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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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두정치는 '네 명의 통치자'를 의미하며, 권력이 네 명에게 분배되는 통치 형태를 말한다. 고대에는 유대 사두정치와 같이 독립적인 지도자 아래에서 통치되는 왕국의 독립적인 부분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는 로마 제국을 4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하고 공동 황제로 승격시켜 이두정치를 시작했으며, 이후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1세를 부제로 임명하여 제국을 4분할하는 사두정치를 수립했다. 사두정치 체제는 3세기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의 안정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으나, 황제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붕괴되었고, 제국 분할 통치와 권력 분산의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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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정치 | |
---|---|
개요 | |
![]() | |
정의 | 네 명의 통치자에 의한 로마 권력 분할 체제 |
어원 | 그리스어 τετραρχία (tetrarkhía, "4분의 1 구역"을 의미) |
로마자 표기 | Tetrarchia (테트라르키아) |
영어 | Tetrarchy (테트라키) |
연대기 | |
디오클레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 284–286년 |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 | 285–286년 |
막시미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서방 및 동방의 아우구스티) | 286–305년 |
콘스탄티우스 1세와 갈레리우스 (카이사르) | 293–305년 |
콘스탄티우스 1세와 갈레리우스 (서방 및 동방의 아우구스티) | 305–306년 |
세베루스 2세와 막시미누스 2세 (카이사르) | 305–306년 |
세베루스 2세와 갈레리우스 (서방 및 동방의 아우구스티) | 306–307년 |
콘스탄티누스 1세 (자칭 아우구스투스) | 306–337년 |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의 찬탈자) | 306–308년 |
갈레리우스 (아우구스투스) | 307–308년 |
막시미누스 2세 (카이사르) | 307–313년 |
콘스탄티누스 1세 (자칭 아우구스투스) | 307–337년 |
리키니우스와 갈레리우스 (서방 및 동방의 아우구스티) | 308–311년 |
막시미누스 2세와 콘스탄티누스 1세 (카이사르) | 308–313년 |
막센티우스 (로마의 찬탈자) | 308–312년 |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 2세 (서방 및 동방의 아우구스티) | 311–313년 |
콘스탄티누스 1세 (자칭 아우구스투스) | 311–337년 |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서방 및 동방의 아우구스티) | 313–324년 |
리키니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 크리스푸스 (카이사르) | 317–326년 |
발레리우스 발렌스 (서방의 아우구스투스) | 316–317년 |
마르티니아누스 (서방의 아우구스투스) | 324년 |
계승 | |
이전 | 3세기의 위기 |
이후 | 콘스탄티누스 왕조 |
2. 용어
'사두정치'(四頭政治)는 τετραρχία|테트라르키아el, 즉 "네 사람의 지도력"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권력이 네 명의 개인에게 분배되는 모든 형태의 정부를 설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사두정치'(四頭政治, τετραρχία|테트라르키아el, "네 사람의 지도력")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권력이 네 명의 개인에게 분배되는 모든 형태의 정부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고대에도 '사두정치'라는 용어는 사용되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황제 협의회를 지칭하는 데 쓰이지는 않았다. 대신, 이 용어는 주로 헤로데 대왕 사후에 세워진 유대 사두정치처럼, 독립적인 지도자 아래에서 통치되는 왕국의 분할된 지역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대 플리니우스는 이러한 형태의 사두정치를 "각각은 왕국과 같으며, 또한 왕국의 일부이다"(regnorum instar singulae et in regna contribuuntur|레그노룸 인스타르 싱굴라이 에트 인 레그나 콘트리부운투르la)라고 설명했다.[1][8]
고대의 사두정치, 특히 유대 사두정치는 네 개의 독립적이고 별개인 영토로 구성되었으며, 각 통치자는 자신의 재량에 따라 할당된 지역을 다스렸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사두정치와는 다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는 로마 제국이라는 단일 체제 아래 네 명의 통치자가 권력을 분담하는 형태였으며, 특히 아우구스투스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다른 카이사르들보다 우위에 있는 계층적 구조를 가졌다. 즉, 단일 최고 지도자가 이끄는 일종의 추기경단과 유사했다. 후대의 역사가 암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갈루스의 불복종을 꾸짖을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부하들의 복종을 예로 들었다고 기록했다. 율리아누스 황제 역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사두정치자들을 최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목소리를 내는 합창단에 비유했다.[2] 반면,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락탄티우스는 사두정치자들을 단순히 여러 명의 통치자로 언급하기도 했다.[3]
현대 역사학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를 '사두정치'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치를 "새로운 제국"으로 묘사했지만 '사두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테오도어 몸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용어는 1887년 독일의 학교 교사 헤르만 실러가 그의 저서 ''로마 황제 시대사''(Geschichte der Römischen Kaiserzeit|게쉬히테 데어 뢰미셴 카이저차이트de)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사두정치"(die diokletianische Tetrarchie|디 디오클레티아니셰 테트라르히de)라고 처음 사용하면서 학계에 등장했다. 하지만 이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897년 오토 제크가 사용한 이후부터이다.[4][9]
이 외에도 고대 테살리아, 갈라티아, 영국의 칸티아치족 사이에서도 사두정치 형태의 통치가 존재했다. 소설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서는 페벤시 남매가 두 명의 왕과 두 명의 여왕으로 나니아를 다스리는 사두정치 형태로 묘사되기도 한다.
