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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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은 프랑스 군인으로, 알제리에서 군 복무를 시작하여 크림 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참전했다. 1859년 마젠타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1864년 알제리 총독을 역임했다. 보불전쟁에서 패배하고 파리 코뮌을 진압했으며, 1873년 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877년 5월 16일 위기를 겪고 1879년 사임했다. 이후 부상 군인 구조 협회를 이끌었고, 189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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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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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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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원수 |
존칭 접미사 | 마젠타 공작 |
출생일 | 1808년 6월 13일 |
출생지 | 프랑스 제1제국 손에루아르주 쉴리 |
사망일 | 1893년 10월 17일 |
사망지 | 프랑스 제3공화국 루아레주 몽크레송 |
국적 | 프랑스 |
배우자 | 엘리자베트 드 라 크루아 드 카스트리 (1854년 결혼) |
자녀 | 마리 아르망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1855–1927) 외젠 드 마크마옹 (1857–1907) (1859–1930) 마리 드 마크마옹 (1863–1954) 핀 백작 부인 |
친척 | 마크마옹 가문 |
정치 | |
직위 | 프랑스 대통령 |
임기 시작 | 1873년 5월 24일 |
임기 종료 | 1879년 1월 30일 |
총리 | 알베르 드 브로이 에르네스트 쿠르토 드 시세 루이 뷔페 쥘 아르망 뒤포르 쥘 시몽 가에탕 드 로슈부에 |
이전 | 아돌프 티에르 |
다음 | 쥘 그레비 |
정당 | 기타 우파 (정통주의) |
군사 경력 | |
소속 | 프랑스 육군 |
복무 기간 | 1827–1873 |
계급 | 프랑스 원수 |
지휘 | 제1 군단 라인 군 샬롱 군 |
주요 전투 | 알제리 정복 콘스탄틴 공방전 (1837) 크림 전쟁 (1853–1856) 말라코프 전투 (1855)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 (1859) 마젠타 전투 (1859) 보불전쟁 (1870–1871) 뵈르트 전투 (1870) 스당 전투 (1870) 파리 코뮌 (1871) |
관직 (알제리) | |
관직 | 알제리 총독 |
임기 시작 | 1864년 9월 1일 |
임기 종료 | 1870년 7월 27일 |
이전 | 에드몽 드 마르탱프레 |
다음 | 루이 뒤리외 |
상원 의원 | |
지명자 | 나폴레옹 3세 |
관직 | 상원 의원 |
임기 시작 | 1864년 6월 24일 |
임기 종료 | 1870년 9월 4일 |
교육 | |
교육 기관 |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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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마크마옹 가문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1688년 명예 혁명으로 폐위된 제임스 2세를 지지하여 프랑스로 이주했다.[6] 이들은 1749년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고, 루이 15세로부터 귀족 지위를 인정받았다.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은 1808년 6월 13일 부르고뉴 오텡 근처 술리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작 모리스-프랑수아 드 마크마옹과 펠라지 드 리케 드 카라망 사이에서 태어난 17명의 자녀 중 16번째였다. 그의 가문은 왕당파 성향이 강했다.
생시르를 졸업한 후, 마크마옹은 1827년 프랑스 육군에 입대했다. 1830년 알제 점령과 무자이야산 전투에서 용맹함을 보여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을 받았다.[3] 1832년 안트베르펜 포위전에서도 활약했다.
1833년 대위가 된 마크마옹은 다시 알제리로 돌아가 베르트랑 클로젤 장군과 샤를마리 드 다므레몽 장군 휘하에서 복무했다. 그는 여러 차례 기병 기습을 이끌었고, 1837년 콘스탄틴 포위전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1840년 기병대장으로 진급했다.
