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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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용군은 1930년대 후반 중국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산하 무장 조직으로, 김원봉을 총사령으로 하여 중국 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았다.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되었으며, 김두봉, 무정 등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용군을 이끌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화북 및 화중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선전 활동과 유격전을 펼쳤다. 1945년 일제의 패망 후 조선의용군은 만주로 진출하여 중국인민해방군에 편입되었으며, 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하거나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어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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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용군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조선의용군 |
| 한자 표기 | 朝鮮義勇軍 |
| 로마자 표기 | Joseon Ui Yonggun |
| 영어 표기 | Korean Volunteer Army |
| 조직 | |
| 창설자 | 김두봉 무정 |
| 활동 기간 | 1939년 ~ 1945년 |
| 본부 | 타이항 산맥 |
| 병력 규모 | 2,000명 (1945년) |
| 상위 단체 | 조선독립동맹 |
| 유래 단체 | 조선의용대 |
| 이후 단체 | 조선신민당 중국 인민해방군 조선인민군 연안파 |
| 동맹 단체 | 경성 콤그룹 |
| 활동 | |
| 참전 | 중일전쟁 |
| 활동 지역 | 중국 |
| 적대 단체 | 일본 제국 육군 |
![]() | |
| 이념 | |
| 이념 | 한국 민족주의 공산주의 |
2. 배경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 중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러 단체들이 후베이성 우한에서 연석회의를 갖고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립하였고, 산하 무장 세력으로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다.[17] 김원봉을 총사령으로 한 조선의용대는 장제스가 위원장으로 있던 중국 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았고, 직접적인 교전보다는 항일 선무 공작이 주된 임무였다.[17]
1939년, 김학무 조선의용대 부대장은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후방 투쟁은 가짜 항일"이라며 북상을 주장하였다.[23] 최창익은 부대를 이끌고 중국 공산당 근거지인 옌안(중국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들과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중국 국민당 지휘 아래 있던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내 반공주의로 인한 희생을 우려하여 타이항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되었다.[21]
1938년 6월 일본군이 우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우한 전투가 시작되었고,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10월 24일 장제스는 우한 철수를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의용대 역시 철수하였다. 그 뒤 조선의용대는 전황에 따라 여러 곳으로 분산하여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19]
1939년, 중국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이 창설되었다.[2] 군대를 책임진 두 사람은 김두봉과 무정이었다. 이 기간 동안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 동북 항일 연군과 함께 싸웠다.[3]
조선의용대 사령관은 김원봉이었으나, 우한 철수 이후 여러 곳에 흩어진 부대들이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조선의용대에 포로 심문과 같은 역할을 부여했지만,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의용대 내부에서는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1939년 조선의용대 부대장 김학무는 정치 연설을 통해 "총소리 없는 후방 투쟁은 가짜 항일 투쟁이다"라고 주장하며 북상을 주장했다. 이러한 내부 요구에 따라 최창익이 이끄는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거점인 연안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북중국 조선청년회를 결성하였다. 한편, 후베이 지역에서 중국 국민당의 지휘 아래 있던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내부의 반공주의로 인한 희생을 우려하여 중국 공산당 주력 부대의 근거지인 태항산으로 이동했다. 1941년 7월, 두 세력은 화북 지역의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되었다.
1942년 중경에 있던 조선의용군 주력부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 조직인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자, 북중국 조선청년회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재편되어 김두봉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또한 조선의용대 화북 지역은 그들의 당군인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되었다. 조선의용군은 창설 초기에는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진 부대였으나, 1943년 이후에는 팔로군의 지휘를 받았다.
