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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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북한에서 남하한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우익 청년 단체이다. 북한에서 공산주의에 저항했던 기독교인, 지주 등이 주축이 되었으며, 김구, 이승만 등 우익 인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좌우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에 반공 투쟁을 벌였으며, 제주 4·3 사건에 개입하여 사태를 악화시키고, 김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는 등 한국 현대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8년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해체되었으나, 이후 재건 시도가 있었고, 2014년에는 관련 단체가 서울광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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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1946년 이승만 계열과 김구 계열이 통합하여 결성된 우익 정당으로, 신탁통치 반대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며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제1당이 되었으나, 분열과 당세 약화로 1960년 소멸되었다. - 자유당의 선행조직 - 대동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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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명칭 | 서북청년회 |
한자 | 西北青年會 |
로마자 표기 | Seobuk Cheongnyeonhoe |
영문 명칭 | North-West Youth Association |
활동 기간 | |
시작일 | 1946년 11월 30일 |
종료일 | 1948년 12월 19일 |
국가 | |
소속 국가 | 대한민국 |
성격 | |
유형 | 준군사조직 |
주요 활동 | |
참여 전투 | 제주 4·3 사건 |
기타 | |
관련 단체 | 2014년에 재건된 단체: 서북청년단 (2014년) |
2. 창립 배경
1946년 3월 조선민주당 당수 조만식이 소련 군정과 김일성에 의해 감금당하자 지주와 기독교인 등은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북한에 반대하는 단체의 조직을 준비하였다. 이후 월남한 청년 남성들이 모여서 조직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1946년 3월 5일 문봉제(文鳳濟) 등 월남 청년들이 주도한 집회가 성공하고, 이에 힘입어 평남동지회가 조직되고, 다시 평남동지회는 평남북 조직을 합친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었다.[15] 결성대회에는 북한 지역 연고자(이윤영, 김병연, 강기덕)는 물론 김구도 참석했다.[15]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과 영락교회청년회 등이 통합하여 서북청년회가 결성되자 김구, 이승만, 한민당 등은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16]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 소련이 점령한 소련 점령 지역인 북한을 탈출한 난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제주 4·3 평화공원 박물관의 벽화에는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가족들이 북한에서 투옥, 강간 또는 살해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기 때문에” 소련군과 한국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다고 적혀 있다.[1]
2. 1. 결성 과정
1946년 8월, 월남 청년 단체들은 평안청년회를 중심으로 통합을 준비하였다. 광복절 전후로 조선민주당 이종현과 백남홍, 대동신문 사장 이종영, 백의사 단장 염동진 등이 서북청년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함경도 출신 청년 단체인 양호단,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와도 통합 논의를 진행하였다.1946년 11월 30일, 소련이 점령한 소련 점령 지역인 북한을 탈출한 난민들에 의해 서북청년회 결성식이 열렸다.[1] 평안청년회, 황해청년회, 함북청년회, 대한혁신청년회, 양호단 등이 참여하였다. 12월 10일, 평안청년회, 황해청년회, 함북청년회, 대한혁신청년회, 양호단이 서북청년회를 공식 결성하고 간부진을 선출하였다. 위원장은 선우기성, 부위원장은 장윤필, 조영진이 선출되었다.
3. 주요 활동
1947년 1월 이선파(李鮮波)를 위원장으로 한 서울중구지부, 평안북도 청년들의 서부지구, 청단지부(靑丹支部), 인천지부, 황해도민들이 가입한 황해도지부 등이 잇따라 결성되었고, 1947년 6월 10일 임일(林一)을 위원장으로 하여 대전에 남선파견대본부(南鮮派遣隊本部)를 설치하였다. 서북청년회는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우익진영의 선봉역할을 하였다.
1947년 3·1절 기념식을 각각 가진 좌우익의 시가행진 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남대문충돌사건, 공산주의를 찬양·고취하던 민족예술제를 광복청년회와 합동으로 저지시킨 부산극장사건, 부산좌익청년운동의 본부격인 민주애국청년동맹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서북청년회 부산지부의 간판을 건 좌익단체사무실점령사건 및 대북공작 등이다. 이러한 격렬한 반공투쟁은 모두가 이북에서 공산치하의 학정에 못 이겨서 자유를 찾아온 그들의 과거경험이 크게 작용한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렇게 서북청년회가 대공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1947년 4월에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지청천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李範奭)이 만든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과의 갈등 속에서도, 전국 청년의 대동단결을 전제로 한 청년조직을 강력히 추진하여,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기존 청년단체들의 통합공작을 시도하였다.
