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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조약 (18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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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리 조약 (1815년)은 1815년 11월 20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가 패배한 후 제7차 대프랑스 동맹 국가들이 프랑스에 더 가혹한 강화 조건을 부과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1790년 영토로 축소되었고, 7억 프랑의 배상금과 최대 5년간의 동맹군 주둔 및 주둔 경비를 부담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는 노예 무역 폐지를 재확인하고, 약탈한 예술 작품을 원산지로 반환해야 했다. 조약은 유럽 국제 질서에 영향을 미쳐, 스위스의 영구적인 중립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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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조약 (1815년)
조약 정보
이름파리 조약
정식 명칭해당 없음
종류양자 조약
맥락해당 없음
초안 작성일해당 없음
서명일1815년 11월 20일
서명 장소파리, 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
봉인일해당 없음
효력 발생일해당 없음
효력 발생 조건해당 없음
만료일해당 없음
만기일해당 없음
중재자해당 없음
협상가해당 없음
원래 서명국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



서명국해당 없음
당사국해당 없음
비준국해당 없음
예탁자해당 없음
수탁 기관해당 없음
인용해당 없음
언어해당 없음
사용 언어해당 없음
위키문헌파리 조약 (1815)
관련 조약제1차 파리 조약
배경
목적나폴레옹 전쟁 종결
조약 내용
영토 변경프랑스 영토가 "1790년 당시의 영토"로 축소
배상금프랑스에 7억 프랑의 배상금을 부과
군대 주둔최장 5년간 동맹군의 프랑스 주둔 및 주둔 경비 부담
점령 구역
1815년 6월부터 1818년 11월까지 프랑스 점령 구역 지도
1815년 6월부터 1818년 11월까지 프랑스 점령 구역. 점령이 시행된 프랑스 영토: 영국 점령 구역(빨간색), 프로이센 점령 구역(녹색), 러시아 점령 구역(파란색), 바덴 및 작센 점령 구역, 바이에른 점령 구역, 헤센 및 뷔르템베르크 점령 구역, 스위스 점령 구역, 사르데냐 점령 구역, 오스트리아 점령 구역.

2. 배경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 제국 나폴레옹 1세가 패배하고 다시 퇴위하면서, 1815년 11월 20일 제2차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다.[1] 1814년 5월 30일 제1차 파리 조약(1814년 파리 조약)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 프랑스가 강화한 후, 백일천하 동안 프랑스 국민이 나폴레옹을 지지하자, 제2차 파리 조약에서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이 제시한 강화 조건은 더 가혹해졌다.[1]

1차 조약과 달리 2차 조약 체결 국가는 영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4개국이었고, 프랑스는 제외되었다. 1차 조약에서 1792년 당시 영토를 인정받았으나, 2차 조약에서는 1790년 당시 영토로 축소되었다. 프랑스는 의 배상금과 최장 5년간 동맹군 주둔 및 경비 부담을 지게 되었다.[1] 프로이센 등은 더 가혹한 조건을 요구했으나, 부르봉 왕가의 왕정 복고 안정을 위해 완화되었다.[1]

1815년 11월 20일, 파리 조약과 같은 날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에 의해 신성 동맹이 체결되었다.[1]

2. 1. 제1차 파리 조약 (1814년)

1814년 5월 30일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은 여러 나라들과 프랑스가 강화한 조약이다.[1] 제6차 대프랑스 동맹과 프랑스 간에 체결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일천하로 프랑스 국민이 나폴레옹 1세에 대해 광범위한 지지를 보내자, 이후 제7차 대프랑스 동맹 국가들이 제시한 강화 조건은 더 가혹한 것이 되었다.[1]

제2차 파리 조약과 비교하면, 제2차 파리 조약 체결 국가는 영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의 네 나라로 프랑스는 체결 국가가 아니었다.[1] 또한 제1차 파리 조약에서 인정받은 프랑스의 영토는 "1792년 당시의 영토"였지만, 제2차 파리 조약에서는 "1790년 당시의 영토"로 축소되었다.[1]