3. 창설과 증원
1942년 충칭의 조선의용대 본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편입되자,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하고 주시경의 제자이자 한글 운동가인 김두봉을 주석으로 선출하였다.[28]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인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되었다.[21] 초기 조선의용군은 독립적 지휘권을 가졌으나 1943년 이후 팔로군 지휘를 받았다.[29] 옌안에 있던 김무정이 조선의용군 총사령이었고, 박효삼이 화북지대장이었다.[31]
조선의용군은 화북, 화중 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선전, 유격전을 펼쳤고, 1943년 말부터 조선인들이 입대하여 병력이 늘었다. 1945년 5월 무렵에는 850여 명에 이르렀다.[21]
3. 1. 화북 지역 활동
조선의용군은 타이항산을 거점으로 허베이성, 산둥성, 산시성 등지에서 활동했다. 주요 임무는 선무 공작이었는데, 일본군 점령 지역의 건물에 벽보를 붙이고,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3개 국어로 작성된 전단을 살포하였다. 당시 허베이 성의 한 노인은 "적이 몇 십분 거리에 있어도 할 일은 다 했다"고 조선의용군의 활동을 증언했다.[32]
이들은 일본군과의 교전도 여러 차례 있었다. 호가장 전투, 타이항산 전투, 진서북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3. 2. 교육 기관
조선의용군은 간부 양성을 위해 여러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1944년 9월 화북조선청년군사정치간부학교,[21] 10월 조선군정학교 산동분교, 1945년 2월 옌안 조선군사정치학교를 잇달아 개설하여[21]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 및 정치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4. 주요 전투
조선의용군은 호가장 전투, 타이항산 전투, 진서북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1945년 11월 창설된 제5지대는 돈화에서 보안대의 기습을 받았으나 소련군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후 제5지대는 연변 지역 부대와 통합 재편되면서 조선의용군이라는 명칭은 점차 사라졌다.
4. 1. 호가장 전투 (1941.12)
1941년 12월 12일 허베이성 원씨현 호가장 일대에서 선전활동을 벌이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 대원 29명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가 일본군 50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27] 박철동 대원이 포위를 뚫고 팔로군에 지원을 요청하러 간 사이, 김학철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35] 2대 대원들은 격렬히 저항하다 지원을 나온 팔로군과 함께 포위를 뚫었으며, 추격해 오는 일본군과 교전을 계속하며 귀대하였다. 이 전투로 손일봉, 최철호, 왕현순, 박철동이 전사하고, 대장 김세광과 분대장 조열광, 대원 장례신이 부상당하였다. 일본군은 전사 18명, 부상 32명을 기록하였다.[33]체포된 김학철은 교전 당사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아 10년형을 선고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8·15를 맞아 석방되었다.[35] 호가장 전투에서 전사한 4명의 대원은 황페이핑 촌에 묻혔으며, 조선의용군 묘지가 사적지로 인정되기 전까지 마을 주민이 이들 묘를 돌봤다.[36] 2002년 사적지로 지정된 뒤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93년 손일봉과 최철호에게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37]
4. 2. 타이항산 전투 (1942.2-5)
1942년 2월, 일본군은 허베이 지역의 항일 무장 세력을 없애기 위해 타이항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5월이 되자 일본군 41사단이 타이항산을 완전히 포위하게 되었고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은 퇴각을 위해 퇴로를 확보해야만 하였다.[38] 이 전투에서 팔로군은 부참모장 쭤취안이 전사하였고(그 지역은 오늘날 쭤취안현[39]으로 불린다), 조선의용군은 윤세주와 진광화를 비롯한 10여 명이 전사하였다.[38] 전투 이후 쭤취안과 윤세주, 진광화의 장례가 치러졌고, 팔로군 사령관 주더가 추도사를 낭독하였다.[40]4. 3. 진서북 전투 (1943.4)
1942년 11월 13일 조선의용군은 산시성 서쪽 산악 지대인 뤼량 산맥에 진서북 분대를 설치하였다. 분대장은 김세광이었고, 조직 담당은 문명철이었다.[31][8]진서북 분대는 창설 이후 수 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1943년 4월 14일, 수백 명의 일본군이 진서북 분대를 포위하였고, 이 전투에서 문명철이 전사하였다. 문명철은 전라남도 출신으로 항일 투쟁을 위해 황푸 군관학교에 입교하였으며, 1941년 국민당 관구 내에서 조선의용대에 합류한 이후 조선의용군 장교로 활동하였다.[31][8]
5. 해방 이후
1945년 8월, 김두봉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의용군 4개 대대를 이끌고 압록강으로 향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기 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소련 군정은 압록강을 넘어온 조선의용군을 인정하지 않고 무장해제하였다.[28][27] 김무정을 비롯한 100여 명의 지휘관들은 1945년 12월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였다. 이들은 연안파라 불리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초기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41]
한편,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군은 국공내전에 휘말렸다. 옌안에 남아있던 대원들은 중국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만주로 이동하였으며 옌볜으로 집결하여 조선인을 보호하는 활동을 하였다.[42] 조선의용군의 옌볜 주둔은 이후 조선족 자치주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30]
5. 1. 만주 진출과 국공내전 참전
1945년 8월, 일제 패망 직후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만주로 이동하였다.[28][27] 1945년 11월, 만주에 도착한 2,000명의 조선의용군은 현지 조선인들을 모아 병력을 늘리고, 중국인민해방군 부대로 편입되어 국공내전에 참전하였다.[42]조선의용군은 만주 각지에서 조선인 보호 활동을 펼치고, 토비 소탕과 근거지 개척에 참여하였다.[30] 1946년 12월 17일, 7개 대대가 국민당에 투항하였지만, 끝까지 남은 유일한 대대는 조선인 대대였다.
