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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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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갈각은 오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아 손권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산월을 평정하고 동흥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등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으며, 손권 사후에는 섭정으로서 내정을 개혁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253년 합비 신성 공격 실패 이후 독단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손준에게 살해당했다. 진수는 제갈각을 재능은 뛰어나지만 교만하고 속이 좁은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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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제갈각 청나라 삽화
제갈각의 청나라 시대 삽화
이름제갈각
원어 이름諸葛恪
로마자 표기Zhūgě Kè
원손 (元遜)
출생203년
사망253년 11월 또는 12월 (50세)
출생지서주낭야군양도현
사망지양주단양군 건업현
가족제갈교 (형)
제갈융 (형)
장승의 아내 (자매)
제갈량 (삼촌)
아버지제갈근
자녀제갈작
제갈송
제갈건
관직
양도후 (陽都侯)귀족
경주와 양주 자사 (荊、揚州牧)252년 5월 또는 6월 – 253년 11월 또는 12월
군주손량
태부 (太傅)252년 5월 또는 6월 – 253년 11월 또는 12월
군주손량
태자태부 (太子太傅)251년 12월 또는 252년 1월 – 252년 5월 21일
군주손권
대장군 (大將軍)246년 9월 또는 10월 – 251년 12월 또는 252년 1월
군주손권
승상보즐 (246–247)
주거 (249–250)
위북장군 (威北將軍)? – 246년 9월 또는 10월
군주손권
승상고옹 (243년까지)
육손 (244–245)
단양태수 (丹陽太守)234년 – ?
군주손권
승상고옹
무월장군 (撫越將軍)234년 – ?
군주손권
승상고옹
기타 정보
직업군사 장군, 정치인

2. 생애

제갈각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손권(孫權)의 총애를 받았다. 손권제갈근을 놀리기 위해 당나귀에 "제갈자유" 이름표를 붙이자, 제갈각은 "지려(之驢)"를 덧붙여 손권을 기쁘게 했다. 또한 '아버지와 숙부 중 누가 더 현명한가'라는 질문에 제갈근이 동오를 섬기는 것을 들어 아버지가 더 현명하다고 답하여 손권을 기쁘게 했다. 장소를 조롱하기도 하는 등 대담하고 거침없는 성격을 보였다. (魏)나라의 대신 장집(張緝), 아버지 제갈근과 숙부 제갈량(諸葛亮)은 그의 재능에 대한 교만함 때문에 집안을 망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성년이 된 후 기도위에 봉해졌고, 황태자 손등과 친해 손권은 그를 태자좌보(太子左輔)에 임명하였다. 진표, 고승, 장휴와 함께 태자사우로 불렸다. 부친 제갈근육손(陸遜) 사후 병권을 잡아 대장군 벼슬을 받고, 손권손량(孫亮)을 태자로 삼자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아 후견인으로 삼았다. 손량 즉위 후 전권을 위임받아 내정에서 많은 업적을 쌓아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제갈탄호준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를 동흥 전투에서 격파했다. 그러나 253년 합비 신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많은 원망을 샀다. 253년에 손준(孫峻)에게 연회장에서 살해당했다. 연의에서는 제갈각이 연회장에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명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연회장으로 갔다가 살해당하였다고 했지만, 정사에서는 제갈각이 키우던 가 그의 옷깃을 물으며 매달렸다고 했다.

일족이 몰살당해 제갈근의 대가 끊기게 되자, 제갈근의 차남이자 제갈량의 양자인 제갈교(諸葛喬)의 아들 제갈반(諸葛攀)이 제갈첨의 허락을 받아 동오로 건너와 가문을 이었다.

2. 1. 어린 시절과 재능

제갈각은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손권(孫權)의 총애를 받았다.

손권이 얼굴이 긴 제갈근을 놀리기 위해 당나귀 목에 "제갈자유"라는 이름표를 걸자, 제갈각은 "지려(之驢, 제갈자유의 당나귀)"를 덧붙여 손권을 기쁘게 했다.[14] 또, '아버지와 숙부 중 누가 더 현명한가'라는 질문에 제갈근이 동오를 섬기는 것을 들어 아버지가 더 현명하다고 답하여 손권을 기쁘게 했다.[15] 장소를 조롱하는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릴 때부터 대담하고 거침없는 성격을 보였다.[15]

손권은 제갈각이 말을 잘 탄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말을 선물하려 불렀는데, 제갈각은 도착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 손권이 그 이유를 묻자 "촉은 폐하의 마구간 역할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신이 훌륭한 말을 바치러 왔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대답하여 손권을 감탄하게 했다.[16]