2. 2. 백일천하와 나폴레옹의 몰락

나폴레옹 1세는 워털루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겪고 다시 퇴위하게 되었다.[1] 이는 백일천하로 알려진, 나폴레옹의 짧은 복귀 기간의 끝을 알리는 사건이었다.[1] 프랑스 국민들이 나폴레옹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1]

2. 3. 제7차 대프랑스 동맹

나폴레옹 1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시 퇴위하면서, 1815년 11월 20일 제2차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1814년 제1차 파리 조약 이후, 백일천하 동안 프랑스 국민들이 나폴레옹을 ব্যাপকভাবে 지지하자, 제7차 대프랑스 동맹 국가들은 더 가혹한 강화 조건을 제시했다.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은 영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4개국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랑스는 조약 체결 국가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은 제1차 파리 조약에서 인정된 "1792년 당시의 영토"를 "1790년 당시의 영토"로 축소하고, 프랑스에 의 배상금과 최장 5년간의 동맹군 주둔 및 주둔 경비 부담을 요구했다. 프로이센 등은 더 가혹한 조건을 원했지만, 부르봉 왕가의 왕정 복고 체제 안정을 위해 요구를 완화했다.

3. 조약의 주요 내용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가 패배하고 1815년 11월 20일에 다시 퇴위하면서 체결된 제2차 파리 조약은 1814년 5월 30일 제1차 파리 조약보다 프랑스에 더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백일천하 동안 프랑스 국민들이 나폴레옹을 ব্যাপকভাবে 지지했기 때문에, 제7차 대프랑스 동맹 국가들은 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제1차 파리 조약과 달리 제2차 파리 조약은 영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4개국이 체결했으며, 프랑스는 체결 당사국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1792년 영토 대신 1790년 영토로 축소되었고,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최장 5년간 동맹군의 주둔과 경비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프로이센 등은 더 가혹한 조건을 요구했지만, 부르봉 왕가의 왕정 복고 체제 안정을 위해 완화되었다.

1815년 11월 20일 파리 조약 체결과 같은 날,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에 의해 신성 동맹이 체결되었다.

1815년 평화 조약은 당시 외교 공용어였던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 프랑스와 4개의 주요 제7차 대프랑스 동맹 국가(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간에 총 4개의 조약이 있었다. 4개의 조약 모두 같은 날(1815년 11월 20일)에 서명되었으며, 문구가 동일하고 같은 방식으로 작성되었다.[2]

이 조약은 프랑스 내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최근에 나타난 데 따른 유보 조항 때문에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의 책략을 통해 협상되었던 1814년 파리 조약보다 프랑스에 더 가혹했다.

조약은 "왕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고 유지하며, 헌법 헌장의 운영을 회복함으로써 프랑스에서 행복하게 재건된 사물의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열망"으로 제시되었다. 1814년 5월 30일의 첫 번째 파리 조약과 1815년 6월 9일의 빈 회의 최종 의정서가 확인되었다. 같은 날 별도의 문서에서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은 4국 동맹을 갱신했다.

3. 1. 영토 변경

1815년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가 상실한 영토 (분홍색).


1815년 11월 20일 제2차 파리 조약을 설명하는 프랑스 동쪽 경계 지도


1815년 파리 조약 이후 프랑스의 동남부 국경


1815년 파리 조약은 1814년 파리 조약보다 프랑스에 더 가혹했다. 프랑스는 1790~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점령했던 영토를 잃고 1790년 경계로 축소되었다.[3] 이전 조약에서 프랑스가 유지했던 콩타 베네생, 몽벨리아르 백작령, 뮐하우젠 자유시의 월경지와 1697년부터 프랑스 영토였던 란다우, 자르루이 월경지도 상실했다. 또한, 스위스와 연결하기 위해 제네바 공화국에 제네바 호수와 접한 6개의 프랑스 코뮌도 양도되었다.[3]

3. 2. 배상금



1815년 파리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7억 프랑의 배상금을 5년에 걸쳐 분할 지급해야 했다.[4] 이는 당시 프랑스에게 상당히 가혹한 조건이었으며,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의 경제 회복에 큰 부담을 주었다.

