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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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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군은 1930년 한국독립당의 무장 부대로 창설되어 북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군 부대이다. 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지도 아래 1931년까지 26개의 군구를 설치하고 일제와 교전했으며,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김좌진 장군 휘하의 신민부 군대와 연합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한중연합작전을 펼쳤으나, 중국군의 배신과 내부 갈등으로 와해되었다. 한국독립군은 동경성 전투와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항일 투쟁에 기여했으나, 한중 연합의 한계와 내부 분열로 인해 활동이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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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군
기본 정보
이름한국독립군
원어명한국독립군 (韓國獨立軍)
로마자 표기Hanguk Dongnipgun
활동 기간1929년 ~ 1933년
창립자김좌진
지청천
규모3,000명
본부만주한인회 (1932년)
상하이, 중화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기
소속

2.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

1930년 7월, 만주 한인회와 북만주의 한인 자치 단체인 생육사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중앙당부에 6개 위원회[5]를 두었고, 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산하 무장 조직이었다. 한국독립군은 1931년까지 북만주 중동철도를 중심으로 26개의 군구를 설치하고 일본 제국에 맞서 싸웠다.

2. 1. 한국독립당의 창당

1930년 7월 북만주(北滿洲) 교민들의 자치기관이던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와 생육사(生育社)를 모체로 하여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5] 한국독립당은 중앙당부에 6개 위원회를 두고 지방에는 지당부(支黨部)와 구당부(區黨部)를 두었다. 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예하 당군이었다.

2. 2. 한국독립군의 편성

1931년까지 북만주 중동철도를 중심으로 26개의 군구(軍區)를 설치하고 일제와 대전한 한국독립당의 당군(黨軍)으로서 한국독립군은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

직책이름
총사령관지청천
부사령관남대관
참모장신숙
재무 겸 외교관안야산
의용군훈련대장이광운
의용군중대장오광선
암살대대장이출정
의용군소대장이춘정
별동대대장한광빈
헌병대대장배성운
통신부대 겸 검사역신원균
구국후원회회장권수정
구국후원회 서기장홍진
선전대 겸 결사대장심중근
고문 겸 대일구국회 회장서일봉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은 신민부의 군대를 구성했다.[1] 이 군대는 사실상 농민 민병대로서, 신민부 군사 학교에서 훈련받은 게릴라들을 보충병으로 하여,[2] 일본 제국소련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3] 또한 한국인을 산적관동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치안대(치안대|Chiandae한국어)와 항일 게릴라 부대를 설립했다.[4]

3. 만주사변과 한중연합작전

1930년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이 결성된 이듬해인 1931년 9월, 일본 제국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가속화했다.

한국독립군은 총동원령에 따라 병사 훈련과 부대 편성을 서두르던 중 1932년 2월 12일, 일본군과 만주군 연합 부대(일만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부대 정비와 장비 확보가 미흡한 상황에서, 일만군은 2월 5일 하얼빈 방면에서 중국군을 격파하고 항공기 엄호를 받으며 중동철도(中東鐵道) 연선을 따라 진격해왔다. 한중연합군은 위사하(葦沙河), 일면피(一面陂), 오길밀(烏吉密), 밀로참(密路站), 동빈방정(同賓方正), 의란(依蘭) 등지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패배하여 분산되었다.

한국독립군 총사령 지청천은 참모장 신숙과 함께 1개 지대(一支隊)를 이끌고 의란에서 분전했으나,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으로 퇴각하여 부대를 수습했다. 별동대장 안종선은 중국 제3호로군 고봉림 부대와 연합 작전으로 3월 3일 아성(阿城)을 일시 탈환했으나, 곧 다시 빼앗겼다. 차철, 야상기, 전북빈이 이끄는 제3, 4, 5 대대는 중국 호로군 제3, 4여단장 유지광(劉志光)·궁영무(宮英武) 등의 부대와 연합하여 한 달 남짓 저항했으나, 결국 일면피 이북 지역으로 퇴각했다.

한국독립당은 쌍성현(雙城縣) 모아산(帽兒山)에서 비상회의를 열어 흩어진 독립군을 집결시키고, 중국군 고봉림 부대에 연합 작전을 지속할 것을 통고했다. 한 달 만에 독립군이 재집결하자, 김창환을 총사령 대리로 임명하고 부대를 재편성하여 훈련에 돌입했다. 전력을 정비한 한중연합군은 1932년 8월, 본격적인 연합 작전을 개시했다.

지청천,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3. 1. 한중연합작전의 배경

1931년 9월, 일본 제국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가속화하면서 일본 제국 육군과 만주국 군대가 연합하여 북만주까지 침공해왔다. 이에 한국독립당1931년 11월,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모든 활동을 군사 방면에 집중하고 중국 당국과 한중연합작전을 협의하였다.[6]

1932년 일본은 괴뢰 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일본군은 만주군과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 작전을 본격화하였는데, 당시 만주에는 반만항일을 표방한 수많은 중국군 부대가 편성되어 일본군과 만주군에 항전하였다. 이들 부대에는 장쉐량 군대의 일부와 보위단(保衛團) 또는 일부 마적까지 참여하였다. 둔화(敦化) 지방에는 왕더린(王德林), 펑잔하이(馮占海) 부대가, 흑룡강 지방에는 마잔산(馬占山) 부대가, 하얼빈에는 중국 호로군(護路軍) 사령관 딩차오(丁超)가 인솔하는 부대와 호로군 여단장 고봉림(考鳳林) 부대가 있어 일만군(日滿軍)과 싸우고 있었다.[7]

이에 앞서 1931년 11월 2일, 한국독립당은 일제의 만주 점령에 대처하여 새로운 활동 목표를 설정하였다. 동월 10일 각 군구를 통해 소집과 징모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2일에 당·군 대표 신숙과 남대관 등을 중국의 길림자위군, 호로군연합군총부에 파견하여 동 군사령관 딩차오 및 제2, 제3군장 양문휘(楊文揮), 고봉림 등과 한중연합작전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11일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과 최악, 오광선, 심만호, 김청농, 최관용, 최종원 등 간부가 중국군 당국과 상호협정을 체결하였다.[7]

3. 2. 주요 전투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및 만주군에 맞서 여러 전투를 벌였다.

