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딩산 사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핑딩산 사건은 1932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이 중국 푸순 핑딩산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항일 게릴라 부대가 푸순 탄광을 습격한 다음 날, 일본군은 핑딩산 부락이 게릴라와 내통했다고 간주하여 주민들을 벼랑으로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 측은 3,217명, 일본 측은 800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한다. 사건 이후, 일본 정부는 학살 사실을 부인했고,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최종 패소했다. 핑딩산 사건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동원 및 학살과 연결되어 있으며,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32년 9월 - 1932년 8월 31일 일식
1932년 8월 31일 일식은 캐나다, 미국, 일본 등에서 관측된 개기 일식으로, 17시 44분 58.8초에 시작하여 22시 22분 37.3초에 종료되었으며 다양한 일식 주기와 관련이 있다. - 1932년 중국 - 만주사변
만주사변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류탸오후 사건을 자작극으로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수립한 사건이며, 일본 군국주의 팽창을 가속화하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 1932년 중국 - 제1차 상하이 사변
제1차 상하이 사변은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과 중국 간에 발생한 무력 충돌로, 일본의 상하이 조계지 영향력 확대를 위한 움직임과 반일 감정 고조 속에서 일본인 승려 피습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중국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공세 강화로 상하이 정전 협정을 체결하고 중일 전쟁의 전초전으로 평가된다.
핑딩산 사건 |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핑딩산 사건 |
다른 이름 | 평정산 사건 |
위치 |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핑딩산 |
날짜 | 1932년 9월 16일 |
공격 대상 | 만주국의 중국인 민간인 |
공격 주체 | 일본 제국 관동군 |
동기 | 중국인 항일 세력 지원에 대한 보복 |
사망자 수 | 400명 ~ 3,000명 (추정) |
배경 | |
시대적 배경 |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성립 시기 |
원인 | 일본군의 항일 세력 소탕 작전, 중국인 민간인에 대한 보복 심리 |
전개 과정 | |
사건 발생 | 일본군, 핑딩산 일대 주민들을 모아 학살 |
주요 가해 부대 | 관동군 소속 부대 |
학살 방법 | 총살, 방화, 생매장 등 |
결과 및 영향 | |
주요 결과 | 핑딩산 일대 초토화, 민간인 대량 학살 |
영향 | 중일 전쟁의 배경 중 하나, 일본군의 만행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 |
논란 | 희생자 수, 사건의 성격 등에 대한 논쟁 존재 |
관련 자료 | |
관련 문서 | 731 부대, 난징 대학살 |
관련 인물 | (자료에 나타나지 않음) |
2. 사건의 배경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만주 지역을 점령하고 1932년 3월 1일 괴뢰 국가인 만주국 수립을 선언했다. 이에 맞서 만주 각지에서는 반만주국, 항일 무장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6] 특히 푸순 지역에서는 1932년 7월 이후 게릴라 활동이 활발해져 일본군과의 교전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일본 측의 피해도 발생하고 있었다.[15][14] 관동군 사령부는 이미 휘하 부대에 항일 세력에 대한 엄중 처벌을 허가한 상태였다.[14]
1932년 9월 15일 밤, 만주국 건국에 반대하는 항일 게릴라 부대 '요녕 민중 자위군'이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가 운영하던 푸순 탄광을 습격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6] 게릴라 부대는 탄광 시설 파괴와 일본인 살해를 시도했으나, 관동군을 포함한 일본 측의 방어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측도 탄광 소장을 포함한 사상자와 재산 피해를 입었다.
핑딩산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1932년 9월 15일 밤에 발생한 '요녕 민중 자위군'의 푸순 탄광 습격 사건이었다.[6] 이 날은 만주국과 일본 사이에 일만 의정서가 조인된 날이기도 했다.[6] 항일 게릴라인 요녕 민중 자위군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가 경영하던 푸순 탄광을 습격하여 일본인 살해와 시설 파괴를 시도했다.[6] 이에 일본 측은 관동군 소속 푸순 수비대, 헌병대, 경찰뿐만 아니라 탄광 경비 방비대, 자경단, 재향 군인, 심지어 청년단원과 중학교 3학년 이상 학생까지 동원하여 교전에 나섰다.[6] 게릴라 측은 일부 시설을 불태웠으나 큰 피해를 주지 못하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며 퇴각했다. 일본 측도 탄광 소장을 포함한 사망자 5명, 중상자 6명과 총액 218125JPY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6] 일설에 따르면 게릴라는 탄광 파괴 후 푸순 시가지 습격까지 계획했다고도 한다.[6]
3. 사건의 전개
다음 날인 9월 16일, 일본군은 전날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핑딩산 마을 주민들에게 게릴라 부대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1] 학살에는 관동군 수비대, 헌병, 경찰뿐만 아니라 탄광 방비대까지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마을 가옥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총검과 기관총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1][8][22] 중국 측은 이 학살로 3,00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추산하지만[1], 일본 측은 희생자 수를 축소 발표했다. 핑딩산 사건은 일본군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이며, 학살 책임 소재와 일본 측의 사건 은폐 시도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29]
3. 1. 푸순 탄광 습격 사건
이 사건은 만주국과 일본 간에 일만 의정서가 조인된 1932년 9월 15일 밤, 항일 게릴라 부대인 '요녕 민중 자위군'이 푸순 탄광을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6] 이 습격의 배경에는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 선언 이후 활발해진 반만주국 항일 운동이 있었다.
