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보인 미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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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보인 미시치는 세르비아의 군인으로,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1876년과 1878년의 세르비아-오스만 전쟁, 1885년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에 참전했고, 5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역했으나 라도미르 푸트니크의 요청으로 복귀했다. 미시치는 발칸 전쟁에서 라도미르 푸트니크의 참모차장으로 활약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세르비아 제1군 사령관으로 콜루바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야전원수로 진급했다. 그는 1918년 살로니카 전선 돌파를 지휘했으며, 베오그라드 군사 아카데미 강사,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 왕국의 군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미시치는 회고록 『나의 추억』을 저술했으며, 1921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다양한 세르비아 및 외국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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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보인 미시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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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작위 | 보이보다 |
이름 | 지보인 미시치 |
별칭 | 해당 정보 없음 |
출생일 | 1855년 6월 19일 |
출생지 | 스트루가니크, 미오니차, 세르비아 |
사망일 | 1921년 1월 20일 |
사망지 | 베오그라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
안장지 | 베오그라드 신 묘지 |
배우자 | 루이제 크리크너 (1884년–1921년, 그의 사망까지) |
자녀 | 엘레오노라 미시치 올가 미시치 라도반 미시치 안젤리야 미시치 알렉산다르 미시치 보이슬라프 미시치 |
모교 | 세르비아 군사 아카데미 |
직업 | 군인 |
군사 경력 | |
소속 | 세르비아 공국 세르비아 왕국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
군종 | 세르비아 육군 |
지휘 | 세르비아 제1군 |
계급 | [[File:KoY-Field-Marshal.svg|30px]] 육군 원수 |
복무 기간 | 1874년–1904년 1909년–1913년 1914년–1921년 |
주요 참전 전투 | 세르비아-튀르키예 전쟁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제1차 발칸 전쟁 제2차 발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세르비아 전역 콜루바라 전투 살로니카 전선 |
정치 경력 | |
직책 | 유고슬라비아 왕립군 총참모총장 |
임기 시작 | 1920년 5월 5일 |
임기 종료 | 1921년 1월 20일 |
국왕 | 페타르 1세 |
이전 | 그 자신 |
이후 | 페타르 보이오비치 |
직책 2 | 유고슬라비아 왕립군 최고사령부 참모총장 |
국왕 2 | 페타르 1세 |
임기 시작 2 | 1918년 12월 1일 |
임기 종료 2 | 1920년 5월 5일 |
이전 2 | 그 자신 |
이후 2 | 그 자신 |
직책 3 | 세르비아군 최고사령부 참모총장 |
국왕 3 | 페타르 1세 |
임기 시작 3 | 1918년 7월 1일 |
임기 종료 3 | 1918년 12월 1일 |
이전 3 | 페타르 보이오비치 |
이후 3 | 그 자신 |
훈장 |
2. 초기 생애
지보인 미시치는 미오니차 근처 스트루가니크에서 태어난 농민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어린 시절 양치기로 일했으며, 크라구예바츠와 베오그라드에서 김나지움(중등학교) 교육을 마친 후 1874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876년과 1878년의 세르비아-오스만 전쟁에 소위 계급의 보병으로 참전했으며, 1885년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에서는 대위 계급으로 중대장을 맡아 활약했다. 1884년에는 독일 여성 루이즈 크릭너와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다.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왕 암살 사건(5월 쿠데타) 이후, 오브레노비치 왕가와 가깝다는 이유로 비밀 결사 조직 흑수단의 영향력 아래 강제로 퇴역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세르비아 육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이었던 라도미르 푸트니크 장군이 그를 자신의 조수로 강력히 추천하면서 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
2. 1. 유년 시절
미시치의 할아버지는 미오니차 근처 스트루가니크 출신이다. 그의 부모인 라도반과 안젤리야(구 Damjanović - Koštunjić)는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지보인은 막내였고, 그가 태어났을 때는 형제자매 중 8명만이 살아 있었다.그는 6살 때부터 양치기로 일했으며, 초등학교는 크라구예바츠에서 졸업했다. 미시치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농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도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경험을 언급했다. 1868년, 그는 크라구예바츠에서 김나지움(중등학교) 교육을 시작하여 1, 2, 6학년 과정을 마쳤고, 3학년과 4학년은 베오그라드에서 수학했다. 김나지움 초기 5년 동안 그의 성적은 특별히 뛰어나지 않았으나, 6학년 때는 훨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 덕분에 1874년 육군사관학교에 19등으로 입학했다. 그는 학업 중에도 휴가 때마다 고향 마을을 방문하여 형제들과 함께 밭일을 돕곤 했다. 1884년 11월 25일, 베오그라드의 승천 교회에서 독일 여성 루이즈 크릭너(1865-1956)와 결혼하여 슬하에 세 아들과 세 딸, 총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1876년과 1878년의 세르비아-오스만 전쟁에는 소위 계급의 보병으로 참전했고, 1885년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에는 드린스카 사단 제5 보병 연대에서 중대장인 대위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왕 암살 사건(5월 쿠데타) 이후, 그는 오브레노비치 왕가와 가깝다는 이유로 비밀 결사 조직 흑수단의 영향력 때문에 강제로 퇴역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육군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 라도미르 푸트니크 장군이 개인적으로 그를 자신의 조수로 강력히 추천하여 다시 군에 복귀했다.
