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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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화가로, 서양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로코코 양식에서 시작하여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후 청력 상실과 질병으로 인해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을 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옷을 벗은 마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8년 5월 3일의 처형》, 《전쟁의 참화》, 그리고 《검은 그림》 연작 등이 있다. 고야는 마지막 거장이자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평가받으며,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등 20세기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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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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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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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
출생일 | 1746년 3월 30일 |
출생지 | 푸엔데토도스, 아라곤, 스페인 |
사망일 | 1828년 4월 16일 |
사망지 | 보르도, 프랑스 |
배우자 | 호세파 바예우 (1773년 결혼) |
묘소 | 성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왕실 예배당 |
활동 정보 | |
분야 | 회화, 드로잉, 조각, 판화 |
사조 | 낭만주의 |
스승 | 호세 루산 |
대표작 | 『나체의 마하/옷 입은 마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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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스페인 북동부 사라고사 근교의 푸엔데토도스에서 도금 장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84] 14세 때부터 화가 호세 루산 이 마르티네스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이 시기에 프란시스코 바이유와 라몬 바이유 형제를 만났다.[84][85] 1764년과 1766년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장학금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84]
19세 때 마드리드로 이주한 후 교황령 로마로 갔으나, 후원자를 찾지 못하고 건강 악화와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85] 르네상스 걸작을 접하고 프레스코화 기법을 배운 그는 팔레르모 아카데미에서 장려상을 받고 1771년 귀국했다.[86] 1772년 사라고사 필라르 성모 교회 대성당 천장 장식 주문을 받는 등 여러 일을 맡았다.[86] 1773년에는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여동생 호세파 바이유와 결혼했고,[84] 바예우의 도움으로 마드리드에 진출하여 1775년까지 1명의 자녀를 낳았다.[85]
1775년부터 1792년까지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태피스트리 하청 작업에 종사했다.[84] 1786년, 40세에 카를로스 3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으며, 1789년에는 카를로스 4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84]
40대에 스페인 최고의 화가 지위에 올랐지만, 1792년 불치병으로 청력을 잃었다.[84] 대표작으로는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옷을 입은 마하』, 『옷을 벗은 마하』[87][86],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88][86], 『거인』 등이 있으며, 모두 청력 상실 이후 후반생에 그려졌다.
1807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침공으로 1808년부터 1814년까지 스페인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 고야는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거인』, 판화집 Los Desastres de la Guerra|전쟁의 참화es (1810-1820) 등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다.[84]
1815년 고야는 40세 이상 연하인 레오카디아 와이스와 동거했다. 1819년 마드리드 교외 퀸타 델 소르도(귀머거리의 집) 별장을 구입하여 1820년부터 1823년까지 검은 그림들을 그렸다.[84] 1823년 "귀머거리의 집"을 손자에게 넘겨주었다.[84]