1841년, 마크마옹은 제10 보병 척탄병 대대를 이끌고 알제리로 돌아가 바브 엘 타자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3] 1842년 중령으로 진급하여 제2 프랑스 외국인 연대에 배속되었고,[3] 1845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제41 보병 연대 지휘를 맡았다.[3]
1848년 여단장으로 진급한 마크마옹은 트렘센 하위 부대장이 되었고,[3] 1849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3] 1852년 1851년 프랑스 쿠데타 승인을 위한 국민투표를 알제리에서 조직했으며, 같은 해 콘스탄틴 사단 사령관 및 사단장으로 진급했다.
크림 전쟁 당시 마크마옹은 제2 동방 군단의 제1 보병 사단을 지휘했으며, 1855년 세바스토폴 공방전 중 말라코프 전투에서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머무르겠다!" (J'y suis, j'y reste!|제 이 쉬, 제 이 레스트!프랑스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8][9]
1859년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마크마옹은 마젠타 전투에 참전, 결정적인 순간에 부대를 진격시켜 프랑스군 승리에 기여했다.[1] 나폴레옹 3세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프랑스 원수로 임명하고 마젠타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생애
마크마옹 가문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아일랜드 왕국의 코르쿠 바이신드 영주였으며[3], 아일랜드의 대왕 무이르케르타흐 우어 브리안의 아들인 마혼의 후손이었다.[4][5] 1652년 크롬웰 압류로 많은 토지를 잃은 후, 한 분가가 잠시 리머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1688년 명예 혁명에서 폐위된 국왕 제임스 2세를 지지했으며, 윌리엄 3세 치세 동안 프랑스에 정착했다.[6] 1749년 프랑스 시민권을 신청했고, 이후 프랑스에 정착한 후 루이 15세의 특허장을 통해 귀족 지위를 인정받았다.군인 가문 출신(마크마옹 가문의 14명이 군대에 있었다)인 그들은 부르고뉴의 오텡에 있는 술리 성에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은 1808년 6월 13일에 태어났다. 그는 남작 모리스-프랑수아 드 마크 마옹|모리스-프랑수아 드 마크마옹프랑스어(1754–1831), 술리 남작, 마크마옹 백작, 샤르네 백작, 그리고 피에르-폴 리케의 후손인 펠라지 드 리케 드 카라망(1769–1819)의 16번째이자 막내에서 두 번째 아들이었다.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자신이 공작 지위에 오른 전에는 흔히 이렇게 불렸다)은 오텡 근처 손에루아르주의 ''데파르트망''인 술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미 프랑스 귀족이었던 가문의 17명의 자녀 중 16번째였다. 그의 할아버지 기사 영주 장-밥티스트 드 마크마옹[7]은 루이 15세에 의해 마르퀴 드 마크마옹이자 1대 에귀이 후작(부인 샤를로트 르 벨랭, 에귀이 부인 출신)으로 명명되었으며, 프랑스에 있는 가문은 분명한 왕당파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조상은 원래 아일랜드 클레어주 출신으로, 잉글랜드 왕 제임스 2세 시대에 리머릭주에서 프랑스로 이주하여 1749년에 귀화했다.
