 후퇴를 명령하고, 세르비아 제2군을 우브로, 제1군과 제3군을 발례보 북쪽과 서쪽에 배치했다. 우지체 군은 도시 방어를 위해 진지를 구축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군을 추격하여 오브레노바츠-발례보 철도를 점령하려 했으나, 세르비아군은 한동안 저지했다. 푸트니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진흙탕 길을 통해 중포를 운용하고, 드리나 강 세르비아 측에 사격 위치를 구축하여 세르비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을 과소평가했다. 추운 날씨에 대비한 의류와 탄약 부족, 장기간의 후퇴로 세르비아군의 사기가 급락했다. 푸트니크는 군대를 재편성하고 발례보를 포기, 콜루바라 강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명령했다.

후퇴 과정은 길고 고통스러웠으며, 세르비아군은 다리와 통신선을 파괴하고 중장비를 버려야 했다. 파시치는 협상국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는 탄약과 보급품을 제공했지만, 러시아영국은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지 못했다.

11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발례보에 진입하자 비엔나에서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프란츠 요제프는 포티오렉을 칭찬했고, 제국 전역의 도시들은 포티오렉을 명예 시민으로 임명했으며, 사라예보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었다. 발례보 점령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세르비아 격파 직전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의 초토화 작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진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콜루바라 강을 따라 구축된 세르비아군의 방어진지는 수개월 전에 준비된 것이었다. 푸트니크의 철수는 세르비아군 피해를 최소화했다. 세르비아 북서부 지형은 방어에 유리했고, 10월에 옐랴크와 말렌 산맥을 요새화하여 크라구예바츠로 이어지는 도로를 장악했다. 세르비아는 니슈로 가는 길을 막는 야전 요새도 구축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1월 16일 콜루바라 강에 도착하여 다음 날 공격을 개시했다. 세르비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후퇴시켰고, 5일 동안 폭우와 강설 속에서 전투를 벌였다. 양측 모두 큰 사상자를 냈고, 많은 병사들이 동상과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격은 베오그라드 남쪽에 위치한 라자레바츠에서 시작되었다. 라자레바츠 점령은 믈라데노바츠 철도선을 이용하고 베오그라드로 향하는 도로를 방어하는 세르비아군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군의 방어가 더 잘 된 우측 측면을 공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군사 역사가 데이비드 조던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제1군과 우지체군을 분리하는 지점을 공격했다면 세르비아군의 중앙을 꿰뚫고 모라바 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세르비아 제1군은 좌측 측면을 강화했고, 이후의 공격은 격퇴하기가 훨씬 어려울 것임을 깨달았다.

11월 18일 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추가 공격 위치로 이동했고, 다음 날 아침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요 목표는 라자레바츠 주변의 세르비아 제2군 방어선 돌파, 세르비아 제1군을 고르니 밀라노바츠 방향으로 후퇴, 초브카와 브라체 브르도 마을 주변 세르비아군 진지 공격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1월 19일 저녁 브라체 브르도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지를 점령했다. 세르비아 제1군은 다음 날 후퇴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크라구예바츠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따라 진격할 수 있었다. 포티오렉은 푸트니크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유인하여 포위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세르비아군이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1월 21일 제1군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가하여 세르비아군을 후퇴시켰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말렌 산으로 진격하여 제1군을 몰아내려 했으나, 세르비아군은 3일간의 전투 끝에 철수했다. 포티오렉은 추격하지 않고 세르비아군이 질서정연하게 철수하도록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큰 사상자를 냈고, 결속력을 잃었다. 세르비아 심처로 진격할수록 지형이 험해져 병사들을 더욱 지치게 했다. 세르비아 제1군이 철수하는 동안 제2군과 제3군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포티오렉은 라자레바츠 주변 위치를 강화하여 크라구예바츠 공격 중심지로 사용하려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진격은 포티오렉에게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게 했다. 그는 세르비아 제2군과 제3군 생존자들을 추격하고, 세르비아 제1군과 우지체군은 베오그라드와 라자레바츠로 이동하여 포위, 괴멸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라자레바츠 외곽 전투가 다시 강화되었고, 세르비아군은 탄약 부족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세르비아군은 포탄이 부족해졌고, 스테파노비치는 제2군의 포병을 후방으로 재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푸트니크는 스테파노비치에게 포병을 전선에 유지하라고 지시했고 러시아가 포탄을 보냈다고 말했다. 스테파노비치는 회의적이었지만 지시대로 했다.

