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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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퀸틸루스는 270년에 잠시 로마 황제로 즉위했던 인물이다. 판노니아 인페리오르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났으며,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동생이다. 퀸틸루스는 고티쿠스 사후 군인들의 옹립이나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으나, 기록에 따라 즉위 과정에 차이를 보인다. 그의 통치 기간은 짧았으며, 17일에서 177일로 추정된다. 퀸틸루스는 아퀼레이아에서 사망했으며, 사망 원인 또한 자살, 살해 등 여러 설이 존재한다. 살아남은 기록들은 그를 온건하고 유능한 황제로 평가하며, 원로원의 지지를 받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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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틸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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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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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틸루스 |
로마자 이름 | Marcus Aurelius Claudius Quintillus |
공식 이름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틸루스 아우구스투스 |
출생지 |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시르미움 (스렘스카미트로비차, 세르비아) |
사망일 | 270년 |
사망지 | 아퀼레이아, 이탈리아 |
자녀 | 아들 2명 |
통치 | |
직위 | 로마 황제 |
재위 기간 | 270년 (17–77일) |
이전 통치자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다음 통치자 | 아우렐리아누스 |
2. 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틸루스의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리리아인으로, 그의 주화로 미루어 보아 판노니아 인페리오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기록에서는 시르미움 출신이라고도 한다.[5] 그는 낮은 신분의 가문 출신이었다.
퀸틸루스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동생으로,[6]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주화 등을 통해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지역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된다.[5] 그는 일리리아인으로 낮은 신분의 가문 출신이었으나, 268년 형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황제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형의 재위 기간 동안 사르데냐의 프로쿠라토르(Procurator)로 임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퀸틸루스의 제위 기록은 여러 면에서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의 형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사망한 후 황제로 선포되었는데, 즉위 과정부터 기록이 엇갈린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로마군 병사들이 그를 선출하고 로마 원로원이 이를 승인했다고 기록한 반면, 요안네스 조나라스는 원로원이 직접 선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뉴브 강 유역의 군단은 퀸틸루스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고 그들의 지휘관이었던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퀸틸루스의 통치 기간에 대한 기록은 서로 다르다. 그의 통치는 17일(제롬, 에우트로피우스, 요안네스 조나라스), 77일(필로칼루스), 또는 "몇 달"(조시무스)로 다양하게 보고된다. 현대 학자들은 퀸틸루스가 많은 양의 동전을 발행할 시간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17일'은 더 긴 기간을 잘못 읽은 것으로 추정한다.[2]
살아남은 로마 기록들은 퀸틸루스를 온건하고 유능한 황제로 평가한다. 그는 원로원의 옹호자로 여겨졌으며, 이전 황제인 갈바와 페르티낙스와 비교되기도 했다. 이 세 명의 황제는 모두 원로원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1년의 통치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황제가 맡았던 사제직이 분리되었고,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으로서의 황제 이미지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로마 황제 열전』에 따르면, 사두정치 시대의 로마 황제 중 한 명이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다르다니아 출신의 귀족 에우트로피우스와, 고티쿠스 및 퀸틸루스의 조카인 클라우디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고티쿠스와 퀸틸루스의 외종손이 되며, 그의 자손인 콘스탄티누스 왕조는 고티쿠스나 퀸틸루스와 혈연 관계를 맺게 된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내와 자녀 2명이 있었다고 한다.