배상금 지급 방식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 분할 지급: 1815년 12월 1일부터 5년 동안 매일 383,251 프랑(약 16,000 파운드 스털링)을 지급해야 했다.[14]
  • 할당 증서 발행: 프랑스 정부는 매일 액면 지불 가능한 프랑스 재무부의 할당 증서를 발행하여 일일 할당량을 충당했다.[14]
  • 채권 교환: 연합 위원회는 7억 프랑을 46⅔백만 프랑의 15개 채권으로 받았으며, 프랑스는 4개월마다 이 채권 중 하나를 더 작은 액수의 ''쿠폰''(할당 증서)으로 교환하여 상환했다.[14]
  • 이자 기금 배정: 프랑스는 배상금 지급 보장을 위해 1억 4천만 프랑의 자본에 대한 7백만 프랑의 이자 기금을 공공 부채의 ''대장''에 기록하여 배정했다. 매 6개월마다 정산이 이루어졌으며, 부족분은 이 기금에서 충당되었다.[14]


이러한 배상금 지급 방식은 프랑스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지만, 연합국은 프랑스의 배상금 지급 능력을 확보하고 프랑스 혁명의 재발을 방지하고자 했다.

배상금 분배 내역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배상금 분배 내역
국가금액 (프랑)총액 (프랑)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프로이센
국가병력금액 (프랑)
바이에른60,000
네덜란드50,000
뷔르템베르크20,000
바덴16,000
작센16,000
사르데냐15,000
헤센-카셀12,000
하노버10,000
헤센-다름슈타트8,000
메클렌부르크-슈베린3,200
나사우3,000
브라운슈바이크3,000
함부르크 & 브레멘3,000
작센-고타2,200935,632
작센-바이마르1,600680,474
안할트1,600680,474
올덴부르크1,600680,474
슈바르츠부르크1,300552,885
리페1,300552,885
로이스900382,766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800340,837
작센 코부르크800340,837
발데크-피르몬트800340,837
프랑크푸르트750318,972
작센-마이닝겐600255,177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400170,118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386164,164
호엔촐레른-헤힝겐19482,507
리히텐슈타인10042,529
국가금액 (프랑)총액 (프랑)
스페인
포르투갈
덴마크
스위스
워털루와 파리 점령에서의 웰링턴과 블뤼허 휘하 영국 및 프로이센 군대에 대한 보상 (각각 )
국가금액 (프랑)
rowspan="5" |네덜란드
프로이센 (자르루이 제외, 5천만 가치)
바이에른
스페인
사르데냐
마인츠 요새 강화
라인강 상류에 독일 연방의 새로운 요새 건설[16]
총액


3. 3. 군사 조항

1814년 파리 조약보다 가혹했던 1815년 파리 조약은 군사 조항에서 프랑스에 대한 연합군의 군사적 점령을 규정했다. 최대 5년 동안 15만 명의 연합군이 프랑스 동부 국경 지역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이 비용은 프랑스가 부담해야 했다.[5][6]

군사 점령의 목적은 조약 부속 협약에 명시되어 있는데, 프랑스 혁명의 재발을 방지하고 프랑스의 배상금 이행을 보장하는 것이었다.[7] 연합군은 프랑스가 배상금을 낼 수 있도록 유통 채권 발행 조건을 규정했다.