11월 24일까지 포티오렉은 세르비아가 며칠 안에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점령 후 세르비아 총독으로 스테판 사르코티치를 임명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1월 25일 추가 이득을 얻었고, 포격으로 세르비아군을 초브카와 브라체 브르도에서 몰아냈다. 11월 26일, 그들은 사바 강과 합류하는 콜루바라 강을 건너려고 시도했고, 초기 공격에서 성공했다. 세르비아군은 반격하여 침입자들을 후퇴시키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50% 사상자를 내게 하여 공세가 중단되도록 했다. 11월 27일, 세르비아군은 초브카와 브라체 브르도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3. 2. 콜루바라 전투

베오그라드의 아다 치간리야 섬에 있는 세르비아 군인


1914년 11월, 세르비아 군대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전선이 과도하게 확장되어 라도미르 푸트니크는 전략적 철수를 고려했다. 11월 26일부터 27일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6군은 전선을 공격하여 세르비아 내륙으로 진격했다.

세르비아 최고 사령부는 베오그라드를 포기했고, 11월 29일부터 30일 사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베오그라드 함락 소식은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전쟁 초부터 예상되었던 일이었기에 무관심하게 받아들여졌다. 독일은 베오그라드 함락을 기뻐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도부에 축하 전보를 보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와의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12월 2일,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즉위 66주년 기념일에 포티오렉은 베오그라드를 황제의 발 아래에 놓았다고 썼다.

3. 2. 1. 세르비아군의 반격

12월 초, 세르비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지보진 미시치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 제1군은 19km 후퇴하여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기회를 얻었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제2군과 제3군은 고지대의 여러 중요한 지점을 점령했고, 우지체 군은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격퇴했다.

세르비아군의 공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기습했고,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베오그라드 거리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보급을 받은 세르비아군은 베오그라드를 향해 전진했다.

공세의 초기 성공은 세르비아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12월 6일, 세르비아 주재 영국 대사는 영국 정부에 세르비아군의 공세가 "눈부시게 진행되고 있다"고 알렸다. 그날 세르비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중앙과 우익을 돌파했다. 기동전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완전한 후퇴를 강요당했고, 후퇴하면서 무기와 장비를 버렸다.

12월 8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우지체와 발레보를 향해 후퇴했다. 세르비아군은 상대방이 참호를 구축하고 세르비아군의 진격을 막으려 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어떤 방어망도 구축하지 못했고 세르비아군의 공세를 막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 세르비아 제3군은 수보보르 산에서 제6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발레보를 급습했다.

12월 9일까지 베오그라드 주변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반격은 힘을 잃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도심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10일, 세르비아군은 드리나 강 하류를 점령하고 살아남은 대부분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드리나 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

3. 2. 2. 베오그라드 탈환



세르비아 최고 사령부는 11월 29일에서 30일 사이에 베오그라드를 포기했고, 12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베오그라드에 진입했다. 베오그라드 함락 소식은 "전쟁 초부터 예상되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은 "무관심하게" 받아들여졌다.

12월 2일, 세르비아 국왕 페트르 1세는 소총을 들고 군대와 함께 전선으로 향했고, 세르비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기습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휴식을 취하고 보급을 받은 세르비아군은 베오그라드를 향해 전진했다. 12월 2일 밤까지 세르비아 제1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전선을 수 킬로미터 돌파하고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2월 9일까지 베오그라드 주변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반격은 힘을 잃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도심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12월 13일, 프랑크는 포티오렉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베오그라드에 더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렸다. 그 결과 포티오렉은 도시에 있는 군대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2월 14일과 15일에 베오그라드를 떠나 사바 강과 다뉴브 강에 있는 강 모니터의 호위를 받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로 후퇴했다. 세르비아군은 12월 15일에 베오그라드로 재진입했고 다음 날이 끝날 무렵 도시 전체를 장악했다.

4. 전투 결과 및 영향

콜루바라 전투는 세르비아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1914년 12월 16일, 세르비아 최고사령부는 벨그라드 탈환이 작전의 성공적인 종결을 의미하며, 적군이 완전히 격파되어 세르비아 영토에서 쫓겨났다고 발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횔첸도르프는 이 패배를 "남쪽에서 온 세르비아의 벼락"이라고 표현했다.

