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프라이드의 숙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라이드의 숙청은 1648년 잉글랜드 내전 이후, 의회와 찰스 1세의 협상을 반대하는 신형군이 의회를 무력으로 해산하고 반대파 의원들을 축출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찰스 1세의 처형이 결정되었으며, 잉글랜드 공화국 수립의 발판이 되었다. 프라이드의 숙청은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고, 이후 호국경 시대의 정당성을 약화시켰으며, 한국 현대사에서 군부의 정치 개입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잉글랜드의 쿠데타 - 명예 혁명
    1688년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2세 폐위 후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공동 왕위에 오르며 권리장전으로 의회 권한이 강화되어 입헌군주제 발전의 계기가 된 사건이 명예 혁명이다.
  • 잉글랜드의 공화주의 - 잉글랜드 공화국
  • 잉글랜드의 공화주의 - 리처드 크롬웰
    올리버 크롬웰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호국경으로 재임했으나, 짧은 통치 후 사임하여 크롬웰 정권 붕괴를 가속화시킨 17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 잉글랜드 내전 - 원두당
    라운드헤드는 17세기 영국 청교도 혁명 당시 의회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짧은 머리 스타일에서 유래했으며, 왕당파인 캐벌리어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휘그당으로 대체되었다.
  • 잉글랜드 내전 - 토머스 페어팩스
    토머스 페어팩스는 1612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를 이끌고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잉글랜드 왕정복고에 기여했다.
프라이드의 숙청
사건 개요
프라이드의 숙청
프라이드 대령이 은퇴한 장기 의회 의원들의 입장을 거부하고 있다.
일부잉글랜드 내전
계획 주체신형군 내부 요소
목표장기 의회에서 신형군 반대파로 간주되는 의원들을 제거
날짜1648년 12월 6일
결과잔부 의회 설립
사상자없음

2. 배경

프라이드의 숙청은 잉글랜드 내전(1642-1651)이라는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갈등 속에서 발생했다.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양측은 모두 '잘 정돈된' 군주제가 신성하게 부여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잘 정돈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왕당파는 왕이 임명하는 주교가 다스리는 잉글랜드 교회를 지지한 반면, 청교도장로교를 지지하며, 선출된 교회의 지도자에게 왕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다.[1]

찰스 1세는 2차 잉글랜드 내전 이후에도 의회와 협상을 지속했지만, 신형군은 점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1648년 11월 10일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이자 신형군의 지휘관이었던 헨리 아이튼은 투표로서 국왕을 선출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의회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동안 찰스 1세의 탈출 계획이 발각되자 신형군은 의회의 논의가 시간끌기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의회 내 반대파를 축출하기로 결심하였다.[5]

2. 1. 잉글랜드 내전의 발발과 의회의 분열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을 당시, 기사당(왕당파)과 원두당(의회파)은 모두 "질서 있는 군주제"를 지지했지만, '질서'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달랐다.[1] 왕당파는 국왕이 임명한 주교가 다스리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지지한 반면, 의회파는 칼뱅주의를 바탕으로 장로에 의해 운영되는 독립적인 교회를 지지하는 청교도가 주류를 이루었다.[1]

청교도는 의회를 장악한 뒤 스코틀랜드 교회처럼 잉글랜드 교회 역시 장로교로 전환되기를 바랐다. 주교제 철폐를 요구하는 이들은 독립파라고 불렸으며, 올리버 크롬웰을 비롯한 신형군의 다수를 차지하였다.[2]

주교 전쟁에서 승리한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는 1643년 엄숙동맹과 언약을 통해 잉글랜드 의회와 동맹을 맺었다. 원두당 온건파는 국왕이 의회의 동의를 받아 통치하는 잉글랜드의 전통을 재확립하려 했으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들과 스코틀랜드는 독립파와 수평파를 왕당파보다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3]

1646년, 의회파는 군사적 패배가 찰스 1세를 굴복시킬 것이라 예상했지만, 찰스 1세는 양보를 거부하며 의회 온건파 및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었고, 이는 1648년 2차 잉글랜드 내전으로 이어졌다.[4] 2차 내전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찰스 1세의 신뢰할 수 없음을 증명했고, 신형군 내에서는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다만, 크롬웰을 포함한 대다수는 처형이 아닌 퇴위를 생각했다.[4]

의회는 찰스 1세와 뉴포트 조약 협상을 지속했지만, 1648년 11월, 신형군은 인내심을 잃었다. 헨리 아이튼은 군사 평의회에 국왕 선출 법안을 제출했고, 평의회는 이를 승인했다. 찰스 1세의 탈출 계획이 발각되자, 신형군은 의회 내 반대파를 축출하기로 결심했다.[5]

찰스 1세; 1648년경에는 그의 죽음만이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상당했다.