요녕 민중 자위군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가 경영하는 탄광을 목표로 삼아 일본인을 살해하고 방화를 통해 탄광 시설을 파괴하고자 했다. 이에 일본 측은 주변 거주민들을 탄광 내부나 공회당으로 피난시키고, 관동군 소속 푸순 수비대, 헌병대, 경찰뿐만 아니라 탄광 경비를 담당하던 방비대(경비단이라고도 불림), 자경단, 재향 군인 등 성인 남성은 물론이고 청년단원과 중학교 3학년 이상의 학생(민간인 청소년)까지 긴급 소집하여 교전에 투입했다.
게릴라 부대는 탄광 시설 일부를 불태우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전술적 미숙함으로 인해 작전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퇴각했다. 일본 측 역시 이 습격으로 탄광 소장을 포함한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총액 218125JPY 상당의 재산 피해를 보았다. 일설에 따르면 게릴라 부대는 탄광 파괴 후 푸순 시가지까지 습격할 계획이었다고도 전해진다.
3. 2. 핑딩산 학살
1932년 9월 15일, 핑딩산을 지나던 반일 홍창회 민병대가 일본군에게 발포하고 푸순의 일본 수비대를 공격했다. 다음 날인 9월 16일,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핑딩산 마을 주민들을 게릴라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무차별 학살했다. 일본군은 반군이 마을을 통해 도주했다는 명분으로 주변의 모든 사람을 민병대원 또는 동조자로 간주하고, 가옥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현장에서 바로 처형하거나 총검으로 찌르고 기관총으로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 중국 측은 이 학살로 인한 희생자 수를 3,217명으로 추산하는 반면, 일본 측은 800명으로 축소하여 발표했다.[1] 마을 전체는 불에 타 파괴되었다.
학살에는 관동군 수비대뿐만 아니라 헌병, 경찰, 통역, 그리고 탄광 방비대까지 동원되었다. 선양 재판 판결에 따르면, 탄광 책임자 구보 타카시가 방비대의 학살 참여를 지시했으며, 방비대원 중 증언자도 방비대와 경찰의 참여 사실을 인정했다.[8][22] 구보는 방비대의 총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건 후 학살 현장에 나타나 지시를 내렸다는 주민 증언도 있었다.[22] 이는 구보가 단순히 군의 압력에 굴복한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학살에 협력했음을 시사한다.
학살의 주도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노우에 중위 주도설은 사건의 책임을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려는 일본군과 관동군 사령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제로 사건 이후 국제 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당시 만주국 대사이자 관동군 사령관이었던 무토 노부요시는 국제 연맹에 보내는 전보에서 사건을 "이노우에 중위가 이끄는 한 소대"의 자위적 교전 결과로 축소하고 정당화하려 시도했다.[29] 이는 군 상층부가 조직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972년, 약 800구의 유해가 묻힌 크기 80 x 5m의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었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관이 중화인민공화국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에 건립되었다.[2] 학살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에 2000만엔의 배상을 요구했으나, 2006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전후 배상 문제는 국가 간 조약으로 이미 해결되었다는 이유로 이 요구를 기각했다.