1824년 자유주의자 탄압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하여 보르도에 정착했다.[89] 파리에 잠시 체류 후, 1826년 마드리드에 일시 귀국하여 궁정 화가 사임을 인정받았다.[84] 1828년 4월 16일 보르도에서 82세로 생을 마감했다.[85]
2. 1. 유년기 및 초기 활동 (1746-1771)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푸엔데토도스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84] 그의 아버지 호세 베니토 데 고야 이 프랑크는 도금 업자였으며,[84] 바스크인 출신으로 세라인에서 금박공을 하며 종교적이고 장식적인 수공예품을 전문으로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다.[5][6] 고야의 어머니 집안은 귀족을 자처했고, 소박한 벽돌집은 그녀의 가족 소유였다.[6]1749년 무렵 고야의 가족은 사라고사에 집을 마련하였고 몇 년 후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고야는 에스쿠엘라스 피아스 데 산 안톤에서 무료 교육을 받았는데, 읽기, 쓰기, 셈하기와 고전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가졌다.[8] 고야는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고 14세가 되자 화가 호세 루산의 도제로 들어가 4년간 도장을 모사하며 공부했다.[10] 이 시기에 그는 후에 처남이 되는 프란시스코 바예우와 그의 동생 라몬 바예우를 만났다.[85] 또한, 학교에서 동료 학생 마르틴 사파테르와 평생 친분을 맺었으며, 1775년부터 사파테르가 1803년에 사망할 때까지 고야가 그에게 보낸 131통의 편지는 마드리드 궁정에서의 고야의 초기 시절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4][9]
1763년과 1766년에 고야는 산 페르난도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두 번 모두 입학이 거부되었다.[11] 19세 때 마드리드로 이주한 후, 자비로 교황령의 로마로 향했지만, 후원자를 찾지 못했고,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건강이 악화된 데다 파산에 가까운 상태였다.[85] 이탈리아 체류 중에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접하고, 프레스코화 기법을 배웠다. 1771년 파르마 시에서 주최한 그림 대회에서 2등을 수상하고 그해 사라고사로 돌아왔다.[86] 1772년에는 사라고사의 필라르 성모 대성당의 천장 장식 주문을 받았으며, 그 외의 일도 맡았다.[86]
2. 2. 성숙기 (1771-1792)
1773년 7월 25일 고야는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여동생 호세파(고야는 그녀를 "페파"라고 불렀다)[15]와 결혼했다. 고야는 바예우의 도움으로 엘 에스코리알[94]과 엘 파르도 궁전의 태피스트리 제작에 참여하여 5년간 42개의 패턴을 제작하였다. 이 작업으로 왕가의 주목을 받았고,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실력을 인정받은 후 왕립 미술 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바예우는 1765년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777년부터 왕립 태피스트리 공방을 감독하면서 고야가 태피스트리 만화 연작을 위탁받는 데 기여했다. 고야는 5년 동안 약 42점의 도안을 디자인했는데, 그 중 많은 작품이 엘 에스코리알과 엘 파르도 왕궁의 석조 벽을 장식하고 단열하는 데 사용되었다.
1783년 고야는 카를로스 3세의 측근이었던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의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야는 왕가의 초상화를 다수 제작하게 되었다. 1786년, 고야는 카를로스 3세의 화가로 봉급을 받는 자리에 임명되었다. 1788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고 1789년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면서,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이 해에 궁정화가가 되었다.[95]
2. 3. 궁정 화가 (1789-1792)
1786년 카를로스 3세의 초상화를 그린 이래 고야는 왕가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1789년에는 정식으로 궁정화가가 되었고 1799년 수석 궁정화가가 되어 연봉으로 50000ESP과 사륜 마차 비용으로 500두카트를 받았다. 궁정화가로서 고야는 왕과 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가운데 1800년 작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 유명하다.[96]1789년 카를로스 4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된 고야는 이듬해 수석 궁정 화가가 되었으며, 연봉 50000ESP과 마차 비용으로 500두카트를 받았다. 그는 국왕과 왕비, 스페인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 및 다른 많은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 초상화들은 아첨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왕가를 매우 가혹하게 평가한 작품으로, 현대의 해석가들은 이 초상화를 풍자적인 것으로 보며 카를로스 4세의 통치 뒤에 숨겨진 부패를 드러낸 것으로 여긴다. 그의 통치 하에서 그의 아내인 루이사가 실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져 고야는 그녀를 집단 초상화의 중심에 배치했다. 그림 왼쪽 뒤편에서 화가 자신을 볼 수 있는데, 그는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고, 가족 뒤의 그림은 롯과 그의 딸들을 묘사하여 부패와 타락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반영하고 있다.[26]