3. 역사
"사두정치자"라는 용어는 고대에 통용되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만든 체제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고대에는 별도의 지도자가 통치하는 왕국의 독립적인 부분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헤로데 대왕 사후에 설립된 유대 사두정치가 고대 사두정치의 가장 유명한 예이다. 이 용어는 라틴 세계에서도 이해되었는데, 대 플리니우스는 "각각은 왕국과 같으며, 또한 왕국의 일부이다"(regnorum instar singulae et in regna contribuunturla)라고 설명했다.[1]
고대인들이 사용한 사두정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체제와는 다른 정부 형태를 의미했다. 유대 사두정치는 네 개의 독립적이고 별개의 국가로 구성되었으며, 각 사두정치자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왕국의 4분의 1을 통치했다. 반면 디오클레티아누스 사두정치는 단일 최고 지도자(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가 이끄는 일종의 추기경단과 유사한 구조였다. 후대의 로마 역사가들도 이 점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암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갈루스의 불복종을 꾸짖을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의 부제들이 보였던 복종을 예로 들었다고 기록했다. 율리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사두정치자들을 최고 지도자를 둘러싼 합창단에 비유하며, 그의 지휘 하에 일제히 발언했다고 묘사했다.[2]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동시대인이자 그의 체제에 비판적이었던 락탄티우스만이 사두정치자들을 단순히 다수의 통치자로 언급했다.[3]
현대 학문에서는 '사두정치'라는 용어가 비교적 늦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정부를 "신 제국"으로 묘사했지만 '사두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테오도어 몸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용어는 1887년 독일의 학교 교사 헤르만 실러가 로마 제국에 관한 핸드북(''Geschichte der Römischen Kaiserzeit'')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사두정치'(die diokletianische Tetrarchiede)라고 처음 사용하면서 문헌에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1897년 오토 제크가 사용하기 전까지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4]
3. 1. 사두정치의 성립
284년 황제로 즉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점진적으로 권력을 분산하며 사두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첫 단계는 이두정치(Diarchy, 두 사람의 통치)의 수립이었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핵심 측근이자 장군이었던 막시미아누스를 부제(카이사르, 황태자)로 임명했고, 이듬해인 286년에는 공동 황제(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동방 지역을,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 본토를 포함한 서방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게 되었다. 이는 중요도가 높은 동방 속주 관리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집중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광대한 제국 영토, 특히 국경 분쟁이 잦은 동방과 넓은 후방 지역을 가진 서방을 황제 한 명씩만으로 관리하는 데 어려움이 드러났다. 이에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시민 문제와 군사 문제에 대한 집중도를 높일 필요성을 느끼고, 막시미아누스의 동의를 얻어 두 명의 부제(카이사르)를 추가로 임명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 아래에는 갈레리우스를,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 아래에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각각 부제로 임명하여 제국을 4명의 통치자가 나누어 다스리는 사두정치 체제를 확립했다.[5]
305년, 선임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공동으로 퇴위하여 은퇴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부제였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갈레리우스가 각각 서방과 동방의 정제(아우구스투스)로 승격했다. 비어있는 부제 자리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임명되었는데, 서방에는 세베루스 2세가, 동방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각각 부제(카이사르)로 임명되어 두 번째 사두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사두정치는 통치자 구성원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3. 2. 사두정치의 구조와 운영
사두정치 체제에서 4명의 황제는 로마가 아닌 국경과 가까운 다른 도시들에 거점을 두었다. 이는 주로 제국의 국경을 위협하는 사산 제국 페르시아나 게르만족을 비롯한 외부 세력에 대한 방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본부 역할을 했다. 이 중심지들을 사두정치 수도라고 부르지만, 로마는 여전히 제국 전체의 명목상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독자적인 수도 장관(praefectus urbi|프라이펙투스 우르비la)의 관할 하에 있었다.[10] 이탈리아 본토 역시 사두정치령과는 별개로 취급되었다.