2. 2. 초기 군 경력 및 알제리 복무
생시르를 졸업한 후, 마크 마옹은 1827년 프랑스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1830년 제4 엽기병 연대에 배속되어 프랑스령 알제리 정복에 부소위로 참전했다. 알제 점령 당시 그의 능력과 용맹함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1830년 11월 24일 메데아 원정에서 무자이야산 전투에 참여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쳐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을 받았다.[3]프랑스로 소환된 마크 마옹은 1832년 십일 전쟁에 참전하여 안트베르펜 포위전에서 다시 한번 두각을 나타냈다.[3]
1833년에 대위가 되어 다시 알제리로 돌아갔고, 1836년에 베르트랑 클로젤 장군과 샤를마리 드 다므레몽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부족 점령 지역을 가로지르는 몇 차례의 대담한 기병 기습을 이끌었고, 1837년 콘스탄틴 포위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이 전투에서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1840년, 그는 아프리카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고, 기병대장으로 진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3]
1841년 5월, 그는 제10 보병 척탄병 대대를 이끌고 다시 알제리로 돌아갔고, 4월 바브 엘 타자 전투에서, 5월 25일 아브델카데르 에미르의 군대에 맞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3]
1842년 12월 31일, 그는 제2 프랑스 외국인 연대 2ème R.E.L.E의 중령으로 진급했다. 1843년, 그는 병든 지휘관을 대신하여 연대 지휘관 직을 맡았고, 1845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3]
마크 마옹은 1844년 10월 14일 차브 엘 기타 전투와 10월 17일 아인 케비라 전투에서 다시 한번 두각을 나타냈다.[3]
1845년 12월에 대령으로 임명된 그는 마르니아에 주둔한 제41 보병 연대의 지휘를 맡았다.[3]
1848년부터, 마크 마옹은 트렘센의 하위 부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 12일 여단장으로 지명되었다.[3]
1849년,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오랑 주 참모총장인 아블르 펠리시에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3]
1852년 마크 마옹은 보편적 선거권을 통해 1851년 프랑스 쿠데타를 승인하는 합법화 국민투표를 알제리에서 조직했다. 같은 해 3월 그는 콘스탄틴 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7월에 사단장으로 진급했다.[3]

1834년부터 1854년까지 알제리에 근무하며, 1837년 콘스탄틴 포위전에서 부상당했다. 1843년에는 프랑스 외인부대 사령관이 되었고, 1852년 소장으로 승진했다.[4]
2. 3. 크림 전쟁과 세바스토폴 공방전
크림 전쟁 당시 제2 동방 군단의 제1 보병 사단을 지휘했으며, 1855년 세바스토폴 공방전 중 말라코프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머무르겠다!" (J'y suis, j'y reste!|제 이 쉬, 제 이 레스트!프랑스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8][9]2. 4. 마젠타 전투와 프랑스 원수 임명
마크 마옹은 1859년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마젠타 전투에 참전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상부의 명령 없이 자신의 부대를 진격시켜 프랑스군 승리에 기여했다.[1]이러한 공적으로 나폴레옹 3세는 마크 마옹을 프랑스 원수로 임명하고, 마젠타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1]
3. 알제리 총독 및 보불전쟁
1861년 마크 마옹은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대관식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다. 1864년 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몇 가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불만이 제기되었다. 1870년 초, 나폴레옹 3세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이후 올리비에 내각이 구성되자 황제는 그의 알제리 계획을 철회하고 마크 마옹을 다시 불러들였다.
마크 마옹은 보불전쟁에 참전하여 알자스에서 여러 차례 패배했고, 스당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그의 전략은 혼란스럽고 우유부단한 것으로 평가된다.[10] 1870년 9월 1일, 스당 항복으로 그는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대패했고, 나폴레옹 3세 황제도 포로로 잡히면서 제2제정이 붕괴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10]
1871년 아돌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정 정부가 수립되자, 독일과의 강화에 반대하는 파리 시민들은 파리 코뮌을 성립시켰지만, 베르사유에 거점을 둔 신정부는 파리 코뮌 탄압에 나섰다. 마크 마옹은 베르사유 정부의 총사령관으로서 파리 코뮌을 진압하여 제3공화국의 거물이 되었다.
