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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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학소는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진창 전투에서 촉한의 제갈량의 공격을 막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젊은 시절 군에 들어가 하서 지역을 수십 년간 지키며 공을 세웠으며, 228년 제갈량이 진창을 공격하자 소수의 병력으로 20일 이상을 방어하며 제갈량의 공격을 격퇴했다. 학소는 진창 전투의 공로로 열후에 봉해졌으나, 요직에 임명되기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검소한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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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삼국 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유비의 삼고초려로 촉한에 합류하여 승상이 되었고, 섭정으로서 남정을 통해 촉한의 기반을 다졌으며, 북벌을 통해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으며, 법치주의와 인재 등용을 중시하고 경제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했다. - 3세기 중국 사람 - 유비
유비는 후한 말 평민 출신으로 시작하여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여러 세력을 거치며 활동하다 제갈량을 영입하여 촉한을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으나, 이릉 전투 패배 후 병사하였다.
학소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郝昭 (Hǎo Zhāo) |
자 | 伯道 (Bódào) |
출생지 | 병주태원군 |
사망년도 | 229년? |
직업 | 장군 |
소속 | 조위 |
주요 활동 | 진창 전투 방어 |
관직 | |
임관 시기 | 불명 |
최종 관직 | 잡호장군 |
봉작 | 열후 |
가족 관계 | |
자녀 | 학개 |
2. 그의 생애
진수의 《삼국지》에는 학소의 전기가 없으며, 그 행적은 명제기, 소칙전, 조진전 등에 흩어져 기록되었고, 배주로 인용된 《위략》에 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학소는 젊은 시절부터 군인으로서 조조를 섬겼다. 용맹하고 과감하여 각지를 전전하며 무공을 세워 잡호장군이 되었다.
228년, 조진은 촉한의 제갈량이 진창을 공격해 올 것을 예측하고 학소와 왕생을 파견하여 성을 수리하게 하고 방비를 굳게 했다. 예측대로 제갈량이 침공하여 진창을 포위했고, 제갈량은 학소의 동향인 근상을 보내 여러 차례 항복을 권유했지만, 학소는 필사적인 결의로 임하고 있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20여 일간의 공방전 끝에 제갈량은 진창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군량이 바닥났고, 위나라의 원군도 다가오자 철수했다(진창 전투).[20]
낙양에 개선한 학소는 조예로부터 그 전공을 칭찬받아 열후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조예가 학소를 요직에 발탁하려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렸다. 임종 시, 학소는 아들에게 "나는 장군이었으니, 장군 따위는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또한 능묘를 파서 그 나무를 사용하여 무기를 만든 적도 있으니, 후한 장례 따위는 죽은 자에게 필요 없는 일임을 알고 있다. 너는 반드시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 그대로 매장하라. 다만 산 자에게만 거처가 있을 뿐, 죽은 후에는 거처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여기는 원래 선조 대대로의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동서남북 네가 편리한 곳에 매장하면 된다"라고 유언했다. 사후, 아들이 뒤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젊어서 군에 들어가 부곡의 독이 되었으며, 전공을 세워 잡호장군까지 승진했다. 하서 일대를 수십 년 간 지켜 한족과 비한족계 종족이 모두 복속했다.[2]220년,[3] 서평의 국연, 주천의 황화, 장액의 장진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위의 이민족도 이에 호응했다. 금성에 주둔하고 있던 학소는 위평과 함께 소칙의 도움으로 진군하여, 소칙, 관구흥(관구검의 아버지)과 협력하여 이를 진압했다.
227년, 서평의 국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학소는 녹반과 함께 진압에 파견되어 국영을 참수했다.[7] 하서를 10여 년간 지키면서 백성과 이민족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2. 2. 하서 지역에서의 활약
학소는 젊어서 군에 들어가 부곡의 독이 되었으며, 잦은 전공으로 잡호장군까지 승진했다. 하서 일대를 수십 년간 지켜 한족과 비한족계 종족이 모두 복속했다.[2]220년,[3] 쥐옌(麴演), 장진(張進), 황화(黃華)는 현재의 간쑤성과 칭하이성에 위치한 시평(西平), 장예(張掖), 주취안(酒泉) 군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우웨이군(武威郡)의 지역 부족들도 봉기하여 반란군에 합류했다. 학소와 웨이핑(魏平)은 위나라 장군 쑤쩌(蘇則)와 합류하여 정부군을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으며, 쥐옌과 장진을 처치하고 황화와 우웨이군 지역 부족들을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4] 이후 학소는 황허 서쪽 지역(현재의 산시성, 산시성, 간쑤성 일부)을 계속 담당하며 10년이 넘는 재임 기간 동안 이 지역의 평화와 안보를 유지했다.[5][6]
227년, 서평군의 쥐잉(麴英)이 린창(臨羌)과 시두(西都) 현의 관리들을 살해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학소와 루판(鹿磐)은 정부군을 이끌고 쥐잉을 공격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쥐잉을 처치했다.[7]
228년, 조진은 촉한의 제갈량이 진창을 공격해 올 것을 예측하고 학소와 왕생을 파견하여 성을 수리하고 방비를 굳게 했다. 예측대로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하자, 제갈량은 학소의 동향인 근상을 보내 여러 차례 항복을 권했으나, 학소는 필사적인 결의로 임하고 있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수천 명 정도의 적은 군대로 수비를 맡은 학소는 조진의 명령을 엄격하게 지키며 완강하게 방어했다. 제갈량은 운제 (사다리차)와 충차 (파성추)를 사용했지만, 학소는 화살과 맷돌로 이를 파괴했다. 제갈량이 정란 (공성루)을 사용하여 성 안에 화살을 쏘게 하자, 성 안에 방어용 담장을 만들어 막았다. 또 제갈량이 지하 갱도를 파서 성 뒤로 나오려 하자, 학소는 성에 옆 구멍을 파서 이를 방해했다. 20여 일간의 공방전 끝에 제갈량은 진창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군량이 바닥났고, 위나라 원군도 다가오자 철수했다(진창 전투).[20]
2. 3. 진창 전투에서의 공방전
제갈량은 진창성이 매우 견고하게 방어되어 함락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촉한군을 이끌고 진창에 도착했을 때, 제갈량은 그곳이 예상보다 훨씬 잘 방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학소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충격을 받았다.[10] 학소는 유능한 장군으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제갈량은 진창을 쉽게 점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10]제갈량은 먼저 군대에 진창을 포위하도록 명령하고, 학소와 같은 고향 출신인 진상(靳詳)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학소는 "그대는 위나라의 법을 잘 알고 나를 잘 안다. 나는 국가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고, 집안도 중요하다. 그대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갈량에게 돌아가 공격을 준비하라고 전하라."라고 답했다.[11] 진상이 학소의 말을 제갈량에게 전한 후, 제갈량은 다시 진상을 보내 "촉한군에 맞서 싸울 가망이 없으니 죽음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했다. 학소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나는 그대를 알아보지만, 내 화살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하고 진상을 돌려보냈다.[12]