4. 피해 규모
핑딩산 사건의 희생자 규모에 대해서는 중국과 일본 측의 주장이 크게 엇갈린다. 중국 측은 당시 주민 증언과 마을의 세대수, 인구를 근거로 3,000명 이상[1](구체적으로 3,217명[1])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한다. 전후 선양에서 열린 재판 판결에서는 2,800여 명, 다른 재판 관련 자료에서는 2,700명이라는 숫자도 등장한다.[22]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핑딩산 마을뿐 아니라, 함께 습격당한 리자가거우(栗家溝), 첸진바오(千金堡) 등 주변 집락의 피해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반면 일본 측은 희생자 수를 400명에서 800명 사이로 추정한다.[1][21] 다나베 토시오는 자신의 저서에서 사건 다음 날인 9월 16일은 휴일이 아니었고, 마을 남성 대부분이 탄광 노동자로 일하러 나가 집에 없었을 것이며, 학살에 참여한 병사가 목격한 집합 인원이 약 600명이었다는 증언을 근거로 희생자 수를 400~800명으로 추산했다.[21] 또한, 사건 한 달 후인 1932년 10월 15일 자 만주일보 조간 기사에서는 핑딩산 집락 인구 1,369명 중 희생자가 400명 전후라고 보도하기도 했다.[25]
그러나 일본 측 주장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사건 당일인 9월 16일은 중추절 다음 날이었지만, 당시 기록에 따르면 탄광도 휴업 상태였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야간 근무는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1] 생존자들은 당일 아침 일본군이 길을 막아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23][24] 만주일보 기사의 경우, 사건 은폐 공작이 시작된 시점에 나온 정보이며, 기사에 언급된 인구 통계가 일본인 관할 지역 기준이라 핑딩산 집락의 실제 인구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22] 당시 핑딩산 집락은 탄광 개발로 인구가 급증한 상태였고[22], 탄광 노동자들이 친척이나 지인의 집에 머무는 경우도 많아 실제 거주 인원은 공식 기록보다 많았을 수 있다. 야마시타 사다무는 수기에서 핑딩산 집락을 약 3,000명이 거주하는 탄광 노동자 집단 거주지로 묘사하며, 현장 상황과 생존자 증언을 토대로 3,000명 사망설이 맞을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9]
사건 당시 탈출에 성공한 생존자 수에 대해서도 십여 명에서 수십 명, 혹은 마을에 없어서 화를 면한 사람까지 포함해 130명 등 여러 설이 있다.[20]
사건 이후 유해 처리 과정에서 시신에 중유를 뿌려 태우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결국 절벽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매장했다는 증언이 있다.[26] 1972년,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에서 약 800구의 유해가 묻힌 집단 매장지(크기 80 x 5m)가 발견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유해를 안치한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2] 발굴은 800구 지점에서 중단되었으나, 아래쪽에 더 많은 유해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9]
한편, 제네바의 국제 연맹 이사회에는 당시 중국 측에 의해 사망자 700명, 중상 60~70명, 경상자 약 130명으로 보고되었으나, 이는 확증된 수치는 아니다.
학살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2000만엔의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2006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전시 배상 문제는 국제 조약의 사안이며 국내 법원에서 다룰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
5. 사건 이후
1932년 9월 16일 일본군과 경찰의 보복 학살로 핑딩산 마을은 완전히 불에 타 파괴되었고, 수많은 주민이 희생되었다. 중국 측은 희생자 수를 3,217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일본 측은 8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1]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 배상 등은 이후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5. 1. 국제 사회의 반응
핑딩산 사건 이후, 일본 내부에서는 관련 정보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국제 사회의 진상 규명 노력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푸순에 거주했던 야마구치 요시코는 사건 자체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으며, 다른 일본인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47]. 하라 세이지에 따르면, 사건이 전후에 알려졌을 때 중국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푸순 이외 지역의 일본인들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고 한다[30].일본 군 당국이 사건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는 기록(『핑딩산 대학살 참안 시말』)과 그렇지 않았다는 상반된 주장[27]이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 정보는 효과적으로 통제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47]. 이러한 철저한 정보 은폐는 사건의 진상이 일본 사회는 물론 국제 사회에도 제대로 알려지는 것을 막았으며, 책임 규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5. 2. 전후 처리
사건의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된 가와카미 대위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에서 전범 혐의를 받았으나, 1946년 고향에서 도쿄로 연행되기 직전에 복독 자살했다. 그의 전범 혐의 내용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지만, 핑딩산 사건 외에 다른 특별한 이유는 거론되지 않는다. 다른 관련자들 대부분은 점령 기간 동안 도주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46]사건 실행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노우에 전 중위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작가 고미카와 준페이에게 이노우에를 자칭하는 인물로부터 사건과 무관하다는 항의 서한이 도착했으나, 이후 이 서한은 이노우에 본인이 아닌 자결한 그의 아내 치요코의 여동생이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이노우에 중위는 파킨슨병을 앓다가 1969년 오사카에서 사망했으며, 가와카미 대위 사후에도 사건의 진상이나 명령 여부에 대해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46]
이시가미 마사오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관계자들이 이노우에 중위 부인의 자결과 연관 지어 사건의 원인을 그의 개인적 자질 문제로 돌리려는 경향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관동군 상층부로 책임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노우에 중위를 희생양으로 삼아 그의 독단적 행동으로 사건을 몰아간 시나리오일 수 있다는 의혹이다.[47] 만주국에서 오스기 사카에를 학살한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만주영화협회 이사장이 되고, 장쭤린 폭살 사건의 주범인 가와모토 다이사쿠가 만주철도 이사가 된 사례처럼, 군 상층부가 책임을 회피하려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제로 이노우에 중위는 사건 이후 육군대학 수험이 허가되거나[27] 금계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27] 이는 그의 배경(일개 병졸에서 특진한 장교)을 고려할 때 이례적인 대우라는 지적이 있다.