2. 2. 학창 시절
미시치는 크라구예바츠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에서 농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도시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했던 어려움을 언급했다. 1868년, 그는 크라구예바츠에서 김나지움 교육을 시작하여 1학년, 2학년, 6학년 과정을 마쳤다. 3학년과 4학년은 베오그라드에서 수학했다. 김나지움 초기 5년 동안 그의 성적은 특별히 뛰어나지 않았으나, 6학년 때는 훨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1874년 육군사관학교에 19등으로 입학했다. 그는 휴가 때마다 고향 마을을 방문하여 종종 형제들과 함께 밭에서 일했다.2. 3. 결혼과 가족
미시치의 할아버지는 미오니차 근처 스트루가니크 출신이다. 그의 부모인 라도반과 안젤리야(결혼 전 성씨는 Damjanović - Koštunjić)는 슬하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지보인 미시치는 이들 중 막내였으며, 그가 태어났을 때는 형제자매 중 8명만이 살아 있었다.1884년 11월 25일, 미시치는 베오그라드의 승천 교회에서 독일 출신 여성 루이즈 크릭너(1865년 ~ 1956년)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세 아들과 세 딸, 총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이름 미상) | 미오니차 근처 스트루가니크 출신 |
아버지 | 라도반 미시치 | |
어머니 | 안젤리야 미시치 (결혼 전 성씨: Damjanović - Koštunjić) | |
배우자 | 루이즈 크릭너 | 1865년 ~ 1956년, 독일 출신, 1884년 결혼 |
자녀 | 6명 | 아들 3명, 딸 3명 |
3. 군 경력
지보인 미시치는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세르비아 군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군인이다. 발칸 전쟁 당시 라도미르 푸트니크 최고 사령부의 참모차장으로 활약하며 장군으로 진급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세르비아 제1군 사령관으로서 콜루바라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 야전원수 계급에 올랐다.[1]
그는 1915년 겨울 알바니아를 통한 세르비아군의 고난의 후퇴에도 참여했으며, 이후 테살로니키 전선에서 다시 군을 지휘하여 불가리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1918년에는 최고 사령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살로니카 전선 돌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전쟁 후에는 베오그라드의 군사 아카데미 강사를 거쳐, 신생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 군대의 초대 참모총장을 역임하며 군 경력을 마감했다.[1]
3. 1. 초기 군 경력
미시치는 발칸 전쟁 기간 동안 보이보드 라도미르 푸트니크 최고 사령부의 참모차장이자 그의 핵심적인 조력자였다. 제1차 발칸 전쟁 중 쿠마노보 전투 이후, 그는 장군으로 진급했다. 제2차 발칸 전쟁의 브레갈니차 전투에서는 불가리아군의 기습 공격에 직면했을 때, 참모진 다수가 세르비아군을 제2 방어선으로 후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당시 참모총장 보좌관이었던 미시치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푸트니크를 설득하여 군대가 제1 방어선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하도록 명령하게 했고, 이는 전투에서 세르비아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1914년 7월 위기 동안, 미시치는 건강 문제로 헝가리의 온천에서 요양 중이던 푸트니크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최고 사령관 직무를 수행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에 맞서 싸우면서, 은퇴했던 미시치는 다시 군에 복귀하여 세르비아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14년 12월 콜루바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세르비아 영토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압도적인 승리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야전원수 계급으로 진급했다.
