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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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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는 1885년부터 1960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를 지칭한다. 프랑스는 1882년 마다가스카르 북부와 서부를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1885년에는 라나발로나 3세 여왕과의 조약을 통해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후 프랑스는 1897년 마다가스카르를 식민지로 완전히 병합하고, 1947년 마다가스카르 봉기를 진압하는 등 식민 통치를 이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치 정부 수립 논의가 시작되었고, 1960년 독립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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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랑스 국기
국기
마다가스카르 정부 총독의 문장
마다가스카르 정부 총독의 문장
1930년의 마다가스카르 식민지와 속령
1930년의 마다가스카르 식민지와 속령
일반 명칭마다가스카르
공식 명칭마다가스카르 식민지와 속령
프랑스어 명칭Colonie de Madagascar et dépendances
마다가스카르어 명칭Ny zanatanin'i Madagasikara sy ny miankina aminy
국가마다가스카르
코모로
프랑스
프랑스령 남방 및 남극 지역
마요트
수도타나나리브
공용어프랑스어
마다가스카르어
코모로어
아랍어
종교기독교
이슬람교
전통 신앙
통화프랑스 프랑 (1897년–1925년)
마다가스카르 프랑 (1925년–1945년)
마다가스카르-코모로 CFA 프랑 (1945년–1958년)
국가La Marseillaise
역사
이전 국가메리나 왕국
프랑스 보호령
프랑스령 코모로
방크 뒤 제제
바사스 다 인디아
유로파 섬
글로리오소 제도
주앙데노바 섬
아델리랜드
암스테르담 섬
크로제 제도
케르겔렌 제도
생폴 섬
이후 국가마다가스카르 공화국
프랑스령 코모로
프랑스령 남방 및 남극 지역
마요트
시작1897년 2월 28일
종료자치 1958년 10월 14일
정치
정치 체제식민지
총독조제프 갈리에니 (1897년–1905년, 최초)
쥘 마르셀 드 코페 (1946년–1948년, 마지막)
고등 판무관피에르 가브리엘 드 셰비녜 (1948년–1950년, 최초)
앙드레 수카도 (1953년–1958년, 마지막)
총리필리베르트 치라나나 (1957년–1958년)

2. 역사적 배경

2. 1. 프랑스 보호령 이전

2. 2. 프랑스 보호령 시기 (1885년 ~ 1897년)

1882년,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 북부와 서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기 시작했다.[1] 1883년, 프랑스와 메리나 왕국 사이에 프랑코-호바 전쟁이 발발했지만, 결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1]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은 마다가스카르의 동맹국이었다. 1862년 5월, 영국의 외무 장관 존 러셀 제1대 러셀 백작은 콘놀리 파켄햄에게 라다마 2세가 다른 열강들과 거리를 두도록 지시했다.[1]

1885년 12월 17일, 여왕 라나발로나 3세는 마다가스카르가 프랑스 보호령이 되는 조약에 서명했으며, 이 조약은 마다가스카르 측의 이의 제기와 함께 1000만 프랑의 차관을 받았다.[2] 1888년, 여왕은 레지옹 도뇌르의 그랑크루아를 수여받았다.[2] 여왕은 자신의 나라가 프랑스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데 열정적이었지만,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3]

이 조약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 제국 확장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기만적인 성격을 띠었다.[2][3] 라나발로나 여왕은 프랑스의 침략을 막으려 했지만, 1895년 9월 프랑스에 수도 안타나나리보를 항복해야 했다.[3] 이후 여왕은 레위니옹 섬을 거쳐 알제로 망명했다.[2][3]

3. 프랑스 식민지 시대 (1897년 ~ 1960년)

프랑스 행정부는 약 15년 동안 전국적인 농촌 게릴라에 대한 평정 작전을 지속했으며, 이 과정에서 10만 명 이상의 마다가스카르인이 사망했다.[4] 1896년,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장악한 후 노예제를 폐지하여 50만 명 이상의 노예를 해방시켰으나, 많은 전직 노예들은 이전 주인들의 집에서 하인으로 남았다.[5]

메리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한 민족주의적 정서가 나타났다. 안타나나리보에 기반을 둔 이들은 마다가스카르 개신교 성직자인 라벨로조아나 목사가 이끌었으며, 일본의 근대화 모델에 영감을 받았다. 1913년, 마다가스카르 문화적 정체성을 옹호하기 위한 비밀 결사 'Vy Vato Sakelika(VVS)'가 결성되었으나, 프랑스 당국에 의해 잔혹하게 탄압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군 복무를 한 마다가스카르 참전 용사들은 초기 민족주의 운동을 강화했다. 1920년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보다는 노동 개혁과 시민적, 정치적 평등을 강조했다. 아나톨 프랑스가 이끄는 마다가스카르 프랑스 연맹은 모든 마다가스카르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요구하기도 했다. 장 랄라이몽고는 1924년 마다가스카르로 돌아와 노동 문제에 관여했다.[4]

1930년대에는 마다가스카르 반식민주의 운동이 탄력을 받으며, 노동 조합주의가 지하에서 나타나고 마다가스카르 지역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1939년 비시 정권을 선택한 식민지 행정부에 의해 모든 조직은 해산되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의 자치 형태를 받아들일 의향을 보였다. 1945년 가을, 프랑스 제4공화국 제헌 의회에 마다가스카르 대표로 조셉 라세타와 조셉 라보아항기가 선출되었다. 이들은 1941년 대서양 헌장과 1944년 브라자빌 회의에서 확인된 민족의 자결권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 마다가스카르 복원 민주 운동(MDRM)이 조직되었고, 자크 라베마난자라등이 참여했다. MDRM은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가졌지만, 마다가스카르 소외된 자당과 같은 경쟁 정당도 존재했다.