다카오 스이, 중국의 퉁다 등도 군 상층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노우에 중위의 단독 범행으로 사건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20] 이노우에 중위가 상급자인 가와카미 대위의 지시 없이, 또는 다른 선임 장교들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중기관총까지 동원하여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필요한 탄약 운반, 총기 설치, 주민 통제 등을 고려하면 한 개 소대의 병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중대 전체 또는 그 이상의 조직적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여러 증언에서 이 중위를 'N 중위'로 지칭하거나, 실존하지 않는 '나카지마 중위'라는 인물을 내세운 자료가 있는 점은 군 차원의 조직적인 은폐 공작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전후 일본에서는 이 사건이 한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당시 봉천(현 선양) 총영사 대리였던 전 외교관 모리시마 모리토가 1950년 자신의 저서에서 "신문 게재 금지로 공론화되지 않은 일본군 만행의 일례"로 처음 언급하며 책임자를 해당 지역 수비대의 한 대위로 지목했다.[49] 이후 마이니치 신문 기자 출신 카미즈마 히토시가 1953년 『비록 대동아전사 하권』에 「무순 비화」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다루면서 일본 내에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다. 카미즈마의 글은 부인의 자결 일화를 중심으로 이노우에 중위(N 중위로 묘사)의 독단적 범행으로 사건을 그렸다.
이 사건이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혼다 가쓰이치가 1971년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중국의 여행」(1972년 서적 출간)에서 핑딩산 사건을 상세히 다루면서부터이다.[50]
5. 3. 일본에서의 재판
1996년 8월 14일, 사건의 생존자인 고(故) 모더셩, 양바오산, 팡수롱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51] 1심(도쿄 지방 재판소)과 2심(도쿄 고등 재판소) 재판부는 학살 사실 자체는 인정했지만, 배상 청구에 대해서는 '국가 무책임의 원칙'을 근거로 들어 당시 법률로는 청구할 수 없다며 기각했다.[52] 결국 2006년 5월 16일, 최고재판소에서 원고 측의 패소가 확정되었다.[51]5. 4. 진상 규명 노력
1972년, 약 800구의 유해가 크기 80m x 5m의 집단 매장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기념관이 건설되었으며, 이 기념관은 중화인민공화국 푸순시 관할 신빈 만족 자치현에 위치해 있다.[2]학살 생존자들로 구성된 중국 단체는 일본 정부에 2000만엔의 배상을 요구했으나, 2006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전시 배상 문제는 국제 조약의 사안이므로 국내 법원에서 다룰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사건 당시 지휘관이었던 가와카미 대위는 전후 일본에서 전범 혐의를 받았으나, 1946년 도쿄로 연행되기 직전에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의 정확한 혐의 내용은 공표되지 않았지만, 핑딩산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관련자들 대부분은 점령 기간 동안 처벌을 피해 도주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건 실행자로 지목되는 이노우에 중위의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966년경, 작가 고미카와 준페이에게 이노우에 중위를 자칭하는 인물로부터 자신은 사건과 무관하다는 항의 서한이 도착했지만, 이는 미결 상태로 남았다.[46] 이노우에 중위는 파킨슨병을 앓다가 1969년 오사카에서 사망했으며, 사건에 대해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이시가미 마사오, 다카오 스이, 퉁다 등 일부 연구자들은 일본군 상층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노우에 중위 개인의 단독 범행으로 사건을 축소하려 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47][20] 중기관총 사용에 필요한 탄약 운반 및 설치, 다수 주민 통제 등을 고려할 때 한 개 소대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중대 전체가 연루된 범행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20] 또한, 여러 증언에서 이노우에 중위를 'N 중위'로 지칭하거나 가공의 인물인 '나카지마 중위'로 언급하는 자료가 있어, 군 차원의 조직적인 은폐 공작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노우에 중위가 사건 이후 육군대학 수험 자격을 얻거나[27] 금계훈장을 받은[27] 사실도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
2009년 5월 6일, 중국을 방문 중이던 일본 민주당 의원단은 일본 정부에 대해 핑딩산 사건에 대해 공식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53]
6. 논란과 쟁점
핑딩산 사건은 사건의 진상과 책임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과 쟁점을 안고 있다. 주요 쟁점은 학살을 직접 지휘하고 실행한 책임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푸순 탄광의 방비대와 같은 민간 조직이 학살에 어느 정도 가담했는지 여부이다.
