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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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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251년부터 253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군사적 경력을 쌓아 모에시아 수페리오르의 총독을 역임했다. 데키우스 황제 사망 후 황위에 올랐으며, 고트족과의 평화 협정을 맺었으나, 이는 로마 시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동방과 북방의 위협에 직면했으며, 기독교 박해를 시도했다는 설도 있다. 253년, 아밀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막으려다 자신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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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황제의 청동 조각상 (세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황제의 청동 조각상.
칭호로마 황제
재위 기간251년 6월 경 – 253년 8월
선임자데키우스
후임자아이밀리아누스
공동 황제호스틸리아누스(251년)
볼루시아누스(251년–253년)
출생일206년 경
출생지이탈리아
사망일253년 8월 경 (47세)
사망지인테람나
배우자아피니아 게미나 바에비아나
자녀볼루시아누스, 비비아 갈라
전체 이름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재위명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아우구스투스

2. 초기 생애와 경력

갈루스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유서 깊은 에트루리아인 혈통의 원로원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아피니아 게미나 바에비아나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훗날 공동 황제가 되는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이고 딸은 비비아 갈라였다.

그의 초기 경력은 당시 로마 명문 자제들의 일반적인 경로였던 ''쿠르수스 호노룸''을 따랐으며, 이를 통해 정치와 군사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여러 정치적, 군사적 임명을 거쳐 보충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250년에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황제 데키우스의 신임을 얻어 로마 속주인 모에시아 수페리오르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6] 이 자리는 로마 제국의 국경 방어선(리메스) 중 하나인 도나우강 유역 방어를 책임지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모에시아에서 갈루스는 고트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며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고 명성을 쌓았다.

3. 황제 즉위와 통치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고트족과의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하자, 군대는 갈루스를 황제로 추대했다.[7] 당시 로마에서는 데키우스의 살아남은 아들 호스틸리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갈루스는 내전을 피하고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그를 공동 황제로 받아들였다.[6]

갈루스는 황제 즉위 후 다뉴브 국경의 안정을 꾀하고자 고트족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6] 이 조약은 고트족이 약탈물과 포로를 유지한 채 로마 영토를 떠나도록 허용하고, 로마가 그들에게 매년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로마에게 다소 불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로마로 돌아온 갈루스는 로마 원로원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고, 그의 아들 볼루시아누스카이사르로 임명하여 후계 구도를 다졌다. 그러나 공동 황제였던 호스틸리아누스는 251년 11월경 역병으로 사망하면서 갈루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갈루스의 통치 기간은 내우외환으로 순탄치 않았다. 그의 치세 동안 지역적이고 비조직적인 형태의 기독교 박해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교황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후임자 교황 루키우스 1세가 추방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외부적으로는 동방에서 페르시아의 황제 샤푸르 1세가 시리아를 침공하여 큰 피해를 입혔으며, 다뉴브 국경 지대에서는 평화 조약에도 불구하고 스키타이 부족들이 소아시아를 침략하여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괴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외부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갈루스 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모에시아와 판노니아 총독이었던 아에밀리아누스가 다뉴브 강 유역의 침략자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면서 군대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3. 1. 황제 즉위 과정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제국을 침략한 고트족을 격퇴하려다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그리스 역사가 덱시푸스와 13번째 시빌린 예언 등에서는 데키우스의 패배가 모에시아 총독이었던 갈루스가 고트족과 공모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데키우스 부자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에서는 데키우스의 살아남은 아들 호스틸리아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다뉴브 전선의 군대는 갈루스를 황제로 추대했다.[7] 하지만 갈루스가 이전에 데키우스 황제로부터 신임을 받았고 그의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덱시푸스의 공모설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는 평가도 있다. 갈루스는 황제가 되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으나, 또 다른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로마에 있는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했다. 이는 제국의 단결을 보여주고 군대와 로마 원로원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정치적 제스처였다.[6]

로마로 돌아가기 전, 갈루스는 다뉴브 국경 지대의 안정을 위해 고트족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6] 이 협정에 따라 고트족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얻은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들을 그대로 보유한 채 로마 영토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또한 로마는 고트족에게 매년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조건은 로마에게 다소 불리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로마에 도착한 갈루스의 황제 즉위는 로마 원로원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볼루시아누스카이사르로 임명되어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얻었다. 한편, 공동 황제였던 호스틸리아누스는 251년 11월경 역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갈루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고, 아들 볼루시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격상시켰다.