이러한 재능에 걸맞지 않은 성격 문제 때문에, 제갈근은 "아들은 머리가 너무 좋다. 집안을 번성시키는 것도 이 아이라면, 망하게 하는 것도 또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한탄했다.[6] 제갈량육손에게 보낸 서신에서 제갈각의 엉성한 성격을 지적하며 주의를 주었고, 육손도 제갈각을 나무랐다.[18]

제갈각의 어린 시절 일화
일화 내용결과
손권제갈근의 긴 얼굴을 놀리기 위해 당나귀에 "제갈자유" 이름표를 붙임제갈각이 "지려(之驢)"를 덧붙여 손권을 기쁘게 함[14]
손권아버지와 숙부 중 누가 더 현명한가라고 질문제갈근이 동오를 섬기는 것을 들어 아버지가 더 현명하다고 답하여 손권을 기쁘게 함[15]
장소가 술을 거부하며 어른에게 존경을 표하는 적절한 의례가 아니라고 말함강태공을 예로 들어 장소를 조롱하며 술을 마시게 함[15]
손권이 말을 선물하려 부름도착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하며, 촉한을 마구간에 비유하여 손권을 감탄하게 함[16]


2. 2. 오나라 조정에서의 활약

성년이 된 후 기도위에 봉해졌으며, 황태자 손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손권은 그를 태자좌보(太子左輔)에 임명하였다. 진표, 고승, 장휴와 함께 태자사우로 불리며 손등의 측근으로 활동했다.[4] 손등은 그들 넷을 가까운 친구로 대했고, 그들은 그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4] 229년에 그의 비서인 호종에게 그의 조언자 4명에 대한 논평을 쓰도록 지시했을 때, 호종은 제갈각이 그의 시대에서 가장 솜씨 있고 지능적인 인물이라고 썼다.[5]

234년경, 제갈각은 손권에게 산월을 평정하고 약 4만 명의 현지인들을 징집하여 단양군(丹陽郡; 현재의 안후이성 쉬안청시 인근)에서 병사로 복무하게 하자는 계획을 제출했다.[11] 제갈각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손권은 그를 단양군 태수와 무월장군에 임명하여 그의 계획을 시행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했다.[12] 제갈각은 단양군에 도착하자, 네 개의 인접한 군의 태수들에게 국경을 봉쇄하고 산월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수확기가 되자 곡물을 신속하게 수확하여 약탈의 위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비축하라고 명령했다. 식량 공급이 끊긴 산월은 결국 제갈각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며 존경을 받았다. 237년까지 단양군은 오나라 정부의 통제 하에 완전히 들어가 인력과 물자를 공급하는 매우 생산적인 군이 되었다. 제갈각은 또한 4만 명의 현지 남성을 징집하여 병사로 복무시키라는 할당량을 쉽게 채울 수 있었다. 손권은 제갈각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위북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도향후의 작위를 수여했다.[13]

243년, 제갈각은 동오의 경쟁국인 조위의 전략적 요충지인 수춘(壽春; 현재의 안후이 성수현 일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계획했다. 공격 준비를 위해 병력을 배치한 후, 위나라 장수 사마의가 수춘을 방어하고 제갈각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손권은 제갈각이 사마의와 교전하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오나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각은 위나라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치던 사마의에게 맞서려 했다는 점 때문에 오나라 백성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오나라 장수 육손은 제갈각의 무모함을 우려하여 그에게 편지를 써서 앞으로 더 신중할 것을 촉구했다. 제갈각은 자신보다 훨씬 선배인 육손에게 따르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태도에 대해 사과하는 답장을 보냈다.[13] 245년 육손이 사망한 후, 손권은 제갈각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육손의 역할을 맡아 무창(武昌; 현재의 후베이 성악주)에서 형주의 군사 업무를 감독하도록 명령했다.[13]

2. 3. 섭정 시기

손권이 252년에 사망한 후, 손량이 동오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손량은 즉위 후 제갈각을 태부(太傅)로 임명했다.[18] 제갈각은 섭정으로서 짧은 기간 동안 손권 시대에 만들어진 엄격한 법을 완화하고 세금을 줄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오나라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18]

태원 원년(251년) 12월, 손권은 태자 손량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병상에 누워 후사를 의논했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제갈각에게 뜻을 두고 있었고, 손준은 제갈각이 섭정을 맡아 중대사를 처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손권은 제갈각이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할 것을 염려했지만, 손준은 당시 조정 신하들 중 제갈각을 따를 자가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제갈각을 불렀다. 이후 제갈각 등을 침상에서 만나 조서를 내리고, 제갈각을 태자태부에 임명했다.[19]