한중연합군 주요 전투 일지
날짜전투명위치결과비고
1932년 9월쌍성보 전투쌍성보한중연합군 승리, 만주군 3개 여단 격퇴, 물자 노획[1]
1932년 11월쌍성보 재탈환 전투쌍성보한중연합군 승리, 일본군 1개 중대 전멸200명 단위 15개 부대로 편성된 한국독립군 선봉, 중국군 지원
1932년 12월경박호 전투경박호한중연합군 승리, 만주군 유격대 2천 명 섬멸[1]
1933년 4월사도하자 전투사도하자한중연합군 승리, 일본군 및 만주군 연합 부대 섬멸[1]
1933년 6월동경성 전투동경성한중연합군 승리, 일본군 격퇴, 만주군 항복, 전리품 획득[1]
1933년 7월대전자 전투대전자령한중연합군 승리, 일본군 대파, 막대한 전리품 획득[9]한국독립군 항일 전투사상 전례 없는 대승리



위 표는 주요 전투들을 요약한 것이며, 이 외에도 한중연합군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 및 만주군과 싸웠다.

4. 한중연합작전의 한계와 와해

1931년 동빈현 전투 이후, 한중 양군 간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중국군은 독립군 총사령 이하 수십 명의 간부를 체포 및 구금하고, 독립군의 무기를 압수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한중연합은 사실상 와해되었다.[4]

4. 1. 한중 양군의 갈등

약 2개월간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보강한 독립군은 1931년 9월 1일 동녕현에 있는 일본군을 단독으로 공격하였다. 이 작전은 원래 중국군이 곧 후속부대를 파견하기로 약속한 전투였다. 약 3일에 걸쳐 독립군이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는데도 중국 후속부대는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립군의 피해가 커져 결국 퇴각하였다. 중국구국군이 후속부대를 보내지 않은 것은 중국구국군 제1사장 오의성(吳義成) 부대 내에 침투한 공산주의자가 한중연합군을 이간시켰으며, 적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의 분배 과정에서 양군의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데 그 이유가 있었다.[4]

동빈현 전투 이후 한중 양군의 불화는 더욱 심해졌으며, 중국군이 독립군의 총사령 이하 수십 명의 간부를 체포, 구금하고 독립군의 무기를 압수하는 사태로까지 번져 한중연합은 와해되었다.[4]

4. 2. 독립군의 고립과 투쟁 지속

약 2개월간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보강한 한국독립군은 1931년 9월 1일 동녕현에서 일본군을 단독으로 공격했다. 이 작전은 원래 중국군이 곧 후속 부대를 파견하기로 약속한 전투였다. 독립군은 약 3일 동안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중국 측 후속 부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군의 피해는 커졌고 결국 퇴각했다. 중국 국민구국군이 후속 부대를 파견하지 않은 이유는 중국 국민구국군 제1지휘관 오의성의 부대에 잠입한 공산주의자들이 한중 연합군의 분열을 초래했고, 적에게서 노획한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양군의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빈현 전투 이후 한국과 중국군의 불화는 심화되었고, 중국군은 독립군 총사령부 소속 간부 수십 명을 체포, 구금하고 독립군의 무기를 몰수하여 한중 연합의 붕괴를 초래했다.[4]

참조

[1] 뉴스 한국 독립군 https://www.worldkor[...] World Korean 2023-09-22
[2] 뉴스 한국 독립군 http://www.okpedia.k[...] Encyclopedia of Overseas Korean Culture 2023-02-04
[3] 서적 Political parties of Asia and the Pacific Greenwood Press 1985
[4] 논문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Manchuria: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and the Yenan-Kanggye Revolutionary Base 2002
[5] 문서 중앙위원장 홍진(洪震), 총무위원장 신숙(申肅), 조직위원장 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 안훈(安勳), 군사위원장 이청천(李靑天), 경리위원장 최호(崔灝), 감찰위원장 이장녕(李章寧)
[6] 문서 1.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하달하고 정개적(整個的)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2. 당내의 일체 공작은 군사활동에 집중한다. 3. 길림성 항일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의한다.
[7] 문서 1. 한중 양군은 어떤 불리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상호 장기항전을 맹서한다. 2. 중동철도(中東鐵道)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담당하고 동부전선은 한군이 담당한다. 3. 한·중연합전시 후방교련은 한군장교가 담당하고 한군에 수요되는 일체 물자는 중군이 공급한다.
[8] 문서 1. 군사활동 지점을 개정하여 동만주(延吉·汪清·東寧·琿春·寧安縣)에 한정하고, 먼저 중국 구국군(救國軍) 수뇌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의함. 2. 각 군구에 수훈장정(受訓壯丁)을 다시 징집할 것. 3. 황학수(黃學秀)를 부사령관으로 선정한다.
[9] 문서 군복 3천 벌, 담요 3백 장, 군량 문서 군용품 2백여 마차, 박격포 10문, 소총 1천 5백 정, 대포 3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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