2. 2. 종교적 갈등과 스코틀랜드의 개입

잉글랜드 내전 이전에 스코틀랜드는 이미 장로교를 채택하고 있었고, 1639년 찰스 1세가 다시 주교를 임명하고자 시도하자 스코틀랜드 장로회의 주류인 언약도들은 주교 전쟁을 통해 이를 저지하였다.[1] 전쟁에서 패배한 찰스 1세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 마련을 위해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1] 11년 동안 의회 없이 독단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절대군주제를 지향하던 찰스 1세가 다시 의회를 소집하자, 의회는 국왕이 독단으로 의회를 해산할 수 없도록 군주권을 제한하고자 하였다.[1] 의회 소집과 세금 징수를 놓고 벌어진 갈등은 결국 내전으로 번졌지만, 당시까지도 원두당의 온건파들은 내전을 국왕이 의회의 동의를 받아 통치하는 잉글랜드의 오랜 전통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여겼다.[1] 내전의 양상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고, 의회는 국왕과 원만한 합의를 바라는 온건파와 완전한 승리를 주장하는 강경파로 분열되었다.[1] 강경파의 주축이었던 독립파나 새로 구성된 부대인 신형군의 사병들 사이에서 번져가던 평등주의 급진파였던 수평파는 국왕과 타협을 바라는 온건파 귀족들과 스코틀랜드 언약도를 왕당파와 다름없다고 여겼으며, 반대로 온건파와 언약도는 강경파를 정치적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게 되었다.[1]

1643년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엄숙동맹과 언약을 맺고 국왕에 맞서는 동맹을 결성하였다.[2] 1646년 찰스 1세의 아성이었던 옥스퍼드가 함락되자 내전은 의회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듯하였으나, 전후 정치 체제 정비 문제에서 의회 내 온건파와 강경파의 갈등은 오히려 고조되었다.[2] 찰스 1세는 연금 상태에서도 의회의 요구에 확실한 답변을 미루면서 자신의 권좌를 되찾기 위해 의회 온건파와 스코틀랜드 언약도를 새로운 동맹으로 삼고자 하였다.[2]

2. 3. 찰스 1세의 책략과 2차 내전

1643년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엄숙동맹과 언약을 맺고 국왕에 맞서는 동맹을 결성하였다. 1646년 찰스 1세의 아성이었던 옥스퍼드가 함락되자 내전은 의회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듯 하였으나, 전후 정치 체제 정비 문제에서 의회 내 온건파와 강경파의 갈등은 오히려 고조되었다. 찰스 1세는 연금 상태에서도 의회의 요구에 확실한 답변을 미루면서 자신의 권좌를 되찾기 위해 의회 온건파와 스코틀랜드 언약도를 새로운 동맹으로 삼고자 하였다.[4] 1648년 찰스 1세는 결국 언약도와 동맹을 맺었고 잉글랜드는 다시 한번 내전을 치르게 되었다. 2차 잉글랜드 내전은 전면전이라기보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하는 것이어서 비교적 신속하게 종결되었고, 1648년 8월 프레스턴 전투에서 언약도의 군대가 패퇴함으로써 다시 의회파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신형군 내에서는 찰스 1세의 축출만이 이 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올리버 크롬웰을 비롯한 대다수에게 찰스 1세의 축출은 처형이 아니라 그저 퇴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4]

3. 프라이드의 숙청

2차 내전 이후에도 의회는 찰스 1세와 협상을 지속했지만, 신형군(뉴 모델 아미)은 인내심을 잃어갔다.

의회파의 연금에서 탈출한 찰스 1세를 구출하려던 스코틀랜드 군은 1648년 8월 프레스턴 전투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뉴모델 군에게 패배하였다. 이로써 Second English Civil War영어도 종결되면서 잉글랜드의 당면한 위기는 사라졌다. 그러나 장기 의회는 9월에 와이트 섬에 있는 찰스 1세와 교섭을 재개하여 군의 사기에 찬물을 끼얹었고, 군 간부가 속한 독립파는 하원의 평등파와 연합하여 토머스 페어팩스에게 런던 진격을 요청하거나 11월에 의회에 교섭에 대한 항의문을 보냈다.[1][2]

한편, 크롬웰은 스코틀랜드와 화해하고 10월부터 왕당파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북쪽 폰테프랙트에 머물렀다. 그는 정국을 파악하기 위해 거리를 둔 것으로 추측되며, 사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의회가 군과 국민에게 해를 끼친다고 판단될 경우 무력 저항도 인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3]

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장로파가 주도하는 의회가 국왕과의 교섭을 계속하려 하자, 페어팩스는 군의 정치 개입을 결단했다. 12월 1일 부하 유어 대령에게 찰스 1세를 체포하게 하고, 2일 군대를 런던으로 이동시켰다. 그럼에도 하원은 129대 83으로 국왕과의 협상 지속을 가결했고, 이에 군은 쿠데타를 단행했다.