3. 1. 알제리 총독 임명 및 정책
1861년 마크 마옹은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의 대관식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다. 1864년 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몇 가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불만이 제기되었다. 1870년 초, 나폴레옹 3세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이후 올리비에 내각이 구성되자 황제는 그의 알제리 계획을 철회하고 마크 마옹을 다시 불러들였다.3. 2. 보불전쟁 참전과 패배
마크 마옹은 보불전쟁에 참전하여 알자스에서 여러 차례 패배했고, 스당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그의 전략은 혼란스럽고 우유부단한 것으로 평가된다.[10] 1870년 9월 1일, 스당 항복으로 그는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대패했고, 나폴레옹 3세 황제도 포로로 잡히면서 제2제정이 붕괴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10]3. 3. 파리 코뮌 진압
1871년 마크 마옹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명령으로 파리 코뮌을 가혹하게 진압한 베르사유 정부군의 수장이었다.[10] 그해 1월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항복했고, 베르사유에 새 과도정부를 세웠다. 파리의 급진파들은 이 정부를 거절하고 파리 코뮌을 세웠다. 같은 해 5월, 마크 마옹은 베르사유 정부의 군대를 이끌고 파리 코뮌에 맞서 싸웠다. 나중에 '''''La Semaine Sanglante''''' (피로 물든 주)라고 불린 격렬한 싸움 속에서, 마크 마옹의 정부군은 코뮌을 진압하고 많은 코뮌 지지자들을 처형했다.[10] 그는 이 일로 비난받지 않고 오히려 우파에게 시대의 영웅으로 추켜세워졌다.[10]아돌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정 정부가 수립되자, 대독 강화에 반대하는 파리 시민들은 파리 코뮌을 성립시켰지만, 베르사유에 거점을 둔 신정부는 파리 코뮌 탄압에 나섰다. 마크 마옹은 베르사유 정부의 총사령관으로서 파리 코뮌을 진압하여 제3공화국의 거물이 되었다.
4. 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
1873년 아돌프 티에르가 사임한 후, 마크마옹은 왕당파와 보수파의 지지를 받아 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프랑스 의회는 왕당파와 공화파 간의 대립이 심각했으며, 마크마옹은 왕당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공화정 체제하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했다.
1873년 5월 24일 마크마옹은 왕당파가 다수인 국민 의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총리 쥘 아르망 뒤포르를 알베르 드 브로이 공작으로 교체했다.
마크마옹은 군주제 복원을 선호했지만, 이 계획이 실패하자 1873년 11월 9일 의회가 부여한 7년 임기를 수용했다. 그는 의회보다는 국가에 책임을 느꼈고, 이로 인해 하원과 충돌하게 되었다.
1874년 2월 4일, 마크마옹은 확립된 법적 질서를 존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정당을 초월"하는 것을 선호하며, 1875년 1월과 2월에 1875년 프랑스 헌법이 제정되어 프랑스 제3 공화국을 프랑스 정부로 확립하는 절차에 참여하기보다는 관찰했다.
1876년 프랑스 총선에서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자, 그는 쥘 뒤포르와 쥘 시몽 총리 밑에 공화당이 지배하는 정부 구성을 승인해야 했다.
1877년 5월 16일 위기는 하원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푸아티에, 님, 네베르의 주교들이 비오 9세에게 로마 문제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확신한 후, 하원은 정부에 "울트라몬타니즘의 발현"을 억압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2일 후 그는 쥘 시몽 총리를 해임하고 다시 알베르 드 브로이를 임명했다. 보수 세력의 승리를 바라면서 마크마옹은 상원을 설득하여 하원을 해산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거 운동을 벌였으며, 공화국을 전복할 의사가 없다고 주장했다.[18]
1877년 8월 15일, 레옹 강베타는 "대통령은 단 하나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복종하거나 사임해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
10월 14일 선거에서 공화당이 120석의 다수를 차지했고, 그에 따라 브로이 총리는 11월 19일 사임했다. 마크마옹은 가에탕 드 로슈부에 장군 아래 정부를 구성하려 했지만 하원은 그와 협력하는 것을 거부했다. 로슈부에는 다음날 사임했고, 대통령은 뒤포르를 불러 공화당 정부를 구성하도록 했다.