최종 조약 제5조에 따른 군사선 협약은 연합군의 임시 점령 관련 세부 사항을 규정했다. 연합군은 파드칼레, 북아르덴, 뫼즈, 모젤, 하(下)라인, 상(上)라인 부서를 프랑스 내부에서 분리하는 국경선을 따라 주둔했다.[17]

연합군과 프랑스군은 특정 지역 점령이 금지되었는데, 여기에는 솜 주의 솜 강 북쪽, 엔 주의 생 캉탱, 베르뱅, 라옹 지역, 마른 주의 랭스, 생트 메네울, 비트리 르 프랑수아 지역 등이 포함되었다.[17]

연합군 점령 지역 내 26개 요새에는 주둔이 가능했지만, 포병 및 공병 물자는 배치되지 않았다.[17]

이름병력이름병력
칼레1,000덩케르크 및 그 요새1,000
그라블린500두에 및 스카르프 요새1,000
베르그500베르됭500
생토메르1,500메츠3,000
베튄500라우테르부르150
몽트뢰유500비셈부르150
에댕250리히텐베르크150
아르드르150프티피에르100
에르 쉬르 라 리500팔스부르600
아라스1,000스트라스부르3,000
불로뉴 쉬르 메르300셀레스트1,000
생 베낭300노이 브리사흐 및 모르티에 요새1,000
3,000벨포르1,000



프랑스는 연합군에게 숙소, 연료, 조명, 식량, 사료 등을 현물로 제공해야 했으며, 급여, 장비, 의류 등도 부담해야 했다.[17] 프랑스는 5년 동안 연합국에 연간 을 지불해야 했지만, 첫해에는 만 받았다.[17]

프랑스의 총비용은 배상금 7억 프랑을 훨씬 초과했다. 병사 식량 및 수당 가치를 1.5 프랑, 기병 식량을 2 프랑으로 추정하면, 현물 제공 비용만 연간 에 달했고, 여기에 연간 을 더하면 총 , 즉 하루 22,370 파운드(당시 환율)에 달했다.[17]

3. 4. 기타 조항

1815년 파리 조약은 노예 무역 문제도 다루었다. 이 조약은 1815년 2월 8일에 있었던 노예 무역 폐지에 관한 열강의 선언을 다시 확인했다.[12] 각 나라 정부는 "지체 없이, ... 종교와 자연의 법에 의해 매우 혐오스럽고 강력히 비난받는 상업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폐지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조치를 찾을 것"을 추가했다.[13] 이는 노예 무역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만, 즉각적인 폐지를 강제하지는 않았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1793년 이후 프랑스군은 유럽 전역에서 많은 예술 작품을 약탈했다. 1814년 파리 조약은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지만, 1815년 파리 조약은 약탈한 예술 작품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12] 이 과정은 일부 국가가 멸망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지만, 이 조약은 역사상 대규모의 전리품 반환을 요구한 최초의 조약 중 하나였다.

4. 조약의 체결 과정 및 참여국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 제국 황제 나폴레옹 1세가 패배한 후, 1815년 11월 20일 제2차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1814년 제1차 파리 조약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국가들과 프랑스가 강화한 후, 백일천하 동안 프랑스 국민들이 나폴레옹을 지지하자, 제2차 파리 조약에서 제7차 대프랑스 동맹 국가들이 제시한 강화 조건은 더 가혹해졌다.

제1차 파리 조약과 달리 제2차 파리 조약은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4개국이 체결했으며, 프랑스는 체결 국가가 아니었다. 1차 조약에서 인정받은 프랑스 영토는 "1792년 당시의 영토"였지만, 2차 조약에서는 "1790년 당시의 영토"로 축소되었다. 프랑스는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최대 5년간 동맹군의 프랑스 주둔과 주둔 경비를 부담해야 했다. 프로이센 등은 더 가혹한 조건을 요구했지만, 부르봉 왕조의 왕정 복고 체제 안정을 위해 완화되었다.

1815년 11월 20일, 파리 조약 체결과 같은 날,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은 사국 동맹을 체결했다.