4개의 사두정치 수도는 다음과 같다.
수도 | 위치 (현재) | 담당 황제 | 주요 역할 및 담당 구역 |
---|---|---|---|
니코메디아 | 터키 이즈미트 |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 | 발칸 반도 및 사산 제국 방면 방어 기지. 오리엔스 도(praefectura praetorio Orientis|프라이펙투라 프라이토리오 오리엔티스la) 관할. |
시르미움 | 세르비아 스렘스카미트로비차 |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 | 발칸 반도 및 도나우강 유역 방어. 일리리쿰 도(praefectura praetorio per Illyricum|프라이펙투라 프라이토리오 페르 일리리쿰la) 관할. |
메디올라눔 (밀라노) | 이탈리아 밀라노 |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 | 알프스 산맥 인근 방어. 이탈리아 도(praefectura praetorio Italiae|프라이펙투라 프라이토리오 이탈리아이la) 관할 (히스파니아, 이탈리아, 아프리카). |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트리어) | 독일 트리어 |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 라인강 방면 방어. 갈리아 도(praefectura praetorio Galliarum|프라이펙투라 프라이토리오 갈리아룸la) 관할. |
이 4개 도시 외에도 아드리아해 연안의 항구 도시 아퀼레이아와 브리타니아 북부의 에보라쿰(Eboracum|에보라쿰la, 현재 요크) 역시 각각 막시미아누스와 콘스탄티우스에게 중요한 거점이었다.
지역 통치에 있어서 4명의 황제 사이에 명확하고 고정된 영토 구분은 없었다. 사두정치는 로마 제국이 4개의 독립된 국가로 분열된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각 황제는 자신의 영향력 범위를 가졌지만, 이는 주로 군사적 최고 지휘권에 기반했으며, 황제들은 종종 직접 전선에 나섰다. 황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의 행정은 각 프라이토리아니 장관(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이 이끄는 관료 조직에 위임되었으며, 이들은 다시 여러 비카리(총독)를 통해 민간 교구를 감독하는 계층적 구조를 이루었다. 서방에서는 정제 막시미아누스가 아드리아해 서쪽과 시르티스 만 내의 속주를, 부제 콘스탄티우스가 그 안의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주로 담당했다. 반면 동방에서는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부제 갈레리우스 사이의 역할 분담이 비교적 유연하게 운영되었다. 일부 후대 기록가들은 4명의 황제에게 확고한 세력 구분이 있었다고 기술했지만, 이는 사두정치의 실제 운영 방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두정치 체제 하에서는 권력이 나뉘었지만, 3세기의 혼란 이후 제국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제국 대학의 네 구성원의 공적 이미지는 '나눌 수 없는 유산'(patrimonium indivisum|파트리모니움 인디비숨la)이라는 통일된 제국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신중하게 관리되었다. 모든 공식 초상화에서 황제들은 동일한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사두정치 시대에 발행된 주화 역시 모든 황제를 동일한 특징으로 묘사하여 오직 주화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서만 누구를 나타내는지 구별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대성당에 있는 유명한 조각상인 ''네 명의 사두정치제 황제 초상'' 역시 네 황제를 동일한 특징과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보여준다.
3. 3. 군사적 성공
3세기의 위기 시대 황제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한 번에 한 전선에서만 군대를 직접 지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나 프로부스 같은 황제들은 군대를 이끌고 수천 마일 떨어진 전장을 오가기도 했지만, 이는 이상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또한, 황제가 없는 지역에서 부하 장군에게 지휘권을 맡기는 것은 위험했는데,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이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사두정치 체제는 이러한 군사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두정치와 사두정치 체제 모두 여러 명의 황제가 각자 책임 지역을 맡아 위기 발생 시 해당 지역에 가까이 머무를 수 있게 했다. 이를 통해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황제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사두정치에서는 2명의 정제(아우구스투스)와 2명의 부제(카이사르)가 있었지만, 네 명의 황제는 본질적으로 동등한 지위와 권한을 가졌다.