1879년 1월 5일 상원의원 선거에서 공화파가 승리하여 상원을 장악하자, 마크 마옹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19] 그는 일부 장군들의 지휘권을 박탈하는 법령에 서명을 거부하고 1879년 1월 30일 사임을 선택했다.[19] 그의 사임 이후, 쥘 그레비가 8시간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19]
4. 1. 대통령 선출과 초기 정치 상황
1873년 아돌프 티에르가 사임한 후, 마크마옹은 왕당파와 보수파의 지지를 받아 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프랑스 의회는 왕당파와 공화파 간의 대립이 심각했으며, 마크마옹은 왕당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공화정 체제하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했다.마크마옹은 1873년 5월 24일 왕당파가 다수인 국민 의회에 의해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총리 쥘 아르망 뒤포르를 알베르 드 브로이 공작으로 교체했다. 브로이 공작은 총리로 재임하면서 새로운 보수적인 "도덕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채택했다.
마크마옹은 군주제 복원을 선호했지만, 이 계획이 실패하자 1873년 11월 9일 의회가 부여한 7년 임기를 수용했다. 그는 의회보다는 국가에 책임을 느꼈고, 이로 인해 하원과 충돌하게 되었다.
1874년 2월 4일, 마크마옹은 확립된 법적 질서를 존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정당을 초월"하는 것을 선호하며, 1875년 1월과 2월에 1875년 프랑스 헌법이 제정되어 프랑스 제3 공화국을 프랑스 정부로 확립하는 절차에 참여하기보다는 관찰했다.
1876년 프랑스 총선에서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결과, 그는 쥘 뒤포르와 쥘 시몽 총리 밑에 공화당이 지배하는 정부 구성을 승인해야 했다.
1877년 5월 16일 위기는 하원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푸아티에, 님, 네베르의 주교들이 비오 9세에게 로마 문제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확신한 후, 하원은 정부에 "울트라몬타니즘의 발현"을 억압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2일 후 그는 쥘 시몽 총리를 해임하고 다시 알베르 드 브로이를 임명했다. 보수 세력의 승리를 바라면서 마크마옹은 상원을 설득하여 하원을 해산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거 운동을 벌였으며, 공화국을 전복할 의사가 없다고 주장했다.[18]
1877년 8월 15일, 레옹 강베타는 "대통령은 단 하나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복종하거나 사임해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
10월 14일 선거에서 공화당이 120석의 다수를 차지했고, 그에 따라 브로이 총리는 11월 19일 사임했다. 마크마옹은 가에탕 드 로슈부에 장군 아래 정부를 구성하려 했지만 하원은 그와 협력하는 것을 거부했다. 로슈부에는 다음날 사임했고, 대통령은 뒤포르를 불러 공화당 정부를 구성하도록 했다.
4. 2. 1877년 5월 16일 위기
1877년 5월 16일 위기는 프랑스 제3공화국 초기, 대통령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과 의회 간의 권력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마크마옹은 비오 9세를 지지하는 주교들의 요청에 영향을 받아, 공화파가 다수였던 하원의 '교회지상주의 저지' 결의안에 반발했다.[18] 1877년 5월 16일, 그는 공화파 총리 쥘 시몽을 해임하고, 왕당파인 브로이 공작을 총리로 임명하여 보수 내각을 구성했다.[18]마크마옹은 상원을 설득하여 하원을 해산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보수 정권의 승리를 위한 선거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877년 10월 14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공화파는 다수 의석을 차지하며 승리했고,[19] 브로이 내각은 11월 19일에 사임했다.[19] 마크마옹은 로슈부에 장군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려 했으나, 의회의 반대로 실패하고, 결국 쥘 뒤포르를 다시 총리로 임명하여 좌파 내각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19]
이 사건은 대통령과 의회 간의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스 제3공화국 초기 정치의 불안정한 상황을 드러냈다. 레옹 강베타는 이 상황을 두고 "대통령은 굴복하거나 사임하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라고 표현했다.[18]
4. 3. 대통령직 사임
1879년 1월 5일 상원의원 선거에서 공화파가 승리하여 상원을 장악하자, 마크 마옹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19] 그는 일부 장군들의 지휘권을 박탈하는 법령에 서명을 거부하고 1879년 1월 30일 사임을 선택했다.[19] 1877년 8월 15일 레옹 강베타는 '''"대통령은 굴복하거나 사임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18] 그의 사임 이후, 쥘 그레비가 8시간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19]마크 마옹의 사임은 프랑스 제3공화국이 공화파 중심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5. 퇴임 이후 및 사망
1887년부터 1893년까지 그는 1940년 프랑스 적십자사가 된 '부상 군인 구조 협회'(Société de secours aux blessés militaires, S.S.B.M.)를 이끌었다.[1]
