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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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파비우스 가문 출신이다. 기원전 134년 재무관, 기원전 123년 히스파니아 총독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121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 재임 중 갈리아 트란살피나에서 알로브로게스족과 아르베르니족을 격파하여 개선식을 거행하고 '알로브로기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웅변가이자 문인이었으며, 숙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장례 연설을 하기도 했다. 알로브로기쿠스는 승전 기념으로 포룸 로마눔에 파비우스 개선문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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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 |
---|---|
기본 정보 | |
이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
로마자 표기 | Quintus Fabius Maximus Allobrogicus |
아버지 | 퀸투스 아이밀리아누스 파비우스 |
가문 | 파비우스 씨족 |
경력 | |
퀘스토르 | 기원전 134년 |
프라이토르 | 기원전 124년경 |
프로프라이토르 | 기원전 123년 |
집정관 | 기원전 121년 |
프로콘술 | 기원전 120년 |
2. 가문
알로브로기쿠스는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의 명문 귀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기원전 145년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이다.[9] 아이밀리아누스는 본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아들이었으나 파비우스 가문에 양자로 입적되었다. 알로브로기쿠스의 숙부는 저명한 군인이자 정치가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소 스키피오)로, 대 스키피오 아들의 양자로 들어갔다. 알로브로기쿠스는 동명이인 아들을 두었는데, 그는 악행으로 유명했다.[2] 알로브로기쿠스의 손자는 기원전 45년 보충 집정관을 역임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이다.
2. 1. 가계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조부
- *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소(小) 스키피오), 숙부. 대(大) 스키피오의 아들의 양자로 들어감.
-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 부친.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의 양자로 들어감.
-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들[2]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손자
3. 초기 경력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는 기원전 145년 로마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들이자 파비아 씨족의 일원이었다.[9] 기원전 134년 재무관 선거에서 친삼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추천으로 당선되었고,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에서 벌어진 제2차 누만틴 전쟁에 참전하여 4,000명의 자원병을 지휘했다.
기원전 124년 법무관으로 선출되었고, 기원전 123년에는 히스파니아(키테리오르 또는 울테리오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4] 그러나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제안에 따라 스페인 마을에서 곡물을 징발했다는 이유로 원로원의 질책을 받았다.[5]
3. 1. 재무관 시절 (기원전 134년)
알로브로기쿠스는 기원전 134년 재무관 선거에 출마하여 숙부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추천으로 당선되었다.[9] 재무관 취임 후 스키피오와 함께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근 히스파니아)로 파견되어 제2차 누만티아 전쟁 (제2차 켈티베리아 전쟁)에 참전했다. 알로브로기쿠스는 4,000명의 자원병을 지휘했다.[3]3. 2. 법무관 시절 (기원전 124년 ~ 123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는 기원전 124년 이전에 법무관(프라에토르) 직에 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 기원전 123년에는 전직 법무관(프로프라에토르) 자격으로 히스파니아(키테리오르 또는 울테리오르) 총독으로 부임했다.[4]히스파니아 부임 중,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제안에 따라 스페인 마을에서 곡물 징발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원로원의 질책을 받았다.[5]
4. 집정관 시절과 갈리아 전쟁 (기원전 121년 ~ 120년)
기원전 124년 프라에토르에 선출되었고, 기원전 123년에는 히스파니아(키테리오르 또는 울테리오르) 중 한 곳의 프로프라에토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9] 그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제안에 따라 스페인 마을에서 곡물을 갈취했다는 이유로 원로원의 질책을 받았다.[9]
4. 1. 집정관 선출 (기원전 121년)
기원전 121년, 알로브로기쿠스는 루키우스 오피미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9] 그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갈리아 트란살피나(현재의 오베르뉴 및 론알프 지역)에서 알로브로게스와 아르베르니 부족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쳤다.[6]4. 2. 갈리아 원정
기원전 121년, 루키우스 오피미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으로서 갈리아 트란살피나(알프스 북쪽의 갈리아, 현재의 오베르뉴와 론알프 지역)로 파견되어 전직 집정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갈리아인 부족인 알로브로게스족(en)과 아르베르니족에 대항하여 군사 작전을 펼쳤다.[6] 기원전 120년에는 프로콘술로서 계속 갈리아에 머무르며 이들 부족을 상대로 승리하여 개선식을 거행하고 알로브로기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6] 개선식에서는 포로로 잡힌 아르베르니족의 왕 비투이투스(en)가 은 갑옷을 입고 참가하여 웅장함으로 유명했다. 또한, 전리품으로 포룸 로마눔의 비아 사크라 거리에 파비우스 아치를 건설하고, 그 위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7]4. 3. 알로브로기쿠스의 승리와 개선식 (기원전 120년)
기원전 120년, 알로브로기쿠스는 갈리아 총독(프로콘술)으로서 알로브로게스족과 아르베르니족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6] 이 승리로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고 '알로브로기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6] 개선식에는 포로로 잡힌 아르베르니족의 왕 비투이투스가 은색 갑옷을 입고 참가하여 그 웅장함이 돋보였다.[7] 알로브로기쿠스는 전리품 매각 이익으로 포룸 로마눔의 비아 사크라 거리에 파비우스 개선문(Fornix Fabianus)을 건설하고, 그 위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7]5. 이후 활동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는 갈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한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기원전 113년에는 크레타 섬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사절단의 지도자로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08년에는 감찰관에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웅변가이자 문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쳤으며, 숙부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사망했을 때 추모 연설을 하기도 했다.[9]
그는 악행으로 악명이 높았던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를 두었으며, 그의 손자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다.[9]
5. 1. 크레타 파견 (기원전 113년)
기원전 113년, 알로브로기쿠스는 크레타 섬의 여러 도시 간의 내부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의 지도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8] 이 임무를 맡은 인물이 알로브로기쿠스인지, 아니면 그의 사촌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에부르누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5. 2. 감찰관 (기원전 108년)
기원전 108년에 그 또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에부르누스가 감찰관에 임명되었다.[9]5. 3. 웅변가 및 문인으로서의 활동
알로브로기쿠스는 웅변가이자 문인이었다.[9] 기원전 129년 숙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사망하자, 알로브로기쿠스는 추모 연설을 하고 시민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9]6. 평가 및 유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는 로마 공화정 중기의 중요한 군사 지도자이자 정치가였다. 갈리아 트란살피나(오늘날의 오베르뉴 및 론알프 지역)에서 알로브로게스와 아르베르니를 상대로 원정을 벌여 승리했고, 전투에서 승리하여 개선하는 영예를 얻었다.[9] 그의 갈리아에서의 승리는 로마의 갈리아 지배 확장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9] 개선식에는 은색 갑옷을 입은 포로 아르베르니 왕 비투이투스가 포함되어 매우 호화롭게 거행되었다.[9] 알로브로기쿠스라는 칭호는 그의 군사적 업적을 기리는 상징이 되었으며, 파비우스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건축물로 로마에 남았다.[9]
그의 정치 경력은 로마 공화정의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성공 사례를 보여준다. 그는 유명한 웅변가이자 문인이었다. 기원전 129년에 그의 친족 삼촌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사망하자 파비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연회를 제공하고 고인의 장례 연설을 했다.[9] 그러나 그의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방탕한 생활로 악명이 높았다는 점은 가문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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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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