2. 4. 청력 상실과 예술적 변화 (1792-1808)
1792년 콜레라에 걸린 고야는 고열로 인해 청각을 잃게 된다. 5년 뒤 회복에 이르기까지 고야는 깊은 상실감을 맛보았다. 이 기간 동안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에 이끌렸고 관련 철학책들을 탐독하였다. 1799년 고야는 에칭의 일종인 애쿼틴트 기법으로 제작한 판화집 《카프리초스》(Caprichos|변덕es)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 속에서 고야는 가톨릭 성직자들을 괴물이나 악마로 묘사하며 마녀와 악마에 대한 미신에 사로잡힌 스페인의 풍조와 부패한 가톨릭 교회의 실상을 고발했다. 마카브르의 일종인 이 판화집은 카툰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어두운 분위기의 판화들로 채워진 이 판화집에 그는 다음과 같은 부제를 붙였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한편 1798년 고야는 파도바의 안토니오를 기념하는 마드리드의 플로리다 성 안토니오 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의 기적을 묘사한 그의 작품은 관례적인 천사들을 배제하고, 기적을 마치 평범한 사람들이 연출하는 연극적 사건처럼 다루었다.[33]
1793년에서 1794년 사이 고야는 일련의 환상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이 시기 그는 머리를 울리는 이상한 소음과 청각상실로 고통받고 있었다. 신경쇠약에 걸린 그는 이 시기에 환상적이면서도 악몽을 표현하는 어두운 그림들을 남겼다. 이러한 그림들은 만년의 고야가 그린 검은 그림들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1799년 그는 마카브르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82개의 판화들을 묶어 《카프리초스》를 발표한다. 고야는 이러한 제목을 붙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 모든 문명 사회는 수 없이 많은 결점과 실패로 가득차 있다. 이는 악습과 무지,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이기심으로 인해 널리 퍼진 편견과 기만적 행위에 의한 것이다.[101]
《옷을 벗은 마야》(''La maja desnuda'')는 알레고리적 또는 신화적 의미를 전혀 담지 않은 "서양 미술 최초의 완전한 세속적 실물 크기의 여성 누드"로 묘사되어 왔다.[29] 《마야》의 모델에 대한 정체성은 불확실하다. 가장 널리 인용되는 모델은 고야와 한때 염문설이 돌았던 알바 공작부인 마리아 카예타나 데 실바, 그리고 마누엘 데 고도이의 정부였던 페피타 투도이다. 두 이론 모두 확인된 바 없으며, 그림이 이상화된 합성물일 가능성이 높다.[30] 고야 생전에 이 그림들은 공개적으로 전시된 적이 없으며 고도이가 소유했다.[31] 1808년, 고도이가 권좌에서 실각하고 추방된 후 그의 모든 재산은 페르난도 7세에게 압수되었고, 1813년 스페인 종교 재판소는 이 두 작품을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압수하여 1836년 산 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에 반환했다.[32]
고야의 신체적, 정신적 붕괴는 프랑스가 스페인에 선전 포고를 한 지 몇 주 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한 당대인은 "그의 머리 속 소리와 귀머거리 증상은 호전되지 않고 있지만, 시력은 훨씬 좋아졌고 균형 감각도 되찾았다"고 전했다.[42] 이러한 증상은 장기간의 바이러스성 뇌염 또는 고혈압으로 인한 일련의 소규모 뇌졸중으로 인해 발생하여 뇌의 청력 및 균형 중추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이명, 균형 장애의 에피소드, 그리고 점진적인 청력 상실 증상은 메니에르병의 전형적인 증상이다.[43] 고야가 다량의 연백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는 캔버스 프라이머와 주요 색상으로[45][46] 직접 갈아 사용했다[44]) 누적된 납 중독을 겪었을 가능성도 있다.
2. 5. 반도 전쟁과 후기 (1808-1828)

1808년부터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간에 반도 전쟁이 일어났다. 고야는 반도 전쟁에 관한 여러 기록화를 남겼는데, 특히 1808년 5월 2일과 5월 3일의 사건을 그린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이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지지자였지만, 자신의 조국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 1810년에서 1820년까지 제작한 《Los Desastres de la Guerra|전쟁의 재난es)》은 전쟁 중에 일어난 학살과 비인도적 만행을 기록한 판화집이다.[50][51][52] 1812년 고야의 아내 호세파가 사망하였다.