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은 자서전을 쓴 후 1893년 10월 17일 몽크레송의 Château de la Forêt|라 포레 성프랑스어에서 사망했다.[1] 그는 국장과 마들렌 대성당에서 열린 종교 의식 후 10월 22일 앵발리드에 안장되었다.[1] 장례 마차의 다섯 끈(장식용 끈)은 레지옹 도뇌르의 대법관인 Victor Février|빅토르 페브리에프랑스어 장군, 해군 장관인 앙리 르니에 제독, 전쟁 장관인 Julien Loizillon|줄리앙 루아질롱프랑스어 장군, 샤를 메를랭 상원의원, 하원의 M. 말비가 잡았다.[1]
- 참고: 1893년 10월 8일 몽클레송 라 포레스트 성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은 10월 17일 사망 내용과 중복되므로 삭제하였고, 앵발리드 지하 성당 매장 내용도 앵발리드 안장 내용에 포함되므로 삭제했다.*
6. 평가 및 유산
마크마옹은 군인으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특히 크림 전쟁과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의 활약은 프랑스 군사 역사에 중요한 부분으로 기록되고 있다. 1855년 말라코프 전투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웠고, 1859년 마젠타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어 마젠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보불전쟁에서의 패배와 파리 코뮌 진압 과정에서의 강경 대응은 그의 군사적 경력에 오점으로 남아 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에는 왕당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공화정 체제를 존중하고, 프랑스 정치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877년의 5월 16일 위기는 그의 정치적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마크마옹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격동적인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인물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성립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7.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873년 선거 | 대통령 | 3대 | 정통주의 | 99.74% | 390표 | 1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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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word that is very suggestive in its concision, was that of Marshal de Mac Mahon, in the circumstances which historian Henri Martin related to: Mac-Mahon, while launching all his division, had finished off with repelling the Russians from Malakof. Informed that the openings were rigged with mines and that there were severe risks of explosions and being blown to pieces, he responded with the famous: ("J'y suis, j'y reste !" – "Here I am; here will I stay !"). Later, other controversies were engaged around the authenticity of this word, and no certain proof of this authenticity were able to be appropriated. It seems that the historical truth would be a little different. After having entered into Malakof, the French troops had to sustain violent counterattacks launched by the Russians; it was only after a couple of hours that their position were finally consolidated, and Mac-Mahon would have sent a letter to Pélissier with the following message, quite different in the form and the content :" Je suis dans Malakof et je suis sûr de m'y maintenir" – "Here I am in Malakof and I am certain of maintaining myself" (Paris soir, 4 January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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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오기(誤記)이지만 마크마옹(Mac-Mahon)으로도 표기됨. "성씨 마크(Mac)와 마옹(Mahon)은 함께 붙여 쓰지 않으며, 붙여 써서도 안된다. 이 오기는 마크 마옹 장군 본인이 서명할 때 두 성씨 사이에 자주 실선을 긋곤 하던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관보(官報)는 이 실선을 하이픈으로 이해했고, 당대 공문서는 그의 성씨를 붙여 항상 마크마옹(Mac-Mahon)으로 표기했으나, 이것은 오기이다. - 가브리엘 드 브로이, 「마크 마옹」, 파리, 페랭, 2000 ; (ISBN 2-262-01143-5, notice BnF no FRBNF37101369)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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