1915년부터 1916년 겨울, 세르비아군은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의 두 번째 침공(이후 불가리아도 합류)에 시달리며 알바니아 산맥을 통해 대규모 후퇴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미시치는 세르비아의 연합된 적들을 상대로 최후의 저항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페치에서 열린 회의에서 페타르 1세 국왕과 다른 군 지휘관들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세르비아군은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를 통해 철수했다.
미시치는 이 힘겨운 후퇴 과정에서 심한 추위와 악조건에 노출되어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이후 회복했다. 1916년 테살로니키 전선에서 미시치는 제1군을 지휘하여 고르니체보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후퇴시켰다. 전쟁 말기인 1918년 6월, 미시치는 최고 사령부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 살로니카 전선 돌파 작전 당시 세르비아군을 지휘했다. 그는 베오그라드의 군사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그의 군 경력은 1918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 왕국 군대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면서 마무리되었다.[1]
3. 2. 발칸 전쟁
미시치는 발칸 전쟁에서 보이보드 라도미르 푸트니크 최고 사령부의 참모차장이자 그의 오른팔이었다. 쿠마노보 전투 이후 제1차 발칸 전쟁에서 그는 장군으로 진급했다. 제2차 발칸 전쟁 중 브레갈니차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의 기습 공세가 있었을 때, 참모진 대부분은 세르비아군을 제2 방어선으로 후퇴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참모총장 보좌관이었던 미시치는 이에 강력히 반대하며 푸트니크에게 군대가 제1 방어선에서 공격을 격퇴하도록 명령하라고 설득했고, 이는 전투에서 세르비아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3. 3. 제1차 세계 대전
미시치는 발칸 전쟁 당시 라도미르 푸트니크 보이보다가 이끄는 최고 사령부의 참모차장이자 그의 오른팔이었다. 제1차 발칸 전쟁 중 쿠마노보 전투 이후 장군으로 진급했다. 제2차 발칸 전쟁의 브레갈니차 전투에서는 불가리아군의 기습에 맞서 대부분의 참모진이 후퇴를 주장했지만, 당시 참모총장 보좌관이었던 미시치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푸트니크를 설득하여 군대가 현재 위치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하도록 명령하게 했고, 이는 전투에서 세르비아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1914년 7월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시치는 건강 문제로 요양 중이던 푸트니크를 대신하여 최고 사령부의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은퇴했던 미시치는 다시 군에 복귀하여 세르비아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14년 12월 콜루바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세르비아 영토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압도적인 승리의 공로를 인정받아 미시치는 보이보다로 진급했다.
1915년 겨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이후 불가리아 합류)의 두 번째 침공으로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 산맥을 통해 대규모 후퇴를 감행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미시치는 적군에 맞서 최후의 저항을 할 것을 주장했지만, 페치에서 열린 회의에서 페타르 1세 국왕과 다른 군 지휘관들에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세르비아군은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를 통해 철수했다. 미시치는 이 힘든 후퇴 과정에서 혹독한 환경 탓에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지만, 이후 회복했다.