신봉 원년(252년) 4월, 손권이 위독해지자 손홍, 손준, 등윤, 여거와 함께 제갈각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다음 날, 손권이 세상을 떠나고 손량이 즉위했다. 손홍은 제갈각과 사이가 좋지 않아 손권의 죽음을 숨기고 제갈각을 제거하려 했으나, 오히려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로 인해 이후 오나라의 실권은 제갈각이 장악하게 되었다.[19]

2. 4. 군사적 활동과 몰락

252년 제갈각은 230년에 건설되었으나 241년에 파괴된 동흥(東興; 현재의 차오후, 안후이) 둑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계획은 차오호 근처에 저수지를 만들어 (魏)나라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 시설로 활용하고, 인근에 두 개의 성을 건설하여 오(吳)나라 선박의 공격 기지로 삼는 것이었다.[19] 동흥 전투에서 정봉 등의 활약으로 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253년 합비 신성 전투에서는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여름의 혹서와 역병으로 인해 패배하고 많은 병력을 잃었다.[19]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등 독단적인 행동으로 많은 원망을 샀다.[19]

결국, 253년에 손준(孫峻)에게 연회장에서 살해당했다.[19] 제갈각이 죽은 후, 손준은 그의 군대를 보내 제갈각의 가족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19] 이로 인해 일족이 몰살당하고 제갈근의 대가 끊기게 되자, 제갈근의 차남이자 제갈량의 양자인 제갈교(諸葛喬)의 아들 제갈반(諸葛攀)이 제갈첨의 허락을 받아 동오로 건너와 가문을 이었다.

3. 평가

제갈각은 뛰어난 재능과 지략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제갈각에 대해 "재기가 넘치고, 큰 안목으로 일할 수 있었으며, 국내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라고 평가했지만, "교만하고 속이 좁았다"라고 평하며 그의 교만함과 경솔함을 비판했다.[18] 또한 "가령 주유라도 (그런 결점이 있다면) 그 장점을 망쳐버렸을 것이다. 하물며 제갈각이라면 더욱 심했을 것이며, 자신을 뽐내며 남을 짓밟았으니, 어찌 몸을 망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아버지 제갈근이나 숙부 제갈량과는 정반대로, 사려 깊지 못하고 엉성하며 야심이 컸다. 변론에 능해 다른 사람을 말로 제압하는 것을 잘했고,[18] 재능을 뽐내는 것을 좋아해 가족들은 그의 장래를 걱정했다. 제갈근은 "아들은 머리가 너무 좋다. 집안을 번성시키는 것도 이 아이라면, 망하게 하는 것도 또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한탄했고, 제갈량육손에게 "각은 대충대충하고 엉성해서 병량 관리는 맞지 않다"라고 주의를 주었으며, 육손도 "그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성격을 어떻게든 하십시오"라고 나무랐다.[19]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는데, 손권이 얼굴이 긴 제갈근을 놀리기 위해 당나귀 목에 "제갈자유"라는 이름표를 걸어놓자, 제갈각은 "지려(之驢)"(제갈자유의 당나귀)라고 덧붙여 손권을 기쁘게 했다.[18] 또한, 손권이 "너의 아버지와 숙부 중 누가 더 훌륭한가?"라고 질문했을 때, "아버지이십니다. 섬겨야 할 주군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여 손권을 감탄하게 했다.[18]

하지만 그의 성격 문제와 관련된 일화도 있는데, 태자 손등이 "말똥이나 먹어라"라고 놀리자, "그렇다면 태자님은 닭알을 드십시오"라고 받아치며, "닭알도 말똥도 나오는 곳은 같습니다"라고 말해 손권을 웃게 만들었지만, 태자를 상대로도 지지 않으려는 성격을 보여주었다.