통합공작에 참가한 단체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을 비롯하여 광복청년회·대한독립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서북청년회 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어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다가,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는 문봉제(文鳳濟)·김성주(金聖柱) 등이 중심이 되어 서북청년단을 재건하였다. 이 조직은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됨으로써 자연 해체되었다.[12]
3. 1. 제주 4.3 사건 개입
제주도에서 단정 반대와 남로당 개입으로 4.3 사건이 발생하자, 서북청년회는 남로당 반대를 명분으로 개입하여 사태를 악화시켰다.[1] 이승만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며 제주도 사태를 강경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 신설을 지시하고, 서북청년회 단원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키기도 했다.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서북청년회는 경찰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며 제주도 주민들에게 잔혹하게 굴었다.[5] 제주 4·3 사건 당시 1만 4천 명에서 3만 명 사이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그중 86%가 서북청년회를 포함한 보안군과 준군사조직에 의해, 14%가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6][3][4] 이로 인해 제주도 주민들의 깊은 원한이 생겼다.[7]
3. 2. 대동청년단과의 관계
1947년 4월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이 대동청년단 조직에 착수하였다.[12] 지청천은 이범석이 만든 민족청년단과의 갈등 속에서도, 전국 청년의 대동단결을 전제로 한 청년조직을 강력히 추진하여,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기존 청년단체들의 통합공작을 시도하였다.[12]통합 대상은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광복청년회, 대한독립청년단, 청년조선총동맹, 서북청년회 등이었다.[12] 이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통합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어 심각한 대립을 보였다.[12] 통합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합류하였고, 통합에 반대한 문봉제(文鳳濟)·김성주(金聖柱) 등은 서북청년단을 재건하였다.[12] 재건된 서북청년회는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해체되었다.[12]
3. 3. 김구 암살 사건
1949년 6월 26일, 서북청년회 재건파 소속 안두희는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17][18] 서북청년회는 제주도에서 단정 반대인 4.3 사건이 발생하고 김달삼 등 남로당원들이 개입하여 사태를 확산시키자, 남로당 반대를 명분으로 4.3 사건에 개입하였다.[17][18] 서북청년회는 제주시민 10%까지 포함한 전국에서 30만명에 달하는 국민을 좌경분자 처단이라는 명목하에 탄압 혹은 살해했다.4. 해체 및 재건 시도
1948년 12월 19일 이후, 서북청년회는 정치단체로서의 활동을 중단하였고,[11]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12] 일부 잔존 세력은 1949년 10월 18일 단체 등록이 취소되어 소멸되었다.[12] 1950년 한국 전쟁 발발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잊혀져 갔다.
서북청년회 해체 이전, 조선경비대 통위부장 류동렬, 경찰청 경무부장 조병옥, 서북청년회 위원장 선우기성 사이에 합의가 있었다.[12] 당시 서북청년회 내부에서는 대동청년단으로의 합류파와 재건파 사이에 분열과 반목이 있었고, 제3의 길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12]
2014년 9월 28일,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정부 대응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를 자처하는 단체가 서울광장에 나타나면서 서북청년회에 다시 주목이 집중되었다.[11] 하지만 2014년에 나타난 단체에 대해서는 이후 인터넷이나 매스미디어 등을 통해 어떠한 활동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4. 1. 해체 과정
서북청년회는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12] 일부 잔존 세력은 1949년 10월 18일 단체 등록이 취소되어 소멸되었다.[12]서북청년회 해체 이전, 조선경비대 통위부장 류동렬, 경찰청 경무부장 조병옥, 서북청년회 위원장 선우기성 사이에 합의가 있었다.[12] 당시 서북청년회 내부에서는 대동청년단으로의 합류파와 재건파 사이에 분열과 반목이 있었고, 제3의 길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12]
4. 2. 재건 시도
2014년 9월 28일,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정부 대응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서북청년단 재건준비위원회"를 자처하는 단체가 서울광장에 나타나면서 서북청년회에 다시 주목이 집중되었다.[11] 하지만 2014년에 나타난 단체에 대해서는 이후 인터넷이나 매스미디어 등을 통해 어떠한 활동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5. 평가 및 비판
서북청년회는 반공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폭력적인 활동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였으며[6][3][4],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서북청년회는 경찰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며 제주도 주민들에게 잔혹하게 굴었다.[5]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며 가혹한 탄압을 지시하기도 했다.
1947년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자,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서북청년회에서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는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13][17] 이들은 김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17][18]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에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17][18]
서북청년회는 제주시민 10%까지 포함한 전국에서 30만명에 달하는 국민을 좌경분자 처단이라는 명목하에 탄압 혹은 살해했다. 서북청년단 해체 요구에 장택상은 강력하게 반발하였으며,[18] 조병옥 역시도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서북청년단 해산을 반대하였다.[18][19] 1947년 3월 3.1절 당시 활동과 관련해 장택상은 서북청년단에 5만원을 지원하기도 했다.[18] 1973년 문봉제는 증언을 통해 선우기성이 장택상에게 불려가 쌀한가마니에 해당되는 액수의 봉투를 받았다고도 했다.[18]
한국 전쟁이 끝난 지 10년 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4·19 혁명 이후 망명을 강요당했다. 반공주의는 특히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 시대에 강력한 힘으로 남아 있었다.[8]
참조
[1]
뉴스
The Northwest Youth League - JEJU WEEKLY
http://www.jejuweekl[...]
[2]
뉴스
Islanders still mourn April 3 massacre - JEJU WEEK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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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The Korean War, 1945–1953
https://books.google[...]
China Books&Periodicals, Inc
[4]
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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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01-01
[5]
웹사이트
American Responsibility and the Massacres in Cheju Conference on Overcoming the Past: Healing and Reconciliation -- Cheju and the World in Comparison
http://islandstudies[...]
2016-12-2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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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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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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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istory of anti-communism in South Korea
https://www.koreatim[...]
201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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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西北青年団”再建の波紋、極右団体の復活に知性はどう対処すべきか
http://japan.hani.co[...]
ハンギョレ
[10]
서적
家 (チベ) の歴史を書く
筑摩書房
[11]
뉴스
記者手帳 - 軽々しく口にすべきでない“西北青年団”
http://japan.hani.co[...]
ハンギョ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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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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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사상사
[14]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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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16]
서적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1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18]
서적
제주 4.3 연구
역사비평사
[19]
서적
나의 회고록
민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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