4. 1. 협상 과정



1815년 평화 조약은 당시 외교의 공용어였던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 프랑스와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의 주요 4개국(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간에 체결된 4개의 조약은 모두 같은 날(1815년 11월 20일)에 서명되었고, 내용은 동일했다.[2]

이 조약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의 책략으로 협상되었던 1814년 파리 조약보다 프랑스에 더 가혹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790~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점령했던 영토를 잃고 1790년 국경으로 축소되었다.[3] 또한 프랑스는 7억 프랑의 배상금을 5년에 걸쳐 분할 지급하고,[4] 영국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프랑스 동부 국경 지역에 최대 5년 동안 15만 명의 동맹군을 자국 비용으로 주둔시켜야 했다.[5][6]

프로이센 왕국은 프랑스가 동부의 상당한 영토를 양도할 것을 처음에는 요구했지만, 다른 강대국 간의 경쟁과 프랑스 부르봉 왕정 복고를 নিশ্চিত하려는 욕구로 인해 평화 협상은 비교적 가혹하지 않게 되었다. 조약은 대영 제국을 대표하여 로버트 스튜어트, 캐슬레이 자작과 웰링턴 공작이, 프랑스를 대표하여 아르망-에마뉘엘 뒤 플레시, 리슐리외 공작이 서명했다.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도 프랑스와의 평행 조약에 서명하여, 사실상 최초의 유럽 연합을 형성했다. 1815년 11월 20일, 별도의 조약으로 4국 동맹이 재설정되어, 빈 회의의 패턴을 따른 "유럽의 평화 유지를 위한" 회의[8]라는 새로운 개념을 유럽 외교에 도입했다.

조약은 "프랑스와 유럽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최근 사업으로 위협받던 동요로부터 보호"[8]하고, "프랑스에서 재현된 혁명 체제"를 부인했다.[8]

조약은 "왕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고 유지하며, 헌법 헌장의 운영을 회복함으로써 프랑스에서 행복하게 재건된 사물의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열망"으로 제시되었다. 1814년 5월 30일의 첫 번째 파리 조약과 1815년 6월 9일의 빈 회의 최종 의정서가 확인되었다. 같은 날 별도의 문서에서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은 4국 동맹을 갱신했다. 오스만 제국을 제외한[10] 다른 군주와 자유 도시들은 조약 조건에 동의하도록 초대받았고,[9] 이 조약은 유럽이 "유럽의 실제적이고 영구적인 세력 균형 체제가 파생될" 관계를 확립하는 공법의 일부가 되었다.[11]

4. 2. 서명 및 발효

1815년 평화 조약은 당시 외교의 공용어였던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 프랑스와 제7차 대프랑스 동맹의 주요 4개국(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간에 체결된 4개의 조약은 모두 1815년 11월 20일에 서명되었으며, 내용은 동일하고 같은 방식으로 작성되었다.[2]

이 조약은 대영 제국을 대표하여 로버트 스튜어트, 캐슬레이 자작과 웰링턴 공작이, 프랑스를 대표하여 아르망-에마뉘엘 뒤 플레시, 리슐리외 공작이 서명했다.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도 프랑스와의 평행 조약에 서명하여, 사실상 최초의 유럽 연합을 형성했다. 같은 날 별도의 문서에서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은 4국 동맹을 갱신했다. 서명하지 않은 군주와 자유 도시들은 조약 조건에 동의하도록 초대받았다.[9]

5. 조약의 영향 및 결과

1815년 11월 20일에 체결된 제2차 파리 조약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가 패배하고 다시 퇴위한 후, 프랑스에 더욱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1814년 제1차 파리 조약과 달리, 제2차 조약은 영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4개국이 주도했으며, 프랑스는 조약 당사국에서 제외되었다.

프랑스는 1792년 영토 대신 1790년 영토로 축소되었고,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최장 5년간 동맹군의 프랑스 주둔과 주둔 경비 부담도 떠안게 되었다. 프로이센 등은 더 가혹한 조건을 요구했지만, 부르봉 왕가의 왕정 복고 체제 안정을 위해 완화되었다.