1814년 프랑스군이 물러가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하였으나 고야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 고야는 가정부 도냐 레오카디나와 그녀의 사생아 로사리오 웨이스와 함께 살았다. 고야는 로사리오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녀는 고야의 딸이었으리라 짐작된다.[97] 말년의 고야는 《유스타와 루피나》와 같은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고야는 세상과 떨어져 지내고자 만사나레스 근처에 집을 한 채 구해 "퀸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귀머거리의 집es)이라 이름 붙였다. 그는 여기서 검은 그림들을 제작하였다.[54][55][56][57][58][59]
1824년 고야는 프랑스 보르도로 이주하였고, 이후 파리에도 잠시 있었다. 1826년 스페인으로 돌아왔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보르도로 갔으며, 1828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69]
고야가 "침략자 왕" 호세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제)의 궁정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프랑스 후원자와 동조자를 위해 그림을 그렸지만, 전투 중에는 중립을 유지했다. 1814년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가 복위한 후, 고야는 프랑스와의 어떤 연루도 부인했다. 1812년 부인 호세파가 사망할 무렵, 그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그렸고, 이후 ''전쟁의 참화''(Los desastres de la guerra)로 알려진 에칭 연작을 준비했다. 페르난도 7세는 1814년 스페인으로 돌아왔지만, 고야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화가는 여러 부처를 위해 국왕의 초상화를 완성했지만, 국왕 자신을 위해서는 완성하지 않았다.
고야는 ''전쟁의 참화''를 만들 때 자신의 의도를 밝히지 않았지만, 미술사학자들은 이를 1808년 5월 2일 봉기, 그 후의 반도 전쟁, 그리고 1814년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 자유주의에 대한 탄압에 대한 시각적 항의로 본다.
이 연작의 첫 47점은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다루며, 개별 군인과 민간인에게 미치는 갈등의 결과를 보여준다. 중간 연작(48~64점)은 1811년~1812년 마드리드를 강타한 기근의 영향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기근은 도시가 프랑스군으로부터 해방되기 전에 발생했다. 마지막 17점은 가톨릭 교회가 지지한 복고된 부르봉 왕정이 1812년 스페인 헌법을 거부하고 국가 개혁과 종교 개혁을 모두 반대했을 때 자유주의자들이 느낀 뼈아픈 실망감을 반영한다.
작품 | 설명 |
---|---|
-- | 1808년 5월 3일 |
-- | 1808년 5월 2일 |
-- | Las mujeres dan valor|여성들은 용감하다es |
-- | Y son fieras|그리고 그들은 사납다es |
-- | Esto es malo|이것은 나쁘다es |
-- | Así sucedió|이것이 일어난 방식이다es |
고야의 작품은 1792년 콜레라로 청각을 잃은 것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뚜렷이 나뉜다. 전기에는 궁정화가로서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와 여러 태피스트리를 그렸는데, 화려하고 밝은 느낌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792년 이후 고야의 그림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반도 전쟁 이후의 참상을 겪으면서 무거운 주제와 어두운 색조를 담은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말년에 퀸타 델 소르도에 그린 검은 그림에서 이러한 성향이 최고조에 달했다.
1814년부터 1819년까지 그의 작품은 주로 의뢰받은 초상화였지만, 세비야 대성당을 위한 성녀 후스타와 성녀 루피나의 제단화, 투우 장면을 묘사한 판화 연작 ''라 타우로마키아''가 포함되어 있다.
