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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헨드리크 판 오라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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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판 오라녜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이자 군사령관으로, 1625년 형 마우리츠의 뒤를 이어 총독직을 계승했다. 그는 80년 전쟁과 30년 전쟁 시기에 군사적, 외교적 업적을 쌓으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브레다, 헤르토겐보스 등 주요 도시를 탈환하고 해군 제독 마르턴 트롬프의 활약을 통해 스페인 해군을 격파하는 등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네덜란드는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스페인과의 평화를 통해 80년 전쟁을 종결했다. 그의 아들 빌럼 2세가 총독직을, 손자 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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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헨드리크 판 오라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힐 얀스 판 미에레펠트의 초상화, 1632년
미힐 얀스존 판 미에레펠트의 초상화, 1632년
이름프레데리크 헨드리크
네덜란드어 이름Frederik Hendrik
별칭스테덴드윙거(stedendwinger)
출생일1584년 1월 29일
출생지네덜란드 공화국 델프트
사망일1647년 3월 14일
사망지네덜란드 공화국 덴・하흐
종교네덜란드 개혁 교회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오라녜 공의 서명
통치
작위오라녜 공 및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겔데르스 및 오버아이설 총독
선임자마우리츠
후임자빌럼 2세
통치 기간1625년 4월 23일 - 1647년 3월 14일
가문
가문오라녜-나사우 가문
아버지침묵공 빌럼
어머니루이즈 드 콜리니
배우자아말리아 폰 졸름스-브라운펠스
자녀
자녀빌럼 2세 판 오라녜
루이제 헨리에테, 프로이센 공작 부인
헨리에테 아말리아 폰 나사우
알렉산드라 폰 나사우
이사벨라 샤를로테 폰 나사우
알베르티네 아그네스 폰 나사우
헨리에테 카타리나, 안할트-데사우 공녀
하인리히 루트비히 폰 나사우
마리아, 짐머른-카이저슬라우테른 백작 부인

2. 생애

미힐 얀스존 판 미에레벨트가 1620~1624년경에 그린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공의 초상화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1625년 형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가 사망하자 가독과 총독직을 계승하여 홀란트주, 젤란트주, 위트레흐트주, 오버이설주, 헬러르트주 총독에 취임했다. 형이 사망하기 전 결혼을 명령했기 때문에 같은 해 오랜 연인이었던 아말리에 폰 졸름스-브라운펠스와 결혼했다.

총독 취임 직후 브레다가 스페인 장군 암브로시오 스피노라에게 함락되었지만, 1627년부터 반격을 시작하여 훌스트를 탈환하고, 1629년에 헤르토겐보스를 함락시켰다. 1632년에는 페네로, 마스트리흐트 등 마스 강 유역의 여러 도시를 탈환하고, 1637년에 브레다를 되찾았다.[3] 1644년에는 테르네우젠의 도시 Sas van Gent|사스 판 헨트nl를, 1645년에는 훌스트를 다시 탈환하여 남부 국경의 여러 도시를 확보, 현재의 벨기에와의 국경까지 네덜란드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1639년에는 해군 제독 마르턴 트롬프가 덩케르크 해전·다운스 해전에서 스페인 해군에 승리하여 전쟁의 종결을 결정지었다.

외교 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여, 1635년에 프랑스와 공수 동맹을 맺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30년 전쟁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의 성립에도 노력했지만, 조약 성립 전인 164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국제적으로 독립을 승인받았고, 스페인과도 평화가 성립되어 80년 전쟁은 종결되었다.[4]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의 적자는 1626년에 아말리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빌럼 2세이며, 빌럼 2세가 오라녜 공과 총독직을 계승했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는 그의 손자이다.