3. 1. 후세의 평가 (한국)

諸葛恪|제갈각중국어은 한국에서 제갈량의 조카라는 점이 부각되어 제갈량 가문의 일원으로서 더욱 유명하다. 제갈각의 실패는 종종 제갈량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강조되기도 한다. 그의 오만함과 독단적인 성격은 리더십의 중요한 교훈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4. 친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제갈근
숙부제갈량
동생제갈융
아들제갈착, 제갈송, 제갈건



제갈량의 양자인 제갈교의 아들 제갈반제갈첨의 허락을 받아 동오로 건너와 자기 가문을 이었다.[18]

5. 일화

손권이 얼굴이 긴 제갈근을 놀리기 위해 당나귀 목에 "제갈자유"라는 이름표를 걸자, 제갈각은 "지려(之驢, 제갈자유의 당나귀)"라고 덧붙여 손권을 기쁘게 했다.[14]

손권이 제갈각에게 아버지 제갈근과 숙부 제갈량 중 누가 더 현명한지 묻자, 제갈각은 아버지가 섬길 황제를 잘 선택했다고 답하여 손권을 미묘하게 아첨했다. 손권은 제갈각에게 술을 따르게 했는데, 장소가 이를 거부하며 어른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고 하자, 제갈각은 강태공을 예로 들며 장소를 논박하여 술을 마시게 했다.[15]

촉한의 사신이 손권에게 말을 선물하자, 제갈각은 손권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미리 알고 무릎 꿇고 감사 인사를 했다. 손권이 놀라 묻자, 제갈각은 촉한손권의 마구간 역할밖에 할 수 없다고 답하여 손권을 감탄시켰다.[16]

손권태자 손등에게 "말똥이나 먹어라"라고 놀리자, 제갈각은 "태자님은 닭알을 드십시오"라고 받아쳤다. 손권이 그 이유를 묻자 "닭알도 말똥도 나오는 곳은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손권을 크게 웃게 만들었다.

제갈각은 지혜로운 자로서의 전승이 후세에 전해진다.


  • 제갈각이 단양 태수였을 때, 어린아이 모습의 요괴 '계낭'을 백택도에 쓰여진 대로 그 자리에서 떼어내어 죽였다.[27]
  • 제갈각이 합비 신성 전투에서 패하고 조정 회의에 나가기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르던 가 옷을 물고 잡아당겼으나, 결국 조정에 들어가 손준에게 살해당했다.[28]
  • 손권이 왕이었던 시절, 어떤 사람이 잡은 큰 거북이 말을 하고 뽕나무 고목과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손권에게 헌상된 거북을 삶을 방법을 찾지 못하자, 제갈각이 뽕나무 고목을 땔감으로 쓰라고 진언하여 거북을 삶아 죽였다.[29]

6. 후출사표 위작설

일부 역사학자들은 제갈량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 위작 의심을 받고 있는 후출사표를 제갈각이 지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후출사표를 제갈각이 지은 것이라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후출사표는 촉나라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오나라의 기록에 등장한다.
  • 제갈각이 북벌을 준비하면서 주장한 논리가 후출사표의 내용과 비슷하다.
  • 후출사표는 오나라의 대흥려 장엄이 기록했는데, 장엄은 제갈각의 일파였다.
  • 당시 나라를 다스리던 황제에 대한 언행이 제갈량이 생전에 언급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7. 기타

오록에서는 제갈각이 큰 목소리를 지녔고 키가 약 182~184cm였으며, 굽은 콧대와 넓은 이마, 큰 입을 가지고 있었고, 수염과 눈썹이 거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7]

제갈각의 지혜와 관련된 여러 전승이 정사(正史) 외에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 제갈각이 단양 태수였을 때의 일이다. 사냥을 하던 중 어린아이 모습의 요괴 '계낭'을 만났는데, 백택도에 기록된 대로 그 요괴를 퇴치하였다.[27]
  • 제갈각이 회남 정벌에서 돌아온 뒤 조정 회의에 참석하기 전날 밤이었다.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르던 개가 옷을 물고 잡아당기는 등 불길한 징조를 겪었다. 결국 그는 조정에서 살해당했다.[28]
  • 손권에게 헌상된 큰 거북을 삶는 방법에 대해, 제갈각이 뽕나무 고목을 땔감으로 쓰라고 진언하여 거북을 삶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9]

참조

[1] 서적 Wu Lu
[2] 서적 Sanguozhi
[3] 문서
[4] 서적 Sanguozhi
[5] 서적 Jiang Biao Zhuan
[6] 문서
[7] 서적 Sanguozhi
[8] 서적 Gu Tan Zhuan
[9] 문서
[10] 서적 Jiang Biao Zhuan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Sanguozhi
[17] 서적 Wu Lu
[18] 서적 江表伝
[19] 문서
[20] 서적 三国志
[21] 서적 三国志
[22] 서적 呉録
[23] 서적 諸葛恪別伝
[24] 서적 江表伝
[25] 서적 太平広記
[26] 서적 捜神記
[27] 서적 捜神記 平凡社ライブラリー 2000
[28] 서적 捜神記 平凡社ライブラリー 2000
[29] 서적 異苑
[30] 서적 진고
[31] 서적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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