학살 책임자 문제와 관련해서는 당시 관동군 수비대 지휘관 중 가와카미 대위와 이노우에 중위 중 누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주장이 엇갈린다. 일본 측 초기 기록이나 일부 연구는 특정 인물의 개인적 책임을 부각하려는 경향을 보였으나, 전후 선양 재판 판결과 이후 연구들은 다른 지휘관의 책임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등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또한, 푸순 탄광의 '방비대'가 일본군의 학살 작전에 조직적으로 협력했는지, 그리고 당시 탄광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구보 타카시가 이에 어느 정도 관여하고 책임이 있는지 역시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선양 재판에서는 방비대의 학살 가담과 구보의 책임을 인정했지만, 구보 본인은 이를 부인하며 책임 소재에 대한 논란을 남겼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일본 제국주의 침략 범죄의 실상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6. 1. 학살 책임자 문제
학살 실행 부대에 대해서는 위칭지(于慶級)의 증언처럼 가와카미 대위의 지시를 받아 3명의 소대장이 실행했다는 설,[22] 실행 부대 규모에 대해 중대 규모(약 200명), 여러 소대 규모(약 80명), 또는 이노우에 중위 소대(약 40명)의 단독 행동이라는 설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소수의 경찰, 헌병, 통역이 동행했다는 설 외에, 상당수(일설에는 1개 중대 규모)의 탄광 방비대원이 군에 협력했다는 설도 있다. 선양 재판 판결에서는 탄광 책임자 구보 타카시가 방비대의 학살 참여를 지시했으며, 방비대원 증언에서도 방비대와 경찰의 참여가 인정되었다고 한다.[8]선양 재판 판결은 관동군 수비대 외에 탄광 방비대도 학살에 참여했다고 보았다. 일본인 방비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방비대는 탄광 책임자 구보의 지시로 만들어졌고, 그의 허가 없이는 동원될 수 없었으며, 구보가 총지휘권을 가졌다고 한다. 또한 사건 후 구보로 보이는 인물이 현장에서 지시했다는 현지 주민 증언도 채택되어 구보 유죄의 근거가 되었다.[22] 판결에서는 구보가 처음에는 학살에 반대했을지라도 결국 군의 의향에 따라 방비대를 출동시켜 학살에 협력하게 하고, 사후 현장을 감독한 점이 학살의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일본 측 초기 자료인 가미즈마 히토시의 『푸순 비화』는 중대장 가와카미 대위(K 대위) 부재설과 실행 책임자를 이노우에 중위(N 중위)로 보는 설을 따른다. 구메 코시 역시 『핑딩산 사건과 그 종말』(1973)에서 가와카미 대위 부재와 이노우에 중위 책임설을 주장하며, 이노우에 중위를 "심각한 신경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다나베 도시오는 이 표현이 선양 재판 당시 히라노 잇조 목사가 이노우에 중위를 "심각한 경험(부인 자결 사건)의 소유자"로 언급한 것을 구메가 『푸순 비화』 등의 영향을 받아 고쳐 쓴 것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37] 다나베는 이노우에 중위가 자신의 오점 때문에 내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말했다는 점[37], 그를 아는 수비대원들로부터 "심각한 신경의 소유자"라는 증언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이노우에 중위가 정상적인 감각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재판 전부터 이노우에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적 공작은 없었다고 주장하려는 의도로 보인다.[37]
선양 재판 판결은 통역 위칭지 등의 증언을 토대로 학살 주도자를 가와카미 대위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현장 책임자였던 샤이이는 자신은 나중에 사건을 알았을 뿐이며, 가와카미 대위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이노우에 중위가 아닌 다른 중위가 범인이라고 주장했다.[38] 퉁다(佟達) 등이 정리한 푸순시의 『핑딩산 대학살 참안 시말』 등 중국 측 문헌 대부분은 가와카미 대위 주도설을 따른다.[20] 일본에서는 고바야시 미노루, 이시가미 마사오 등이 가와카미 대위 설을 지지하거나 이노우에 중위 단독 행동설에 의문을 제기한다.[47] 다카오 스이는 게릴라 습격이 예상되는 시기에 수비대장이 3일이나 부재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며 가와카미 대위 설을 지지한다.[20] 반면, 일본에서는 『푸순 비화』의 영향으로 이노우에 중위가 부인의 자결이라는 특이한 경험 때문에 학살을 주도했다는 설이 뿌리 깊으며, 다나베 도시오, 오에 시노부, 에구치 케이이치 등이 이 설을 따른다고 한다.[39] 다만 오에와 에구치는 각각 다나베의 주장이나 초기 자료인 『푸순 비화』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40][41] 모리 마사타카에 따르면, 에구치 케이이치는 고바야시 미노루의 가와카미 대위 주도설 논문(『「핑딩산 사건」고』)을 상세 자료로 모리에게 전달했으며, 고바야시는 5차례 방중 조사와 생존자 증언 등을 통해 가와카미 대위가 16일 아침 회의에서 구보 차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살을 결정했고, 이노우에 중위가 이를 대원들에게 전달했으며, 가와카미 대위 자신도 헌병대장과 함께 현장에 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42]