이러한 체제 덕분에 사두정치 시대에는 여러 중요한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 갈레리우스: 296년 페르시아에게 패배했지만, 298년에는 나르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갈레리우스는 페르시아 황족을 포로로 잡고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으며, 로마에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이후 수십 년간 동방 국경의 안정을 가져왔다.
- 콘스탄티우스: 브리타니아에서 제위를 찬탈했던 알렉투스를 격파하고 브리타니아를 로마 제국에 복귀시켰다.
- 막시미아누스: 갈리아 지역의 반란과 소요를 진압하여 서방 지역을 안정시켰다.
-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집트에서 발생한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3. 4. 사두정치의 붕괴와 내전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면서 제1차 사두정치는 막을 내리고,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1세가 정제로 승격했다. 새로운 부제로는 막시미누스 다자(동방)와 세베루스 2세(서방)가 임명되어 제2차 사두정치가 시작되었다.그러나 이 체제는 306년 콘스탄티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콘스탄티우스의 군대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했고, 로마에서는 막센티우스(막시미아누스의 아들)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선언했다. 막센티우스는 307년 서방 정제로 승격된 세베루스 2세를 격파하고 살해했으며,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정제를 자칭했다. 이로 인해 308년에는 갈레리우스, 콘스탄티누스, 막시미아누스, 막센티우스 네 명이 정제를 주장하는 혼란이 발생했다.
308년 카르눈툼 회의에서 리키니우스를 새로운 서방 정제로 임명하고 기존 인물들의 지위를 정리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누스 다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막센티우스는 찬탈자로 규정되었다. 결국 309년에는 갈레리우스, 리키니우스, 콘스탄티누스, 막시미누스 다자까지 총 4명의 공식적인 정제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309년부터 313년까지 제국은 황제 자리를 둘러싼 내전에 휩싸였다. 이 과정에서 주요 경쟁자들이 차례로 제거되었다.
- 310년: 막시미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제거됨.
- 311년: 갈레리우스가 병사함.
-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함.
- 313년: 리키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를 패배시키고 제거함.
313년 내전이 일단락되면서 제국에는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만이 남게 되었다. 이로써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구축한 사두정치 체제는 사실상 붕괴했다. 두 황제 간의 불안정한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리키니우스를 최종적으로 격파하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면서 사두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6]
3. 4. 1. 콘스탄티누스 왕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면서 제2차 사두정치가 시작되었으나,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306년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군대에 의해 정제로 추대되었고, 동시에 막센티우스(막시미아누스의 아들)도 로마에서 황제를 선언하며 혼란이 가중되었다. 막센티우스는 서방의 새로운 정제 세베루스를 307년에 살해하고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정제를 자칭했다. 이로써 308년에는 갈레리우스, 콘스탄티누스 1세, 막시미아누스, 막센티우스 네 명이 정제를 주장하는 복잡한 상황이 되었다.308년,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선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카르눈툼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리키니우스를 서방 정제로, 콘스탄티누스 1세를 그의 부제로 임명했다. 막센티우스는 찬탈자로 규정되었고, 막시미아누스는 다시 은퇴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실효성이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리키니우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들에게 부제의 별칭이자 정제 계승권을 의미하는 '정제의 아들'(filius Augusti|필리우스 아우구스티la)이라는 명목상의 칭호를 부여하여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309년 두 사람 모두 정제로 인정받게 되면서, 4명의 정제가 서로 대립하는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이후 몇 년간 황제 자리를 둘러싼 내전이 이어졌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0년 막시미아누스를 처형했고,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여 서방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동방에서는 311년 갈레리우스가 병사하고, 313년 리키니우스가 타르수스에서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제거하여 동방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제국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라는 두 황제 체제로 재편되었다.
두 황제의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를 최종적으로 격파하고 제국의 유일한 정제가 되었다. 이로써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했던 사두정치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한 단독 통치 시대, 즉 콘스탄티누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3. 4. 2. 사두정치의 유산
사두정치 체제는 313년까지 지속되었지만, 그 여러 측면은 이후 로마 제국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제국의 4분할된 지역 구분은 각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praefectus praetorio)가 관리하는 프라이토리안 대관구(praefectura praetorio) 형태로 이어졌으며, 대관구 아래에는 행정 단위인 로마 교구(dioecesis)가 존재했다. 또한, 여러 속주를 관할하는 군사 사령관직인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의 권한 범위 설정에도 사두정치의 지역 구분이 영향을 주었다.황제의 권력을 여러 명이 나누어 다스리는 기존의 개념인 콘소르티움 임페리(consortium imperii)와, 혈연보다는 능력을 중시하여 후계자를 지명하는 관례는 사두정치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동서 분할이라는 개념 역시 지속되어, 결국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후 제국은 실질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는 결과를 낳았지만, 중요한 점은 제국이 공식적으로 분할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로마와 서로마의 황제는 이론상 하나의 로마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는 형태였으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 말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이 유일한 로마 제국의 정식 계승자로 남게 되었다.