장녀 루이제 헨리에테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과 결혼했다. 다섯째 딸 알베르티네 아그네스는 나사우 가 방계의 나사우-디츠 백작 빌럼 프레데리크와 결혼했지만, 그 손자 요한 빌렘 프리소가 빌럼 3세 사망 후 오라녜-나사우 가를 계승하여 현재의 네덜란드 왕가로 이어진다.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네덜란드 군 총사령관으로 전과를 올리는 한편, 프랑스풍 궁전을 조성하여 화려한 궁정 생활을 했으며, 독일 제후 및 잉글랜드 스튜어트가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이로 인해 오라녜-나사우가의 지위는 높아졌지만, 동시에 여러 외국과 네덜란드 간의 외교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또한, 팔십 년 전쟁에 종군한 조카 튀렌 자작과 증손자 루퍼트 폰 데어 팔츠는 후에 각각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발탁되어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2. 1. 어린 시절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1584년 1월 29일 네덜란드 공화국 홀란트델프트에서 침묵공 빌럼과 루이즈 드 콜리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빌럼은 홀란트, 질란트, 위트레흐트프리슬란트총독이었다. 그의 어머니 루이즈는 위그노 지도자였던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의 딸이자 빌럼의 넷째 부인이었다. 또한 그는 1625년 사망한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의 이복 형제이기도 했다.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1584년 7월 10일 그의 아버지가 암살되기 6달 전에 태어났다. 그는 그의 형인 마우리츠에게 군사 훈련을 받았다. 마우리츠가 결혼을 하지 않으면 그의 아이들이 적법화될 수 없다고 협박을 받자, 프레데리크는 1625년 아말리아 폰 졸름스-브라운펠스와 결혼했다. 1624년에는 그와 마가레타 카타리나 브륀스 사이의 아들인 주일레슈타인의 프레데리크 나사우가 태어났다.

2. 2. 총독 취임과 업적

1625년 마우리츠가 적자 없이 사망하자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그의 자산과 영지, 그리고 홀란트, 제란트, 위트레흐트, 오버레이설, 헬러 5개 주의 총독 직을 물려받았다. 그는 네덜란드 연방 육군과 네덜란드 해군의 총사령관직도 겸임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30년 전쟁에 참여하여 스페인과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6]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형 마우리츠만큼 훌륭한 장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훨씬 유능한 정치가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22년 동안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의 정부 수반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의 시대에 총독의 권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네덜란드 작가들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시대"를 공화국의 황금기로 칭송한다.[2] 이 시기는 군사적, 해군적 승리, 전 세계적인 해상 및 상업적 확장,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의 놀라운 발전으로 특징지어진다.

그의 주요 군사적 업적은 1627년 그롤, 1629년 헤르토겐보스, 1632년 마스트리흐트, 1637년 브레다, 1644년 사스 반 겐트, 1645년 휠스트의 포위와 점령이었다. 그의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스페인에 대항하는 프랑스와의 동맹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외교 정책의 중심이었지만, 그는 말년에 프랑스 동맹을 희생하여 스페인과 별도의 평화를 체결했는데, 이로써 네덜란드 연방은 스페인으로부터 80년 동안 추구해 온 모든 이점을 얻었다.[6]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네덜란드군 주력 지휘관으로서 다음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
흐로엔로 5차 공방전
헤르토겐보스
브뤼헤
마스트리흐트 3차 공방전
루벤
스헨켄스찬스
브레다 4차 공방전
칼로
휠스트 2차 공방전
휠스트 3차 공방전
휠스트 4차 공방전



총독 취임 직후 브레다가 스페인 장군 암브로시오 스피노라에게 함락되었지만, 1627년부터 반격을 시작하여 훌스트를 탈환하고, 1629년에 헤르토겐보스도 함락시켰다. 1632년에 페네로, 마스트리흐트 등 마스 강 유역의 여러 도시를 탈환하고, 1637년에 브레다를 되찾았다.[3] 1644년에 테르네우젠의 도시인 Sas van Gent|사스 판 헨트nl를, 1645년에 훌스트를 탈환하여 남부 국경의 여러 도시를 확보, 현재의 벨기에와의 국경까지 네덜란드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1639년에 해군 제독 마르턴 트롬프가 덩케르크 해전·다운스 해전에서 스페인 해군에 승리하여 전쟁의 종결을 결정지었다.

외교적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여, 1635년에 프랑스와 공수 동맹을 맺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30년 전쟁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의 성립에도 노력했지만, 조약 성립 전인 164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네덜란드는 국제적으로 독립을 승인받았고, 스페인과도 평화가 성립되어 80년 전쟁은 종결되었다.[4]

2. 3. 죽음과 유산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1647년 3월 14일 헤이그에서 사망했다.[3] 그의 사후, 스페인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의 오랜 분쟁을 종식시키는 뮌스터 화약이 1648년 1월 30일에 체결되었는데, 이는 헨드리크의 병과 죽음이 협상을 지연시켰기 때문이었다.[4] 그는 자신의 업적을 ''메모리 데 프레데리크 헨리''라는 책에 남겼다. 그의 사망 이후 오라녜 공작 지위는 빌럼 2세 판 오라녜가 계승했다.