고바야시 미노루는 『만주 독립 수비대』라는 서적의 "전투 사보"에서 16일 새벽 푸순 습격 게릴라 격퇴 지휘자가 가와카미로 기록된 것을 발견했다. 이는 최소한 사건 당일 가와카미가 푸순에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27] 다나베는 이를 단순히 보고서에 대표로 이름을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가와카미가 지인에게 피신을 권유했다는 이야기나, 사건 후 와타나베 소장의 부인에게 "원수를 갚았다"고 보고했다는 고바야시의 주장에 대해, 다나베는 부인의 딸 모리 시즈코로부터 보고한 인물이 이노우에 중위였다고 들었으며, 당시 17세였던 모리 시즈코가 가와카미 대위를 알고 있었으므로 틀릴 리 없다고 반박한다.[27] (다만, 다나베는 모리 시즈코가 왜 가와카미를 알았는지 직접 묻지는 않았다.) 가와카미가 지인(데라니시)에게 피신을 권유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다나베는 데라니시의 아들이 그 이야기를 의심한다는 이유로 이야기 자체의 신빙성을 문제 삼는다.[27] 고바야시가 가와카미의 16일 자료만 누락되었다고 의심한 주장에 대해,[43] 다나베는 15-17일 자료가 모두 없으며, 중요한 시기의 자료가 없는 것 자체가 의문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27] 이후 이노우에 히사시가 다롄 도서관에서 발견한 월간 『푸순』 1932년 10월호 기사와 『푸순 신보』 호외 등을 통해 9월 15일부터 16일에 걸쳐 가와카미 대위가 푸순 현장 근처를 왕래한 사실이 확인되었다.[20]
사건 당시 푸순 탄광 소장은 겸무 중으로 부재했고, 차장인 구보 타카시가 사실상 최고 책임자였다. 구보는 선양 재판 상소 변론서에서 사건 일주일 후 군 관계자로부터 가와카미 대위가 부재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16일 회의 증언이나 당시 보도와 배치되며, 사건이 커지자 말단 책임자의 우발적 범행으로 축소하려는 군의 위장 공작에 구보가 동조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1월 말, 만주국 대사 무토 노부요시는 사건을 "이노우에 중위가 이끄는 한 소대가 비적의 발포에 자위상 응전한 결과"로 정당화하며 이노우에 중대의 단독 행동으로 축소하려는 보고를 했다. 이시가미 마사오는 이를 관동군 사령부가 사건을 이노우에 중위의 독단으로 몰아가려 한 정황으로 본다.[29]
구보 타다시는 상소심에서 제출한 변론서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8]
# 탄광은 무장이 허가되지 않았다.
# 방비대는 군 지휘하의 재향군인 자경단 같은 조직이다. 방비대장은 군 명령 전달 역할일 뿐 실제 지휘는 수비대가 한다. 문민은 군의 통수권에 관여할 수 없다. 탄광이 소총 500정을 지급한 것은 기부이며 소유권은 방비대에 있었다.
# 학살 현장에 나타난 회색 옷의 지팡이를 든 인물은 자신이 아니며(회색 옷 없고 자전거 사용), 다른 인물(보고 차 온 직무상 인물)일 것이다.
# 사건 1주일 후 군 관계자로부터 사건이 이노우에 중위의 개인적 폭주이며, 그는 부인 자결이라는 특이한 경험의 소유자라고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반박된다.
# 만주철도(만철)는 철도 및 부속지 경비 경찰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만주국 성립 후에도 유지되었다.[44] (이 권한은 1938년에야 만주국으로 이관되었다.[45])
# 방비대는 재향군인 외 탄광 직원도 포함된 민간 조직 성격이 강하며, 군 지휘하에 당연히 들어가는 조직이 아니다. 야마시타 사다의 수기에 따르면 방비대는 수비대 보충을 위해 만들어졌고 전투 시 그 지휘하에 들어갔다고 하나,[9] 이는 자율적 협력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방비대 규모(보병 1개 대대 등)는 지휘를 맡을 중대 병력을 훨씬 능가했다.
# 선양 재판 판결은 방비대원 증언을 통해 구보의 명령으로 방비대가 결성되었고, 그의 허가 없이 동원될 수 없었으며, 탄광장이 총지휘권을 가졌다는 점 등을 인정했다.[22] 즉, 실질적으로 탄광의 방위대로 간주되었다. 구보는 변론서에서 증언자들이 하급 직원이라 정확한 지식이 없다고 반박했지만,[30]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구보를 포함한 피고 7명 전원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다. (덧붙여, 처형된 유일한 전직 경찰관은 다른 관계 경찰서원이 도망친 가운데 현지에 남아 있던 인물로, 사건 당일 비번이었으나 전날 밤 교전에 참가했으며 경찰의 중요 일원이었기에 다음날 학살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고 판단되었다.)
