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키레네 학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키레네 학파는 기원전 4세기경 아리스티푸스에 의해 창시된 쾌락주의 철학 학파이다. 이들은 육체적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현재의 감각 경험을 유일하게 확실한 지식으로 간주하는 회의주의적 인식론을 펼쳤다. 쾌락 추구 과정에서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고, 현명하게 쾌락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기 키레네 학파는 교리를 변형하여 삶의 목표를 고통 회피로 보거나, 정신적 쾌락을 강조하기도 했다. 키레네 학파는 공리주의와 불교 사상에 영향을 미쳤으며,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재조명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대철학 학파 - 피타고라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는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를 중심으로 수(數)를 만물의 근원으로 보고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탐구하며 수학, 음악, 천문학 등에서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키고 영혼 불멸, 윤회, 채식주의 등의 신념을 공유하며 후대 철학 및 과학 사상에 영향을 미친 학파이다.
  • 고대철학 학파 - 소요학파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립한 소요학파는 리케이온 산책로에서 이름을 얻었으며 그의 철학적, 과학적 사상을 탐구했지만, 그의 사후 쇠퇴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재정비를 통해 스콜라 철학과 이슬람 철학 등에 큰 영향을 주었고, 윤리학은 한국 사회 도덕 교육에, 정치사상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 고대 그리스 철학 - 피타고라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는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를 중심으로 수(數)를 만물의 근원으로 보고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탐구하며 수학, 음악, 천문학 등에서 독자적인 이론을 발전시키고 영혼 불멸, 윤회, 채식주의 등의 신념을 공유하며 후대 철학 및 과학 사상에 영향을 미친 학파이다.
  • 고대 그리스 철학 - 소요학파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립한 소요학파는 리케이온 산책로에서 이름을 얻었으며 그의 철학적, 과학적 사상을 탐구했지만, 그의 사후 쇠퇴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재정비를 통해 스콜라 철학과 이슬람 철학 등에 큰 영향을 주었고, 윤리학은 한국 사회 도덕 교육에, 정치사상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인용한 문서 - 장미 전쟁
    장미 전쟁은 1455년부터 1487년까지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시작되어 헨리 7세의 승리로 튜더 왕조가 건국되면서 종결된 일련의 내전입니다.
  •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인용한 문서 - 샤를 8세
    샤를 8세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왕으로, 브르타뉴 여공작과의 결혼으로 브르타뉴를 프랑스에 통합하고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큰 성과 없이 사망하여 발루아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었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프랑스에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키레네 학파
개요
유형고대 그리스 철학 학파
창시자아리스티포스
주요 인물아리스티포스
헤게시아스
아나케리스
키레네의 테오도로스
에우헤메로스
주요 사상쾌락주의, 감각주의, 주관주의
영향 받은 학문에피쿠로스주의
명칭
영어Cyrenaics

2. 철학

키레네 학파는 쾌락주의와 회의주의적 인식론을 핵심 철학으로 삼았다.

키레네 학파는 쾌락, 그 중에서도 육체적 만족을 최고의 선으로 여겼다. 정신적인 쾌락보다 육체적 쾌락이 더 강렬하고 선택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으며, 당장의 쾌락을 미루는 것을 부정했다. 이러한 점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와는 차이를 보인다.

또한, 키레네 학파는 회의주의적 인식론을 통해, 인간은 당면한 감각 경험은 얻을 수 있지만, 그 감각을 일으키는 대상의 본질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꿀을 핥아 '달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꿀이 달다'는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경험 역시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고 보았다.

쾌락주의자로서 키레네 학파는 쾌락을 인생의 유일한 선으로, 고통을 악으로 여겼다. 이들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좋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조차 쾌락의 유익성을 인정하고 행복을 도덕적 행동의 부차적인 목적으로 보았는데, 아리스티포스와 그 제자들은 쾌락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미덕은 본원적인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당면한 감각만이 인식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논리적, 물리적 과학은 쓸모없다고 여겼다(프로타고라스 참조). 감각은 순전히 주관적이며, 폭력적이면 불쾌하고, 평온하면 보통이며, 온화하면 즐거운 '운동'이었다. 감각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대상의 인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막연한 감정만이 인식과 행위의 유일한 척도이며, 그 감정을 품은 상태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키레네 학파는 소피스트의 비판적 회의주의를 넘어, 인류를 위한 보편적 목적을 추론했다. 모든 감정은 찰나적이고 등질적이므로, 과거와 미래의 쾌락은 실재가 아니며, 현재의 쾌락 사이에는 구별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지성의 고차적 쾌락을 말했지만, 키레네 학파는 육체적인 쾌락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순간적이고 세속적인 쾌락이 인간에게 유일한 선이라고 했다.