프랑스 제4공화국의 1946년 프랑스 헌법은 마다가스카르를 해외 영토로 만들고, 모든 마다가스카르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MDRM의 완전한 독립 목표와는 모순되었고, 라보아항기와 라세타는 투표를 기권했다.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의 정치적 분열, 1948년.


1947년 3월 29일, 마다가스카르 민족주의자들은 프랑스에 반란을 일으켰다. 봉기는 섬의 3분의 1 이상으로 확산되었지만, 프랑스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11,000명에서 80,000명 사이의 마다가스카르인들이 사망했다. 프랑스군은 약식 처형, 고문, 강제 재집결, 마을 방화 등을 자행했으며, "심리전"을 실험하기도 했다.[8] MDRM은 불법화되었고, 군사 지도자들은 처형되었다.

3. 1. 식민 통치와 저항

프랑스 행정부는 약 15년 동안 전국적인 농촌 게릴라에 대한 평정 작전을 지속했으며, 이 과정에서 10만 명 이상의 마다가스카르인이 사망했다.[4] 1896년,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장악한 후 노예제를 폐지하여 50만 명 이상의 노예를 해방시켰으나, 많은 전직 노예들은 이전 주인들의 집에서 하인으로 남았다.[5]

메리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한 민족주의적 정서가 나타났다. 안타나나리보에 기반을 둔 이들은 마다가스카르 개신교 성직자인 라벨로조아나 목사가 이끌었으며, 일본의 근대화 모델에 영감을 받았다. 1913년, 마다가스카르 문화적 정체성을 옹호하기 위한 비밀 결사 'Vy Vato Sakelika(VVS)'가 결성되었으나, 프랑스 당국에 의해 잔혹하게 탄압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군 복무를 한 마다가스카르 참전 용사들은 초기 민족주의 운동을 강화했다. 1920년대 민족주의자들은 독립보다는 노동 개혁과 시민적, 정치적 평등을 강조했다. 아나톨 프랑스가 이끄는 마다가스카르 프랑스 연맹은 모든 마다가스카르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요구하기도 했다. 장 랄라이몽고는 1924년 마다가스카르로 돌아와 노동 문제에 관여했다.[4]

1930년대에는 마다가스카르 반식민주의 운동이 탄력을 받으며, 노동 조합주의가 지하에서 나타나고 마다가스카르 지역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1939년 비시 정권을 선택한 식민지 행정부에 의해 모든 조직은 해산되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의 자치 형태를 받아들일 의향을 보였다. 1945년 가을, 프랑스 제4공화국 제헌 의회에 마다가스카르 대표로 조셉 라세타와 조셉 라보아항기가 선출되었다. 이들은 1941년 대서양 헌장과 1944년 브라자빌 회의에서 확인된 민족의 자결권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 마다가스카르 복원 민주 운동(MDRM)이 조직되었고, 자크 라베마난자라등이 참여했다. MDRM은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가졌지만, 마다가스카르 소외된 자당과 같은 경쟁 정당도 존재했다.

프랑스 제4공화국의 1946년 프랑스 헌법은 마다가스카르를 해외 영토로 만들고, 모든 마다가스카르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MDRM의 완전한 독립 목표와는 모순되었고, 라보아항기와 라세타는 투표를 기권했다.

1947년 3월 29일, 마다가스카르 민족주의자들은 프랑스에 반란을 일으켰다. 봉기는 섬의 3분의 1 이상으로 확산되었지만, 프랑스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11,000명에서 80,000명 사이의 마다가스카르인들이 사망했다. 프랑스군은 약식 처형, 고문, 강제 재집결, 마을 방화 등을 자행했으며, "심리전"을 실험하기도 했다.[8] MDRM은 불법화되었고, 군사 지도자들은 처형되었다.

3. 2. 자치 정부 수립과 독립

4. 영토 변화

1897년 2월 28일 마다가스카르 보호령이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에 편입되었다. 1912년 7월 25일에는 마요트와 부속 영토가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에 편입되었다가, 1946년 10월 27일 코모로 자치령으로 분리되었다. 글로리오소 제도, 바사스 다 인디아, 유로파 섬, 후안 데 노바 섬 등은 1897년 10월부터 프랑스 식민부의 직접 관할하에 있다가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의 일부로 편입되었으나, 1960년 4월 1일 레위니옹 주지사의 관할로 변경되었다.

5. 한국과의 관계 (추가)

참조

[1] 간행물 Britain's 'Abandonment' of Madagascar: The Anglo-French Convention of August 1890 https://www.jstor.or[...] 2022-01-24
[2] 웹사이트 In Madagascar, People Remember One of the Deadliest French Colonial Wars in History https://globalvoices[...] 2022-01-23
[3] 웹사이트 The Little-Known Story of Madagascar's Last Queen, Ranavalona III https://www.smithson[...] 2022-01-24
[4] 웹사이트 1947, un massacre colonial français à Madagascar https://www.humanite[...] 2017-03-28
[5] 서적 Encyclopedia of African history CRC Press
[6] 웹사이트 Madagascar: Colonialism as the historical root cause of deforestation https://www.wrm.org.[...] World Rainforest Movement 2022-10-17
[7] 웹사이트 Africa awaits closure of French colonial crimes https://www.aa.com.t[...] 2022-01-23
[8] 웹사이트 Bitter reminders of colonialism remain as Madagascar celebrates 60 years of independence https://www.france24[...] 2022-01-23
[9] 웹사이트 In Madagascar, People Remember One of the Deadliest French Colonial Wars in History https://globalvoices[...] 2022-01-23
[10] 웹사이트 The Little-Known Story of Madagascar's Last Queen, Ranavalona III https://www.smithson[...]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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