6. 2. 민간인 협력 문제
핑딩산 사건 학살에는 관동군 병력 외에도 민간인, 특히 푸순 탄광의 '방비대'가 가담했다는 주장이 있다.[22] 일부 기록은 약 1개 중대 규모의 탄광 방비대원이 학살에 동원되어 군에 협력했다고 전한다.[8]선양 재판 판결은 관동군 수비대뿐만 아니라 탄광 방비대 역시 학살에 참여했다고 명시했다. 판결에 따르면, 당시 푸순 탄광 책임자였던 구보 타카시가 방비대 창설을 지시했으며, 그의 허가 없이는 방비대를 동원할 수 없었고, 사실상 총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사건 이후 구보로 추정되는 인물이 학살 현장에서 지시를 내렸다는 증언도 채택되었다.[22] 구보가 처음에는 학살에 반대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군의 요구에 응해 방비대를 동원하고 학살에 협력했으며, 현장 감독까지 한 점이 유죄 판결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22]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과정에서 민간 조직이 어떻게 동원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후 구보는 상소 과정에서 제출한 변론서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려 했다.[8] 그는 ① 탄광은 무장이 허가되지 않았고, ② 방비대는 재향군인 중심의 자경단 성격으로 군 지휘하에 있었으며 자신은 문민으로서 군의 작전에 관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③ 학살 현장에 나타난 회색 옷의 인물은 자신이 아니며, ④ 사건은 이노우에 중위의 단독 행동이었다고 군 관계자에게 들었다고 변론했다.[8]
그러나 구보의 주장은 여러 사실과 어긋난다. ① 만철은 철도 및 부속지 경비 경찰권을 보유하여 상당 수준의 무장이 가능했다.[44][45] ② 방비대는 재향군인 외 일반 탄광 직원도 포함된 조직이었고, 급여는 만철에서 지급되었다. 야마시타 사다의 수기에 따르면 방비대는 수비대의 병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창설되었고 전투 시 군 지휘하에 들어갔으나[9], 방비대장 오하시는 수비대의 '지시'를 받아 자신이 소집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방비대가 군 지휘 체계에 완전히 편입된 조직이 아니라, 탄광 측의 통제하에 있으면서 군의 요청에 협력하는 형태였음을 시사한다.
선양 재판은 방비대원의 증언을 토대로 구보가 방비대 결성을 명령했고 동원 허가권과 총지휘권을 가졌으며, 재향군인이 아닌 탄광 직원이 소대장으로 지휘하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22] 이는 방비대가 사실상 탄광의 자체 방위 조직이었고 구보가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구보는 증언자들이 하급 직원이라 정확한 사실을 모른다고 반박했지만[30],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구보를 포함한 피고 7명 전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했다.
7. 사건의 역사적 의미
핑딩산 사건은 1932년 9월, 만주사변 중 일본군이 중화민국 랴오닝성 푸순 인근 핑딩산 마을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 참극이다. 홍창회 민병대의 일본군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자행된 이 사건은, 일본군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운 대표적인 전쟁 범죄 사례로 꼽힌다.[1] 일본군은 반군과 무관한 주민들까지 '동조자'로 간주하여 총검과 기관총으로 학살했으며, 중국 측은 희생자 수를 3,000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반면[22], 일본 측은 이를 축소하려는 경향을 보였다.[1] 피해자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며, 정확한 규모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22][21]
사건 이후, 일본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학살 책임자 중 한 명인 가와카미 대위는 전범 혐의로 연행되기 직전 자살했으며[46], 다른 관련자들도 처벌을 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정부는 사건 자체를 은폐하려 했고[26], 전후에도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에 대해 일본 최고재판소는 국제 조약을 이유로 국내 법원에서 다룰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2]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잔혹성을 생생히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 1972년 집단 매장지에서 800여 구의 유해가 발굴되어 기념관이 건립되었고[2], 혼다 가쓰이치가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중국의 여행」 등을 통해 일본 내에서도 사건의 진상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50] 핑딩산 사건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책임 있는 자세와 진정한 반성을 촉구하며, 역사 정의 실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
7. 1. 한국과의 연관성
2009년 5월 6일, 중국을 방문 중이던 일본 민주당 의원단은 일본 정부에 핑딩산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53]. 당시 의원단에는 여러 중의원 및 참의원 의원이 참여했으며, 한국계 일본인인 백진훈 참의원 의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일본 내 일부 정치 세력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를 낸 사례 중 하나이다.참조
[1]
서적
追跡平頂山事件
図書出版社
1988-12
[2]
웹사이트
english.eastday.com
http://english.eastd[...]
2024-06-05
[3]
뉴스
旧日本軍が満州住民を殺害した「平頂山事件」とは 研究の第一人者が調査結果まとめる 「事実知ること必要」
https://www.tokyo-np[...]
2023-09-03
[4]
뉴스
“反日プロパガンダ”に使われる「平頂山事件」の真実 語られぬ抗日ゲリラの撫順炭鉱襲撃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15-09-13
[5]
서적
満鉄と共に四十年
白木印刷
1966-08-15
[6]
뉴스
“反日プロパガンダ”に使われる「平頂山事件」の真実 語られぬ抗日ゲリラの撫順炭鉱襲撃
https://www.sankei.c[...]