고야의 만년의 기록은 비교적 빈약하며,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했기에 이 시기의 작품 중 일부를 억눌렀고, 대신 개인적으로 작업했다.[54] 그는 노년에 대한 공포와 광기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다.[55] 고야는 성공적이고 왕실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였지만, 말년에는 공적인 삶에서 물러났다. 1810년대 후반부터 그는 마드리드 외곽의 농가를 작업실로 개조하여 거의 고독하게 살았다. 그 집은 "킨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귀머거리의 집)로 알려지게 되었다.[56]
미술사학자들은 고야가 1814년 부르봉 왕가의 복고 이후의 사회적, 정치적 경향에 소외감을 느꼈으며, 이러한 발전들을 사회 통제의 반동적인 수단으로 보았다고 추정한다.
75세의 나이에, 고독과 정신적, 육체적 절망 속에서 그는 14점의 ''검은 그림''(Black Paintings) 작품을 완성했는데, 모두 자신의 집 벽에 직접 유화로 그렸다. 고야는 이 그림들을 전시할 의도가 없었고, 그에 대해 글을 쓰지 않았으며, 아마 그에 대해 말한 적도 없을 것이다.[59] 그의 사후 약 50년 후인 1874년경, 이 작품들은 떼어내어져 캔버스 지지대로 옮겨졌다. 오늘날, 이 작품들은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에 영구 전시되어 있다.
레오카디아 바이스(née 소리야, 1790–1856),[62][63] 화가의 하녀이자 35살 연하로 먼 친척이었으며,[64] 바예우가 사망한 후 고야와 함께 살며 그를 돌보았다. 그녀는 1824년까지 딸 로사리오와 함께 그의 킨타 델 소르도 별장에 머물렀다.[65]
그녀의 불같은 성격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녀는 화가의 아들 하비에르가 결혼했던 부유한 가문인 고이코에체아 가문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레오카디아가 보석상 이시도르 바이스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그가 그녀를 "부정한 행위"로 고발한 후 1811년부터 별거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녀는 그 전에 두 아이를 낳았고, 26세였던 1814년에 세 번째 아이 로사리오를 낳았다. 이시도르는 아버지가 아니었고, 비록 확실한 증거는 거의 없지만, 그 아이가 고야의 아이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자주 제기되었다.[67]
고야는 1828년 4월 16일에 사망했다.[69] 레오카디아는 고야의 유언에서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3. 주요 작품
고야의 대표작으로는 벨라스케스풍의 종교화와 초상화, 민중 생활에서 소재를 취한 사실적 풍속화가 있는데, 특히 초상화 〈옷 입은 마하〉, 〈옷 벗은 마하〉, 〈카를로스 4세와 그 가족〉 등과 역사화 〈1808년 5월 3일의 처형〉, 판화집 〈카프리초스〉, <전쟁의 재난>등이 유명하다. 고야의 작품 대다수는 프라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98]
3. 1. 초상화
고야는 벨라스케스풍의 종교화와 초상화, 민중 생활에서 소재를 취한 사실적 풍속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초상화 〈옷 입은 마하〉, 〈옷 벗은 마하〉, 〈카를로스 4세와 그 가족〉 등이 특히 유명하다.[98]
마하 연작은 고야의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1800년에 〈옷 벗은 마하〉를 그렸고 1803년에는 〈옷 입은 마하〉를 그렸다. 같은 여인이 똑같은 포즈로 그려져 있는 이 두 그림은 어떠한 비유나 신화적 연관성이 없는 현실의 여인을 대상으로 한 그림으로, "서양 예술 최초의 등신대 여성 누드"로 평가받는다.[96] 《옷 벗은 마하》는 신성 모독 논란을 일으켰고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에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는 것을 거절하고 《옷 입은 마하》를 새로 그렸다.