1949년, 중국인민해방군 내 조선의용군을 주축으로 편성된 제164사단(12,000명, 부사단장 김창덕 인솔)과 제166사단(10,000명, 사단장 방호산 인솔)이 북한으로 보내졌다. 제164사단은 조선인민군 제5사단, 제166사단은 조선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전우가 이끄는 중국인민해방군 독립 제15사단(14,000명)은 1950년 4월 초 열차편으로 신의주를 거쳐 원산에 도착했으며, 인민군 제12사단(사단장 전우)으로 개편되었다. 이 외에도 선양 혼성단, 철도병단 조선족 부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생 등 조선의용군 출신 55,000명에서 60,000명 정도의 병력이 인민군에 편입되어 북한군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5. 2. 조선인민군 편입
1949년부터 1950년 사이, 조선의용군 출신 부대들은 북한으로 이동하여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다. 1949년 7월, 중국 인민해방군 제164사단(12,000명, 부사단장 김창덕 인솔)과 제166사단(10,000명, 사단장 방호산 인솔)이 북한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각각 조선인민군 제5사단과 제6사단으로 개편되었다.[28][27]1950년 4월에는 전우가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 독립15사단(14,000명)이 신의주를 거쳐 원산에 도착하여 조선인민군 제12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이 외에도 선양 혼성단, 철도병단 조선족 부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생 등 조선의용군을 주축으로 한 55,000명에서 60,000명 정도의 병력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다.[41]
이들은 조선인민군의 핵심 전력을 구성하여 한국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5. 3. 연안파 숙청
김무정 등 조선의용군 출신들은 연안파로 불리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초기 주요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41] 그러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은 권력 강화를 위해 8월 종파사건을 일으켜 연안파를 숙청하였다.6. 주요 인물
| 성명 | 주요 직책 및 활동 | 북한에서의 직책 |
|---|---|---|
| 김두봉 | 조선독립동맹 주석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 김무정 | 조선의용군 총사령, 홍군 대장정 참여 | 민족보위성 부상,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포병사령관 |
| 김원봉 | 의열단장, 조선민족혁명당 및 조선의용대 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역임 | |
| 박일우 | 조선의용군 부사령관 | 내무상 |
| 박효삼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 | 상업성 수매양정국장 |
| 최창익 | 조선의용군 창설 주도 | 재정상, 부수상 |
| 윤세주 | 의열단,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 | 타이항산 전투 중 전사 |
| 김학철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분대장, 호가장 전투에서 부상 후 체포, 해방 후 북한으로 귀환했다가 중국으로 망명 | |
| 이화림 |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 조선의용군 군의 | |
| 정율성 |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졸업, 조선의용군 복무, 〈조선의용군가〉, 〈팔로군 행진곡〉 작곡 |
7. 기념
2002년 대한민국 순국선열 유족회와 중국 짠황현 황베이핑촌 인민정부가 공동으로 조선의용군 타이항산 지구 항일전 순국선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37] 2004년에는 타이항산에 조선의용군 본부가 있던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45] 기념관은 100m2 규모로 관련 사료를 한국어와 중국어로 전시하고 있다.[46]
옌안 시기의 유적으로는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정율성 기념비가 있다.[4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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