장로파를 제거한 군은 잔부 의회와 연계하여 1649년 1월 6일 상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 재판을 위한 특별 재판소 설치를 하원 단독으로 가결했다. 20일부터 27일까지 재판을 진행한 후, 30일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잉글랜드 공화국을 수립했다.[4]

그러나 의회는 총선으로 소집된 것이 아니었고, 민의를 반영하지 못해 정당성 문제가 있었다. 군의 개입으로 다수파가 배제된 점, 처형된 찰스 1세에 대한 국민적 동정심은 공화국과 잔부 의회를 고립시켰다. 이후 공화국은 왕정, 상원, 추밀원 등을 폐지하고 하원만의 잔부 의회가 단독으로 정치를 집행하며, 크롬웰 등 군과 연계하여 어려운 정권 운영을 이어갔다.[5]

3. 1. 신형군의 불만과 의회 축출 결심

1648년 11월, 헨리 아이레튼은 투표로 국왕을 선출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찰스 1세의 탈출 계획이 발각되자, 신형군(뉴 모델 아미)은 의회 내 반대파를 축출하기로 결심했다.[1][2]

12월 1일, 신형군 사령관 토머스 페어팩스 경은 찰스 1세를 허스트 성으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날 페어팩스는 화이트홀에 본부를 두고 신형군에게 런던의 요지를 장악하도록 했다.[4]

12월 5일, 의회는 129 대 83으로 찰스 1세와의 협상 지속을 의결했다. 다음 날 신형군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고, 아이레튼은 휘하의 토머스 프라이드 대령과 하드레스 월러의 분견대를 의사당으로 보냈다. 이들은 의사당 앞 경비대를 철수시키고 나다니엘 리치의 기병대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의사당 입구 계단을 봉쇄했다.[4]

토머스 페어팩스 경, 뉴 모델 아미 사령관

3. 2. 쿠데타의 실행

1648년 12월 1일, 토머스 페어팩스 신형군 사령관은 찰스 1세와이트 섬에서 허스트 성으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날, 신형군은 런던의 요지를 장악하여 런던 민병대의 소요를 방지하고자 화이트홀에 본부를 두었다.[1][2]

12월 5일, 의회는 129 대 83으로 찰스 1세와의 협상 지속을 의결했다. 이에 신형군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 헨리 아이레튼은 토머스 프라이드 대령과 하드레스 월러의 분견대를 의사당으로 보냈다. 이들은 의사당 앞 경비대를 철수시키고 나다니엘 리치의 기병대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의사당 입구 계단을 봉쇄했다.[4]

프라이드는 미리 준비한 명단을 들고 출석하는 의원들을 확인했다.[3] 명단에는 전체 의원 470명 가운데 전날 협상 지속에 찬성한 129명을 포함한 180명이 올라 있었다. 덴질 홀스를 포함하여 명단에 포함되어 런던을 떠나 피신을 해야하는 의원들도 있었다.[4]

프라이드는 이날 명단에 오른 의원 중 실제 출석을 시도한 총 140명의 의사당 출석을 막았고, 그 중 45명은 체포되어 스트랜드에 있는 여관 두 곳에 구금되었다. 구금된 의원들은 대부분 해가 바뀌기 전에 석방되었지만, 윌리엄 윌러와 리처드 브라운은 거의 3년 가까이 갇혀 있어야 했다.[4]

이 사건으로 잉글랜드 의회는 156명의 의원만이 남게 되어 잔부 의회로 불리게 되었다. 프라이드의 행동에 불안을 느낀 의원 80여 명이 의사당 출석을 거부하자, 찰스 1세와 협상을 종료하는 안건에 대한 표결은 단지 83명의 의원에 의해 이루어졌다.[4] 올리버 크롬웰은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쿠데타 당일 런던에 도착하여 찬성 의사를 표명했다.[5]

4. 숙청 이후

프라이드의 숙청으로 찰스 1세를 지지하던 의회 세력은 제거되었지만, 찰스 1세가 곧바로 처형된 것은 아니었다. 페어팩스는 찰스 1세의 재판 참여를 거부했고, 크롬웰도 찰스 1세가 아일랜드 침공을 지지한다면 굳이 처형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쿠데타에 앞장선 프라이드의 연대는 1648년 12월부터 1649년 1월 사이에 약 8000GBP를 채납 급여로 수령하였다. 이는 오랫동안 급여가 채납되어 있던 신형군 가운데 어느 부대보다 큰 금액이었다. 프라이드는 찰스 1세의 반역죄 재판에 참여하였고 이후 사형집행 영장에도 서명하였다. 그는 호국경 정치 치하에서 부자가 되었고 1659년 사망하였다.