그림의 모델인 마하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림을 소유하게 된 카를로스 4세의 수상 마누엘 데 고도이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마하의 후보로 알바 여공을 꼽았으나 고야는 이를 부정하였다. 마누엘 데 고도이의 아끼는 정부라는 설도 있다. 여러모로 보아 마하는 실존 인물이기보다는 이상화된 여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99] 1808년 고도이가 실각하자 이 그림은 그의 모든 재산과 함께 페르난도 7세에게 귀속되었다. 1813년 스페인 종교재판은 마하 연작을 외설스럽다고 압수하였으나 1836년 반환하였다. 고야는 간신히 이단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100] 현재 마하 연작은 스페인 프라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99]
1783년,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은 카를로스 3세의 총애를 받아 고야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다. 그는 국왕의 이복 형제인 루이스와 친구가 되었고, 인판테와 그의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두 번의 여름을 보냈다.[25] 1780년대에 그의 후원자 그룹은 오수나 공작과 공작 부인, 국왕, 그리고 그가 초상화를 그린 왕국의 다른 저명한 인물들로 확대되었다. 1786년, 고야는 카를로스 3세의 화가로 봉급을 받는 자리에 임명되었다.
고야는 1789년 카를로스 4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그는 수석 궁정 화가가 되었으며, 연봉 5만 레알과 마차 비용으로 500 두카트를 받았다. 그는 국왕과 왕비, 스페인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 및 다른 많은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초상화들은 아첨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카를로스 4세와 그 가족''은 왕가를 매우 가혹하게 평가한 작품이다. 현대의 해석가들은 이 초상화를 풍자적인 것으로 본다. 카를로스 4세의 통치 뒤에 숨겨진 부패를 드러낸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통치 하에서 그의 아내인 루이사가 실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고야는 그녀를 집단 초상화의 중심에 배치했다. 그림 왼쪽 뒤편에서 화가 자신을 볼 수 있는데, 그는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고, 가족 뒤의 그림은 롯과 그의 딸들을 묘사하여 부패와 타락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반영하고 있다.[26]
고야는 스페인 귀족의 최고위층으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여기에는 오수나 공작과 그의 아내 베나벤테 백작 부인, 알바 공작과 그의 아내 알바 공작 부인, 폰테호스 후작 부인 등이 포함되었다. 1801년, 그는 포르투갈과의 짧은 오렌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고도이를 그렸다. 비록 고야의 1801년 초상화가 일반적으로 풍자로 여겨지긴 하지만, 두 사람은 친구였다. 고도이는 고야가 《변덕》을 출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고, 널리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옷을 벗은 마하''를 의뢰했다.[27]
3. 2. 카프리초스
1792년 콜레라에 걸려 청각을 잃은 고야는 회복까지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이 시기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에 이끌렸던 고야는 1799년 에칭의 일종인 애쿼틴트 기법으로 제작한 판화집 《카프리초스》(Caprichos|카프리초스es, 변덕)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서 고야는 가톨릭 성직자들을 괴물이나 악마로 묘사하며, 마녀와 악마에 대한 미신에 사로잡힌 스페인의 풍조와 부패한 가톨릭 교회의 실상을 고발했다.[98] 마카브르의 일종인 이 판화집은 카툰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어두운 분위기의 판화집에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라는 부제를 붙였다.
고야는 《카프리초스》를 출판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799년 고야는 "어떤 문명 사회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무수한 약점과 어리석음, 그리고 관습, 무지 또는 사리사욕으로 인해 흔하게 된 일반적인 편견과 기만적인 행위"를 묘사한 80점의 《카프리초스》 판화를 출판했다.[34] 이 판화 속 환상은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라는 캡션으로 부분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암울한 것만은 아니며, 그는 《카프리초스》 52번 《재단사가 할 수 있는 일!》에서처럼 날카로운 풍자적 재치를 보여준다.[35]

3. 3. 전쟁의 재난
1808년에서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간에 반도 전쟁이 일어났다. 고야는 반도 전쟁에 관한 여러 기록화를 남겼는데, 특히 1808년 5월 2일과 5월 3일의 사건을 그린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의 처형》이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지지자였지만, 자신의 조국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 1810년에서 1820년까지 제작한 《전쟁의 재난》(Los Desastres de la Guerraes)은 전쟁 중에 일어난 학살과 비인도적 만행을 기록한 판화집이다.[50][51][52]고야는 《전쟁의 재난》에서 프랑스 군인의 만행뿐만 아니라 스페인 사람들이 프랑스에 협력한 자국민에게 벌인 만행 역시 똑같이 기록하였다. 이 연작의 첫 47점은 전쟁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다루며, 개별 군인과 민간인에게 미치는 갈등의 결과를 보여준다. 중간 연작(48~64점)은 1811~12년 마드리드를 강타한 기근의 영향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기근은 도시가 프랑스군으로부터 해방되기 전에 발생했다. 마지막 17점은 가톨릭 교회가 지지한 복고된 부르봉 왕정이 1812년 스페인 헌법을 거부하고 국가 개혁과 종교 개혁을 모두 반대했을 때 자유주의자들이 느낀 뼈아픈 실망감을 반영한다.


