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한봉덕은 평안북도 영변 출신의 서양화가로, 호는 노석이다. 1945년 화단에 등단하여 평양에서 교편을 잡다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했다. 이후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고 현대작가초대전 등을 조직하며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선보였다. 1968년부터 1971년까지 보문사 석굴암 조성에 조각가로 참여했다. 1971년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시민권을 취득하고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88년 서울로 귀환하여 위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대한민국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작품은 불교적, 동양적 사고를 서양화 기법으로 표현하며, 스웨덴에서 특히 명성을 얻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봉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한봉덕 |
| 원어 이름 | 韓奉德 Ben Hahn Harrie Hahn Bernard Hanne Denis Rahnn Bernardo Hahn |
| 별칭 | 호는 노석(老石) |
| 출생일 | 1924년 |
| 출생지 | 평안북도 영변 |
| 사망일 | 1997년 7월 17일 (73세)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 국적 | 시민권(최종 국적) |
| 이전 국적 | 국적(前) |
| 영주권 |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영구거주권(前) |
| 거주권 | 거주권(前) 거주권(前) |
| 분야 | 서양화 조각 평론 |
| 종교 | 유교(성리학) 불교 |
| 직업 | 서양화가 조각가 언론인 미술평론가 대학 교수 |
| 학력 | 신징 미술학교 |
| 배우자 | 박순자(朴順子) |
| 자녀 | 슬하 1남 3녀 |
| 부모 | 아버지: 한치우 어머니: 수안 김씨 부인 |
| 경력 | |
| 언론 | 前 대한민국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
| 대학교 | 前 대한민국 홍익대학교 전임교수 前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교 전임강사 前 대한민국 세종대학교 특임강사 |
2. 생애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號)는 노석(老石)이다. 평안북도 영변 출신으로, 1945년 서양화가로 등단했다. 평양에서 교편을 잡던 중 1951년 1·4 후퇴 때 대한민국으로 월남하였다. 월남 이후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고 현대작가초대전을 조직하는 등 활동했으며,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출품하고 보문사 석굴암 조성에 조각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1971년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스웨덴, 덴마크, 미국, 노르웨이 등 여러 국가에서 개인전 및 초대전에 참여하며 활동했다. 1973년 대한민국 국적과 아일랜드 영구거주권을 포기하고 스웨덴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교 동양학부 전임강사를 지냈다. 1988년 대한민국 서울로 돌아왔으나 스웨덴 국적을 유지했으며, 1997년 7월 17일 위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대한민국에 거주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월남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號)는 노석(老石)이며 평안북도 영변 출생이다. 1945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첫 등단하였고 평안남도 평양에서 교편을 잡다가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하였다. 같은 해 서울 동양백화점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화가 김병기(金秉期), 김영주(金永周)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을 조직하였다. 현대작가초대전은 김창열, 박서보 등의 신세대 미술작가들이 참여하였고 한봉덕 자신도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출품하였다.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서울 보문사 석굴암 조성에 조각가로도 참여하였다.2. 2. 대한민국에서의 활동 (1951년 ~ 1971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교편을 잡다가 1951년 1·4 후퇴 때 대한민국으로 월남하였다. 같은 해 서울 동양백화점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김병기(金秉期), 김영주(金永周) 등과 함께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을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이 초대전에는 김창렬, 박서보와 같은 당시 신세대 미술 작가들이 참여했으며, 한봉덕 자신도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출품하며 작가로서 활동했다.1968년부터 1971년까지는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보문사의 석굴암 조성 작업에 조각가로서 참여하기도 했다.
2. 3. 스웨덴 이주 및 활동 (1971년 ~ 1988년)
1971년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이후 스웨덴, 덴마크, 미국, 노르웨이 등 여러 나라에서 개인전 및 초대전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교 동양학부 전임강사를 지냈으며, 1973년에는 대한민국 국적과 아일랜드 영구거주권을 포기하고 스웨덴 시민권을 취득했다. 1988년 대한민국 서울로 돌아왔으나, 스웨덴 시민권자 신분은 계속 유지했다.2. 4. 대한민국 귀환 및 타계 (1988년 ~ 1997년)
1988년 대한민국 서울로 귀환했으나, 여전히 스웨덴 시민권자 신분은 유지했다. 이후 1997년 7월 17일 위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대한민국에서 거주했다.3. 작품 세계
한봉덕의 작품 세계는 활동 시기와 장소에 따라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초기 대한민국 활동 시기에는 서양화 재료를 통해 불교나 동양 사상을 표현하는 등 전통적인 화단의 경향에서 벗어나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실험적인 시도를 하였다. 스웨덴에서 활동한 중기에는 모필을 주로 사용하여 불교적 정신세계,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성찰, 고국에 대한 그리움 등을 표현하며 유럽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와 활동한 후기에는 고국의 자연 풍광, 동물, 식물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아 서양화 기법을 바탕으로 동양적인 정신을 담아내고자 하였으며, 구상, 반구상,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3. 1. 초기 (1945년 ~ 1971년)
1945년부터 스웨덴으로 이주하기 전인 1971년까지 다양한 방식의 작품 활동을 펼쳤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는 기존 화단의 경향과 다른 현대미술을 선보이며, 전통과 장르의 틀을 벗어나려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였다. 불교나 동양 사상을 서양화 재료로 표현하는 실험적인 시도를 하였으며, 추상표현주의 서양화를 통해 당시 현대미술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다. 또한 조각가로서도 활동하여 서울 보문사 석굴암 조성에 참여했고, 이 과정을 사진과 글로 기록한 '보문사석굴암조성기'를 집필했다.3. 2. 중기 (1971년 ~ 1988년)
1971년부터 1988년까지는 스웨덴으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모필을 사용하여 불교적 동양 정신과 인간 및 자연에 대한 사랑, 동물, 식물, 산 등 자연으로의 회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을 선보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유럽 화단의 관심을 받았으며, 특히 스웨덴에서 명성을 얻었다.3. 3. 후기 (1988년 ~ 1997년)
1988년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여 1997년 타계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한봉덕은 고국의 자연 풍광, 동물, 식물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작품 활동에서는 서양화적인 기법을 바탕으로 불교와 동양적인 정신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또한 구상, 반구상,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원초적인 감성을 화폭에 표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