아리스티포스는 찰나적 쾌락을 일으키는 행위가 고통을 수반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선악의 관습적 구별을 바탕으로 법과 관습을 준수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키레네 학파 쾌락주의 발전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쾌락주의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키레네 학파의 사회적 의무 인식과 이타적 감정의 쾌락주의적 가치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제러미 벤담 등 근현대 공리주의자들처럼, 키레네 학파는 선악에 대한 일반적 판단을 불신하고, 법과 관습에만 기초한다고 보았다. 쾌락을 추구하는 현자는 악이나 부정을 자제해야 한다는 원리를 결합했다. 볼네, 윌리엄 페일리 등의 학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개념은 후기 키레네 학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다.

2. 1. 쾌락주의

키레네 학파는 쾌락, 특히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육체적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보았다. 이들은 정신적인 쾌락보다 육체적 쾌락이 더 강렬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8] 쾌락을 유일한 선으로, 고통을 유일한 악으로 간주했다.[5][9]

키레네 학파는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미래의 쾌락을 위해 현재의 쾌락을 희생하는 것을 부정했다. 모든 감정은 순간적이고 동질적이므로, 과거와 미래의 쾌락은 실재하지 않으며 현재의 쾌락 사이에는 구별이 없다고 보았다.[12] 소크라테스는 지적인 쾌락을 더 높이 평가했지만, 키레네 학파는 이러한 구별을 부정하고 육체적 쾌락이 더 단순하고 강렬하여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8]

덕 자체는 가치가 없다고 보았지만, 법과 관습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쾌락 추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8] 이들은 사회적 의무와 이타적 행동의 쾌락주의적 가치를 인정했으며, 옳고 그름에 대한 대중의 판단이 법과 관습에만 근거한다고 믿었다. 제러미 벤담,[12] 볼네 같은 공리주의자들처럼, 쾌락을 추구하는 현자는 부정을 피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졌다.

2. 2. 회의주의적 인식론

키레네 학파는 우리가 직접적인 감각 경험을 통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있지만(예: "내가 단맛을 느낀다"), 이러한 감각을 유발하는 대상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예: "꿀이 달콤하다")고 생각했다.[10][5] 또한, 다른 사람의 경험이 어떠한지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11]

모든 지식은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에 관한 것이며, 이러한 감각은 순전히 주관적인 운동이다. 격렬하면 고통스럽고, 평온하면 무관심하고, 부드러우면 즐겁다.[5][12] 또한 그것들은 완전히 개별적이며 객관적으로 세상에 속한다고 설명될 수 없다. 따라서 감정은 지식과 행동의 유일한 가능한 기준이다.[5] 우리가 영향을 받는 방식만이 알려질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키레네 학파는 논리학을 진리의 기준에 관한 기본적인 교리로 축소했다.[10] 그들은 논리적·물리적인 과학은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2. 3. 윤리적 함의

키레네 학파는 사회적 의무와 이타적 행동의 쾌락주의적 가치를 인정했다.[8] 타인과의 관계에서 얻는 즐거움, 우정, 정의 등이 쾌락의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8] 쾌락을 추구하는 현명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악이나 부정으로 여겨지는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키레네 학파는 즉각적인 쾌락을 주는 행동이 때로는 그 이상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은 쾌락에 얽매이기보다는 쾌락을 통제해야 하며, 삶의 다양한 쾌락을 평가하기 위한 판단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14] 법과 관습은 그 자체로는 본질적인 가치가 없지만, 이를 위반하면 타인으로부터 불쾌한 처벌을 받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8]

이러한 관점은 제러미 벤담,[12] 볼네, 윌리엄 페일리 등 근현대 주요 공리주의자들의 사상과 유사하며, 후기 키레네 학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2. 4. 후기 키레네 학파

안니케리스, 헤게시아스, 테오도로스 등 후기 키레네 학파 철학자들은 기존의 키레네 학파 교리를 수정하고 발전시켰다.[15]

안니케리스는 개별적인 만족 행위를 통해 쾌락을 얻는다고 보았지만,[15] 가족, 국가, 우정, 감사와 같은 가치를 강조하며, 이러한 것들이 희생을 통해 쾌락을 제공한다고 보았다.[16]