3. 4. 검은 그림
고야는 말년에 세상과 떨어져 지내고자 만사나레스 근처에 "퀸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es, 귀머거리의 집)라는 집을 구해 검은 그림들을 제작하였다.[97] 그는 1810년대 후반부터 이 집에서 거의 고독하게 살았다. 이 집은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의 소유였던 가장 가까운 농가를 따라 "킨타 델 소르도"(귀머거리의 집)로 알려지게 되었다.[56]고야의 신체적, 정신적 붕괴는 프랑스가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한 지 몇 주 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1792년 이후 고야의 그림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으며, 반도 전쟁 이후의 참상을 겪으면서 무거운 주제와 어두운 색조를 담은 그림을 그리게 된다. 1793년에서 1794년 사이 고야는 머리를 울리는 이상한 소음과 청각 상실로 고통받으면서 환상적이면서도 악몽을 표현하는 어두운 그림들을 그렸는데, 이러한 그림들은 만년의 고야가 그린 검은 그림들과 깊은 연관성을 보인다.
반도 전쟁의 참혹한 결과에 고야는 그림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였고, 외딴집 퀸타 델 소르도에서 검은 그림 연작을 남겼다. 이 그림들 속에서 그는 이성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광기를 묘사하였다. 검은 그림들 가운데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가 유명하다.[102]
75세의 나이에 고독과 정신적, 육체적 절망 속에서 그는 14점의 검은 그림 작품을 완성했는데, 모두 자신의 집 벽에 직접 유화로 그렸다. 고야는 이 그림들을 전시할 의도가 없었고, 그에 대해 글을 쓰거나 말한 적도 없을 것이다.[59] 그의 사후 약 50년 후인 1874년경, 이 작품들은 떼어내어져 프레데릭 에밀 데를랑게 남작에 의해 캔버스 지지대로 옮겨졌다.[60] 복원 과정에서 많은 작품들이 상당히 변형되었으며, 오늘날 이 작품들은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어 있다.
4. 영향
고야는 종종 마지막 거장이자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일컬어진다.[72][73][74] 20세기 화가 중 고야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로는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가 있으며, 이들은 고야의 ''카프리초스''와 ''검은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75] 21세기에는 마이클 잔스키와 브래들리 루빈스타인과 같은 미국의 포스트모던 화가들이 "이성의 꿈은 괴물을 낳는다"(1796–98)와 고야의 ''검은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 잔스키의 대형 회화 및 목각 작품인 "거인과 난쟁이 시리즈"(1990–2002)는 고야의 이미지를 사용한다.[76][77]
고야의 영향은 시각 예술을 넘어 확장되었다.
- 스페인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는 1911년 고야의 그림을 바탕으로 솔로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를 작곡했으며, 이후 이 모음곡을 바탕으로 동명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 스페인 작가 페르난도 아라발의 소설 ''정어리의 매장''은 고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78]
-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나는 고야다''는 고야의 반전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79]
- 비디오 게임 임파스토는 고야의 작품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80]
- 2024년에는 고야의 판화 특별전이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의 노턴 사이먼 미술관에서 열렸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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