1916년 테살로니키 전선에서 미시치는 다시 제1군을 지휘하여 고르니체보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후퇴시켰다. 전쟁 말기인 1918년 6월, 미시치는 최고 사령부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 살로니카 전선 돌파 작전 당시 세르비아군 전체를 지휘했다. 전쟁 후 그는 베오그라드의 군사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1918년 새롭게 수립된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 군대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군 경력은 정점에 달했다.[1]
3. 4. 종전 이후
베오그라드의 군사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1918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 군대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면서 군 경력을 마무리했다.[1]
4. 회고록
미시치는 사망하기 전 프랑스에서 입원해 있는 동안 회고록인 『나의 추억』(Moje uspomenesr)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제2차 발칸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다루었으나, 정작 제2차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 대해서는 집필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회고록에서 미시치는 세르비아의 삶의 현실과 전쟁 참여의 고된 부분을 솔직하게 묘사했다. 특히 경험이 부족한 농민들로 주로 구성된 세르비아군의 현실과, 19세기 후반 세르비아 농민들이 토지 소유 관련 새로운 법률 및 정치 참여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 등을 상세히 다루었다. 또한, 당시 세르비아인들이 얼마나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이었는지에 대한 그의 관찰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러시아 기병대가 전투에 돌입했을 때, 나는 우리 사람들이 얼마나 순진한지 알아차렸다. 우리는 그 기병대가 터키군과 싸우면서 언덕에서 기적을 일으켜 터키군을 전투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기병대는 곧 흩어졌고 다른 방향으로 갔다."라고 기록하며 당시의 순진했던 기대와 현실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5. 죽음
미시치는 1921년 베오그라드 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6. 유산
그는 가장 저명한 세르비아인 100인에 포함되어 있다.
7. 훈장
지보인 미시치는 군 경력 동안 세르비아 왕국 및 여러 외국으로부터 다수의 군사 훈장과 복무 메달을 받았다. 세르비아 국내 훈장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러시아 제국 등 여러 국가로부터 권위 있는 훈장을 받았다. 자세한 수훈 내역은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1. 세르비아 군사 훈장
wikitext훈장 | 등급 |
---|---|
카라조르제 별 훈장 | 기사 십자 대십자장 |
카라조르제 별 훈장 | 대수훈자 |
카라조르제 별 훈장 | 사령관 |
카라조르제 별 훈장 | 장교 |
카라조르제 별 훈장 | 장교 |
백색 독수리 훈장 | 대수훈자 |
백색 독수리 훈장 | 장교 |
타코보 십자 훈장 | 대수훈자 |
타코보 십자 훈장 | 사령관 |
칼이 달린 타코보 십자 훈장 | 기사 |
7. 2. 세르비아 복무 메달
wikitext메달 이름 |
---|
세르비아 적십자 공로 메달 |
용맹 메달, 금장 |
용맹 메달, 은장 |
페타르 1세 기념 메달 |
1876-1878년 튀르키예와의 전쟁 기념 메달 |
1885년 불가리아와의 전쟁 기념 메달 |
군사 공로 메달 |
헌신 복무 메달 |
비도브단 메달 |
제1차 발칸 전쟁 기념 메달 |
제2차 발칸 전쟁 기념 메달 |
제1차 세계 대전 기념 메달 |
알바니아 기념 메달 |
7. 3. 국제 및 외국 훈장
wikitext훈장명 | 등급 | 수여 국가 |
---|---|---|
성 미카엘과 성 조지 훈장 | 명예 기사 십자 대십자장 | 영국 |
프란츠 요제프 훈장 | 기사 십자장 | 오스트리아-헝가리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그랑크루아 | 프랑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그랑 오피시에 | 프랑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코망되르 | 프랑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오피시에 | 프랑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슈발리에 | 프랑스 |
1914–1918년 무공 십자 훈장 | 청동 야자 | 프랑스 |
구세주 훈장 | 대십자장 | 그리스 |
이탈리아 왕관 훈장 | 기사 십자 대십자장 | 이탈리아 |
전쟁 공로 십자장 | 이탈리아 | |
다닐로 1세 훈장 | 기사 지휘관 | 몬테네그로 |
메지디 훈장 | 2등급 | 오스만 제국 |
메지디 훈장 | 3등급 | 오스만 제국 |
루마니아 왕관 훈장 | 대수훈자 | 루마니아 |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 대수훈자 | 러시아 제국 |
성 게오르기 훈장 | 4등급 | 러시아 제국 |
바스 훈장 | 기사 사령관 | 영국 |
군사 공로 십자 훈장 | 오스트리아-헝가리 | |
발칸 전쟁 영국 적십자사 메달 | 영국 | |
육군 공로 훈장 | 미국 | |
미국 적십자사의 공로 메달 |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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