産経新聞ニュース
2015-09-13
[7]
서적
平頂山事件とは何だったのか
高文研
2008-08-15
[8]
서적
平頂山事件資料集
柏書房
2012-09-01
[9]
서적
平頂山事件資料集
柏書房
2012-09-01
[10]
웹사이트
『東北王朝を越え、惨案の地へ⑦(それは死者と生者の声、平頂山事件)』遼寧省(中国)の旅行記
https://4travel.jp/t[...]
フォートラベル
2022-03-17
[11]
뉴스
〈対話・戦争、平和、信仰〉中山善衛真柱/山口淑子
1993-08-22
[12]
문서
[13]
문서
[14]
서적
平頂山事件資料集
柏書房
2012-09-01
[15]
서적
追跡 平頂山事件
田辺敏雄
1988-12-20
[16]
뉴스
(10)30ヶ所越す万人坑_中国の旅(第一部 平頂山事件)
1971-09-13
[17]
서적
万人坑に向き合う日本人
花伝社
2020-11-25
[18]
뉴스
1932-12-02
[19]
서적
平頂山事件資料集
柏書房
2012-09-01
[20]
서적
天皇の軍隊と平頂山事件
新日本出版社
2005-11-15
[21]
서적
追跡 平頂山事件
図書出版社
1988-12-20
[22]
서적
平頂山事件資料集
柏書房
2012-09-01
[23]
서적
中国人戦争被害者の証言
皓星社
1998-12-02
[24]
서적
旅でみつめた戦争と平和
草の根出版会
1999-08-01
[25]
서적
追跡 平頂山事件
図書出版社
1988-12-20
[26]
서적
平頂山事件資料集
柏書房
2012-09-01
[27]
서적
追跡 平頂山事件
図書出版社
1988-12-20
[28]
웹사이트
【満州文化物語(6)】反日プロパガンダに使われる「平頂山事件」の真実 語られぬ抗日ゲリラの撫順炭鉱襲撃(2/4ページ)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22-03-17
[29]
서적
平頂山事件
青木書店
1991-07-15
[30]
서적
満鉄撫順炭鉱と平頂山事件
新人物往来社
2010-09-11
[31]
웹사이트
日本侵略軍の公文書、発見と研究の経緯を振り返る
http://j.people.com.[...]
中国網
2022-06-26
[32]
뉴스
占領前 文書焼却を指示
2015-08-10
[33]
웹사이트
公文書廃棄、73年前も 敗戦の霞が関に何日も炎と煙が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2-06-26
[34]
뉴스
“反日プロパガンダ”に使われる「平頂山事件」の真実 語られぬ抗日ゲリラの撫順炭鉱襲撃
https://www.sankei.c[...]
産経新聞ニュース
2015-09-13
[35]
뉴스
1971-09-06
[36]
서적
秘録 大東亜戦史 下巻
富士書苑
1953-06-10
[37]
서적
追跡 平頂山事件
図書出版社
1988-12-20
[38]
서적
平頂山事件資料集
柏書房
2012-09-01
[39]
서적
天皇の軍隊と平頂山事件
新日本出版社
2005-11-15
[40]
서적
満州歴史紀行
立風書房
[41]
서적
昭和の歴史 15年戦争の閉幕
小学館
[42]
서적
中国の大地は忘れない
社会評論社
1995-06-30
[43]
간행물
「平頂山事件」考
[44]
서적
満州国警察小史
満蒙同胞援護会愛媛県支部
[45]
서적
鉄道自警村 -私説・満州移民史-
日本図書刊行会(発売:近代文芸社)
1997-09-30
[46]
간행물
井上中尉夫人(死の餞別)
[47]
서적
平頂山事件 消えた中国の村
青木書店
1991-07-15
[48]
서적
追跡 平頂山事件
図書出版社
1988-12-20
[49]
서적
陰謀・暗殺・軍刀 一外交官の回想
岩波書店
1950-06-10
[50]
뉴스
“反日プロパガンダ”に使われる「平頂山事件」の真実 語られぬ抗日ゲリラの撫順炭鉱襲撃
https://www.sankei.c[...]
産経新聞ニュース
2015-09-13
[51]
웹사이트
戦後70年平頂山事件を通じて日中の歴史和解を考える 【弁護士 大江 京子】
https://www.tobu-law[...]
東京東部法律事務所
2015-08-17
[52]
뉴스
2審も虐殺の事実認定 平頂山、東京高裁
http://www.47news.jp[...]
47NEWS
2005-05-13
[53]
URL
http://news.liao1.co[...]
[54]
웹사이트
「そんな事件はなかったという人ほど読んでほしい」“理想郷”の盛衰を史実を織り交ぜながら描く空想歴史小説
https://bunshun.jp/a[...]
文藝春秋
2022-08-3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