같은 날,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은 사국 동맹을 체결하여 신성 동맹에 더하여 유럽의 안정을 도모했다.

5. 1. 스위스의 중립

스위스 연방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국가로 인정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스위스는 중립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는데, 일부 주는 다른 국가에 병합되었고, 프랑스의 영향으로 스위스 연방을 프랑스에 동맹한 더욱 중앙 집권적인 헬베티 공화국으로 대체하는 중재법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23]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스위스 주는 새롭고 덜 중앙 집권적인 헌법을 작성하기 시작했다.[23]

1815년 3월 20일 빈 회의에서 유럽 열강(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프로이센, 러시아, 스페인스웨덴)은 영구적으로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스위스를 인정하기로 합의했고, 5월 27일 스위스는 이 선언에 동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동안 제7차 동맹은 나폴레옹이 패배할 때까지 스위스의 영구적인 중립성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조약 서명을 보류했다. 이는 동맹군이 스위스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1815년 11월 20일에 작성된 빈 회의 최종 의정서 제84조에 따라 4개의 주요 동맹국(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과 프랑스는 스위스의 영구적인 중립성에 대한 공식적이고 진정한 승인을 표명했다.[23][24]

6. 조약에 대한 평가

1793년 이후 프랑스군은 유럽 전역에서 많은 예술 작품을 약탈했다. 제1차 파리 조약에서는 이에 대한 반환 요구가 없었지만, 제2차 파리 조약에서는 약탈한 예술 작품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일부 국가가 멸망했기 때문에 이 과정은 무질서했지만, 이 조약은 역사상 대규모의 전리품 반환을 요구한 최초의 조약 중 하나였다.[1]

참조

[1] 웹사이트 Battle of Waterloo https://www.history.[...] 2022-07-29
[2] 서적
[3] 논문 Guide to International Relations and Diplomacy
[4] 간행물 The Problem of Reparations after the Hundred Days 1953-12
[5] 간행물
[6] 서적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British Army of Occupation in France, 1815–1818 Greenwood Press
[7] 간행물
[8] 간행물 British and Foreign State Papers
[9] 간행물
[10] 간행물
[11] 논문 The Treaty of Paris and Turkey's Status in International Law 1943-04
[12] 서적 The Parliamentary Debates from the Year 1803 to the Present Time https://books.google[...] s.n.
[13] 서적 British and Foreign State Papers https://books.google[...]
[14] 간행물 The European Magazine, and London Review https://books.google[...] Philological Society (Great Britain) 1918-01
[15] 문서 To divide up the sum of 100 million more precisely for this number of men the payment would be 426 francs 38.50 cents per man.
[16] 문서 Delayed until after the 1840 [[Rhine crisis]]. In 1841 the German Confederacy decided to erect two fortresses in [[Rastatt]] and [[Ulm]].
[17] 간행물 The European Magazine, and London Review https://books.google[...] Philological Society (Great Britain) 1918-01
[18] 간행물 The Gentleman's Magazine https://books.google[...] F. Jefferies
[19] 서적 The Dispatches of Field Marshal the Duke of Wellington, K.G.: During His Various Campaigns in India, Denmark, Portugal, Spain, the Low Countries, and France https://books.google[...] J. Murray
[20] 서적 The American Annual Register https://books.google[...] G. & C. Carvill
[21] 서적 Executive Documents: 13th Congress, 2d Session–49th Congress, 1st Session https://books.google[...]
[22] 간행물 The European Magazine, and London Review https://books.google[...] Philological Society (Great Britain) 1918-01
[23] 서적 International Law https://books.google[...] The Lawbook Exchange, Ltd.
[24] 서적 The Parliamentary Debates from the Year 1803 to the Present Time https://books.google[...] Hansard 181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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