그는 아내 아말리아 폰 솔름스-브라운펠스, 아들 오라녜 공 빌럼 2세, 네 명의 딸, 그리고 사생아 아들 프레데리크 나사우 데 쉴레슈타인을 남겼다.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델프트에서 그의 아버지와 형제 곁에 화려하게 매장되었다. 그의 미망인은 그의 생애와 업적을 바탕으로 한 좋은 정부에 대한 우화가 담긴 파노라마 그림의 무도회장인 오라녜잘에 정교한 묘소를 의뢰했다.

그의 적자(嫡子)는 1626년에 아말리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빌럼 2세이며, 빌럼 2세가 오라녜 공과 총독직을 계승했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는 그의 손자이다.

장녀 루이제 헨리에테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과 결혼했다. 다섯째 딸 알베르티네 아그네스는 나사우 가 방계의 나사우-디츠 백작 빌럼 프레데리크와 결혼했지만, 그 손자 요한 빌렘 프리소가 빌럼 3세 사망 후 오라녜-나사우 가를 계승하여 현재의 네덜란드 왕가로 이어진다. 결혼 전에 태어난 서자(庶子) 프레데리크는 윌리엄 3세를 따랐고, 자손은 잉글랜드 귀족의 로치포드 백작에 서임되었다.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네덜란드 군 총사령관으로 전과를 올리는 한편, 프랑스풍 궁전을 조성하여 화려한 궁정 생활을 했으며, 독일 제후 및 잉글랜드 스튜어트가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이로 인해 오라녜-나사우가의 지위는 높아졌지만, 동시에 여러 외국과 네덜란드 간의 외교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또한, 팔십 년 전쟁에 종군한 조카 튀렌 자작과 증손자 루퍼트 폰 데어 팔츠는 후에 각각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발탁되어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3. 가계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아말리아 판 솔름스-브라운펠스와의 사이에서 9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4명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유일한 아들 빌럼 2세 만이 상속자로 남았다. 또한 마르가레타 카타리나 브룬스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프레데리크 나사우 1명을 인정했다.

3. 1. 자녀

아말리아 판 솔름스-브라운펠스와의 사이에서 7명의 딸과 2명의 아들, 총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중 4명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고, 유일한 아들 빌럼 2세 만이 상속자로 남았다.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의 유일한 남계 손자가 사망한 후, 스타트호우더 직위는 그의 딸 알베르티네 아그네스와 결혼한 먼 친족에게 넘어갔다.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의 자녀
이름출생일사망일비고
빌럼 2세1626년 5월 27일1650년 11월 6일
루이제 헨리에테1627년 12월 27일1667년 6월 18일
헨리에테 아말리아 폰 나사우1628년 10월 26일1628년 12월 2일유아기에 사망
엘리자베트 폰 나사우1630년 8월 4일출생 시 사망
이자벨라 샤를로테 폰 나사우1632년 4월 28일1642년 5월 17일9세에 요절
알베르티네 아그네스1634년 4월 9일1696년 5월 24일
헨리에테 카테리나1637년 2월 10일1708년 11월 3일
헨드릭 로데베이크 폰 나사우1639년 11월 30일1639년 12월 19일유아기에 사망
마리아 폰 나사우1642년 9월 5일1688년 3월 17/20일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마르가레타 카타리나 브룬스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1명을 인정했다.


  • 프레데리크 나사우, 쥘레슈테인 영주 (1624–1672)

3. 2. 사생아

프레데릭 판 나사우 자일레슈테인영어(1624년 ~ 1672년)은 군인으로서 빌럼 2세를 지지했으며, 그의 장남 en은 빌럼 3세의 측근으로서 영국 귀족 로치포드 백작에 서임되었다.[1]

참조

[1] 서적 The Dutch Republic 1995
[2] 논문 Frederick Henry, Prince of Orange https://www.jstor.or[...] 1890
[3] 서적
[4] 서적
[5] 서적 The Dutch Republic 1995
[6] 웹인용 Hoofdstuk IX http://www.dbnl.org/[...] Digitale Bibliotheek voor de Nederlandse Letteren 200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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