[1]
서적
The Cambridge Manual of Latin Epigraph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퀸틸루스는 268년 그의 형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황위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형의 재위 기간 동안 사르데냐의 프로쿠라토르(Procurator)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퀸틸루스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동생으로, 형이 죽은 뒤 황제가 되었다. 그의 즉위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와 『로마 황제 열전』 등에서는 퀸틸루스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며, 형이 죽은 뒤 군대의 병사들의 옹립을 통해 즉위했다고 전한다.[6] 로마의 원로원은 이러한 군대의 추대를 사후 승인하는 형태로 받아들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원로원에 의해 직접 선출되었다거나, 원로원의 요청으로 옹립되어 즉위했다는 설도 있어 기록이 일관되지 않다.[7]
하지만 공식 기록에서는 도나우 강 유역에서 전역을 펼치던 고티쿠스의 군대 내에서 퀸틸루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는 기록은 특별히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병사들은 아우렐리아누스를 옹립했고, 혹은 죽음을 앞둔 고티쿠스 본인이 후계자로 아우렐리아누스를 지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3. 즉위 과정
270년, 형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사망하자 퀸틸루스는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의 즉위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는 그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6] 에우트로피우스는 형의 사망 직후 로마군 병사들에 의해 추대되었고 이후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다고 전한다. 반면 요안네스 조나라스는 원로원 자체에서 그를 선출했다고 기록했으며,[7] 원로원의 요청으로 옹립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7]
그러나 다뉴브 강 유역에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따르던 군단들은 퀸틸루스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아예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신 당시 군대의 지도자였던 아우렐리아누스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죽음을 앞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직접 아우렐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도 한다. 퀸틸루스가 다뉴브 강 유역의 군대 내에서 특별한 활약을 보였다는 기록은 없어, 군대의 지지를 얻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4. 통치와 모순
퀸틸루스의 통치 기간에 대한 기록 역시 매우 상이하다. 제롬과 에우트로피우스, 조나라스는 17일이라고 기록했지만, 필로칼루스의 기록에는 77일, 조시무스는 "몇 달"이라고 언급했다. 현대 학자들은 퀸틸루스가 상당히 많은 양의 동전을 발행할 시간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17일이라는 기록은 오류이거나 더 긴 기간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정한다.[2]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 또한 일치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타 열전''은 퀸틸루스가 엄격한 군사 훈련을 강요하여 병사들의 반발을 사 살해당했다고 전한다. 제롬은 그가 아퀼레이아에서 살해되었다고만 간략히 언급한다. 반면 요안네스 조나라스는 퀸틸루스가 스스로 정맥을 베어 자살했다고 기록했으며,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의사의 도움을 받은 자살이었다고 덧붙였다. 클라우디우스 살마시우스는 덱시푸스가 그의 죽음에 대해 기록했지만 사망 원인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그가 사망한 장소가 아퀼레이아였다는 점은 모든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퀸틸루스는 사망 당시 두 아들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아우구스타 열전''에는 클라우디우스와 퀸틸루스에게 크리스푸스라는 또 다른 형제가 있었고, 그의 딸인 클라우디아가 에우트로피우스와 결혼하여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는 후대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아첨하기 위해 계보를 날조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5. 죽음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 역시 일치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타 열전''은 그가 엄격한 군사 훈련에 반발한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한다. 제롬은 그가 아퀼레이아에서 살해되었다고만 언급하며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요안네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퀸틸루스는 정맥을 베어 자살했다.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이 자살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고 덧붙이며 조나라스의 기록에 동의한다. 클라우디우스 살마시우스는 덱시푸스가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고 기록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모든 기록은 그의 죽음이 아퀼레이아에서 일어났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퀸틸루스는 사망 당시 두 아들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6. 평가
7. 콘스탄티누스 가문과의 관계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은 이 계보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손자인 콘스탄티누스 2세가 자신들의 가문을 명망 높은 두 황제의 후손으로 보이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고티쿠스, 퀸틸루스 사이에는 실제 혈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8. 가족 관계
참조
[2]
서적
Aurelian and Probus
https://books.google[...]
Pen and Sword
[3]
문서
In 고전 라틴어|Classical Latin, Quintillus' name would be inscribed as MARCVS AVRELIVS CLAVDIVS QVINTILLVS AVGVSTVS.
[4]
문서
Jones, pg. 759
[5]
문서
"These men are usually called the Illyrian emperors since they all were born in that province (Illyricum) and were raised to power by legions stationed there." The Ancient World, Joseph Ward Swain
[6]
문서
Eutropius IX:12
[7]
문서
Zonaras,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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