4. 사두정치 시대의 황제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전체, 그리고 동방')
(20년 5개월 11일)
갈레리우스 (카이사르, 293년 3월 1일–305년 5월 1일)
콘스탄티우스 1세 (카이사르, 293년 3월 1일–305년 5월 1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서방')
(19년 1개월; 은퇴)
306년 10월 28일 – 308년 11월
(복위)
310년
(재복위 시도)
갈레리우스 (카이사르, 293년 3월 1일–305년 5월 1일; 아우구스투스, 306년 말-308년 11월)
콘스탄티우스 1세 (카이사르, 293년 3월 1일–305년 5월 1일)
막센티우스 (공동 아우구스투스, 306년 10월 28일–308년)
콘스탄티누스 1세 (적대 아우구스투스, 306년 7월 25일; 공동 아우구스투스, 307년–308년)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동방')
(6년 4일)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293년 3월 1일–305년 5월 1일; 복위 아우구스투스, 306년 말–308년 11월)
콘스탄티우스 1세 (카이사르, 293년 3월 1일; 공동 아우구스투스, 305년 5월 1일–306년 7월 25일)
세베루스 2세 (카이사르, 305년 5월 1일; 공동 아우구스투스, 306년 8월–307년 4월)
막센티우스 (적대 아우구스투스, 306년 10월 28일–311년 5월 5일)
리키니우스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임명, 308년 11월 11일–311년 5월 5일)
막시미누스 2세 (카이사르, 305년 5월 1일; 공동 아우구스투스, 310년 5월 1일–311년 5월 5일)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서방')
(1년 2개월 24일)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286년 4월 1일–305년 5월 1일)
갈레리우스 (카이사르, 293년 3월 1일; 공동 아우구스투스, 305년 5월 1일–306년 7월 25일)
세베루스 2세 (카이사르, 305년 5월 1일 – 306년 7월 25일)
막시미누스 2세 (카이사르, 305년 5월 1일–306년 7월 25일)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누스
('서방'', 이후 전체)
(18년 1개월 25일;
단독 황제 324–337)
막센티우스 (적대 아우구스투스, 306년–312년)
리키니우스 (적대 아우구스투스, 308년–310년; 공동 아우구스투스, 310년–316년; 적대, 316년–324년)
크리스푸스 (카이사르, 317년 3월 1일–324년)
콘스탄티누스 2세 (카이사르, 317년 3월 1일–324년)
마르티니아누스 (적대 아우구스투스, 324년)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서방')
(약 8개월)
막센티우스 (적대 아우구스투스, 306년 10월 28일–307년 4월)
콘스탄티누스 1세 (적대 아우구스투스, 306년 7월 25일–307년 4월)
막시미누스 2세 (카이사르, 305년 5월 1일–307년 4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
('서방')
(6년)
세베루스 2세 (적대 아우구스투스, 306년 8월–307년 4월)
리키니우스 (적대 아우구스투스, 308년 11월 11일–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 1세 (적대 아우구스투스, 306년 7월 25일–312년 10월 28일)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
('서방, 이후 동방')
(15년 10개월 8일)
발렌스 1세 (서방 아우구스투스로 임명, 316년 10월–317년 2월)
리키니우스 2세 (카이사르, 317년 3월 1일–324년)
크리스푸스 (카이사르, 317년 3월 1일–324년)
콘스탄티누스 2세 (카이사르, 317년 3월 1일–324년)
마르티니아누스 (서방 아우구스투스로 임명, 324년 7월–9월)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동방')
(3년)
갈레리우스 (아우구스투스, 305년 5월 1일–311년 5월 5일)
세베루스 2세 (카이사르, 305년 5월 1일; 아우구스투스 306년 8월–307년 4월)
막시미아누스 (아우구스투스, 306년 말–308년 11월)
막센티우스 (적대 아우구스투스, 310년–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 (적대 아우구스투스, 310년–313년)
리키니우스 (아우구스투스, 308년–313년; 적대 아우구스투스, 3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