헤게시아스는 에우다이모니아는 달성 불가능하다고 믿었으며,[15] 삶의 목표는 고통과 슬픔을 피하는 것이라고 보았다.[14] 부, 빈곤, 자유, 노예 등은 무관심하며 고통보다 더 많은 쾌락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보았다.[17] 헤게시아스에게 키레네 쾌락주의는 삶의 고통에 대처하기 위한 가장 비합리적인 전략이었다.[15]

테오도로스는 삶의 목표를 정신적 쾌락으로 보았으며,[18] 절제와 정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9] 그는 무신론자로도 유명하다.[18] 이들은 모두 에피쿠로스 학파의 도전에 대응하려 했다.[7]

헤게시아스 시대의 키레네 학파 철학은 피론주의, 에피쿠로스 학파, 불교와 유사하게 발전했다.[20] 특히 사성제 개념에서 불교 교리와 놀라운 유사점이 있다.[20]

키레네의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와 기원전 276년부터 독립한 왕 키레네의 마가스는 아쇼카 인도 왕의 칙령에 따르면 불교 선교사들의 수혜자였다고 주장된다.[20][21][22] 따라서 헤게시아스는 기원전 3세기에 파견된 선교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불교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24]

3. 역사

아리스티푸스는 기원전 435년경 키레네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아테네로 건너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1]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처형 이후, 그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1세의 궁정에서 잠시 살았다고 전해진다.

아리스티푸스가 키레네 학파의 교리를 직접 정립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1]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소티온과 파이에티우스를 인용하여 아리스티푸스가 많은 책을 저술했다고 주장했지만, 소시크라테스는 아리스티푸스가 아무것도 저술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2]

아리스티푸스의 제자 중에는 그의 딸인 키레네의 아레테가 있었고, 아레테는 자신의 아들인 소 아리스티푸스를 가르쳤다. 아리스토클레스에 따르면,[3] 소 아리스티푸스가 키레네 철학을 체계화했다.[4] 그러나 키레네 철학의 기초는 아리스티푸스(아버지)가 시작하고, 아레테가 다듬었으며, 소 아리스티푸스(손자)가 더욱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5]

소 아리스티푸스 이후, 학파는 안니케리스, 헤게시아스, 테오도로스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에피쿠로스쾌락주의 철학에 대응하여 키레네 교리를 다르게 해석했다.[6] 기원전 3세기 중반, 키레네 학파는 에피쿠로스 학파에 밀려 쇠퇴하였다.[7]

4. 주요 철학자

5. 영향

키레네 학파는 에피쿠로스 학파에 흡수되면서 직접적인 영향력은 사라졌지만, 이들이 제시한 쾌락주의와 회의주의적 인식론은 후대 철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15] 특히,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등의 공리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16]

후기 키레네 학파인 헤게시아스의 철학은 불교, 특히 사성제와 고(苦) 사상과의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한다.[20] 당시 키레네의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와 키레네의 마가스는 아쇼카 인도 왕의 칙령에 따라 불교 선교사들을 받아들였다고 알려져 있다.[20][21][22] 이러한 배경 때문에 헤게시아스가 불교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된다.[23][24]

안니케리스는 쾌락을 개별적인 만족 행위를 통해 얻는다고 보았지만, 가족, 국가, 우정, 감사와 같은 가치를 강조하며 희생을 통해 얻는 쾌락도 인정했다.[16] 헤게시아스에우다이모니아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삶의 목표는 고통과 슬픔을 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4] 그는 부, 빈곤, 자유, 노예와 같은 가치는 무관심하며, 고통보다 더 많은 쾌락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보았다.[17] 테오도로스는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강조하고, 절제와 정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8][19]

참조

[1] 서적
[2] 문서 Diogenes Laërtius, ii. 84f
[3] 문서 Aristocles ap. Eusebius, ''[[Praeparatio Evangelica]]'', xiv. 18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문서 Cicero, ''Tusc''. V.52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Berenice II and the Golden Age of Ptolemaic Egypt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1] 서적 Ashoka: The Search for India's Lost Emperor https://books.google[...] Hachette UK
[22] 서적 Berenice II Euergetis: Essays in Early Hellenistic Queenship https://books.google[...] Springer
[23] 웹사이트 Éric Volant, ''Culture et mort volontaire'' http://agora.qc.ca/t[...]
[24]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Ancient Greek Philosophy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