4. 1. 찰스 1세의 재판과 처형

올리버 크롬웰은 찰스 1세가 아일랜드 침공을 지지하지 않자, 그를 처형하기로 결심했다. 1649년 1월 1일 잉글랜드 의회 하원은 국왕을 반역죄로 기소했고, 상원이 이를 거부하자 하원이 국가 최고 권력이라고 선언하며 재판을 강행했다.[4]

찰스 1세는 "전쟁 중에 흘린 피에 대한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사형이 결정되었다.[5] 그러나 찰스 1세 처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재판관들조차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국왕 시해죄를 짓는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찰스 1세 재판에는 135명의 판사가 임명되었으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한 사람은 52명뿐이었다. 크롬웰은 부결을 막기 위해 의회에 회부하지 않고 재판관 서명으로 사형을 결정했다.

찰스 1세의 처형. 프라이드의 숙청으로 처형이 가능해졌다.


찰스 1세는 1649년 1월 30일에 처형되었다.

4. 2. 잉글랜드 공화국의 수립과 한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잉글랜드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프라이드의 숙청 이후 이미 반대파가 모두 축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처형이었기 때문에 공화정은 시작부터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프라이드의 숙청은 1653년 잔부 의회 해산 때까지 의회파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였다.[4]

의회파의 연금에서 탈출한 찰스 1세 구출을 시도한 스코틀랜드 군의 남하는, 8월 프레스턴 전투에서 올리버 크롬웰에게 공격을 받아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Second English Civil War|제2차 잉글랜드 내전영어도 종결되면서 잉글랜드의 당면한 위기는 사라졌다. 그러나, 장기 의회는 9월에 와이트 섬에 있는 찰스 1세와 교섭을 재개하여 어렵게 활약한 군의 사기에 찬물을 끼얹었고, 군 간부가 속한 독립파는 마찬가지로 교섭에 불만이 있는 하원의 평등파와 손을 잡고, 군 사령관 토머스 페어팩스에게 런던 진격을 부추기거나 11월에 의회에 교섭에 대한 항의문을 보냈다.[1][2]

한편, 거취가 주목받던 크롬웰은 스코틀랜드와 화해, 10월부터 왕당파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 북쪽 폰테프랙트에 체류했다. 정국을 파악하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추측되며, 사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의미의 문장을 적는 동시에, 의회가 군, 나아가 국민에게 해를 끼친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무력에 의한 저항도 인정하겠다는 뜻을 비쳤다.[3]

중앙에서 장로파가 주도권을 쥔 의회가 국왕과의 교섭을 계속할 의향을 보이며, 군의 항의를 무시했다. 이에 이르러 페어팩스는 군의 정치 개입을 결단, 12월 1일 부하 유어 대령에게 찰스 1세를 체포하게 하고, 다음 날 2일 부대를 움직여 런던을 점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과의 교섭은 하원이 129대 83으로 찬성했기 때문에, 군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2월 6일 아침, 토머스 프라이드 대령이 한 부대를 이끌고 하원 의사당에 난입, 장로파 의원들을 다수 체포·추방하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체포·구금 54명, 추방 94명, 총 148명에 달했고, 스스로 출석을 거부한 의원도 20명이나 되어 하원은 60명 이하밖에 남지 않아, 그들만으로 의회(럼프 의회)가 형성되었다. 페어팩스로부터 귀환 편지를 받은 크롬웰은 이날 밤 런던에 도착, 계획을 몰랐다고 말하면서도 찬성 의사를 표명했다. 방해가 되는 장로파를 제거한 군은 럼프 의회와 연계하여, 새해 1649년1월 6일 상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왕을 재판할 특별 재판소 설치를 하원만으로 가결, 20일부터 27일까지 재판을 진행한 후, 30일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잉글랜드 공화국이 탄생했다.[4]

하지만, 의회는 총선으로 소집된 것이 아니었고,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성립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군의 개입으로 다수파가 배제되었다는 경과도 함께 공화국 및 럼프 의회는 처음부터 정당성을 의심받았고, 처형된 찰스 1세에게 국민이 동정심을 느낀 것과 맞물려 주변은 적으로 가득한 고립된 상태에 놓였다. 이후 공화국은 왕정·상원·추밀원 등을 폐지하고, 하원만의 럼프 의회가 단독 정치를 집행하며, 크롬웰 등 군과 연계하면서 어려운 정권 운영의 길을 걷게 된다.[5]

5. 역사적 의의와 평가

프라이드의 숙청은 군사력이 정치에 개입하여 민주적 절차를 훼손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