이 전투로 세르비아는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고, 많은 외국인들이 세르비아에 정치적,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거나 세르비아군에 합류하여 함께 싸웠다. 독일 언론인 막시밀리안 하르덴은 "세르비아는 코소보 전장에서 무덤에서 일어났다. 콜루바라 강의 발원지에서 이번 세기 최대의 전투를 위한 용기를 얻을 것이다."라고 썼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약 22만 5천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3만 명이 사망, 17만 3천 명이 부상, 7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세르비아 측 기록에 따르면 200명의 장교, 130문 이상의 대포, 70정 이상의 중기관총과 다량의 군수품이 노획되었다. 세르비아군 역시 2만 2천 명 사망, 9만 1천 명 부상, 1만 9천 명 실종 또는 포로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지보인 미시치는 전투에서의 지휘 공로로 보이보드 계급으로 승진했다. 반면, 오스카르 포티오렉은 12월 22일에 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오스트리아의 외젠 대공으로 대체되었다.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는 제5군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카를 테르슈티안스키 폰 나다스로 대체되었다. 제5군과 제6군은 9만 5천 명으로 구성된 단일 제5군으로 합쳐졌다.

이 전투는 도브리차 초시치의 소설 ''죽음의 시간''의 중심 소재이며, 1983년 ''콜루바라 전투''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각색되기도 했다.

4. 1. 세르비아의 승리

콜루바라 전투는 세르비아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1914년 12월 16일, 세르비아 최고사령부는 "벨그라드 탈환은 우리 작전의 위대하고 웅장한 시대의 성공적인 종결을 의미한다. 적은 패배하여 흩어졌고, 완전히 격파되어 우리 영토에서 쫓겨났다."라고 발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횔첸도르프는 이 패배를 "남쪽에서 온 세르비아의 벼락"이라고 표현했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전쟁에서 탈락시키거나, 불가리아를 중앙 동맹국에 가입시키거나, 루마니아가 중립을 유지하도록 설득하는 등의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하게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역사가들은 이 패배가 "이중 제국의 명성과 자존감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전투는 세르비아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외국인들이 세르비아에 와서 정치적,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거나 세르비아군과 함께 싸웠다. 독일 언론인 막시밀리안 하르덴은 "세르비아는 코소보 전장에서 무덤에서 일어났다. 콜루바라 강의 발원지에서 이번 세기 최대의 전투를 위한 용기를 얻을 것이다."라고 썼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약 22만 5천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3만 명이 사망, 17만 3천 명이 부상, 7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세르비아 측 기록에 따르면 200명의 장교가 포로로 잡혔고, 130문 이상의 대포, 70정 이상의 중기관총과 다량의 군수품이 노획되었다. 세르비아군 역시 2만 2천 명 사망, 9만 1천 명 부상, 1만 9천 명 실종 또는 포로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서방 언론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세르비아 민간인, 특히 여성과 어린이를 상대로 저지른 잔혹 행위에 경악했다.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의 윌리엄 셰퍼드는 최소 11개의 마을이 버려졌고 세르비아 북서부 전체가 거의 황폐화되었음을 확인했다.

지보인 미시치는 전투에서의 지휘 공로로 보이보드 계급으로 승진했다. 반면, 오스카르 포티오렉은 "이 가장 불명예스럽고, 격분스럽고, 조롱거리가 되는 패배" 때문에 12월 22일에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외젠 대공으로 대체되었다.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는 제5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카를 테르슈티안스키 폰 나다스로 대체되었다. 제5군과 제6군은 그 후 9만 5천 명으로 구성된 단일 제5군으로 합쳐졌다.

도브리차 초시치의 소설 ''죽음의 시간''은 이 전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은 1983년 ''콜루바라 전투''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각색되었다.

4. 2.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피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콜루바라 전투에서 약 22만 5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가운데 3만 명이 사망했고, 17만 3천 명이 부상당했으며, 7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전투 중 장교 200명이 포로로 잡혔고, 대포 130문 이상, 중기관총 70정 이상, 그리고 다량의 군수품이 세르비아군에게 노획되었다.

이러한 인적, 물적 손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사가들은 이 패배가 "이중 제국의 명성과 자존감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투 결과, 발칸 지역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령관 오스카르 포티오렉은 해임되었고, 그의 부관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도 제5군 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포티오렉의 자리는 오스트리아의 외젠 대공이, 폰 프랑크의 자리는 카를 테르슈티안스키 폰 나다스가 대신하게 되었다. 제5군과 제6군은 9만 5천 명 규모의 단일 제5군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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