3. 2. 고트족과의 평화 협정

251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황제 데키우스와 그의 아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전사하자, 군대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로마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고 다뉴브 국경의 상황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갈루스는 고트족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6]

협정 조건에 따라, 고트족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얻은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 (우수한 기술자 포함)를 그대로 보유한 채 로마 영토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 대가로 로마는 고트족에게 매년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은 로마에게 매우 불리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 강화 조약으로 인해 갈루스는 로마 시민들로부터 멸시와 혐오를 받게 되었다.

3. 3. 호스틸리아누스의 죽음과 기독교 박해

갈루스가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받아들였으나[6], 호스틸리아누스는 251년 11월 페스트 발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7] 이로써 갈루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고, 아들 볼루시아누스카이사르로 임명했다. 에드워드 기번과 같은 후대의 역사가들은 호스틸리아누스의 때 이른 죽음이 갈루스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이는 확실하지 않다.

갈루스의 치세 동안 지역적이고 비조직적인 기독교 박해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교황 코르넬리우스가 켄툼셀레로 추방되어 253년에 사망한 사건과, 그의 후임자인 교황 루키우스 1세 역시 선출 직후 추방되었다가 발레리아누스 치세에 로마로 돌아온 사건이 알려져 있다.

3. 4. 동방 및 북방의 위협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갈루스도 쉬운 통치를 하지 못했다. 동방에서는 안티오키아 귀족 마리아데스가 반란을 일으켜 시리아와 카파도키아를 약탈한 후 페르시아로 도망쳤다. 갈루스는 군대에 페르시아 공격을 명령했지만, 페르시아 황제 샤푸르 1세아르메니아를 침략하여 바르발리소스 전투에서 로마 군대를 기습하여 전멸시켰다. 253년, 샤푸르 1세는 방어가 허술해진 시리아 속주를 침략하여 모든 군단 기지를 점령하고 안티오크를 포함한 도시들을 약탈했으나 로마 측의 별다른 대응은 없었다. 페르시아의 침략은 다음 해에도 이어졌지만, 에메사의 사제였던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가 샤푸르 군대에 맞서 싸워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우라니우스는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고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발행하기도 했다.

한편 다뉴브 강 유역에서는 251년 고트족과 평화 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키타이 부족들의 침략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들은 해상을 통해 소아시아로 건너와 에페수스의 유명한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태우고 약탈한 뒤 돌아갔다. 하 모에시아 역시 253년 초에 침략을 받았다. 이에 수페리오르 모에시아와 판노니아의 총독이었던 아에밀리아누스가 나서서 이들 침략자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4. 죽음

모에시아 및 상판노니아 총독이었던 아에밀리아누스는 고트족을 격퇴한 공로로 휘하 로마 군단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선언했다. 군대가 더 이상 황제 갈루스에게 만족하지 않자, 병사들은 아에밀리아누스를 새로운 황제로 내세운 것이다. 찬탈자가 된 아에밀리아누스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갈루스의 제위를 위협했다.

갈루스는 이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그는 여러 군단을 소집하고, 당시 갈리아에 있던 미래의 황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에게 증원군을 이끌고 로마로 오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아에밀리아누스는 발레리아누스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인테르암나(현대의 테르니)에서 갈루스를 따라잡았다.

인테르암나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갈루스와 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볼루시아누스는 초기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신의 군대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갈루스의 군대가 아에밀리아누스에게 투항하면서 갈루스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살해당했다고 전한다. 어쨌든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는 253년 8월에 함께 살해되었다.

갈루스를 제거한 아에밀리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그의 통치는 겨우 3개월 만에 끝났다. 갈루스의 지원 요청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오던 발레리아누스가 라인강 유역에서 스스로 황제를 선언하고 이탈리아로 진군하자, 아에밀리아누스 역시 253년 8월 자신의 군대에 의해 암살되었다.

갈루스의 짧은 통치와 죽음은 황제의 생존이 군사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과 대중의 인식을 관리하는 능력에 크게 좌우되었던 3세기 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권력 구도를 잘 보여준다.[6]

참조

[1] 웹사이트 Bronze statue of the emperor Trebonianus Gallus https://www.metmuseu[...] 2023-09-08
[2] 서적 Roman Portraits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6
[3] 문서
[4] 서적 The Cambridge Manual of Latin Epigraph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Römische Kaisertabelle https://archive.org/[...]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6] 서적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ume 12, The Crisis of Empire, AD 193-337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7] 서적 The Empire Stops Here: A Journey Along the Frontiers of the Roman World Pimlico 2010
[8] 간행물 Portrait bust of man in armour made from disparate elements. Antioch on the Orontes (Syria). Late third to early fourth century. http://laststatues.c[...] Last Statues of Antiquity 2012
[9] 서적 Sculptures from Roman Syria II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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