당시 학소는 수만 명에 달하는 촉한군에 맞서 싸울 병력이 1,000명 정도밖에 없었고, 위나라 지원군이 온다는 징후도 없어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제갈량은 군대에 사다리를 사용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공성전 전술을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학소는 궁병들에게 불화살을 쏘아 공성 사다리에 불을 붙여 그 위에 있는 병사들을 태워버리라고 명령하여 이에 대응했다. 적군이 충차를 사용하자, 학소는 쇠사슬로 연결한 바위와 돌을 성벽에서 굴려 떨어뜨려 충차를 부수었다.[13]
촉한군은 공성탑을 벽에 가까이 가져가 병사들이 성벽을 넘을 수 있도록 해자를 메웠다. 학소는 외부 벽 뒤에 내부 벽을 쌓아 적군의 진격을 막았다.[14] 제갈량은 군대가 진창으로 직접 이어지는 터널을 파도록 했지만, 학소는 부하들에게 수직 방향으로 터널을 파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도록 명령했다.[15][16]
20일 넘게 포위가 지속되었지만, 제갈량은 학소를 이기고 진창을 함락할 수 없었다. 결국 제갈량은 위나라 지원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17]
2. 4. 죽음과 유언
조예는 학소가 성을 잘 지킨 것을 칭찬하는 조서를 내리고 열후의 작위를 주었으며, 장차 크게 쓰려 했다. 그러나 학소는 병에 걸려 죽었다. 아들 학개(郝凱)에게 유언을 내려, 자신이 남의 무덤을 파서 얻은 목재로 무기를 만들었으니 후장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18]학소는 죽기 전에 아들 학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수로서, 나는 장수가 해서는 안 될 일을 안다. 나는 전투 장비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얻으려고 많은 무덤을 파헤쳤으니, 성대한 장례가 죽은 자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죽으면) 수수한 옷을 입혀라. 삶에는 우리가 살 곳이 있지만, 죽음에는 우리가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내 무덤이 북쪽이든, 남쪽이든, 동쪽이든, 서쪽이든 네가 결정하도록 하라."[19]
낙양에 개선한 학소는 조예로부터 그 전공을 칭찬받아 열후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조예가 학소를 요직에 발탁하려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렸다.
임종 시, 학소는 아들에게 "나는 장군이었으니, 장군 따위는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또한 능묘를 파서 그 나무를 사용하여 무기를 만든 적도 있으니, 후한 장례 따위는 죽은 자에게 필요 없는 일임을 알고 있다. 너는 반드시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 그대로 매장하라. 다만 산 자에게만 거처가 있을 뿐, 죽은 후에는 거처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여기는 원래 선조 대대로의 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동서남북 네가 편리한 곳에 매장하면 된다"라고 유언했다.
사후, 아들이 뒤를 이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학소
사마의의 추천으로 제갈량이 진창으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진창성에 배치되었다.[20] 키는 9척에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 활을 잘 쏘고, 지모가 뛰어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진창성으로 쳐들어온 촉군을 막아내는 활약은 역사 기록과 비슷하나, 병에 걸린 뒤 갑자기 쳐들어온 촉군들의 함성과 진창성의 함락으로 놀라 죽었다.[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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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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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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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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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诸葛亮:蜀汉舵手的历史真相
https://books.google[...]
中国纺织出版社
20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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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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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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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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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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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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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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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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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aiping Huanyu Ji 25-26
https://ctext.org/wi[...]
20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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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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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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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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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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